제3장 수증(修證)과 공덕(功德)
제1절 참선(參禪)
불교에서는 문자를 많이 배우고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것을 산사업(算沙業)이라고 폄하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모래사장에서 모래알을 헤아리는 것이 한도 끝도 없듯이 학문세계라는 것은 끝도 갓도 없이 분별시비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불교의 경(經)이라 하더라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다 말씀하시지 않은 위경(僞經)도 많아서 그런 것을 볼 때에는 우리 마음이 망연해져서 어떻게 할 것인가, 도리어 혼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히 밀교 가운데 의궤(儀軌)같은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상야릇하게 우리의 소중한 삼학도(三學道)인 계율도 무시하고 방만한 대문이 다분히 있는데 후래인들은 그런 것을 무슨 도인들이 한 것처럼 생각하여 마음에 혼란을 느낍니다. 물론 그런 것 가운데는 머리 좋은 사람들이 경전의 명구문도 인용을 해 놓았기에 "방편으로는 필요한 것이구나" 하고 느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모래알을 헤아리는 것과 같은 산사업처럼 그런 번쇄한 것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마음을 쉬어야 할 것인데, 마음을 쉬려고 할 때는 우리 마음이 하나의 도리로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른바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모두를 하나의 통일 원리로써 마음의 섣부른 의단을 풀어 버려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마음을 쉴 수가 없습니다. 벽암록(碧巖錄)에 휴거헐거(休去歇去)라는 말이 있습니다. 쉬고 또 쉬어라, 상대 유한적(相對有限的)인 분별시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와 아무런 얘기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말 한마디에나 어느 순간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여법성(眞如法性) 자리에서 비추어서 하라는것입니다.
저는 가끔 스피노자(Spinoza, Baruch 1632∼1677)에 대한 말을 인용합니다. 그는 비록 가난한 철인으로 이층 하숙방에서 생명을 마쳤습니다만, "영원의 상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그러면 그대 마음은 영원에 참여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철학에는 부처님 사상이 많이 스며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의 소견을 산에 비유하면 산기슭에서나 중턱에서의 전망같은 그런 하찮은 중생 경계에서 보니까 십인십색으로 가지가지의 번뇌에 묻어서 나오기 때문에 때묻은 행위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상, 영원의 이미지(image)에서 보라는 말은 법의 정상에서, 본질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제법공(諸法空)의 자리,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자리에서 보아야 바로 보이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은 바로 보일 수가 없습니다. 본질적인 관조(觀照)는 바로 우리 마음을 본질적으로 성숙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두를 드는 것이나 염불하는 것이나 근본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상대적인 개념지식, 헤아림을 떠나버린 본체를 여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는 우주의 근본 도리, 법성 도리에 입각해서 하라는 말이나 같은 뜻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상대적이고 개념적이고 유한적인 지식은 휴거 헐거라, 쉬고 또 쉬어버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진여법성(眞如法性)이 발현(發現)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휴거 헐거(休去歇去)라, 그러면 철수개화(鐵樹開花)라, 쇠로 된 나무에서 꽃이 핀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비로운 것이나 부사의(不思議)한 소식을 보통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이라 무시합니다마는 천지 우주 자체가 부사의 덩어리요 신비의 창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마음을 쉬고 또 쉴 때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한테 있는 초인적인 힘이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분별심으로 해서 초인적인 부처의 힘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쉬고 쉬어라. 그러면은 쇠로 만든 나무에서 꽃이 피어난다" 마음 쉬는 지름길이 참선(參禪)입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이것저것 많이 하더라도 결국은 마음을 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 출가사문은 모두가 선(禪)을 생명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부좌 위에서 생명을 바칠 사람들입니다.
1. 선(禪)의 정의(定義)
禪 (Dhyana, 持訶那, 禪那)
思惟修, 寂慮, 棄慾, 功德叢林, 現法樂住 또는 三摩地(Samadhi삼매)라고도 하며, 모두 心-境性의이름이다. 또한 禪宗의 禪은 其名은 同一하나 其體는 涅槃妙心이다. 三明六通 등 諸功德이 禪定에 依하여 發得되므로 禪定은 最學道요 安樂法門이며 功德叢林이라 한다.
