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시중28/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8. 31. 16:10

시중  28 

 


14-6 사자후 일성에 뇌가 찢어진다

道流야 儞取這一般老師口裏語하야 爲是眞道하야 是善知識은 不思議요 我是凡夫心이니 不敢測度他老宿이라하나니 瞎屢生이여 儞一生을 祇作這箇見解하야 辜負這一雙眼하니 冷噤噤地가 如凍凌上驢駒相似로다 我不敢毁善知識이라 怕生口業이라하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은 어떤 노스님들의 설법을 듣고 그것이 참된 도라고 여긴다.

이러한 선지식은 불가사의하다고 하면서 ‘나는 범부의 마음이니 감히 그 노스님의 뜻을 헤아려 볼 수 없다.’고 한다.

이 눈멀고 어리석은 사람아!

그대들의 일생을 이러한 견해에 사로잡혀 멀쩡한 두 눈을 막아버리고 산다.

추워서 벌벌 떠는 모습이 마치 빙판 위를 걸어가는 당나귀의 새끼 같구나.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감히 선지식을 비방하지 못한다.

입으로 짓는 업이 두렵다.’고하니라.”


강의 ; 일반 불자들은 스님의 모습을 하고 있기만 하면 젊든 늙든 무조건 믿고 따르는 경향이 있다.

하물며 주지스님, 노스님, 큰스님이라고 하면 거의 맹목적으로 그들의 말을 믿는다.

좀 알려진 큰스님이라면 그를 믿는 것은 거의 절대적이다.

특별한 차원에 살고 있는 것으로 맹신한다.

그래서 그의 말은 어떤 말이든지 다 옳다고 생각하고 전전긍긍하면서 감히 비판할 생각을 갖지 못한다.

참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마치 한 사람의 맹인이 많은 맹인들을 이끌고 위험한 길을 가는 격이다.

‘악지식(惡知識)을 비판하고 꾸짖을 수 있어야 비로소 불조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확실한 소신을 가진 이라면 정법을 위해서 큰스님도 비판하고 도인도 꾸짖을 수 있어야 한다.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 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위하는 길이다.


道流야 夫大善知識이 始敢毁佛毁祖하며 是非天下하며 排斥三藏敎하며 罵辱諸小兒하야 向逆順中覓人하나니 所以我於十二年中은 求一箇業性을 如芥子許도 不可得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큰 선지식이라야 비로소 부처와 조사를 비방할 수 있고 천하의 선지식들을 옳다 그르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경·율·논 삼장(三藏)의 가르침을 배척할 수도 있으며,

어린애 같은 모든 무리들을 꾸짖을 수 있다.

거슬리고 순종하는 경계 속에서 사람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12년 동안 업의 성품을 찾았는데 겨자씨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강의 ; 진짜 큰 선지식이라야 비로소 부처님을 훼방하고 조사님을 훼방할 수 있다.

천하 선지식들의 법을 시비할 수 있다.

또 부처님이 설한 경과 율과 논을 그르다고 배척하고 비판할 수 있다.

역행(逆行)이나 순행(順行)을 자유롭게 저지르면서 그 가운데서 좀 사람다운 사람을 찾는다.

따뜻한 자비의 손길로 어루만지기도 하고 매섭게 꾸짖기도 하며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한다.

모두가 학인들의 눈을 열어주기 위함이다.

솟을 아홉 번이나 걸게 했다는 구정(九鼎)조사도 있었다.

부처와 조사를 훼방하고 삼장을 배척하면 일반적으로는 큰 죄업을 짓는다고 한다.

당연하다.

어찌 함부로 부처님을 훼방하랴.

큰 죄업을 짓는 일이다.

하지만 임제스님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오랜 세월동안[12년] 업의 성품을 아무리 찾아야 찾을 길 없었다.

겨자씨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마음이 텅 빈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천수경에도 “죄업이란 자성이 없다.

다만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

마음을 비우면 조업도 없다.”라고 하였다.

임제스님은 늘 그와 같은 경지에 있기 때문에 죄업이란 있을 수 없다.

일체 업성(業性)이 공(空)인 자리에서 생활한다.

한없이 당당하다.

하늘을 찌를 기상과 자존심이 있다.

수천만 불조(佛祖)가 한꺼번에 와서 질문을 하고 법을 거량하더라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비바시불(毗婆尸佛)의 게송이 좋아서 소개한다.

“몸이란 형상이 없는 곳으로부터 태어났다.

마치 요술쟁이가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든 것과 같다.

요술쟁이가 만든 사람은 본래 마음이 없으며

죄도 복도 모두 공하여 머무는 곳이 없다.”

[身從無相中受生 猶如幻出諸形象 幻人心識本來無 罪福皆空無所住]


若似新婦子禪師하면 便卽怕趁出院하야 不與飯喫하야 不安不樂이어니와 自古先輩가 到處人不信하고 被趁出하야 始知是貴하나니 若到處人盡肯하면 堪作什麽오 所以師子一吼에 野干腦裂이니라

“만약 새색시 같은 선사라면 절에서 쫓겨나서 밥을 얻어먹지 못할까 두렵고 불안해한다.

그러나 예로부터 뛰어난 선배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믿지 않아 쫓겨났다.

그리고 나중에야 비로소 귀한 사람인줄 알았다.

만약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정해 준다면,

이런 사람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한 번의 사자후에 여우의 머리통이 찢어지는 것이다.”


강의 ; 새색시 같이 이제 막 조실이 된 선사가 있다.

새색시는 남편의 눈치도 시어머니의 눈치도 살펴야 한다.

시어머니 같은 대중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혹시라도 말을 잘못했다가는 선원에서 축출당한다.

밥을 굶을지 몰라 불안하기 이를데 없다.

그렇게 되면 개망신이다.

그래서 새색시 같은 선사라 한다.

대개가 그와 같은 선지식들이다.

소신도 없지만 그나마 대중들에게 아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옛 선배들 중에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고 선원에서 축출을 당한 예가 있다.

대중들도 축출한 뒤에 그가 참으로 훌륭한 선지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달마대사가 그 좋은 예다.

그가 만약 양나라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그의 성가가 오늘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만약 훌륭한 선지식을 가는 곳마다 알아준다면 그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유사한 예로 오늘날의 불교도 정법(正法)을 거론 하는 데는 파리를 날린다.

하지만 삿된 가르침이나 불교가 아닌 행사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진정으로 정법에 소신을 가지고 법을 펴는 사람들은 매우 외롭다.

하지만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섭섭해 하거나 외로워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의인군자가 아닌가.

임제스님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할 말은 당당하게 한다.

그래서 임제가풍을 청천벽력이라고 한다.

청천벽력 같은 기상천외의 사자후 일성에 자질구레한 불교 상식으로 재산을 삼고 있는 사람들은 뇌가 찢어지거나 기절하고 만다.

지금까지의 법문이 기존의 불교 상식과는 전혀 다른 놀라운 말씀들이 많았다.

아마도 뇌가 찢어지거나 기절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혀를 내 둘렀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것은 불교가 아니라고 책을 던져버렸을 것이다.

최상의 근기는 최상승법을 들으면 기쁜 마음으로 곧바로 받아드린다.

중간 근기는 과연 그러한가 아닌가 하고 망설인다.

그러나 소인배 하근기는 비웃어 버린다.

소인배 하근기가 비웃지 않으면 족히 최상의 도가 되지 못한다.

사자일후 야간뇌열(師子一吼 野干腦裂). 사유해 볼만한 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