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운여본 (歸雲如本)스님의 말씀
1
귀운스님이 말하였다.
이 나라 정국공(鄭國公) 부필(富弼)은 투자 수용(投子修顒)선사에게 도를 물었는데 편지와 게송이 14장이나 되었으며, 대(台) 땅 홍복사 두 회랑 벽 사이에 비를 세웠다. 이로써 선배들이 근엄하게 법을 주관했다는 것과 왕공귀인들이 독실하게 도를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직(社稷)의 중신(重臣)이었던 정국공이 만년에 방향을 제대로 찾았던 것은 투자 수옹스님에게 반드시 남다른 데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 자신도 “투자 수옹에게서 자극받은 바가 있었다”고 밝혔다.
사대부 가운데서 불교를 진실하게 믿는 자는 나이도 잊고 세도도 굽힌 채 용맹정진하여 완전하게 깨닫기를 기약하면서 그만두었다.
시랑(侍郞) 양대년(楊大年)과 도위(都尉) 이화문(李和文)의 경우 광혜원 원연(廣慧院 元璉), 석문 온총(石門 蘊聰), 자명(慧明) 등 모든 큰스님들을 뵙고 격렬하게 문답하였던 말들이 여러 선서(禪書)에 잘 나타나 있다.
양무위(楊無爲)의 백운 수단(百雲 守端)스님과 장무진(張無盡)의 도솔 종열(兜率 從悅)스님은 모두가 관문을 통과하고 정곡을 쳐서 근저까지 철저한 깨달음이 있었는데, 예사로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근세에 시랑(待郞) 장무구(張無垢)와 참정(參政) 이한로(李漢老), 학사(學士) 여거인(呂居仁)은 모두가 묘희(妙喜) 노장을 뵙고 점점 진보하여 결국 선의 심오한 경지를 체득했으니 이들을 일러 속세를 초탈한 도반이라 할 만하다.
그들은 애증과 역순의 경계를 번개처럼 뿌리치고 우뢰처럼 쓸어버려 세속의 구차함과 거리낌을 벗어버렸다. 그리하여 보는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공손하게 길을 비켜 드리며, 그 경지를 엿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군자(士君子)들은 한가하고 적막한 강가에서 서로들 구하고 선(禪)의 고요한 경지에 마음을 깃들이고자 하면서 본심만을 캘 뿐이었다.
2
귀운스님이 말하였다.
후세에 선덕(先德)들의 법다운 모범을 바로 보지 못하고, 오로지 아첨하기를 일삼으며 승진하여 이름날릴 것만을 구하고 있다.
주지가 추천한 이름으로 장로가 된 자들은 더러는 명함을 써서 모 문중의 승려 아무개라 자칭하며, 윗사람들을 배경으로 삼고, 사중의 상주물을 빼돌려 뇌물로 바치면서 아첨하기도 한다. 이를 식견있는 자들이 딱하게 여기고 비웃는데도 수치를 모르고 그저 편안할 뿐이다.
아-아, 우리 불제자 사문들은 물병 하나 발우 하나로 구름처럼 새처럼 떠돌아도 얼거나 굶주리는 절박한 상황은 없다. 그런데도 자녀와 옥백(玉帛)을 그리워하여 허리를 굽히고 빗자루질을 하며, 윗사람에게 아첨하고자 설설 기며 몸도 제대로 못 펴니, 욕됨과 천함을 자초하는 상황이다.
은혜의 곳간〔恩府〕이라 칭하는 배경은 자기 한 몸의 욕심에서 나왔으므로 의거할 바가 못된다.
허망하고 용렬한 사람 하나가 그의 앞에서 부르짖으면 백이나 되는 허망하고 용렬한 사람들이 그 뒤에서 화답하며 다투어 그를 받들려고 하니, 실로 비루하고 좀스러울 뿐이다.
교풍(敎風)을 깎아내고 약화시키는 것으로는 아첨하는 사람보다 심한 것은 없다. 실로 간사한 이가 교묘하게 살금살금 속여 들어가면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이라 해도 몸은 불의에 빠지고 덕은 구제할 수 없는 데에 이르게 되니 슬프지 않겠는가. 법을 파괴하는 비구는 마구니의 기운이 모여 있으므로 미친 속임수를 쓰면서도 태연자약하다.
속임수로 선지식의 자태를 나타내고 선림의 큰스님 이름을 대면서 그의 법을 이었다 하며 요직에 있는 귀인에게 아첨하여 그를 자기 문중이라 한다. 또한 불필요한 공경을 펴서 법을 무너뜨리는 단서를 열고, 속인으로서 법상에 올라 이래를 보고 절을 하니, 성인의 법도를 어기고 가문의 도풍을 욕되게 한다. 우리 불법이 이렇게 극한 지경까지 쇠하게 되었으니, 슬프도다.
