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 스님 - 惡氣息
옛 스님이 이르시되, "이 문에 들어와서는 지해(知解)를 두지 말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간절히 천착(穿鑿)을 꺼린다."하시고 또 이르시되,
"지묵(紙墨)에 오를까 두려워 한다." 하셨으니,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부처님께서 마갈타국에서 외부와의 문을 막고 수행하신 일과
달마대사께서 소림(少林)에서 면벽하신 일이 오히려 전적(傳迹)이 부끄럽고,
임제(臨濟)선사의 할과 덕산 스님의 방망이가 또한 마음을 훔치는 귀신을 면하지 못함이어늘,
장구(章句)를 찾아 따 맞추어 어지러운 언설로 사람을 속이며 대중을 미혹케 함이랴.
영리한 이가 삼각산 생기기 전과 한양성이 형성되기 전과
선학원(禪學院)이 창립되기 전에 알았다 하더라도,
오히려 허물이 적지 않고 크게 우둔함이어늘
하물며 한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관악산 빛에 눈을 붙임이랴.
아! 말세가 되어서 그런한가. 불법의 시운이 변천해서인가.
소위 본색이 납자인 자가 입을 열어 지식을 과장하며 글 쓰는 것을 일삼아
가지를 당기고 넝쿨을 끌어다가 지분(脂粉)을 발라서 무시겁래(無始劫來)의
업식종자(業識種子)를 희롱하여 생사의 뿌리와 싹을 일으킴이랴.
조금이라도 선가의 가풍(家風)을 드러낼 것 같으면 전선선원(全鮮禪院, 전 조선의 선원)에
선중(禪衆)이 한 30명, 20명, 10여 명이 함께 모인 것을 모두 낱낱이 한 30방망이를 주어서
쫓아 헤쳐 버리고 껄껄 웃고 돌아오면 조금쯤 그럴 듯 할 것이나, 가추(家醜)를 드날려
대중에게 자랑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혹 떼려다 혹 하나 더 붙인 셈이다.
참으로 우습고 우습도다.
피를 토하도록 울어도 소용없으니
입을 다물고 남은 봄을 보내니만 못하리라.
그러나 모든 부처와 조사가 어지러이 말씀하신 것은 비불외곡(臂不外曲)이라.
속담에 '팔이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지 않는다.'는 말이니 큰 자비의 원력으로 출현하신 까닭이다.
그러므로 삼각산이 생겨나고, 한양성이 형성되고, 선학원이 창립된 것이다.
따라서 작은 책자까지 창간된 것이니, 어서 바삐 정진하여 이 위없는 큰 도를 대중에게 권발하소.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生)에 이 몸을 제도하리요.
백천만 겁에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으니
부지런히 닦아보세.
동산화상의 자계(自誡)이신 말씀을 보지 못하였는가?
"한낱 허환한 몸이 능히 몇 날이나 사는데, 저 부질없는 일을 위하여 무명(無明)을 기르는고."
하셨으니, 우리 중생들이 조석으로 마음 쓰는 것을 관찰하여 보면
모두가 성현의 꾸짖으신 일이로다.
탐욕, 성냄과 질투, 아만과 게으름으로 죄업의 불에 나무 섶을 더하며, 헐뜯고 칭찬하고,
옳고 그르고, 얻음과 잃음, 영광됨과 욕됨으로 항상 쓰는 재보로 삼으니, 어찌 가련하지 않으리오.
부처님과 조사의 성실한 말씀으로 업행(業行)을 조명하고 법계(法界)를 깨달아 닦으면
범부가 성현되는 것이 한 생각 사이에 자재하게 되리니,
나의 지식이 천단(淺短)하나 대강 말하리라.
탐심이 일어날 때에 탐심이 일어나는 근본을 살펴보면 본래 공적(空寂)하여 없는 마음에
자기 스스로 장애와 어려움을 일으켜서 무한한 고통을 받는 것이,
마치 누에가 몸 속에서 실을 내어 제 몸을 결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관찰하여 당장에 한 칼로 두 쪽을 내어 다시는 상속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속하면 범부의 망령스러움을 그대로 사용함이요,
억지로 끊어서 나지 않게 하면 이승(二乘, 성문승과 연각승)에 항복함이요,
당처가 공적하여 끊음이 끊어야 대승의 깨달은 지혜이니,
깨달은 지혜가 둥글게 밝아서 생각마다 어둡지 않으면 탐욕과 애착이
곧 해탈의 진원이요 마왕이 곧 호법의 선신이 됩니다.