선(禪)은 무엇인가? 우선 뜻을 알아야 보다 더 확신이 서지 않겠습니까? 선(禪)은 선나(禪那 Dhyana)나 같습니다. 풀이하면 사유수(思惟修)라 합니다. 바른 생각으로 닦는다는 말입니다. 그냥 보통 생각이 아니라 정사유(正思惟) 곧 바른 생각입니다. 바른 생각이란 반야(般若)의 도리, 제법공(諸法空) 도리, 오온개공(五蘊皆空) 도리를 분명히 알고서 또는 다만 공(空)이 아닌 중도(中這)의 도리,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도리가 이른바 정사유요, 정사유 하면서 닦는 공부가 선이란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적려(寂慮)라는 뜻입니다. 번뇌를 소멸하여 고요하고 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분사(本分事)에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기악(棄惡)의 뜻이 있습니다. 상대유한적인 악만 아니라, 내가 있다 네가 있다 무엇이 좋다 궂다 하는 분별망상도 버리는 것입니다. 또는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합니다. 달마 스님과 양무제(梁武帝)가 거량할 때에 양무제는 "절도 많이 짓고 다리도 많이 놓고 많은 스님네 한테 보시도 했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하니까 달마 스님이 일언지하에 무공덕(無功德)이라 했습니다. 달마 스님은 선(禪)의 조사(祖師)이기 때문에 상대 유한적인 공덕을 말씀하실 필요는 없었겠지요. 상대적인 공덕은 또 분명히 있으나 영원적인 진여법성에서 볼 때는 때묻은 공덕인 것이지 무루공덕(無漏功德)은 못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공덕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선은 공덕총림이라, 공덕이 하나 둘 있는 것이 아니라 총림같이 무더기로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한공덕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무루지혜를 얻는 것이거니 무한공덕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해하실까봐서 부언합니다마는 우리가 설사 무주상(無住相)이 못된다 하더라도 밥 한 끼 베푸는 것도 꼭 공덕이 됩니다. 저희들은 공부할 때 느낍니다마는 유위공덕(有爲功德)의 복덕도 많이 지은 사람들은 공부할 때 장애가적습니다. 그러나 공을 못 세우고 자기 몸뚱이만 생각하고 자기 공부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연도 잘못 만나고, 병마가 엄습하고 장애가 많습니다. 따라서 유위공덕도 조도(助道)로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하는 참선 수행자들은 마땅히 복잡한 정(情)에 얽힌 것은 단연코 끊어버려야 하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삼매(三昧)가 발득(發得)되어서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할 때는 부처님께서 초기경전에서 말씀하신 신통부사의한 공덕인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못하니까 여러분들에게 자신있게 보여드릴 수는 없으나 확신은 분명히 합니다. 다만 게을러서 깊은 삼매에까지 못 들어가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지 꼭 된다는 확신은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 말씀은 헛된 말씀은 한 말씀도 없습니다. 우리가 보통 부처님이 말씀한 신통자재(神通自在)같은 것은 비유나 상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꼭 사실로 되는 것입니다. 가사, 천안통(天眼通)을 하면은 정말로 안목이 밝아서 우주를 다 보는 것입니다. 천이통(天耳通)을 하면은, 순수청정무구한 청정법신에서 오는 본래의 청각(聽覺)이라는 것은 천지 우주의 음성을 다 듣는 것입니다. 영어를 안 배워도 영어로 말하는 것을 알아듣는 것입니다. 가사, 천도재(薦度齋)를 모실 때에 굉장히 어려운 한문 아닙니까? 천도법문의 대부분이 화엄경, 법화경, 어록 등 중요한 데서 따온 법문이기에 한자도 어렵지만 뜻이 어렵습니다. 