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6장 천태종사상] 4. 원교의 중도설 - (4) 원교의 십이인연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1:24

제6장 천태종사상

  4. 원교의 중도설

    (4) 원교의 십이인연



이제부터 해설하는 장교, 통교, 별교, 원교의 사교(四敎)에서 말하는 십이인연설은 마하지관(摩訶止觀)에서 지관(止觀)을 설명하는 가운데 일부입니다. 천태스님은 원교와 장교, 통교, 별교의 삼교는 그 법의 의미가 같지 않음을 교판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로 논의하였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앞에서 일부 언급한 사종사제(四種四諦)이며, 여기에서 해설하는 십이인연도 사교의 차이를 분별하여 설한 것입니다.


일체불법의 근본 사상이 십이연기(十二緣起)에 포함된다는 것은 원시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에 이르도록 변함 없이 일관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천태스님도 불교를 사교(四敎)로 구분하고 그 사교에서 설하는 십이인연설을 통하여 각 교의 특성을 일목요연하게 구별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교 중에서도 십이인연이 중도라고 설한 것은 바로 원교라고 단정하여 천태교의 우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원교의 실상을 해명하는 교설 중의 하나인 십이인연설에서도 중도사상은 뚜렷이 부각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도량에 앉아 법륜을 굴리며 열반에 들어감이 모두 십이인연에 의한다. 대품반야경에 말하기를, 만약 능히 깊이 십이인연법을 보면 곧 이것이 도량에 앉는 것이라고 하였다. 도량에는 넷이 있다. 만약 십이인연이 생멸함을 관하여 구경으로 하면 곧 삼장(三藏)의 부처님이 도량에 앉되 수목의 풀자리[草座]이며, 십이인연이 곧 공함을 관하여 구경으로 하면 통교의 부처님이 도량에 앉되 칠보나무의 하늘옷자리(天衣座)이며, 십이인연이 거짓 이름[仮名]임을 관하여 구경으로 하면 별교의 사나불(舍那佛)이 도량의 칠보자리에 앉으며, 십이인연이 중(中)임을 관하여 구경으로 하면 원교의 비로자나불이 도량에 앉되 허공을 자리로 삼는다. 마땅히 알아라. 크고 작은 도량이 모두 십이인연관을 벗어나지 않는다.

佛坐道場轉法輪入涅槃이 皆約十二因緣이니라. 大品云若能深觀十二因緣法이면 卽是坐道場이라 하니라. 道場有四하니 若觀十二因緣生滅究竟이면 卽三藏佛이 坐道場木樹草坐요 若觀十二因緣卽空究竟이면 通敎佛이 坐道場七寶樹天衣座요 若觀十二因緣仮名究竟이면 別敎舍那佛이 坐道場七寶座요 若觀十二因緣中究竟이면 是圓敎毘盧遮那佛이 坐道場虛空爲坐니라. 當知하라 大小道場이 不出十二因緣觀也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128上, 中]


“만약 능히 깊이 십이인연법을 보면 곧 이것이 도량에 앉는 것이니라”에서 ‘도량에 앉는다’는 것은 십이인연을 깊이 관하여 바로 깨치어 보리좌에 앉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십이인연을 관하는 방법이 장교, 통교, 별교, 원교의 사교에 따라 각각 다르므로 그 깨달은 경지도 각각 달라 네 가지로 구분됩니다.

