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훈집(禪林寶訓集)
7. 백운 수단(白雲守端)선사의 말씀
1
공보(功輔)가 태평주(太平州) 의 요직을 맏고 바로 강을 건너 백운 단화상을 해회(海會)로 방문하였다.
백운천사가 공(公)에게 묻기를
“소는 순박한가?”
하니, 공(公) 이 말하였다.
“순박합니다.”
백운선사가 그를 꾸짖어도 공(公)은 팔짱을 끼고 서 있으니 이에 백운선사가 말씀하였다.
“순박하고 순박하구나! 남전과 대위산도 이와 다름이 없었다.”
이에 게송을 지어주었다.
“산중에서 소가 내려오니
물도 많고 풀도 넉넉하다.
소가 산을 나와 떠나니
동쪽에도 부딪치고 서쪽에도 부딪친다.”
또 말하였다.
“공자는 삼천명의 제자를 교화하였으니 예의를 알 것이다.”
곽공보는 재관(宰官)으로 현신(現身)하여 불사(佛事)를 하였으니 욕계(欲界)에 있으면서도 욕심이 없었고, 육진(六塵)에 거처하면서도 육진에 물들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또 그는 숙세에 덕의 근본을 심어 큰 인연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육진 · 육근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한 생각도 의지함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이르러 다리(橋)가 끊어지고 길이 끝나니 다른 사람의 지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해회(海會)로 백운전사를 방문하였던 것이다.
백운선사는 통방정안(通方正眼)을 갖추어서 노련한 솜씨로 걸림없는 변재를 베풀어 문득 공(公)에게 ‘소는 순박한가?’하고 물었던 것이다. 공(公)은 일찌기 공부를 크게 도야하여 이미 의심이 없는 지위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온몸으로 짐을 짊어지고 근원에 도달하여 백운선사에게 ‘순박합니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백운선사는 자식을 기르는 인연이 있었으므로 노파심이 간절하여 그가 보았던 도(道)가 온당치 못할까 염려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우뢰소리가 요란하고 번개가 번쩍이는 기틀과, 땅을 진동하는 위엄스럽고 씩씩한 모습으로 그를 질타하였다. 이는 관문을 지키려면 반드시 자세하고 엄격한 관리를 써야하니, 분명함을 경험하지 않으면 방자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말할 만하다. 마치 질풍이 불어야 굳센 풀을 알고 맹렬한 불만이 진금(眞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공(公)은 이미 콧구멍이 하늘을 두르고 다리는 땅을 밟은 사람이라, 팔방에서 바람이 불어온다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체득한 곳이 온당하고 세밀한데 어찌 팔방에서 바람이 분다하여 방해롭겠으며, 견지(見地)가 심오한데 사산(四山)이 와서 합치한들 왜 두려워 하겠는가? 마침내 팔짱을 끼고 서 있었으니 체득한 곳에서 자연히 계교를 잊고 들어내 보임에 전혀 공부를 허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암선사는 여기에 이르러, 눈 온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를 알고 일이 어려워야 바야흐로 대장부가 나타남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수레를 곁에서 밀어보지 않으면 이치를 곡단(曲斷)할 수 없듯이 입 가득히 그의 도(道)를 인정하여 ‘순박하고 순박하다. 남전과 대위산도 이와 다름이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한 게송을 지어주니 앞의 두 구절은 그의 견지가 명백한 것을 노래한 것인데, 말하자면 주리면 부드러운 풀을 뜯어 먹으며 멀리 산으로 가고 목마르면 차거운 생물을 마시며 시냇가를 돌며 되돌아 온다는 것이다.
뒤의 두 구절은 자유자재한 현재를 노래한 것이니, 자유자재하여 공겁의 땅을 갈지도 않는데 저문 하늘에 목동들의 노래를 재촉하여 무엇할 것인가를 말한 것이다.
