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제4장 수행의 조도] 제2절 바라밀과 수릉엄삼매 - 2. 반야심경의 독해

通達無我法者 2007. 4. 20. 21:30

 

 

2.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독해(讀解)

 


반야심경을 모르는 불자가 재가(在家)나 출가(出家)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스님네들이야 더 말할 것 없이 숙달하신 내용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해설할 필요도 없겠으나 금타 스님의 심경(心經) 번역은 누구나가 꼭 살펴볼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한국이나 중국, 일본을 통해서 반야심경의 번역이나 주석이 100종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훌륭한 강백(講伯)이 해설했다는 것도 상당한 오류가 있습니다. 곧, 반야사상의 당체즉공(當體卽空)의 도리를 제대로 설파를 못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꼭 참선만 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부처님 법문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기 때문에 경을 볼 때나 또는 기도나 주문이나 염불이나 우리 마음 자세가 본체인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를 안 여읜다면 모두가 다 참다운 공부가 되고 바로 참선과 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을 보아도 정말로 진지한 마음으로 본다면 간경자 혜안통투(看經者慧限通透)라, 혜안이 통해서 공부가 성취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참선 수행자라 하더라도 경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선방에 들어가서 결제하면 볼 필요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해제한뒤에는 조사어록이라든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요한 경전을 보는 것은 크게 조도(助道)가 됩니다. 게으름부리다가도 법문 말씀 한마디에 뜨끔하니 심기일전해서 마음에 사무친 경책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의 독해  

般若波羅密多心經의 讀解


(心經은) 本師 釋迦牟尼佛께서 舍利子에 對하신 修道法門이니라 

                            

반야심경 공부 순서 차례


1. 經文(경문)의 素讀(소독)  

2. 懸吐(현토)의 音讀(음독)

3. 懸吐(현토)의 訓讀(훈독)

4. 略解(약해)의 解讀(해독)만으로 了知(요지)

5. 2+4 병독

  [懸吐(현토)의 音讀(음독)] + [略解(약해)의 解讀(해독)]竝讀(병독)

6. 3+4 합독

  訓讀(훈독)+解讀(해독)合讀(합독)

7. 意讀(의독)만으로 (종)하야

8. 이를 모두 義釋(의석)

9. 觀解(관해)로 照了(조료)

10. 黙照(묵조)


如實信의 信滿으로써 法에 住하야 如實解의 解滿으로써 實行하고 如實修行의 行滿으로써 實證하되 身證心悟의 證滿으로 成彿할진져

 


반야바라밀다 심경의 독해(讀解)라


심경은 본사 석가모니불께서 사리불(舍利弗)에 대하신 수도법문입니다. 경문만 한번 읽고 다음에는 보다 세밀히 읽기 위해서 토를 붙여서 음독(音讀)하고 다음에는 새기면서 읽고 다음에는 조금더 풀이해서 뜻을 헤아리고 제5에는 현토(懸吐)의 음독과 제4의 약해(略解)의 해독(解讀)도 아울러서 읽어가다가 제6에는 훈독(訓讀)과 제4의 해독을 같이 아울러서 읽어가게 되면 점차로 뜻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제7에는 읽지도 않고 뜻만 살피고서, 우리가 경을 볼 때도 소리를 안 내고 가만히 참선하는 자세로 비추어 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8은 모두를 다 뜻만으로 해석하고 9에는 관해(觀解)로 비추어 보고 제10에는 묵조(默照)해서 비추어 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읽다보면 결국은 독서백번(讀書百番) 의자통(意自通)이라, 스스로 통한다고 하듯이 처음에는 건성이라 하더라도 자꾸만 읽어가다 보면 성인의 말씀이기 때문에 또는 우리 마음이 본래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점차로 자기 마음이 밝아져 불성과 걸맞은 여법한 믿음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여실(如實)한 신()의 신만(信滿) 곧, 여실한 믿음이 원만해진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별로 깊지 않은 옅은 믿음이겠습니다만, 제법이 공(諸法空)한 도리를 직설로 설파한 법문은 착실하게 보면 볼수록 더욱더 공()에 사무치게 되어 신앙심을 깊게 해줍니다.