천만번을 죽어도 속죄되지 않는 경우는 바로 아첨하는 이런 사람이 아니겠는가.
명교계숭 (明敎契崇)스님의 말씀
3
명교스님이 말하였다.
옛날의 고승들은 천자를 배알해도 신하 노릇을 하지않고, 미리 조서(詔書)를 지어 공(公)이니 사(師)니하고 칭하였다.
제(齊)나라 종산(鍾山) 승원(僧遠)스님은 고조(高祖)의 수레가 산문에 이르렀으나 법상에 앉은 채 맞이하지 않았으며1) 호계(虎溪) 혜원(惠遠)2)스님은 천자가 심양(潯場)까지 당도하여 조서를 내렸으나 산문을 나가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당세에서는 그 사람을 대우
하고 그의 덕을 존중하였다. 이 때문에 성인의 도가 진작되었던 것이다.
후세에 고승을 흠모하는 자들은 경대부(卿大夫)와 사귀면서도 낮은 사람 만큼도 예의를 차릴 줄 모르며 제멋대로인 용렬한 사람만도 못하니, 승원스님이 천자를 뵌 것이나 혜원스님이 태연자약했던 것과 비교가 되겠는가.
그러면서도 우리 불도가 흥성하고 납자들이 수행 잘 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 가르침은 보존하려고 하면서 그 적임자를 구하지 않으면 가르침이 존재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생각하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다.
순희(淳熙) 정유(丁西)년에 크신 은혜를 하직하고 평전서산(平田西山)의 조그마한 마을에 붙여 살게 되었는데 매일 가까이서 보고 듣는 일이 교만과 속임수가 많아 옛날의 교풍이 시들어 가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내 이야기가 먹혀들어갈 리도 없으므로 그런대로 써서 자신을 경책할 뿐이다.
원극언잠 (圓極彦岑)스님의 말씀
4
원극스님이 말하였다.
부처님 가신 지가 오랜지라 바른 종지는 얇아져서 경박한 풍조가 팽배한 마당에 선배들은 시들어가고 후학들은 지성이 없어 총림의 법도는 거의 전몰지경에 이르렀다. 비록 구제해 보겠다고 나서는 자가 있다 해도 도리어 문중에서 덜 떨어진 놈이라는 소리나 들을 뿐이다.
지금 소산 여본(疏山如本)선사의 「변영편」(辯侫篇)을 관찰해 보았더니 말과 뜻이 폭 넓고, 매우 절실하고도 분명하여 그 병통을 완전히 바로 잡을 만하였다.
다만 용렬하고 허망한 무리들은 어둡고 짧은 지식으로 삿된 세계에 마음이 도취되어 있으니, 필연적으로 제호(醒醐)를 독약으로 만들 뿐이다.
동산혜공 (東山慧空)스님의 말씀
5
동산혜공(東山慧空)스님이 여재무(余才茂)가 짐꾼〔脚夫〕을 빌려 달라고 보낸 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장하였다.
지난날 외랍하옵게도 돌보아 사랑해 주시는 은혜를 받고 이별한 뒤, 또 이렇게 은혜로운 편지를 받게 되니 더욱 자신의 부끄러움을 느낄 뿐이옵니다. 저는 본래 바윗골 사이에 사는 사람으로서 세상사에는 무심합니다. 이는 재무(才茂)께서도 아시리라 여겨집니다. 지금은 장노가 되어 방장실(方丈室)에 거처하기는 하나 여전히 수좌 혜공일 뿐입니다.
사중 살림은 한결같이 소임자에게 맡겨 버리고 수입지출의 장부도 모두 눈에 스치지를 않습니다. 의발(衣鉢)을 쌓아 두지도 않고 상주물을 사용하지도 않으며, 외부의 초청에 가지 않고 남의 도움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인연따라 잠시 머물 뿐 애초에 다음날의 계획을 세우지도 않습니다.
재무께서는 예로부터 도가 높다는 칭송을 받아왔읍니다. 그러므로 도에서 서로를 잊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편지에서는 짐꾼 몇을 찾으시는데 그것이 상주물에서 나오는지 이 혜공에게서 나오는지를 모르겠읍니다. 저에게서 나온다면 체게 무엇이 있겠으며 상주물에서 나온다면 개인적으로 시용하는 것이 됩니다. 일단 사사로운데 빠지고 나면 도적이 되고 마니 어떻게 승려로서 상주물을 도용할 수 있겠읍니까.