남전(南泉)선사는 마조대사의 제자이며, 남악 아래 2세이다. 하루는 상당(上堂)하여 말하기를 ‘나는 한 마리 물소를 기르고 있다. 개울 동쪽에서 기르려니 관가(官家)의 벼의 묘를 먹는 것은 말릴 수 없고, 개울 서쪽에서 기르려니 또한 관가의 벼의 묘를 먹는 것을 말릴 수 없다. 분수를 따라 조금조금 주는 것만 같지 못하니 모두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위산 영우(潙山靈祐)선사는 백장선사의 제자이며 남악하 삼세이다. 하루는 상당하여 말하기를 ‘노승이 백년 후에 산밑의 신도 집에서 한 마리 물소가 되어 태어나서 옆구리에 위산 아무개라고 다섯자가 쓰였다면 그때 위산의 중이 물소라고 하여야 하겠느냐, 물소가 위산의 중이라고 하여야 하겠느냐? 필경에 어떻게 불러야 옳겠느냐? 앙산스님이 대중 가운데서 나와 예배하고 물러났다.
2
공보(功輔)에게 말씀하였다.
옛날 취암*l 가진선사는 우쭐대는 마음으로 선관을 탐내어 혀끝의 날카로운 변론으로 제방을 꾸짖고 욕하며, 그의 뜻에 옳다고 인정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대법(大法) 은 실로 명료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루는 금란*2 선시자가 그를 보고 비웃으며 말하였다.
“사형께서는 비록 참선은 많이 했지만 오묘한 깨달음이 아니므로 어리석은 참선이라고 말할 만합니다.”
3
도가 융성하고 침체됨이 어찌 일정하겠는가? 사람이 이를 홍대하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잡으면 존재하고 버리면 없어진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도가 사람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를 버리는 것이다. 옛 사람은 산림에 있거나 조정과 시장에 은둔하거나 명리에 끄들리지 않고 성색(壺色)에 현혹되지 않았다. 드디어는 청아한 기풍은 한 시대를 진동하고 아름다운 명성은 만세에 전해졌다. 어째서 옛날에만 되었고 요즈음이라 해서 되지 않겠는가? 교화가 지극하지 못하고 실천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옛 사람은 순박했기 때문에 교화가 가능했지만 요즈음 사람은 들뜨고 천박하기 때문에 교화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실로 사람들을 고무하고 현혹시키는 말로써 고증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4
무위자*3에게 말하였다.
말은 가능하지만 실천은 불가능하다면 아예 말하지 않는 것만 못하며, 실행은 가능하나 말하지 못할 것은 실행하지 않는 것이 낫다. 말을 꺼내려면 반드시 그 마칠 바를 염려하고 실행을 수립하려면 반드시 그 가린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에 선철께서는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간택하여, 말을 꺼내는 것은 굳이 이치를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학자의 깨닫지 못함을 열어주려 함이며, 행동을 수립함은 그의 몸만 홀로 착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학자가 이루지 못한 바를 훈계하려 함이였다. 그 때문에 말을 꺼내면 법도가 있었고 행동을 수립하면 예의가 있었다. 마침내는 말을 해도 재앙을 부르지 않았고 실천을 해도 욕됨을 부르지 않았다. 말을 하면 길이 되었고 실천하면 법이 되었다.
그러므로 말과 행동은 군자의 추기(樞機)며 몸을 다스리는 큰 근본으로서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감동시킨다. 공경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5
법연선사에게 말씀하였다.
참선을 하는 사람의 지혜는 이미 지난 자취를 보는 경우는 많아도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은 보지 못한다. 지관(止觀)·정혜(定慧)는 아직 나타나기 이전을 방비하며, 작(作)·지(止)·임(任)·멸(滅)은 이미 지난 이후에 깨닫는다. 그러므로 작·지·임·멸은 작용하는 것을 보기 쉽지만 지관(止觀)·정혜(定慧)는 하는 바를 알기 어렵다.