법에 주()하여 여법한 해석이 원만해지므로써 여실(如實)한 수행이 되고 여실한 수행이 원만하므로써 실증(實證)하는 것이니 우리 몸으로 증()하고 마음으로 깨닫는 신증심오(身證心悟)는 원래 둘이 아닙니다. 마땅히 참다운 깨달음은 마음도 깨닫고 몸도 아울러 증명이 되어서 우리 몸도 속화된, 물질화된 소조사대(所造四大)가 순수한 4대인 능조사대(能造四大)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소위 환골탈태(換骨奪胎)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생리와 심리가 바꿔진다는 말입니다. 증만(證滿) 곧 원만한 증득(證得)으로 성불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般若心經(반야심경)의 略解(약해)


序分(서분) 第一(제일)


觀自在(관자재)의 菩薩(보살)이 行深般若波羅密多時(행심반야바라밀다시)에

三身四智(삼신사지)에 萬德(만덕)을 具備(구비)한 一大人(일대인)의

大自在境(대자재경)을 觀察(관찰)하는 菩薩(보살)이

深密(심밀)의 正智(정지)로써 彼岸(피안)에 (도)하는 (법)을

修行(수행)할 (시)에


照見五蘊皆空(조견오온개공)하야 度一切苦厄(도일체고액)이니

먼저 妄情(망정)으로 임의 分別(분별)하든 色法(색법)인 色蘊(색온)과

心法(심법)인 受想行識(수상행식)의 四蘊(사온)은

일즉히 假相假名(가상가명)으로서 名相(명상)이 (본) (공)일새

五蘊(오온)의 皆空(개공)함을 照見(조견)하야

生老病死(생노병사)의 四苦(사고)를 (주)로 한

一切苦厄(일체고액)의 苦海(고해)를 (도)하나니

 


반야심경의 약해(略解)를 보겠습니다.


어떤 경전이나 서분(序分)이 있고 정종분(正宗分)이 있고 유통분(流通分)이 있습니다. 서분은 서론이요. 본론이 정종분이고 결론은 유통분인 것입니다.


서분이라, 관자재(觀自在)의 보살이; 삼신사지(三身四智)에 모든 공덕을 구비한 일대인(一大人)의 대자재경(大自在境)을 관찰하는 보살이, 관자재 보살은 관세음 보살과 같은데 이렇게 깊은 뜻이 있습니다. 관자재 보살을 풀이하면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三身)과 본래 진여불성에 갖추어 있는 지혜인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대원경지(大圖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의 무량한 지혜와 만덕을 갖추어 있는 경계를 다 관찰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주 전체의 성품과 현상을 조금도 빠짐없이 갖추어 볼 수 있는 보살이 이른바 관세음 보살이라는 말입니다. 보살이란 진리를 여법히 통찰하고 행하는 이를 말합니다.


다음에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심밀(深密)의, 깊고 비밀스러운 바른 지혜로써 피안(彼岸)에, 해탈의 언덕에 이르는 법을 수행할 때에,


조견오온 개공하야; 먼저 망정(妾情)으로 이미 분별하던 색법인 색온(色蘊)과 심법인 수상행식의 사온(四蘊)은 일찌기 가상가명(假相假名)으로서, 참다운 상도 아니고 참다운 이름도아닌 명과 상이 원래 공할새 오온이 다 공임을 비추어 봐서도 일체고액이니, 생로병사를 주로하는 일체고액의 고해를 제도하나니

 

 

正宗分(정종분) 第二(제이)


舍利子(사리자)야 色不異空(색불이공)이오 空不異色(공불이색)일새 色卽是空(색즉시공)이오 空卽是色(공즉시색)이라 受想行識(수상행식)도 亦復如是(역부여시)니

舍利子(사리자)야 (색)이란 空性(공성)의 如如相(여여상)으로서

色體(색체)가 別有(별유)함이 않이오. 空體(공체)의 幻華(환화)일새

(색)이 (공)과 不異(불이)하고 (공)이 (색)과 不異(불이)하야

(공) 그대로 (색)이오 (색) 그대로 (공)이라

四蘊(사온)도 또한 그러하니


舍利子(사리자)야 是諸法空(시제법공)의 相(상)이 不生不滅(불생불멸)이며 不垢不淨(불구부정)이며 不增不減(부증불감)일새

舍利子(사리자)야 이러한 五蘊(오온)[色受想行識(색수상행식)]