그런 어려운 것을 얼핏 생각하는 천박한 마음으로서는 한문을 전혀 안 배운 영가(靈駕)들이 어떻게 알 것인가 하지만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지금 컴퓨터(computer)를 보십시오. 입력(入力)만 시켜놓으면 기기묘묘한 것이 다 나옵니다. 우리 마음 곧, 불심(佛心)이란 것은 무한의 가능 곧, 모두를 다 알고 할 수 있는 힘이 갖추어 있습니다. 마음의 능력은 이른바 컴퓨터로 비유한다면 무한공덕이 본래로 입력되어 있는 컴퓨터인 것입니다. 일체를 다 알고 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중요하고 인간성이 존엄스러운 것입니다. 무엇을 좀 배우면 알고 안 배우면 모르는 정도 같으면 우리 인간성의 존엄이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은 그와 같이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입니다. 우리 불교가 아니면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통, 참선할 때 분별시비를 항시 못 끊어 버립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비로소 끊는 것입니다. 일념(一念)이 딱 되어서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마음이 오직 한 덩어리가 되어 버려야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고 삼매를 성취해야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천안통, 숙명통, 누진통의 삼명통(三明通)을 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여래십호(如來十號) 가운데 명행족(明行足)이 있습니다. 밝은 것을 능히 다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훤히 보는 천안통이요 또는 숙명통이라, 무시이래의 과거를 다 아는 것입니다. 지금은 최면술만 좀 잘해도 몇 생을 거슬러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무량무변의 불지(佛智)를 통한다고 할 적에는 정말로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또는 누진통(漏盡通)이라, 모든 번뇌 습기(煩惱習氣)를 다 떼어버리는 것입니다. 습기를 못 떼었을 때는 아직 공덕이 못 나옵니다. 이른바 현법락주(現法樂住)라든가 하는 공덕이 못 나오는 것입니다. 습기를 떼어버려야 비로소 우리 심리와 생리가 정화되어서 공덕이 나오는 것입니다. 불경에, 우리 마음에서 욕심의 뿌리만 뽑아버리면 우리 발이 하늘로 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중을 비행하다가도 순간만 욕심을 내면 이른바 신족통(神足通)이 다 소멸되어 땅에 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심공덕(佛心功德)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여불공덕이 분호불수(與佛功德分毫不殊)라, 부처의 과불공덕(果佛功德) 즉, 불과를 성취한 공덕이 나와 더불어서 눈꼽만큼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참다운 신(信)입니다. "부처는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고 부처 공덕은 부처의 것이지 나한테는 무관하다"고생각할 때는 참다운 신(信)이 못되는 것입니다.
또한 선정(禪定)을 현법락주(現法樂住)라고 합니다. 이 현법락주라는 것도 우리가 크게 관심을 둘 문제입니다. "참선하면 아무런 재미도 없겠지" 합니다마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선 처음에 재미는 몸과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음식도 있으나마나 별 문제가 아니고 모든 것에 대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상(相)이 점차로 가시게 됩니다. 이 상에 얽히고 저 상에 얽히면 굉장히 괴롭고 구속되는 옹색한 구속감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인데 우선 나라는 생각이 차근차근 줄어지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가다가 죽어도 무방하고, 언제 죽어도 무방하다" 이런 생각이 들어갑니다. 이렇게 집착이 스러지다가 드디어 욕계를 초월한 법락(法樂)을 얻어서 한량없는 행복에 잠기는 것이 현법락주입니다.
