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질의응답과 회향법어] 제2절 회향 법어(廻向法語)

通達無我法者 2007. 4. 20. 22:08

 

 

제7장 질의응답과 회향법어(廻向法語)

 

제2절 회향 법어(廻向法語)


 

 

   

망담반야 죄범미천(妄談般若罪犯彌天)이라, 반야는 원래 말이 없고 문자가 없습니다. 상()이 없는 그 자리를 횡설수설 말씀을 많이 드렸으니, 그 허물이 천지에 가득 찹니다. 오늘 회향(廻向) 때에는 주장자나 텅텅 치고 내려갔으면 좋겠는데 또 사족(蛇足)으로 몇 말씀 붙이겠습니다.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이라, 모든 존재가 오직 식() 곧, 마음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도 동물도 유정(有情)ㆍ무정(無情)도 모두가 오직 식() 곧, 마음입니다. 식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만법유식의 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도 역시 식() 덩어리요, 마음 덩어리요. 산도 태양도 별도 식 덩어리요, 우리 지구도 바로 식입니다. 따라서 우리 지구는 바로 그대로 지장보살(地藏菩薩)입니다. 또는 태양은 바로 그대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요, 달은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입니다.


그런데, 우주의 도리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우리는 여태 반야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도 하고 검토해 왔습니다. 반야는 바로 제법공(諸法空) 도리입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 있고 허무하다고만 생각할 때에는 반야바라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는 현상계는 사실은 시간적으로 무상(無常)하고 공간적으로 비어 있어서 허무한 것이나, 모든 허망한 존재의 근본성품(根本性品)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무한 공덕을 갖추고 우주에 충만해 있는 바로 생명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진공묘유(眞空妙有)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도리가 반야바라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야가 있으면 비로소 참다운 수행자이고 반야가 없다면 수행자가 못됩니다. 반야는 어느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바로 생명입니다. 우리가 전도몽상(顚倒夢想)만 떠나 버리면 바로 반야의 생명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반야와 더불어 있어야 참다운 창조가 있고 또는 참다운 수행이 있습니다. 반야가 없다면 모두가 다 범부의 허물을 벗지 못하는 것이고 또는 어떤 행동이나 때묻은 유루행(有漏行)밖에는 못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생이 보고 느끼는 일체 현상은 모두가 다 허망무상한 것이고 범부인 한, 우리가 보는 것은 다 전도몽상입니다. 전도몽상을 끊어 버리지 않고서 공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끊어야 할 것인가? 이런 수도방편이 화두(話頭)요, 염불(念佛)이며, 관법(觀法)이요, 주문(呪文)이며 계율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아직 반야의 도리를 증명은 못하더라도 우선 이론적으로라도 바른 이해가 있어야 수행이 바로 되기 때문에 철두철미한 이론적인 자기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이른바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상()을 여의면서 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현대 사조(思潮)는 여러 갈래로 다원적(多元的)이고 다양한 문화현상들이 하나의 도리, 하나의 근본 체성(體性)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전환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기독교만 보더라도 이른바 구제관(救濟觀)이 다원주의(多元主義)로 발전되어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권위 있는 신학대학(神學大學)의 학장까지도 구제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있다고 개방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나 카톨릭이나 전통적인 보수주의는 오직 자기들이 신봉하는 하느님한테서만 구제가 있다고 국집하지만, 혁신주의는 다른 종교에도 구제가 있다고 이른바 범신론(汎神論)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분야에서나 모두가 다 개방적이고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하나의 진리, 포괄적인 본체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상()에서 체()로 또는 분열(分裂)에서 화합(和合)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시대에 당해서, 우리 불교도 내 종파(宗派) 네 종파의 상에서 벗어나 불법(佛法)의 근본이자 우주의 법칙인 반야바라밀로 돌아가는 것이 절실한 때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도 여러 가지 방편이 많이 있는 것인데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우주 자체가 무량무변한 진여불성이거니 불성을 깨닫는 대도(大道)에는 문()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에게 가서 ‘여하시조주(如何是趙州)꼬’ 조주가 무엇입니까 하고 문법하니까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 북문(北門)이라’ 진실한 조주는 어느 한 문()이 아니라 동문이나 서문이나 남문이나 북문이나 어디에나 걸림이 없는 참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불법은 이와 같이 대도무문이라, 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진리에 마음만 사무치면은, 상을 여의고서 본체를 지향하는 간절한 마음만 있다면, 수도정진하는 과정에서 물[水] 보고 깨닫고 불[火] 보고 깨닫고 달[月] 보고 깨닫고 별[星] 보고 깨닫고 돌멩이 부딪치는 소리 듣고서도 깨닫는 것입니다. 오직 문제는 우리가 체()를 여의지 않고 용()을 나투고 또는 용에서 본체로 돌아가는 간절한 뜻이 없으면 수행자의 자세가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한눈 팔지 않고서 근본성품인 진여불성을 깨닫고 진여불성과 하나가 되고자 출가사문이 된 것입니다. 삼천대천 세계도 모두가 체에서 용으로 화현(化現)되었다가 다시 체로 돌아갑니다. 체와 용이 원래 둘이 아니지만 현상적인 세계는 체에서 용으로 온 세계입니다. 현상적인 용()이란 본래로 본체인 질여불성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본체에 입각해서 용()을 나투어야 온전한 바른 통찰과 올바른 수행(修行)이 되는 것입니다.