탐애, 질투와 아만과 게으름이 또한 이와 같아서 마음마음이 깨달아 파(破)하면
마음마음이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육조대사가 이르시되,
"앞 생각이 미(迷)하면 중생이요, 뒷 생각이 깨달으면 부처요,
앞 생각이 경계에 집착하면 중생이요, 뒷 생각이 경계를 여의면 부처니라." 하셨습니다.
그런즉 부처와 중생이 한 생각 사이에 나의 마음 쓰는 대로 성립되니
이것이 곧 살활자재(殺活自在)의 기권(機權)인 방편입니다.
이 기권을 잡아쥐고 나의 수중에서 뜻대로 수용하게 되면
어찌 보리도를 성취하지 못할까 근심하리오.
마음마음이 깨달아서 깨달음이 순일하게 익어지면 자연히 항상 깨어있게 되리니
항상 깨어있기 때문에 대각(大覺)이요, 대각이기 때문에 각사(覺士)라 합니다.
무연(無緣)의 대자비로 유연 중생을 제도하면 그 누가 대장부, 천인사, 세존이 아니리요,
그런즉 성불이 마음에 있고 겉모양 치장에 있지 않습니다.
또 지혜로 깨달아 살피는 데 있고 의식으로 널리 힘들여 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이르시되, "고기가 뼈를 바꾸어 용이 됨에 그 비늘을 바꾸지 않고,
범부가 마음을 돌이켜 부처가 되어도 그 얼굴을 고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불심은 스스로 뜻을 얻은 후에 스스로 도를 이루는 것이요,
필경 언어 문자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뜻을 얻고는 말을 잊는다 하시고,
또 마음을 얻으면 세간에 머트러운 말이나 자상한 말이 모두 실상법문(實相法門)이요,
말에 떨어지면 염화미소(拈花微笑)가 또한 경전에 나열된 문자일 뿐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위에 제시한 갈등이 교내법문(敎內法門)인가, 교외별전(敎外別傳)인가.
마음에 얻음인가, 말에 떨어짐인가. 몸에 혈기 있는 사람은 기상을 발휘해 보라.
머뭇거리는 사이에 십만 팔천 리나 멀어짐이올시다.
그러면 머뭇거리지 않음이 도리어 얻음인가?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이르기를,
밤길 걸을 때 흰 것을 밟지 마소.
물이 아니면 돌이올시다.
옛 스님이 이르시되, "이 문에 들어와서는 지해(知解)를 두지 말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간절히 천착(穿鑿)을 꺼린다."하시고 또 이르시되,
"지묵(紙墨)에 오를까 두려워 한다." 하셨으니,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부처님께서 마갈타국에서 외부와의 문을 막고 수행하신 일과
달마대사께서 소림(少林)에서 면벽하신 일이 오히려 전적(傳迹)이 부끄럽고,
임제(臨濟)선사의 할과 덕산 스님의 방망이가 또한 마음을 훔치는 귀신을 면하지 못함이어늘,
장구(章句)를 찾아 따 맞추어 어지러운 언설로 사람을 속이며 대중을 미혹케 함이랴.
영리한 이가 삼각산 생기기 전과 한양성이 형성되기 전과
선학원(禪學院)이 창립되기 전에 알았다 하더라도,
오히려 허물이 적지 않고 크게 우둔함이어늘
하물며 한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관악산 빛에 눈을 붙임이랴.
아! 말세가 되어서 그런한가. 불법의 시운이 변천해서인가.
소위 본색이 납자인 자가 입을 열어 지식을 과장하며 글 쓰는 것을 일삼아
가지를 당기고 넝쿨을 끌어다가 지분(脂粉)을 발라서 무시겁래(無始劫來)의
업식종자(業識種子)를 희롱하여 생사의 뿌리와 싹을 일으킴이랴.
조금이라도 선가의 가풍(家風)을 드러낼 것 같으면 전선선원(全鮮禪院, 전 조선의 선원)에
선중(禪衆)이 한 30명, 20명, 10여 명이 함께 모인 것을 모두 낱낱이 한 30방망이를 주어서
쫓아 헤쳐 버리고 껄껄 웃고 돌아오면 조금쯤 그럴 듯 할 것이나, 가추(家醜)를 드날려
대중에게 자랑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혹 떼려다 혹 하나 더 붙인 셈이다.
참으로 우습고 우습도다.
피를 토하도록 울어도 소용없으니
입을 다물고 남은 봄을 보내니만 못하리라.
그러나 모든 부처와 조사가 어지러이 말씀하신 것은 비불외곡(臂不外曲)이라.
