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22/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3:52
 

 

서장 대 강좌 5- 4 강

 

 

  깨닫고 난 뒤의 나타나는 세 가지 현상을 구체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p. 97

10. 또 이참정이 질문하는 편지

  제가 요즘 가르침의 답장을 받고 깊은 뜻을 두루 다 알겠습니다. 제가 스스로 경험한 것이 셋입니다. 첫째는 일에 있어 좋고 나쁜 것 없이 [逆順] 없이 인연을 따라 곧 대응하되, 어떤 일이든지 간에 가슴속에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설명한 그대로이지요?

둘째는 두터운 묵은 습관을 배척해 보내지 아니해도 저절로 가벼워진다는 것입니다. 좋지 아니한, 예를 들어서 몸에 해롭다는 습관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깨닫고 나니까 불교를 알고 보니까 ‘아 그거 뭐 별로 재미없어.’ 억지로 배척해 보내지 아니해도 저절로 쉽게 가벼워져요. 그냥 잊어버리고요. 친구들 하고 만나서 즐겁게 놀고 떠나면 그 뿐입니다. 그것이 다시 그리워서 어쩌고저쩌고 끈적끈적하게 다시 지속 되거나 그렇게 아니한다 이겁니다. 불교공부 좀 하면 그쯤 되어야지요. 이거는 크게 깨달아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는 옛날에 까마득하던고인의 공안을 때로 다시 엿보아 여기에 스스로 미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사스님들의 대화라든지 아니면 경전의 아주 어려운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을 보니까 그냥 술술술술 무슨 뜻인지 다 그냥 쉽게 재미있는 소설책 읽듯이 다 이해가 되고, 납득이 간다 이겁니다.

앞에 대법이 밝지 않다는 말은 대개 작은 것을 만족하게 여길까 염려하여 마땅히 넓히고 채워 간다는 뜻이지, 어찌 별도로 좋은 견해를 구하겠습니까?

이것은 겸손해서 擴而充之(확이충지) 유교에서 쓰는 말인데 확대시키고 더욱 더 그것을 충족시킨다는 말이 있거든요. 그렇지요. 공부도 자꾸 넓혀가고, 더 채우고 넓히고 채우고 넓히고 채우고 이렇게 해야 됩니다.

현재 흐름을 깨끗이 제거하는 것도 이치가 없지 않으니, 감히 명심하여 가지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현재 흐름이라는 것도 깨달았다고 해서 어떤 현상을 보고, 마음이 안 끌리는 것은 아니지요. 좋은 자리 준다면 한번 生을 내 볼만 하지요. “당신 이번에 대통령 될 만하니까 그 모아뒀던 돈 좀 쓰고 한 번 나와 보십시오.” 하니까 나와 보려고 꿈적대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하하하 될 것 같으니까요. 어느 정도 초탈했다손 치더라도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 명심하라는 겁니다. 좀 공부했다 하더니 그만 벌써 끌려서 삶의 태도가 바뀌어 버렸다 이겁니다.

  앞에서 정말 부처님 같은 경허스님 말씀을 자꾸 해서 죄송스럽지만, 저~기 삼수갑산 가서 非僧非俗(비승비속)으로 그렇게 아이들. 그것도 큰 선비들을 가르친 것도 아니고, 그저 아이들. 학동들 몇 명 모아놓고 하늘 천 따지나 가르치다가 일생을 보냈다는 그런 삶의 태도가 그것이 만공 스님에게는 못 마땅한 겁니다. 만공 스님은 불교를 일으키려고 그 도풍 산에서 열심히 정진하고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고 선을 선양하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선과 어불이요 악과 어호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스승에게 했던 것입니다.

11. 또 이참정에게 답함.

悟後(오후)보림의 문제입니다.깨닫고 나서 그것을 잘 보전해서 가지는 것을 보림 이라고 그래요. 보전해서 가지는 것이 삶의 태도입니다. 오늘 주로 그런 이야기가 많네요. 왜냐하면 깨달은 분하고의 이야기니까요. 그야말로 “성공은 쉬운데 스승은 어렵다.” 이 깨달음에도 그것이 적용이 되네요. “깨닫기는 쉽지만 그 깨달음을 잘 보존해 가지는 것은 어렵다.” 고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서신을 받은 뒤에 더욱 우러러봅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날마다 인연을 따라 놓고 비워 뜻대로 자재합니까? 또 四威儀(사위의). 行(행) 住(주) 坐(좌) 臥(와)지요? 앉고 눕고 서고하는 가운데 塵勞(진로)에 굴복하지 않습니까? 망상입니다. 또 깨고 잠자는 두 변에 一如(일여)합니까?  이것이 참 어려운 문제지요. 잠자거나 깨거나, 잠 잘 때나 꿈을 꿨을 때나 깨달음의 경지. 불교적 삶이 한결 같아야 되는데 이것이 한결 같으냐 이겁니다.