삼매(三昧)는 삼마지(三摩地 Samadhi)와 같은 의미입니다. 앞에 든 것이 모두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하여 우리 마음이 한 경계에 머물러서 즉 본체에 머물러서 분별망상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또한 선종(禪宗)의 선은 그 이름은 동일하나 그 체(體)는 바로 열반묘심(涅槃妙心)입니다. 열반묘심은 바로 불심(佛心)을 말합니다. 선종(禪宗)이 이루어질 때는 화엄종이나 법화종 등 다른 종파와 대립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화엄이나 법화 등 모든 경론이나 종파를 초월해서 선종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참선하는 분들은 다른 종파와 대립하거나 교(敎)와 대립한 것도 아닌 것이고, 팔만사천 법문 모두를 포괄하고 초월해서 선종이 나왔기 때문에 조금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 상을 내지 말고 설사 경을 안 배웠다 하더라도 불심(佛心) 가운데는 모두가 다 함장(含藏)되어 있으니 "우주의 진리 모두를 다 갖춘 공부를 한다"하는자부심으로 우리 선객(禪客)들은 공부를 지어 나가야 합니다.
또 삼명육통(三明六通) 등 제공덕이 선정에 의하여 발득(發得)되므로 최학도(最學道)라 곧, 배우는 길 가운데서 가장 수승한 길이란 말이요, 또는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 합니다. 참선이란 것은 몸도 마음도 가장 안락스러운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가부좌(跏趺坐)하고 앉았으니까 어렵다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처음에 습인(習忍)이 발득될 때까지는 어려울지몰라도 나쁜 버릇만 떨어지면 제일 쉬운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앉는 것도 그냥 함부로 앉고 자는 것도 함부로 자고 하지않습니까? 그러나 참선수행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자세 가운데서 가부좌같이 좋은 자세가 없습니다. 가사, 이틀이나 사흘이나 누워 있으라고 하면 마음도 무겁고 머리도 무겁고 오히려 괴롭습니다만 가부좌가 행습이 되어서 앉아 있으면 며칠도 무방합니다. 왜냐 하면, 가부좌한 정삼각형 모습이 기하학(幾何學)적인 의미에서도 가장 안정된 모습인 것입니다. 둥그런 것은 아예 안정이 될 수도 없겠고 네모꼴보다도 정삼각형은 아래가 무겁고 넓고 위가 좁아서 제일 안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삼각형을 미타(彌陀)의 지인(智印)이라 합니다. 아미타는 제불의 본사(本師)요 제불의 왕인데, 미타의 묘관찰지(妙觀察智)의 상징이 정삼각형입니다. 밀교에서는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의 상징적인 표치가 정삼각입니다. 이 모습이 가부좌하고 똑같습니다. 따라서, 가부좌할 때는 가장 몸이 안정되고 지혜가 제일 발동되기 쉬운 것입니다. 참선에 대한 공덕을 이와 같이 표현하는 것은 모두가 다 경론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저 가부좌 모양을 취하면 참선하고 있다고 하지만 참다운 참선이 못됩니다. 오직 마음이 본분사, 본체를 안 여의어야 참선입니다. 우리는 선에 대한 정의를 확실히 해 두어야 합니다. 달마 스님의 어록을 보나, 육조단경을 보나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상을 여의고서 본래면목 자리를 여의지 않아야 참선입니다. 하나의 테크닉이나 형식적인 모양으로는 참선 같은 모양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진정한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를 참구 하더라도 제일의제(第一義諦), 상(相)을 떠나고 유무공(有無空)을 떠나버린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본체에다 마음을 안주시켜야 참된 화두가 되는 것이지, 그냥 의심만 한다고 참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리하게 어거지로 의심한다 해 가지고서 몸도 안 좋고 그러겠지요.
묵조선(默照禪), 묵조한다 하더라도 제일의제가 전제가 되고, 제일의제를 관조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혼침만 와서 꾸벅꾸벅합니다. 우리 마음으로 비추어 보는 반야가 있어야지, 반야 없이 덮어놓고 앉아 있다고 할 때는 혼침만 많이 오는 것입니다. 공부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마장이 혼침(昏沈)과 도거(掉擧)라, 혼침과 분별시비입니다. 어떻게 이 혼침을 이길 것인가? 어떻게 이 분별시비를 이길 것인가? 그것을 못 이기면 결국은 심일경성(心一境性)인 삼매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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