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대장부라야 된다
道流야 儞若欲得如法하면 直須是大丈夫兒라사 始得다 若萎萎隨隨地하면 則不得也니라 夫如시[斯瓦]嗄之器는 不堪貯醍醐니 如大器者는 直要不受人惑이라 隨處作主하야 立處皆眞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이 만약 여법(如法)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대장부라야 비로소 할 수 있다.
만약 시들시들하고 나약하게 흐느적거려서는 안 된다.
깨어진 그릇에는 제호(醍醐)같은 좋은 음식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큰 그릇이라면 다른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고 어딜 가나 주인이 되어 그가 선 자리 그대로가 모두 참다운 삶이 된다.”
강의 ; 이 단락을 부연하면 이렇다.
불교의 문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진정한 불교인은 드물다.
불교공부를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다.
또 공부를 한다고 해서 아무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여법한 불교인이 되려면 먼저 세속적 명리(名利)를 초개같이 보아야 한다.
세상사 인생사가 모두 무상한 줄 알고 허망하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나아가서 있다 없다, 선이다 악이다. 라고 하는 편견에 떨어져서도 안된다.
그것은 모두 세속적 안목이다.
세속적 가치관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불교인이 아니다.
또 하나 결단력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나약하거나 비실비실해서는 불교를 제대로 체득할 수 없다.
조사스님들은 무쇠로 지어 만든 사람, 또는 쇠말뚝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의 이런 저런 주장에 미혹되어서도 안된다.
명예와 이익과 칭찬에 좌우되어서도 안된다.
정직해야 한다.
의롭고 떳떳하게 행동해야 한다.
어디를 가나 당당한 주인이 되어 그가 선 자리가 그대로 참되고 진실한 삶이어야 한다.
더럽고 깨어진 그릇에는 좋은 음식을 담을 수가 없다.
빼어난 훌륭한 그릇이어야 한다.
그를 대장부라 한다.
불교의 문에 드나들면서 입으로 불교를 운위한다고 불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머리를 깎고 중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불교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세상에서 칭송받는 의인(義人)이나 영웅호걸보다도 더욱 빼어난 사람이 불교인이다.
여기서 다시한번 해야 할 공부는, 남에게 속지 말라.
불수인혹(不受人惑).
그리고 어디서든지 주인으로 살라.
수처작주(隨處作主).
그리하면 그대 선 곳이 모두가 참된 삶이리라.
입처개진(立處皆眞).이다.
但有來者어든 皆不得受니 儞一念疑하면 卽魔入心이라 如菩薩疑時에 生死魔得便이니라 但能息念이요 更莫外求하고 物來卽照하라
“다만 찾아오는 사람이 있더라도 모두 받아들이지 말라.
그대들이 한 생각 의심하면 곧 마(魔)가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만약 보살이라도 의심을 내면 생사의 마군이가 그 틈을 얻게 된다.
다만 생각을 쉬기만 하면 된다.
다시 바깥으로 구하지 말라.
사람이 다가오면 오는 대로 곧 비춰보라.”
강의 ; 날아오는 공을 다 받을 필요는 없다.
걸려오는 전화를 다 받을 필요는 없다.
부탁하는 일이라고 다 할 것은 없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다 받아드릴 일은 아니다.
수많은 번뇌 중에서 의심하는 번뇌도 큰 번뇌에 속한다.
만약 그대들이 한 생각 의혹이 생기면 그 순간 마군이가 마음속에 자리하게 된다.
경전에도 보살이 의혹이 생기면 본래 생사가 없는 데서 곧 생사의 마군이가 그 틈을 엿보아 침입하게 된다고 했다.
자주 말씀하시는 불수인혹(不受人惑)이다.
다른 사람들의 의혹[속임]을 받아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다만 한 생각 쉬어버려라.
한 생각 쉬어버리고 다시는 밖을 향해서 찾지 말라.
사람이 오거나, 사물을 대하거나, 일이 벌어지거나, 그냥 가만히 비취보라는 것이다.
儞但信現今用底하면 一箇事也無니라 儞一念心生三界하야 隨緣被境하야 分爲六塵하니 儞如今應用處가 欠少什麽오 一刹那間에 便入淨入穢하며 入彌勒樓閣하며 入三眼國土하야 處處游履하나 唯見空名이니라
“그대들이 지금 바로 작용하는 이것을 믿기만 하면 아무런 일이 없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삼계를 만들어내고 인연을 따라 경계에 끄달려서 육진경계로 나누어진다. 그대들이 지금 응하여 쓰는 그곳에서 무슨 모자람이 있겠는가?
한 찰나 사이에 깨끗한 국토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국토에도 들어가며,
미륵의 누각에도 들어가고 삼안국토(三眼國土)에도 들어가서 곳곳을 다니지만 오직 텅 빈 이름뿐이다.”
강의 ; 아마도 임제스님이 가장 많이 말씀하시는 것이라 여겨진다.
지금 곧 사용하고 있는 것,
법문을 듣고 있는 그 사람,
그 사람을 믿고 알면 아무런 일이 없다.
일생의 일을 끝낸 사람이다.
그 사람이 모든 것의 근본이며 모든 것이 그 사람에게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믿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공연히 그대들 한 생각이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는 그들의 경계에 이끌리면서 또다시 여섯 가지의 경계를 만들어낸다.
다시한번 생각해 보자.
그대들이 지금 모든 상황에 맞추어 활용하고 있는 그 사실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비가 오면 비가 오는 줄을 알고, 날씨가 개이면 개인 줄을 알고, 추우면 추운 줄을 알고, 더우면 더운 줄을 알고, 피곤하면 쉴 줄을 알고, 배고프면 밥을 찾아 먹을 줄을 알지 않는가?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팔만사천 신통묘용이며 무량대복이 아닌가?
이 사람은 한 찰나사이에 청정한 곳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곳에도 들어가고 인간이 이르러 갈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미륵누각에도 들어가고 삼안국토(三眼國土)에도 들어간다.
이렇게 곳곳을 흘러 다니지만 그것들은 헛된 이름뿐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그 한 사람, 지금 목전에서 활발발하게 작용하는 그 한사람뿐이다.
다시 복습할 말이 있다. 이여금응용처 흠소십마(儞如今應用處 欠少什麽)
'임제록(臨濟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제록강설/시중27/무비스님 (0) | 2007.08.31 |
---|---|
임제록강설/시중26/무비스님 (0) | 2007.08.31 |
임제록강설/시중24/무비스님 (0) | 2007.08.31 |
임제록강설/시중23/무비스님 (0) | 2007.08.31 |
임제록강설/시중22/무비스님 (0) | 2007.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