諸法(제법)이 本空(본공)한 實相(실상)은

元來(원래) (생)하였음이 않이니 (멸)하지 못하고

染垢(염구)하지 않앴으니 洗淨(세정)하지 못하고

欠縮(흠축)없이 圓滿(원만)하니 增減(증감)하지 못할지라


是故(시고)로 空中(공중)에 無色(무색)이라 無受想行識(무수상행식)이니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요 無色聲香味觸法(무색성향미촉법)이오

그럼으로 諸法空(제법공)의 實相(실상)엔

(색)이란 假相(가상)도 (무)하고

受想行識(수상행식)이란 假名(가명)도 (무)하니

六根(육근)[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무)하고

枝末無明(지말무명)[六根(육근)](무)하니

六塵(육진)[色聲香味觸法(색성향미촉법)](무)하며


無眼界(무안계)요 乃至無意識界(내지무의식계)일새 無無明(무무명)이라 亦無無明盡(역무무명진)이며 乃至無老死(내지무노사)라 亦無老死盡(역무노사진)이며 無苦集滅道(무고집멸도)니 無智(무지)라 亦無得(역무득)하야 以無所得(이무소득)일새 故(고)로

이미 根塵(근진)[六根六塵(육근육진)](무)하니

前五識(전오식)의 所智境界(소지경계)[眼識界(안식계) 耳識界(이식계) 鼻識界(비식계) 舌識界(설식계) 身識界(신식계)](무)하고

能智(능지)의 意識界(의식계)도 (무)하야 

無明(무명)이란 都是本無(도시본무)할새

無明(무명)의 (진)할 것도 (무)하며

따라 (행) (식) 名色(명색) 六處(육처) (촉) (수) (애) (취) (유) (생)도  (무)할새 乃至(내지) 老死(노사)의 (진)할 것도 (무)하며

이와같이 三世(삼세)의 苦果(고과)와 그 集因(집인)을 밝히신

十二支(십이지)의 因緣法(인연법)이란 곧 五蘊法(오온법)에 (기)한 (자)로서

實相(실상)에 本無(본무)할새 修道證滅(수도증멸)할 것도 (무)하니

己上(기상) 五蘊法(오온법)의 凡夫智(범부지)와 十二因緣法(십이인연법)의 緣覺智(연각지)와 四諦法(사제법)의 聲聞智(성문지) (등)

一切(일체) 有爲法(유위법)의 有漏智(유루지)란

夢幻泡影(몽환포영)을 計執(계집)함과 (여)하야 皆是(개시) 虛妄(허망)일새

一切有漏(일체유루)의 (지)가 (무)하고

따라서 有漏(유루)의 (득)도 (무)하며

生死有漏(생사유루)를 (득)할 바가 (무)하므로 


菩提薩埵(보리살타)는 依般若波羅密多(의반야바라밀다)니 故(고)로 心無罣碍(심무괘애)요 無罣碍故(무괘애고)로 無有恐怖(무유공포)라 遠離顚倒夢想(원리전도몽상) 하고 究竟涅槃(구경열반)하나니 三世諸佛(삼세제불)도 依般若波羅密多故(의반야바라밀다고)로 得阿뇩多羅三藐三菩提(득아누다라삼먁삼보리)시니라

諸相(제상)의 無明雲(무명운)을 (개)하고

非相(비상)의 佛性日(불성일)을 (견)하는 開士(개사)는

無爲法(무위법)의 無漏智(무루지)로서 涅槃岸(열반안)에 (도)하는 (법)에 (의)함으로

(심)에 有漏(유루)의 罣碍(괘애)가 (무)하고 罣碍(괘애)가 (무)함으로

無明心(무명심)의 極端(극단)인 死厄(사액)의 恐怖(공포)가  (무)해짐에 따라

一切(일체)의 顚倒夢想(전도몽상)을 遠離(원리)하고

涅槃(열반)에 究竟(구경)하나니

三世諸佛(삼세제불)도 如此修行(여차수행)하야

無上菩提(무상보리)를 證得(증득)하시나니라 

 