공께서는 관직에 몸 담으셨으니 좋은 일을 구해야지 사중에서 이러한 일을 경영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또한 공께서는 민(閩) 지방사람입니다. 보고 이는 사람들도 모두 민 지방의 장노들입니다. 한번 절에 욕심을 두게 되면 상주물을 다 훔쳐 자기의 소유로 할 것입니다. 혹 이를 사용하여 귀인과 우호를 맺거나 속가에 공급하거나 아는 사람을 대접하고 모신다면 그것이 ‘사중의 스님네들이 쓰는 공용물’〔十方常住 招提增物〕이라는 것을 사뭇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요즈음 뿔을 달고 털을 뒤집어 쓴 채 전생의 빚을 갚는 축생들 중에 이런 사람의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옛날 부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읍니까.
근래에 절집이 잔폐되고 승도가 쓸쓸한 것은 모두가 이들의 허물입니다. 공께서는 우리를 이런 무리 가운데 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공이 결과적으로 신임을 받아 다른 사찰에서 허락했던 것도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으신다면 공의 앞날은 헤아리지도 못할 것입니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어떻게 여기실는지 모르겠군요. 차가운 계절인데 가는 길에 몸조심하소서.
절옹여담 (浙翁如琰) 스님의 말씀
6
절옹스님이 말하였다.
이 글은 실로 염라대왕 대궐 앞에서 사죄받을 수 있는 한통의 비방이다. 요즈음 제방의 스님들이 모르는 것을 어찌하랴. 과연 이 글을 수긍하여 명심할 수 있다면 언젠가 크게 덕을 볼 날이 있으리라. 절옹스님은 매번 이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찬은산(璨隱山)도 또한 말하기를 “상주물인 돈과 곡식은 대중공양을 제외하고는 거의 극약과 같다”고 하였다.
주지나 수입 지출을 맡은 자로서 일단 여기에 빠져들었다 하면 온몸이 썩어 문드러지리니, 이는 율부(律部)에 자세히 실려 있다.
오조(五祖)스님은 돈을 가지고 창고에 가 생강을 사가지고 돌아와서야 약을 달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방장(方丈) 자리에 앉아있는 자들은 대중의 발우에 담길 물건을 깎아서 자기의 속을 멋대로 채울 뿐 아니라, 자기만을 떠받든다 해서 그것이 인심을 들뜨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긴다 또 이보다 심한 경우는 진귀한 것을 팔아 널리 인심을 얻고 큰 사찰로 승진하기를 바라기까지 하니, 뒷날 추상 같은 염라대왕이 계산해 줄 값이 두려울 뿐이다.
1) 제(齊)나라 고조(高祖) 원년에 일이 있어 어가(御駕)가 종산(鍾山)에 당도하였다. 이로 인해 황제가 사문인 승원(僧遠)을 방문하였는데 승원은 법상에 앉은 채 늙고 병들어 영접하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고조가 법상 아래에 나아가 그를 보려 하자, 좌우의 신하들이 방이 비좁아 가마를 탄 채로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왕은 결국 가마를 세워둔 채 정성껏 문안드리고 떠났다.
2) 여산(盧山) 동림사(東林寺)의 호계 혜원(虎溪慧遠)선사 육경 (六經)에 박통하였으며 주역(周易)에 더욱 심오하였다.
일찌기 아우인 혜지(慧持)와 도안(道安)법사의 법석에 나아가「반야경」 설법을 듣고 기쁨으로 찬탄하며 ‘유도(儒道)와 제자백가는 찌꺼기일 뿐이군’ 하고는 드디어 출가하여 대법(大法)을 자기 책임으로 여겼다.
관중(關中) 지방이 전쟁으로 시끄럽자, 스님은 남쪽으로 유람하다가 심양(潯陽)에 이르러 광산(匡山)을 보고는 좋아하게 되었다. 산중에 초막을 짓자 태수(太守) 환윤(桓尹)이 그의 도덕을 존경하여 정사(精舍)를 지었다.
그때 진(晋) 왕실이 쇠잔하자 천하의 기재(奇才)들이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스님은 연사(蓮社)를 맺고 모든 훌륭한 유생들과 사문 천여 사람을 회합하여 정토(淨土)에 왕생하기를 구했다.
동진(東晋) 안제(安帝)의 어가(御駕)가 심양에 이르러 조 서로 혜원에게 한번 나오라 하였다. 스님이 늙고 병들었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자, 황제는 더욱 존경하고 구강태수(九江太守)에게 칙명을 내려 매년 절기마다 필요한 물건을 보내 주라하였다.
30년을 살도록 그림자가 신문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손님 전송을 호계(虎溪)의 다리까지로 한정하였다.「광산집」(匡山集) 30권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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