본체란 가명(假名)과 가상(假相)을 여읜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자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아(無我)ㆍ무소유(無所有)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아ㆍ무소유의 경계는 일체만유 그대로 진여법성의 경지입니다. 어느 것도 진여법성, 부처님 아님이 없는 자리입니다. 한 생각 잘못 비뚤어져서 ‘저것은 부처가 아니다, 이것은 부처다’고 분별하는 마음 자체가 체를 여의고서 상에 얽매이는 미망(迷妄)인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부처라는, 일체공덕을 원만히 갖춘 진여불성이라는 생명의 실상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둔다면 우리 행위인 신ㆍ구ㆍ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청청하여, 이른바 도덕률에 안 따를 수가 없습니다.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예수나 그런 성인들의 행위도 모두가 도덕률에 따른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도덕률의 본체는 바로 참다운 철학인 우주의 도리요, 불교에서 말하면 진여불성이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고 또는 도교(道敎)에서는 도()요, 유교(懦敎)에서는 천도(天道)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도리는 본래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생명이기 때문에 말하는 언어나, 행동하는 짓이나 조금도 윤리 도덕에 어긋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함부로 한다거나 또는 음행을 한다거나 또는 음식을 함부로 먹는다는 것은 모두가 다 도덕률 곧 우주의 천연자연(天然自然)한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철학에서도 인간성의 실존(實存)문제가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어떤 분야에서나 인간성을 탐구하는 문제가 가장 절실한 근본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성을 똑바로 깨닫고 가르치는 가르침은 불교 외에는 없습니다. 절대로 아전인수(我田引水)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 수행자는 인간성을 개발하는 선구자(先驅者)입니다. 현대 산회의 선구자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도덕적으로 우리는 완벽을 기해야 합니다. 인간이란 약해서 마음으로 다짐을 해도 미끄러지고 비틀어지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칠전팔기(七顚八起)로 즉시 다시 일어나서 나약한 자기를 추슬러야 합니다. 인지도자 인지기(因地倒者因地起)라, 땅에서 넘어졌으니 다시 땅을 짚고 일어나듯이 강인한 의지로 다시 바로 일어나서 한사코 법성(法性)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붙이고 미망(迷妄)의 그물을 벗어나야 합니다.


어떤 분야에서나, 자기 스승을 위해서나 부모를 위해서나 친구를 위해서나 어느 누구를 위해서나 이와 같이 생명의 고향인 본체로 돌아가는 그 행위가 가장 수승한 행위요, 가장 진정한 보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도몽상만 떠나면 다 한결같이 제법(諸法)이 공()이요 5온(五蘊)이 개공(皆空)입니다. 범부 중생들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기 때문에 고민이 생기고 여러 가지 번뇌가 더욱 더 치성(熾盛)해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래면목을 바로 참구하는 공덕보다 더 수승한 보배는 없습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약을 먹고 영양분을 많이 섭취합니다만 그것이 필요없는 것은 아니나, 가장 훌륭한 영양분, 가장 완벽한 보약은 부처님 가르침을 여법히 수행하는 일입니다.