 


본론인 정종분(正宗分)에,


사리자야 색불이공이오 공불이색일새 색즉시공이오 공즉시색이라; 사리자야 색()이란 공성(空性)의 여여상(如如相)으로서, 색이 원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공성 그대로 인연따라 그림자같은 상을 내었다는 말입니다. 즉 어느 상이라도 진리에 맞는 여법한 상입니다. 색이란 그 성품이 공()이라는 것이지 없던 것이 나오고 진리에 안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색이든지, 무슨 물질이나 모두가 다 본체에서 본다면 진여의 여법한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색체가 따로 있음이 아니요, 공체에서 피어나오는 허깨비 꽃,허망한 그림자일새, 색과 공이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아서 공 그대로 색이요 색 그대로 공이라, 분석한 뒤의 공이 아니라 바로 색즉공입니다. 색 그대로 공이요 또는 공 그대로 색입니다. 진여불성이어떻게 바꾸어진다 하더라도 변질이 되거나 변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꿈같은 허환상(虛幻相)이 상만 나툴 뿐이기에 바로 즉공입니다. 물리학자처럼 분자를 원자로 분석하듯이 분석한 뒤의 공은 석공(析空)이고 반야심경의 공은 즉공(卽空)인 것입니다.


수상행식도 역부여시니; 4온도 또한 그러하니 수와 상, 행, 식도 역시 그와 같이 공이라는 말입니다.


사리자야 시제법공의 상이; 사리자야 이러한 색·수·상·행·식 오온의 제법이 본래 공한 실상(實相)은,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이며 부증불감일새; 원래 생하였음이 아니니 멸하지 못하고, (보통은 생도 아니요 멸도 아니요 라고 번역합니다만 이런 풀이가 금타 스님의 독특한 풀이입니다.) 실상(實相)에서 통찰할 때는 원래 생겨나지 않았으니 멸할 것도 없고, 염구(染垢)되지 않았으니, 원래 오염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염되게 보는 것은 우리 중생이 잘못 보는 것입니다. 세정(洗淨)하지 못하고, 다시 씻을 필요가 업고, 흠축없이 원만하니 증감하지 못할지라, 아무 흠절이 없이 원만무결하니 새삼 더하고 덜고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시고로 공중에 무색이라 무수상행식이니; 그러므로 제법공의 실상은 색이란 가상(假相)도 무()하고 또는 수상행식이란 가명(假名)도 무하여 무명(無明)이란 가상가명의 총 대명사로서 근본무명이 무하니, 그 무명이란 것은 결국 가상을 실상으로 보고 가명을 실제로 생각하는 데서 생기지 않습니까. 무명의 시초도 제법의 상을 여실하게 보지 못해서 무명이 나오는것입니다.


