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6장 천태종사상] 4. 원교의 중도설 - (2) 원교사문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1:21

제6장 천태종사상

  4. 원교의 중도설

    (2) 원교사문



이것은 원교의 중심사상을 유(有), 공(空), 역공역유(亦空亦有), 비유비무(非有非無)의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인데, 주요 내용은 번뇌가 보리이고 무명이 법성이라는 원융한 도리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네 가지로 분별하여 설하기는 하지만 그 네 가지가 각각 격리되지 않고 서로 원만하게 융화하므로 여기에서 유(有)와 공(空) 등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中道)의 묘(妙)가 은연히 드러납니다.


원교의 네 문은 묘한 이치를 단박 설하여 원융무애하니 차례대로 지내는 것과는 다르다. 어떤 것이 네 가지 문인가. 견사(見思)의 가(仮)를 관(觀)하니 즉 법계로 일체불법을 구족하고, 또 모든 법이 곧 법성(法性)의 인연이요, 내지 제일의도 역시 인연이다. 열반경에 말씀하시되, 무명을 멸함으로 인하여 타오르는 삼보리(三菩提)의 등(燈)을 얻는다고 하니 이것을 유문(有門)이라 하느니라.

圓敎四門은 妙理頓說하여 圓融無碍하여 異於歷別하니 云何四門고 觀見思仮하니 卽是法界라 具足佛法이요 又諸法이 卽是法性因緣이요 乃至第一義도 亦是因緣이라 大經에 云, 因滅無明하여 卽得熾燃三菩提燈이라 하니 是名有門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75上]


‘차례대로 지내는 것과 다르다’ 함은 각 부문이 서로 통하지 못하고 각각 구별되어 나누어져 있지 않고 하나하나의 부문에 나머지 세 부문이 다 구족되어 원융하다는 뜻입니다.‘견사(見思)의 가(仮)를 관하니’에서 견과 사는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을 말하는데, 견혹은 불교의 진리를 알지 못하여 생기는 후천적인 번뇌이고, 사혹은 습관적으로 사물에 대하여 애착하는 선천적인 번뇌입니다. 이 견혹과 사혹은 삼계 생사윤회의 번뇌로서, 견과 사의 가(仮)란 유문(有門)에서 총칭하는 생사의 번뇌를 말합니다. 이 ‘견사의 가가 곧 법계’라 하는 것은 무명 이대로가 불성이라는 말과 같으니, 견(見), 사(思), 가(仮) 이대로가 불성이고 열반으로서 일체불법을 다 구족하고 있습니다.

흔히 견, 사, 가 이대로가 법계이고, 무명 이대로가 불성이며 중생 이대로가 부처라 하니, 그러면 우리가 공부할 것도 없고 성불할 것도 없으며 20일, 30일 앉아서 법문 듣는 것이 쓸데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외도의 소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명 이대로가 법계이며 불법인 줄 알려면 실제로 법계와 불성을 장애하는 무명의 구름을 걷어내고 제거해야 합니다. 무명을 멸하기 전에는 무명 이대로가 법계이고 불법인 줄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열반경에 말씀하시길 “무명이 완전히 멸하는 것을 인하여 삼먁삼보리의 등이 타오르는 것을 얻어” 정각을 이룬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유문(有門)이라 하는데 유라 해도 여기에는 무도 포함되어 있고 비유비무(非有非無)와 역유역무(亦有亦無)도 포함되어 있어 나머지 세 부문이 다 따라오는 유(有)입니다.


공문(空門)이란 환화(幻化)의 견과 사 및 일체를 관하니 인(因)에도 있지 아니하고 연(緣)에도 있지 아니하여 자아 및 열반이 둘 다 공하다. 오직 공에 집착하는 공병(空病)이 있지만 공병도 또한 공하니 이것이 곧 삼제가 모두 공함이다.

空門者는 觀幻化見思及一切니 不在因不在緣하여 我及涅槃이 二皆空이라 唯有空病이어나 空病도 亦空하니 此卽三諦皆空也라.


‘환화의 견과 사’에서 견과 사는 앞에서 말한 삼계생사의 번뇌인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을 말합니다. 그런데 견혹과 사혹은 그 본성이 실제로 공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환화의 견사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끝내 생(生)과 멸(滅), 인(因)과 연(緣)이 없으므로 마침내 자아와 열반(涅槃)이 모두 공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오직 일체가 공하다는 공병(空病)만이 남는데, 이 공병이 또한 공하여 공, 가, 중 삼제가 모두 공해 버립니다.


앞에서 말한 유(有)는 말을 바꾸어 가(仮)라 하고 여기서 말한 공(空)은 무(無)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일체만법이 유(有)라면 유(有)고 공(空)이라 하면 공(空)인데 이것이 근본적으로는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니어서 언어와 생각이 다 떨어진 동시에 유라 해도 좋고 공이라 해도 좋습니다. 이것은 결국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표현을 달리하여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무엇을 공문이면서 또한 유문[亦空亦有門]이라 하는가. 환화의 견과 사가 비록 진실은 없으나 거짓 이름을 분별하면 곧 다함이 없으니 마치 한 미진 가운데에 삼천대천의 경권(經卷)이 있는 것과 같느니라. 제일의에서 요동하지 아니하고 능히 모든 법상을 잘 분별하며, 또한 대지가 하나이나 능히 여러 가지 싹들을 생기게 함과 같이 이름과 모습이 없는 가운데 거짓으로 이름과 모습을 말하며, 내지 부처도 또한 단지 이름만 있으니 이것이 있으면서 또한 없는 문[亦有亦無門]이니라.

云何亦空亦有門고 幻化見思가 雖無眞實이나 分別仮名이면 則不可盡이니 如一微塵中에 有大千經卷이라 於第一義而不動하고 善能分別諸法相하며 亦如大地一이나 能生種種芽하여 無名相中에 仮名相說하며 乃至佛도 亦但有名字하니 是爲亦有亦無門이니라.


부처라 해도 부처란 형상을 얻어 볼 수 없으니 무문(無門)이고, 그러면서 부처님이란 존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유문(有門)입니다. 따라서 유가 즉 무고 무가 즉 유이니 역유역무문(亦有亦無門)이 됩니다. 앞에서 공과 유를 말했는데 이 공과 유는 언제든지 역유역무를 포함하는 공과 유지 역유역무를 떠나서 공과 유가 따로 없습니다.


무엇을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문[非有非無門]이라 하는가. 환화의 견과 사를 관하니 곧 법성이다. 법성은 불가사의하여 세간의 것이 아니므로 있는 것이 아니요, 출세간의 것이 아니므로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색과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으니 하나가 중이면 일체가 중이어서 비로자나(毘盧遮那)가 일체처에 두루한다. 어찌 견사가 있다고 해서 진실한 법이 아니라 하리오. 이것을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문[非有非無門]이라고 한다.

云何非有非無門고 觀幻化見思卽是法性이라 法性은 不可思議하여 非世故非有요 非出世故非無라 一色一香이 無非中道니 一中一切中하여 毘盧遮那가 遍一切處니라. 豈有見思라가 而非實法이리오 是名非有非無門이니라.


결국 유를 바로 알게 되면 나머지 셋을 알게 되고, 무를 알게 되어도 나머지 셋을 알게 되어 하나가 곧 넷이고 넷이 곧 하나[一卽四四卽一]가 되어 전체가 원융무애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 무, 역유역무, 비유비무의 네 문이 원융해서 하나도 막힌 데가 없다 하여 네 문이 따로 없는 줄 알면 이것도 잘못입니다. 네 문이 따로 있으면서 또한 원융한 곳에 우리 불법의 묘(妙)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