부처님 법에다가 마음을 두고 바로 생활한다면 웬만한 문제들은 풀리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에 가까울수록 더 잘 풀리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무슨 병이나 다 근본은 무명(無明)에서 오는 것이며 법성 자리에는 본래 죽음도 병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안 먹어도, 단백질을 별도로 안 취해도, 그것 때문에 죽지는 않습니다. 오신채(五辛菜)를 먹어서 그것이 꼭 살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어째서 먹지 말라고 했던가? 모든 계율(戒律)이 다 심오한 공덕이 있으니 부처님 율법(律法)에 있는 것은 꼭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법의를 입었습니다. 만약 자신이 없으면 법의(法衣)를 벗고 산문(山門)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해서 뒤뚱거리고 넘어지기가 쉽지만 넘어지면은 바로 일어서야 합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길은 공명정대한 우주의 공도입니다. 사실은 최상의 안락행(安樂行)입니다. 우리 출가사문이 가는 길은 수많은 성현(聖賢)들이 형극(荊棘)을 헤치고 다져 놓은 탄탄하고 공변된 해탈의 대도(大道)입니다. 전도몽상만 떠나 버리면은 훤히 트인 마음으로 영생(永生)의 락토(樂土)를 지향하여 환희용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도 눈도 열려 버리면은 웬만한 병은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없이 틔어 있고 다만 비어 있지 않는 자리, 무량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자리, 이 자리를 생각하고 그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는 생활보다 더한 행복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불경에도 아가타(阿伽陀Agada)약이라, 아가타약은 만병 통치약입니다. 부처님 명호나 화두나, 또는 주문이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법(佛法)은 다 한결같이 마음 병과 몸 병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의 아가타약입니다.


우주가 바로 부처님이요 만법(萬法)이 바로 불법(佛法)이기 때문에 중생염불 불환억(衆生念佛 佛還憶)이라, 중생이 부처를 생각하면은 부처는 또한 우리 중생을 굽어보고 호념(護念)하는 것입니다. 다같은 부처거니 부처를 생각해서 부처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상통하고 감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무서운 시대입니다. 자기 문중(門中)에 집착하고 자기 종단(宗團)에 얽히고 자기가 공부하는 법, 내 것만이 옳다는 것에 붙잡히게 되면 우리 마음은 바로 어두어지고 그지없이 옹색해집니다. 이것 자체가 전도몽상입니다. 본래 훤히 틔어서 아집(我執)도 법집(法執)도 없는 마음인 것을 구태여 지어서 아집을 하고 법집을 한다면 우리 공부에나 다른 사람한테나 그 무엇에도 도움이 안되며 그것이 또한 우주를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현대는 개방적인 시대입니다. 아무렇게나 방만(放漫)하게 한다는 개방적인 시대가 아니라, 법집을 털고 아집을 털어 버리지 않을 수 없는 해탈을 지향한 시대라는 말입니다. 마땅히 번뇌 해탈을 지향하는 시대적인 조류에 맞춰야 첨단 과학에도 뒤지지 않고 우리가 오욕(五欲)의 수렁에서 헤매는 무량중생을 구제하는 진정한 보살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출가사문들, 자랑스러운 우리입니다. 석년누대 중근기(昔年累代 重根基)라, 과거 전생에 두고두고 근기를 쌓아서 금생에 영광스러운 법의를 입었습니다. 우리들의 무상(無常)한 금생 인연이 몇 차례나 다시 만나게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러나 내생에 가서도 꼭 우리는 동진출가해서 피차 청정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다생겁래(多生劫來)로 몇 만 생을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한사코 중생 제도를 위해서 반드시 고통 많은 사바세계에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때마다 출가하여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고 본래 없는 무명 다 여의고, 본래 없는 무량중생(無量衆生)을 제도하여 다 함께 성불(成佛)하여지이다.


나무 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

나무 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南無摩訶般若波羅蜜).



원통불법의 요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