먼저 ‘십이인연이 생멸함을 관함’은 중생이 생멸의 견해로써 십이인연을 본다는 말입니다. 생멸의 견해란 마치 눈병 난 사람이 하얀 구름을 푸르게도 보고 누렇게도 보고 검게도 보아 바로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소승교의 경, 율, 논의 삼장(三藏)을 통달한 부처님이 나무 밑에 풀을 뜯어 놓고 앉아 있는 격이 되는데, 생멸하는 물건이므로 곧 생멸견해를 비유한 것입니다. 즉 소승 장교(藏敎)의 부처님은 십이인연을 관하되 생멸의 경계에 머무르며 아직 생멸을 떠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두번째로 ‘십이인연이 공함을 관함’에서 통교의 부처님이란 대승 통교의 부처님을 말합니다. 이 부처님이 칠보나무 아래 하늘옷으로 만든 자리에 앉는 것은, 그냥 나무 밑의 풀자리에 앉는 것보다 단수는 높지만 완전히 생멸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아직 십이인연이 공하다는 공병(空病)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 ‘십이인연이 거짓 이름임을 관함’에서 십이인연이 거짓 이름임을 본다는 것은 대승 별교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을 알면 별교의 사나불(舍那佛)의 칠보좌에 앉게 됩니다. 별교의 사나불이란 천 개의 연잎으로 된 대 위에 앉은 보신불을 지칭합니다. 여기서는 아직 광경이 두루 비추는 것이 되지 못하고 상주법계가 되지 못하여 전반적인 불교의 교리에는 통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십이인연이 중임을 관함’에서 십이인연이 중도임을 보면 광명이 두루 비추는 원교의 비로자나불의 지위에 이르게 됩니다. 이 비로자나불이 허공을 자리로 삼는다는 것은, 무변무한한 그것을 허공이라 표현한 것이므로 새파란 저 허공에 앉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십이인연을 중도의 정견으로 보면 구경에 비로자나법신불을 보아 상주법계의 중도연기를 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이이연은 중도로 보아야 바로 보는 것이지 변견(邊見)인 생멸(生滅)이나 공(空) 혹은 가(仮)로 보면 이것은 십이인연의 중도를 바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소승, 대승 할 것 없이 크고 작은 도량이 모두 십이인연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불법이 다 십이인연에 집약되어 있으며 십이인연을 제외하고 따로 불법이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 근기가 둔한 제자를 위하여 십이인연이 생멸하는 모습을 설할 때, 따로 근기가 예리한 보살이 앉아 있다가 비밀히 십이인연이 생멸하지 않은 모습을 듣고서 곧바로 불성을 깨달아 무생인을 얻으니 이것이 비밀한 뜻이니라.

初爲鈍根弟子하여 說十二因緣生滅相할새 別有利根菩薩하여 在坐하여 密聞十二因緣不生滅相하고 卽悟佛性하여 得無生法忍하니 此秘密意也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128中]


부처님이 성문의 제자를 위해서 비록 십이인연의 생멸하는 모습을 설하셨더라도 근기가 수승한 보살은 이에 의해 생멸하는 모습을 버리고 그 이면의 본질적 내용인 생멸하지 않는 모습을 듣고 불성을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비밀한 뜻[秘密義]이라고 합니다.


혹은 생멸을 듣고 곧 생멸(生滅)과 불생멸(不生滅), 비생멸(非生滅)과 비불생멸(非不生滅)을 알아 생멸과 불생멸을 쌍조한다. 하나에 즉하면서 셋이고 셋에 즉하면서 하나로, 법계에 비밀히 상락(常樂)을 구족한다. 복덕인(福德人)이 돌을 집으면 보배가 되고 독을 집으면 약이 되는 것과 같다.

或聞生滅하고 卽解生滅解不生滅하며 非生滅非不生滅하여 雙照生滅不生滅하여 卽一而三卽三而一하여 法界秘密常樂具足하니라. …… 如福德人이 執石成寶하고 執毒成藥하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6下]


돌을 집으면 보배가 되고 독을 집으면 약이 된다는 말은 저쪽에서 생멸을 이야기할 때 이쪽에서 생멸을 불생멸 내지 비불생멸로 수용한다는 뜻입니다. 즉 사제나 십이인연이 생멸한다고 설해도 그것을 불생불멸 등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즉 소가 물을 먹으면 젖이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되며, 뱀의 독은 사람을 죽이지만 소의 젖은 사람을 살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건은 한가지라도 받는 사람에 따라 그 물건의 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부처님이 방편으로 생멸을 말씀하시더라도 우리는 일승의 중도를 증득하도록 힘써야지 방편에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참고로 근본불교에서 설한 사념처(四念處)에 대해 한마디 하겠습니다. 사념처란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을 말하는 것으로, 보통 사념처를 설할 때는 이 몸을 부정하다고 관하고[觀身不淨], 감수를 고통이라고 관하고[觀受是苦], 마음을 무상하다고 관하고[觀心無常], 일체법을 무아라고 관하는 것[觀法無我]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순전히 차별견해인 생멸의 변견에서 하는 말이지 일승의 중도가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 가운데 ‘중도가 있으니 이것이 사념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 의지하여 볼 때에 사념처를 중도정견으로 해석해야지 생멸의 변견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또 사전도(四顚倒)라는 것이 있는데, 사념처에서 부정(不淨)을 정(淨)으로, 고(苦)를 낙(樂)으로, 무상(無常)을 상(常)으로, 무아(無我)를 아(我)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전도(四顚倒)란 실제로 변견에 집착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하는 말이며 중도정견을 갖춘 사람이 볼 때는 사전도 이대로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사해탈(四解脫)입니다. 물은 물인데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젖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념처의 설법도 변견의 중생이 들으면 사전도요, 중도의 정견으로 들으면 사해탈이 되어 버립니다. 중도정견에 의하면 상락아정(常樂我淨) 이대로가 부사의 해탈경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