속담에 '팔이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지 않는다.'는 말이니 큰 자비의 원력으로 출현하신 까닭이다.
그러므로 삼각산이 생겨나고, 한양성이 형성되고, 선학원이 창립된 것이다.
따라서 작은 책자까지 창간된 것이니, 어서 바삐 정진하여 이 위없는 큰 도를 대중에게 권발하소.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生)에 이 몸을 제도하리요.
백천만 겁에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으니
부지런히 닦아보세.
동산화상의 자계(自誡)이신 말씀을 보지 못하였는가?
"한낱 허환한 몸이 능히 몇 날이나 사는데, 저 부질없는 일을 위하여 무명(無明)을 기르는고."
하셨으니, 우리 중생들이 조석으로 마음 쓰는 것을 관찰하여 보면
모두가 성현의 꾸짖으신 일이로다.
탐욕, 성냄과 질투, 아만과 게으름으로 죄업의 불에 나무 섶을 더하며, 헐뜯고 칭찬하고,
옳고 그르고, 얻음과 잃음, 영광됨과 욕됨으로 항상 쓰는 재보로 삼으니, 어찌 가련하지 않으리오.
부처님과 조사의 성실한 말씀으로 업행(業行)을 조명하고 법계(法界)를 깨달아 닦으면
범부가 성현되는 것이 한 생각 사이에 자재하게 되리니,
나의 지식이 천단(淺短)하나 대강 말하리라.
탐심이 일어날 때에 탐심이 일어나는 근본을 살펴보면 본래 공적(空寂)하여 없는 마음에
자기 스스로 장애와 어려움을 일으켜서 무한한 고통을 받는 것이,
마치 누에가 몸 속에서 실을 내어 제 몸을 결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관찰하여 당장에 한 칼로 두 쪽을 내어 다시는 상속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속하면 범부의 망령스러움을 그대로 사용함이요,
억지로 끊어서 나지 않게 하면 이승(二乘, 성문승과 연각승)에 항복함이요,
당처가 공적하여 끊음이 끊어야 대승의 깨달은 지혜이니,
깨달은 지혜가 둥글게 밝아서 생각마다 어둡지 않으면 탐욕과 애착이
곧 해탈의 진원이요 마왕이 곧 호법의 선신이 됩니다.
탐애, 질투와 아만과 게으름이 또한 이와 같아서 마음마음이 깨달아 파(破)하면
마음마음이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육조대사가 이르시되,
"앞 생각이 미(迷)하면 중생이요, 뒷 생각이 깨달으면 부처요,
앞 생각이 경계에 집착하면 중생이요, 뒷 생각이 경계를 여의면 부처니라." 하셨습니다.
그런즉 부처와 중생이 한 생각 사이에 나의 마음 쓰는 대로 성립되니
이것이 곧 살활자재(殺活自在)의 기권(機權)인 방편입니다.
이 기권을 잡아쥐고 나의 수중에서 뜻대로 수용하게 되면
어찌 보리도를 성취하지 못할까 근심하리오.
마음마음이 깨달아서 깨달음이 순일하게 익어지면 자연히 항상 깨어있게 되리니
항상 깨어있기 때문에 대각(大覺)이요, 대각이기 때문에 각사(覺士)라 합니다.
무연(無緣)의 대자비로 유연 중생을 제도하면 그 누가 대장부, 천인사, 세존이 아니리요,
그런즉 성불이 마음에 있고 겉모양 치장에 있지 않습니다.
또 지혜로 깨달아 살피는 데 있고 의식으로 널리 힘들여 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이르시되, "고기가 뼈를 바꾸어 용이 됨에 그 비늘을 바꾸지 않고,
범부가 마음을 돌이켜 부처가 되어도 그 얼굴을 고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불심은 스스로 뜻을 얻은 후에 스스로 도를 이루는 것이요,
필경 언어 문자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뜻을 얻고는 말을 잊는다 하시고,
또 마음을 얻으면 세간에 머트러운 말이나 자상한 말이 모두 실상법문(實相法門)이요,
말에 떨어지면 염화미소(拈花微笑)가 또한 경전에 나열된 문자일 뿐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위에 제시한 갈등이 교내법문(敎內法門)인가, 교외별전(敎外別傳)인가.
마음에 얻음인가, 말에 떨어짐인가. 몸에 혈기 있는 사람은 기상을 발휘해 보라.
머뭇거리는 사이에 십만 팔천 리나 멀어짐이올시다.
그러면 머뭇거리지 않음이 도리어 얻음인가?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이르기를,
밤길 걸을 때 흰 것을 밟지 마소.
물이 아니면 돌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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