무안이비설신의요 무색성향미촉법이요; 안의비설신의 6근()도 무하고 지말무명인 6근이 무하니 또 6진()인 색성향미촉법도 무하며, 무안계요 내지 무의식계일새; 이미 6근과 6진이 무하니 전5식의 소지경계(所智境界) 즉 안식계·이식계·비식계·설시계·신식계도 무하고 능지(能智)의, 능히 분별하는 의식계도 무하며, 무무명이라 역무무명진이며; 무명이란 도시 본래 없을새 무명을 다할 것도 없으며, 무무명 역무무명진의 풀이를 잘 새기십시요. 무명이란 본래 없으니 무명을 없앨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무명이 있어야 무명을 여읠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이며; 따라서 행·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생도 무할새, 반야심경에서 무명이나 내지 무노사는 십이인연법을 인용한 것입니다. 원래 무명이 없거니 무명에서 파생되는 행이나 식이나 다 응당 없고 따라서 늙어서 죽는 것도 결국은 없다는 말입니다. 노사를 다할 것도 없다, 즉 노사가 없다고 하면 끊을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원래 무명이 없기 때문에 무명에서 파생된 십이인연법(十二國緣法)의 십일지(十一支)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무고집멸도니; 무고집멸도는 상당히 세밀히 풀이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삼세의 고과(苦果) 곧 삼악도(三惡道)나 우리 중생이 윤회하는 육도(六道)는 고의 과보입니다. 과거세에 지은 무명과 삼독심에서 업을 지은 고의 과라는 뜻입니다. 그 집인(集因)을 밝히신 십이지의 인연법이란 곧, 5온법에 근거한 것으로서 원래 실상에는 없을새 수도증멸(修道證滅)할 것도없다. 우리가 공을 미처 모를 때 이렇게 저렇게 분별하는 것이지 제법공의 경계 곧 색도 공이요 또는 우리 마음 우리 관념도 공이요 모두 공이라는 도리를 안다면 사제(四諦)법문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고나 집이나 또는 멸이나 도나 모두가 다 색()이 있고 심()도 있는 데서 나온 것이지 색심(色心)이 공하다면 이런 것이 어디에 붙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지라 역무득하야 이무소득일새 고로; 이상 5온법의 범부지(凡夫智)와 십이인연법의 연각지(緣覺智)와 사제법의 성문지(聲聞智) 등 일체유위법의 유루지(有漏智)란, 물론 부처님쩨서 아함경에서 오온법이나 십이인연법을 말씀하신 법문이 유루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표면에 나타난 문자로서는 색심(色心)을 설하고 본래자성자리를 분명히 말씀한 것이 아니기에 아직 방편설이 되겠지요. 몽환포영 곧 꿈이나 허깨비나 또는 거품이나 그림자같이 허망한 것들을 집착함과 같이 모두가 한결같이 허망하니, 일체 유루(有漏)의 지()가 무하고 따라서 유루의 득()도 무하며 생사유루(生死有漏)를 득할 바 없으므로, 이무소득고 즉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잘 되었다, 잘났다, 또 무엇이든 많이 안다, 이런 것도 결국은 때묻은 번뇌의 득이므로 얻을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생사윤회할 까닭이 없다는 뜻입니다.


보리살타는 의반야바라밀다니 고로; 모든 상의 무명운(無明雲)을 걷고서 상이 아닌 불성일(佛性日)을 견()하는 개사(開士)는, 개사는 살타보살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야심경을 여실히 아는 정도가 되면 벌써 보살지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공을 알면 대승초입(大乘初入)이라, 대승에 입문하는 것이므로 반야를 모르면 대승이 못되는 것입니다. 무위법(無爲法)의 무루지로써 열반안에 이르는 법에 의하므로, 심무괘애요 무괘애고로 무유공포라 원리전도몽상하고 군경 열반하나니; 마음에 유루의 괘애(?碍)가, 유루의 그림자나 거리낌이 없고 괘애가 없으므로 무명심의 극단인 죽음의 공포가 없어짐에 따라 일체의 전도몽상을 멀리 여의고 열반의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범부심은 잠재의식이나 현재의식이나 간에 모두가 다 죽음의 공포를 면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는 응당 준음의 공포는 따르겠지요. 마음에 아직 번뇌가 남아있는 거리낌이 없어지고 또는 그런 거리낌이 없으므로 무명심의 극단인 죽음의 공포가 없어짐에 따라 일체의 거꾸로 보는 전도몽상을 멀리 여의고 열반을 구경(究竟)한다는 말입니다.


삼세제불도 의반야바라밀다고로 득 아뇩다라 삼막삼보리시니라; 삼세제불도 이와 같이 수행하여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하시나니라, 삼세제불도 반야바라밀를 수행하셨습니다. 따라서 오온이 개공한 반야의 지혜를 떠나서 성불할 수 없는 것입니다.