옛 사람은 도에 목적을 두고 아직 싹이 나기 이전에 생각을 끊어 버렸다. 비록 지관·정멸과 작·지·임·멸이 있다 하여도 모두가 본말(本末)의 의론일 뿐이다. 때문에 말하기를 “털끝만큼이라도 본말(本末)을 말하는 이는 모두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옛 사람의 견해가 투철한 곳으로서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작(作)이란 마음으로 조작하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나는 본심에서 갖가지 행동을 조작하여 진리를 구하고자 하다고 말하면 즉시 병통이 되는 경우이다. 지(止)는 허망을 쉬고 진실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는 지금 모든 사념을 영원히 쉬고 고요하고 평등하여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 고 말한다면 바로 병통이 되는 것이다.
임(任)은 인연에 따르고 정에 맡김을 말한다. 가령 ‘나는 지금 생사를 끊지도 않고 열반도 구하지 않으며, 일체 있는대로 맡겨두고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 고 하면 즉시 병통이 되는 경우이다. 멸(滅)은 적멸(寂滅)을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지금 일체의 번뇌인 몸과 마음의 육근·육진의 허망한 경계를 영원히 없애고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고 말하면 병통이 되는 경우이다.
6
납자들이 경전을 보지 아니하고 원대한 계책도 없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나는 총림이 이로부터 쇠박하여질까 염려스럽다.
돌아가신 양기스님은 매양 말씀하셨다.
“윗 사람이나 아랫 사람이 자신의 편안만 도모하는 것이 법문의 가장 큰 근심거리다.”
나는 지난 날 귀종사(歸宗寺) 의 서당에서 은거하며 경전과 역사를 열람하여 수백번이나 읽어도 눈에 스쳐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 책장은 떨어지고 낡을대로 낡았다.
그러나 책을 펼 때마다 반드시 새로운 뜻을 얻었다. 나는 이로써 생각해 보니 학문이 사람을 저버리지 않음을 알겠다.
7
백운선사가 처음 구강(九江)의 승천사(承天寺)에 주석하다가 다음으로는 원통사(圓適寺)로 옮겨 갔는데 나이가 가장 어렸었다. 이 때 회당(晦堂)*4선사가 보봉사(宝峰寺)에 머물고 있으면서 월공*5 회스님에게 말하였다.
“원통사에 새로 온 백운은 통철히 근원을 보았으니 양기선사의 법 이음을 욕되게 하진 않을 것이다. 애석하다! 너무 일찍 쓰였으니 총림의 복이 아니다.”
월공 회선사가 이 말을 듣고 그 까닭을 묻자 회당선사가 말하였다.
“공명과 아름다운 그릇은 조물주가 아낀다. 이를 사람에게 완전하게 주지는 않는다. 사람이 억지로 이를 욕심내면 하늘이 반드시 그를 빼앗아 가버리기 때문이다.”
백운선사가 서주(舒州)의 해회 (海會)에서 56세로 임종하자 식자들은 ‘회당선사가 기미를 알았으니 참다운 철인이다’ 라 하였다.
1 . 취암가진(翠巖可眞) 석상 초원(石霜楚圓)의 법을 이음
2. 금란선(金鑾善) 자명(慈明)의 고제(高弟).도오 진(道悟 眞)과 양기 방희(楊岐方會)가 모두 추대하고 복종하였으나 누구의 법을 이었는지는 미상이다.
3. 무위자(無爲子) 성은 양씨(楊氏), 이름은 걸(傑), 자(字)는 차공(次公), 호는 무위거사(無爲居士), 관직은 예부(禮部)에 이르고 천의 회(天衣 懷)선사에게 법을 이었다.
4. 회당조심(晦堂祖心) 임제종 황룡파인 황룡 혜남의 법을 이었으니 남악하 12세 법손이다.
5. 월 공회(月 公晦) 휘(諱)는 효월(曉月), 자(字)는 공회(公晦), 낭야의 각선사에게 법을 얻었다. 홍주(洪州)의 늑담(泐潭) 보봉사(宝峰寺)에 주석하면서 능엄표지(楞嚴標旨)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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