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스님] 선림보훈집(禪林寶訓集)-명교계숭(明敎契嵩)2 선사의 말씀

通達無我法者 2007. 11. 23. 15:51

선림보훈집(禪林寶訓集)

1. 명교계숭(明敎契嵩)*2 선사의 말씀
도(道)보다 존귀한 것은 없고 덕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도덕이 갖추어졌다면 외톨박이라 하여도 곤궁하지 않으며, 도덕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천하에 왕 노릇을 한다 하여도 형통함이 없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옛날에 굶어 죽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그들에게 비교하여 주변 모두가 기뻐한다. 걸(桀) ·주(紂) ·유(幽) ·여(厲)는 옛날의 임금들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사람들은 그들에게 비교하면 모두가 성을 낸다.
이 때문에 학자는 도덕이 몸에 충만하지 못한 것을 근심할지언정 세력과 지위가 자기에게 있지 않음을 근심하지 않아야 한다.

태사공(太史公)이 맹자(孟子)를 읽다가 양혜왕(梁惠王)이 ‘무엇으로써 내 나라를 이익되게 할 수 있겠읍니까’하고 맹자에게 질문한 대목에 이르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책을 덮어버리고 길게 탄식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슬프다. 이익이란 실로 혼란의 시초이다. 때문에 공자(孔子)께서로 이익에 대해서는 드물게 말씀하셨는데, 이는 항상 그 근원을 막고자 함 때문이었다.”
근원이란 시초이다. 존귀한 사람이나 번천한 사람이나 이익을 좋아하는 폐단은 무엇이 다르겠는가? 공직에 있는 자가 이익을 공정하지 못하게 취하면 법이 혼란하고 개인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속임수로 이익을 취한다면 일이 혼란해진다. 일이 혼란해지면 사람들이 다투며 화평하지 못하고, 법이 혼란해지면 백성이 원망하며 복종하질 않는다. 서로가 뒤틀려 투쟁하며 죽음도 뒤돌아보지 않는 것도 이로부터 발단된다. 이것이 ‘이익은 실로 혼란의 시초라’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성현께서는 이익을 버리고 인의(仁義)를 우천적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깊이 주의를 주셨다. 그런데도 후세에서는 이익을 믿고 서로를 속이며 풍속과 교화를 상하게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더구나 공공연히 이익 취하는 방법을 크게 벌여놓고 이를 시행하면서 천하의 풍속이 올바르게되어 야박하지 않게 하려하나 이것이 될 법이나 한 말이겠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행하는 악에는 드러난 악도 있고 드러나지 않는 악도 있다. 드러나지 않는 악은 사람을 해치며 드러난 악은 사람을 죽인다. 사람을 죽이는 악은 작고 사람을 해치는 악은 크다. 때문에 잔치하는 가운데 짐독(鴆毒)이 있고, 담소하는 가운데는 창이 있으며, 안방 구석에도 호랑이·표범이 있고 이웃 거리에는 오랑캐가 있다. 성현이 이를 싹트기 전에 끊고 예의와 법도로 방지하지 않았다면 그 해로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드러난 악은 흘러온 방향이 있으므로 대적하여 막을 수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악은 그 유래를 헤아릴 수가 없으므로 해로움이 작지가 않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이는 악은 작고 사람을 해치는 악이 크다는 것이다. 사람을 죽인다고 한 것은 자취로써 말하였고, 사람을 해친다고 한 것은 마음으로 말하였다. 드러난 자취로 사람을 죽였다 해도 그 허물은 용서할 수도 있겠지만 잔인한 마음으로 진리를 해치는 것은 재앙이 극심하다.
때문에 형체가 있는 악은 분명히 드러나서 볼 수 있지만, 형태가 없는 악은 그윽하여 헤아릴 수 없다. 사람들이 보고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죄가 작은 것이며, 사람이 볼 수도 알 수도 없기 때문에 그 죄가 무겁고 크다고 한 것이다.

대각회연(大覺懷璉)화상께서 육왕산(育王山)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두 스님이 시주가 준 이익을 다투며 그치지 않는데도 일을 주관하는 스님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보고 대각이 스님을 불러 앞으로 나오라 하고는 그들을 꾸짖으며,
“지난날 포공(包公)이 개봉(開封)지방의 판관(判官)으로 있을 때,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스스로 나서 말하기를 ‘백금(白金) 백량(百兩)을 저에게 맡겨 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날 죽어버렸읍니다. 이제 그 집안으로 되돌려 주었더니 그 아들이 받질 않습니다. 공(公)께서는 그 아들을 소환하여 이를 되돌려 주십시오’ 하였다. 공(公)은 그 기특함을 칭찬하고 즉시 그 아들을 불러서 백금을 받으라고 하자 그 아들은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는 백금을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의 집에 맡겨두신 일이 없읍니다’며 사양하였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굳이 사양하자 공(公)은 부득이 성내에 있는 사찰과 도관(道觀)에 부탁하여 명복을 빌고 죽은 사람을 천도하라 하였다.
나는 그 일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진로(塵勞)의 세상 속에 있는 사람도 재물을 멀리하고 의로움을 생각하기를 이같이 하였다. 너희들은 부처님의 제자임에도 이처럼 염치를 모르는가?”하고는 드디어 총림의 법규에 의거하여 그들을 쫓아버렸다.