 


流通分(유통분) 第三(제삼)


故知(고지)하라 般若波羅密多(반야바라밀다)가 是大神呪(시대신주)며 是大明呪(시대명주)며 是無上呪(시무상주)며 是無等等呪(시무등등주)니 能除一切苦(능제일체고)요 眞實不虛(진실불허)라

(고)로 알아라

般若波羅密多(반야바라밀다)가 究竟覺(구경각)까지 成就(성취)하는 妙不可思議(묘불가사의)의 大總相法門(대총상법문)이며

根塵識(근진식)의 諸惑(제혹)을(단)하고 寂滅(적멸)을 (증)하니 度無極(도무극)의 三明(삼명)과 六通(육통)이 (생)하는 大方便(대방편)이며

八萬藏經(팔만장경)을 讀破(독파)하고 千七百公案(천칠백공안)을 立證(입증)함보다 (승)한 (법)이며

最上無比(최상무비)의 總持(총지)니 以上(이상) 그대로의 解義修行(해의수행)이 堅固(견고)하면

多羅尼神通藏(다라니신통장)에 (주)할새 諸魔(제마)가 不侵(불침)이오 一切(일체)의 虛妄相(허망상)을 (이)한 實相(실상)의 智慧(지혜)라


故(고)로 說般若波羅密多呪(설반야바라밀다주)일새 卽說呪曰(즉설주왈) 揭諦揭諦波羅揭諦波羅僧揭諦菩提沙婆訶(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보디사바하)라시니라

(고)로 이의 實相智(실상지)인 般若(반야)로써 到彼岸(도피안)하는 約法(약법)을 重說(중설)할새

般若波羅密多(반야바라밀다)의 話頭(화두)요 公案(공안)이라

이를 더욱 短縮(단축)하야 總智(총지)하면

揭諦揭諦波羅揭諦波羅僧揭諦菩提沙婆訶(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보디사바하)라시니

般若波羅密多呪(반야바라밀다주) 그대로 般若波羅密多(반야바라밀다)의 (인)이 되고 (과)가 됨을 了知(요지)할지라

 

 

유통분 (流通分) 이라.


고지하라 반야바라밀다가 시대신주며 시대명주며 시무상주며 시무등등주니; 고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가 구경각까지 성취하는 묘불가사의(妙不可思議)의 대총상 법문이며 6근 6진 6식의 제혹(諸惑)을 단하고 적멸을, 해탈을 증하니, 도무극(度無極) 곧 다시 더 높은 곳이 없는 가장 수승한 삼명(三明天眼通宿命通漏盡通)과 육통(六通三明에 神足通他心通天耳通을 합한 神通)이 생하는 대방편이며 팔만대장경을 독파하고 1700공안(公案)을 입증함보다 수승한 법이며 최상무비(最上無比)의 총지(總持)니, 능제일체고요 진실불허라; 이상 그대로의 뜻을 알고서 수행이 견고하면은 다라니신통장 곧 일체재앙을 없애고 모든 공덕을 갖추는 법인 다라니신통장에 머물게 되니 모든 마구니가 침범할 수 없고 일체허망상을 떠난 실상(實相)의 지혜입니다.


고로 반야바라밀다주(般若波羅蜜多呪)를 설()할새 곧,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디사바하라 한다. 이 주문은 실상지(實相智)인 반야로써 도피안(到彼岸)하는 압축된 간략한 법문으로서 곧 반야바라밀다의 화두(話頭)요 공안이 되니 반야바라밀다주 그대로 인()이 되고 과()가 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음은 금타 스님이 주를 붙인 것입니다.


蓋明心而 見性이오 見性而 悟道일새 先修後悟란 修는 迷修요 先悟後修란 修는 悟修니 修法에 있언 講經이나 誦呪나 參禪이나 觀法이나 그의 方法은 多少 差異가 有하지만 迷·悟의 境은 一也요 證이란 身證이며 悟란 心悟일새 身證心悟를 證悟라 云하나니라


대저 마음 밝힘이 견성이요, 견성이 바로 오도일새 먼저 닦고 뒤에 깨닫는 선수후오(先修後悟)란 미혹된 수행법이요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선오후수(先悟徨修)란 참다운 수행법인오수(悟修)이니, 수법에 있어서 경을 보는 것이나 또는 송주나 참선이나 관법이나 그 방법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천수경으로 깨달으나 염불하고 깨달으나 화두로 깨달으나, 깨달은 경계는 둘이 아니요, 증()이란 몸으로 증하는 것이요 오()란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니 신증심오(身證心悟)를 증오(證悟)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