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선(禪)의 자세(姿勢)
一相三昧 ―― 慧… 觀(如猫捕鼠)┐ │ 眞如三昧 一行三昧 ―― 定… 止(如鷄抱卵)┘
정과 혜를 말씀 드렸습니다마는 선(禪)이나 삼매(三昧)나 같은 뜻으로 삼매를 총괄해서 백팔삼매(百八三昧)라고도 하고 또 포괄적으로 말할 때는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어제도 대체로 살펴본 바와 같이 달마 대사의 리입사행(理入四行)도 따지고 보면 일상삼매 일행삼매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달마의 리입(理入)즉, 본래 일체만유와 불성(佛性)이 둘이 아니라는 원리에 들어가는 것은 지혜(智慧)고 일상삼매입니다. 천지 우주 모두를 하나의 부처로 보는 것이 이른바 일상삼매입니다. 네가 있고 내가 있고 천차만별로 두두물물 구분하면 일상(一相)이 못되겠지요. 오직 부처라는 불성 일상(一相)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상(相)은 우리가 상을 내는 상이 아니라 우주를 하나의 성품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지혜적이고 이른바 관(觀) 이 됩니다.
어느 행법에 치우친 사람들은 관법(觀法)이 외도라고 합니다. 저는 관법만 좋아하는 사람도 아닙니다만 어느 분은 저더러 애는 퍽 쓰는데 관법 외도한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습니다. 그러나 관은 바로 부처님 반야를 관조(觀照)한다는 말입니다. 또는 관심론 허두에 이른바 "관심일법이 총섭제행(觀心一法 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찰하는 법이 모든 법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화두나 주문이나 모두가 다 원리적으로는 관(觀)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할 때는 잘 알고 해야 하는 것이지 잘 모르면서 피상적으로 비판해서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런 것은 하나의 구업(口業)이 되겠지요.
따라서 일상삼매(一相三昧)는 혜적(慧的)이고 관적(觀的)이란 말입니다. 관도 그냥 땅을 보고 하늘을 보는 그런 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성(自性)을 보는 관이요 혜도 보통 분별지혜가 아니라 반야지혜(般若智慧)입니다. 육조단경 부촉품에 일상삼매 일행삼매가 있고 4조 도신(道信) 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에도 일상삼매 일행삼매가 나와 있습니다. 또는 5조 말씀에도 나와있습니다. 따라서 불경이나 조사어록이나 공부하는 방법이 다 정(定)과 혜(慧)로 포괄이 됩니다.
혜(慧)를 삼매분상에서 말할 때에 일상삼매인 것이고 정(定)은 일행삼매입니다. 일행삼매는 일상삼매라는 혜경계를 놓치지 않고서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지속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정과 혜가 쌍수(雙修) 곧, 아울러 닦아야만이 정혜균등(定慧均等)으로서 가지런히 조화가 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거니, 부처 가운데는 정과 혜가 구족원만(具足圓滿)이거니, 우리 공부도 그렇게 상응(相應) 조화해 나가야 계합(契合)이 빠른 것입니다.
삼매가 발득(發得)이 못되는 것이 정혜불균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칠각지(七覺支) 법문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공부가 지금 정과 혜가 균등히 조화가 되는 것인가? 조화가 된다면 혼침(<心昏>沈)도 도거(掉擧)도 점차로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이러한 자세를 여묘포서(如描捕鼠)라,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찰나도 한눈 팔지 않고, 눈도 깜짝 않고서 쥐만 노려보는 것처럼 화두를 참구할 때나 염불할 때나 눈도 깜짝 않고서, 마음이 한눈 팔지 않고 그 자리만 생각하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튼 마음이 없이 그 자리만 관조(觀照)하고 참구하는 것을 여묘포서라고 조사어록에 표현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계포란(如鷄抱卵)이라, 마치 닭이 알을 품듯이 한다는 뜻입니다. 닭이 계란을 품어서 부화시킬 때는 21일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21이나 7이나 굉장히 심심미묘한 수치(數値)인 것입니다. 21일 동안에 계란이 부화되는데 닭이 경망해서 계란을 품고 있다가 며칠 안되어서 풀떡 일어나 버리면 되겠습니까? 따스한 온기로 훈습을 시켜서 적당한 온도가 되면 계란의 생명이 차츰 무르익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줄탁동시(<口卒>啄同時)라, 그 안에서 생명이 발육이 되어 곧 나가야겠다고 미묘한 신호를 보내면 동시에 어미닭이 껍질을 쪼읍니다. 시기가 딱 맞아서 병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어미 닭이 쉬임없이 계속 품고 있었기에 되는 것입니다.
참선 좀 하다가는 한 해나 했다고 해서 "내가 무던히 했는데" 그리고서 기분이 좀 좋으면 그만 둔다든가 또는 마음이 약간 열려서 몸도 마음도 공중에 뜨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이것이 깨달음인가보다고 훌쩍 자리를 떠나고 "그대 공부가 아직 멀었다"고 충고해도 선방을 떠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행삼매가 못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남전보원(甫泉普願 748∼834) 선사도 30년 동안 산에서 안 나온 선지식입니다. 달마 대사도, 물론 교화를 위해서지만 소림굴에서 9년간 있었습니다. 일행삼매를 진득하니 못하기 때문에 근래에 와서 삼명육통(三明六通)하는 분들이 거의 안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출가사문은 한사코 정해탈(定解脫) 곧, 선정해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야 재주가 있고 구변 좋고 경 많이 외우고 위풍이 늠름하면 충분히 도인으로 대접 받을 수도 있겠지만, 선정해탈(禪定解脫)은 오랫동안 삼매에 들어앉아야 되는 것입니다. 닭이 계란을 품듯이 진득하니 오랫동안 앉아야 합니다. 우리 참선 수행자들 정말로 명심을 하여야 합니다. 선방에서 공부하다가 방선(放禪)죽비 치면 나와서 잔소리나 하고, 그러면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 하더라도 그래서는 공부가 익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방선 해서 일어날 때도 안상(安詳)이라, 우리 수좌나 부처님 거동은 안상이라, 조용하고 점잖하고 사뿐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본체에다 머무르고 있는 그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밥 먹을 때도 하마 그 마음이 흩어질새라 소중하니 가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보임(保任)입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익어져서 병아리가 나오듯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자성(自性)을 깨닫는 이른바 생사 대사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우리 번뇌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지금 닦아나가는 우리 진지한 수행자들은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번뇌가 얼마나 지겹고 무거운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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