2. 원통거눌(圓通居訥)*3 선사의 말씀
인조(仁租) 황우(皇祐) 초년에 조정에서 환관을 파견하여 원통거눌선사를 소환하여 효자대가람(孝慈大伽藍)에 주석하라 하였다. 눌선사는 병을 핑게하고 일어나지 않고 표문(表文)을 지어 임금께 글을 올리니 조정에서는 이에 답하여 대각(大覺)이라는 호(號)를 하사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
“어진 천자께서 스님의 도덕을 들어내고 존중하여 그 은혜가 샘물이나 돌까지도 덮었읍니다. 스님은 무엇 때문에 사양하십니까?”
눌선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외람되게도 승려의 무리에 끼어들긴 하였으나 보고듣는 것이 총명하지 못하다. 그런데도 요행히 숲에 안주하며 거친 밥을 먹고 흐르는 물을 마신다. 선철(先哲)도 말씀하시기를 ‘큰 명예 아래서는 오래 거처하기 어렵다’하였다. 나는 평생을 만족할 줄 아는 계책을 실천하였을 뿐 명성과 이익으로 자신에게 누를 끼치지는 않았다. 가령 마음에 염증을 느낀다면 어느 날인들 만족을 느끼겠느냐? 그러므로 동파(東坡)도 언젠가 ‘편안힘을 알면 영화롭고, 만족함을 알면 부자다’ 하였다”
명예를 피하여 절개를 온전히 하고 훌륭하게 시작하여 훌륭하게 마치는 것을 원통스님이 체득했다 하겠다.

절름발이의 생명은 지팡이에 있으니 지팡이를 잃으면 넘어진다. 물을 건너는 사람의 운명은 배에 있으니 배를 잃으면 익사한다. 보편적으로, 산속숲에 사는 사람이 스스로가 지키는 것 없이 외부의 세력을 끼고 이를 소중하게 여기면, 하루 아침에 그가 끼고있던 것을 잃을 때 모두가 넘어지고 익사하는 환란을 면치 못한다.

옛날 백장(百丈)선사께서 총림을 건립하고 청규(淸規)를 만들었다. 이는 상법(像法) · 말법(末法)시대의 바르지 못한 폐단을 구제하고자 하여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법 ·말법시대에 도를 배우는 사람이 법도를 도적질하여 백장의 총림을 파괴할 줄은 몰랐다. 상고(上古)시대에는 스님들이 둥우리나 암혈에 거처한다 하여도 저마다 스스로를 규율했었다. 그러나 백장선사가 총림을 만든 이후로는 높고 널찍한 집에 살면서도 저마다 스스로를 피폐시켰다. 그러므로 ‘편안하고 위험한 것은 덕이며 흥하고 망하는 것은 운수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지로 스스로가 덕(德)을 받들어 행할 만하다면 무엇 때문에 총림이 필요하겠으며 운수를 의지하고 기댈 만하다면 무엇 때문에 법도(法度)를 쓰겠는가?

원통이 대각에게 말하였다.
“옛 성인은 싹이 트기 이전에 마음을 다스렸고, 혼란해지기 이전에 정(情)을 방비하였다. 이는 미리 대비하면 환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중으로 문을 잠그고 목탁을 치면서 도둑에 대비하였다.
일을 미리하면 쉽고 창졸간에 하면 어렵다. 옛날의 현철(賢哲)이 종신의 근심은 있을지언정 하루아침의 근심은 없었던 것은 실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詿
*1 선림보훈집(禪林宝訓集) 이 책은 대혜(大慧)선사와 죽암선사가 강서(江西)지방의 운문사(雲門寺)에서 초암(草庵)을 짓고 살 때 함께 편집한 것이다. 후에 정선(淨善)화상이 이 책을 얻어 보았을 때는 좀이 먹어 앞과 뒤가 완전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정선화상이 10여년동안 전기나 어록 가운데서 오십여편의 글을 모아 재편집하였다.
*2 명교 항주(杭州) 불일사(佛日寺)의 명교계숭(明敎契嵩)선사이니 동산효총(洞山曉聰)의 법을 이었으며 청원(淸源)선사의 17세 법손이다. 일곱살에 출가하고 십삼세에 득도 십구세에 사방으로 유력하며 항상 관음상 족자 한 폭을 이고 다니며 매일같이 성호(聖號)를 십만번 외었다. 세간의 전적을 보지 않음이 없었으며, 원교론(原敎論)을 지어 유교·불교를 하나로 관통하여 설명하니 이로써 한퇴지가 불교를 배척한데 대항하였다. 인종(仁宗)이 이를 보고 찬탄하며 대장경에 편수하라 하고, 이를 보교편(輔敎篇)이라 하다. 그리하고는 자의방포(紫衣方袍)와 명교(明敎)라는 호(號)를 하사하였다.
*3 원통거눌(圓通居訥) 자(字)는 중민(仲敏), 연경자영(延慶子榮)의 법을 이었으며, 청원(淸源)의 10세 법손이다. 사람이 영특하고 뛰어나 눈에만 스치면 외어버렸다 한다. 후에 원통사(圓通寺)에 주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