  그전 그대로에서 도망가지 않습니까? 새로운 삶을 자꾸 추구하는 그런 일은 없느냐는 말입니다. 그냥 그대로. 그전 그대로 살았던 대로 사느냐는 말입니다. 또 생사의 마음이 서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다만 凡情(범정)이 없을 뿐이지, 특별히 성스럽다는 알음알이가 없습니다. 이 도리에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但盡凡情(단진범정) 別無聖解(별무성해). 유명한 말입니다. 다만 범부라는 생각이 없을 뿐입니다. 凡俗(범속)한 생각이 없을 뿐. 성스럽다는 알음알이도 없다. 이 말입니다. 범부의 정이 없어졌지, 나는 성인이다. 나는 깨달았다는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 ←이것이 아주 무서운 소리이기도 하고, 또 깨달음의 그 정도를 가름 하는 잣대이기도합니다.

당신은 이미 한번 웃음에 正眼(정안)을 활짝 열어 생멸도 한꺼번에 없어졌습니다. 生滅(생멸). 생하고 멸하고 하는 것이 한꺼번에 없어졌습니다. 힘을 얻고 얻지 못함은,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따뜻한 것을 저절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스스로 알 일이지, 내가 굳이 설명 아니 해도 알 일이라 이겁니다.

그러나 날로 쓰는 사이에 일상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마땅히 부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正性(정성)을 깎아내며, 정성을 깎아내며 ←이것은 음란과 성냄을 이런 식으로 경전의 말을 인용을 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을 아주 근엄하게, 정말 도인답게 모범답게 모범인 답게 잘 해 나가라는 뜻입니다.

그 도와주는 원인을 제거하며 현업을 끊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일 마친 사람의 방편 없는 가운데 참다운 방편이며, 닦아 증득하는 것이 없는 가운데 참으로 닦아 증득하는 것이며, 취하고 버림이 없는 가운데 진실로 취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도통 했으면 마음대로 살아도 되지 않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이것이지요. 천만의 말씀이다 이겁니다. 그럼 그렇게 알뜰히 도 못 통한 사람처럼 그렇게 어렵게 진지하게 그렇게 살 바에야 뭐하려고 도통하느냐? 도 한번 통하면 그냥 발 뻗고 누워 자듯 좀 잘 것이지 ←이런 생각에 떨어질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도를 통했을수록 더욱 더, 불교를 알면 알수록 더욱 더 모범. 더욱 더 근엄한. 더욱 더 탈속하고 더욱 더 간결 소박한 삶을 이어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방편 없는 가운데 참다운 방편입니다. 닦아 증득함이 없는 가운데 참으로 닦아 증득하는 것입니다. 無爲而爲(무위이위) 이위무위. 하되 함이 없고 함이 없이 하는 것. 처음 들으신 분은 알쏭달쏭한 말씀 같지만, 이것이 아주 진짜 말씀입니다. 하되 함이 없고 함이 없이 하는 것.

  어디서 내가 좋은 일을 했으되 했다고 생색내거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했으되 한 것이 없어요. 한 것이 없으되 한 것입니다. 그것이 취하고 버림이 없는 가운데 진실로 취하고 버리는 것이다.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상황 따라서 인연 따라서 당연히 그런 것을 지키고 가야지, 무슨 일확천금해서 지 멋대로 띵까띵까 하면서 사는 것처럼 그런 것이 불교가 아니다 이겁니다. 그런 것이 도가 아니다 이겁니다. 또 사실은 그런 폐단이 많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대혜스님께서 특별히 이 문제에 주의를 주는 것입니다.

고덕이 이르기를 “피부가 다 떨어지더라도 오직 하나의 진실이 있으며, 이것이 제가 아까 말한 “원줄기 하나만 남고 가지가 다 떨어지고 잎이 다 떨어진 정신.” 전단향의 번성한 가지가 다 떨어지더라도 오직 참다운 전단향이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현재 업을 끊고, 돕는 원인을 제거하며 正性(정성)을 깎아 내는 극치입니다. 그러니까 일상생활을 더욱 더 근엄하고 모범스럽게 예의와 도덕을 준수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시험 삼아 생각해 보십시오. 이와 같은 말도 일 마친 사람의 입장에서 한 자루의 겨울 부채와 같습니다.

겨울 부채. 그것이 지금은 필요 없지만, 놔두면 나중에 여름 돌아오면 쓸데가 있거든요. “내가 지금 이런 간곡한 말. 이것이 지금 당신 현재는 필요 없을 꺼야, 그렇지만 언젠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겨울에 지금 부채가 필요합니까? 그렇지만 놔두면 곧 필요한 여름철이 돌아온다는 겁니다.

아마 남쪽 땅은 춥고 더운 것이 일정하지 [恒常] 않아서, 없앨 수 없으므로 한번 웃으리라. ‘한번 웃습니다.’ 보다도 한번 웃으리라. ‘당신이 이런 이야기 잘 알아듣고 한 바탕 웃을 것이오.’ 이렇게 편지의 종지를 지었습니다.

  그 다음. 강급사라는 분에게 답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다음 시간에 하고 질문 있으면...

 

※대답만 정리 했습니다. (황벽불법무다자에 대해서?)

 

  말씀을 잘 이해를 하겠습니다만, 오늘 강의 중에서 답은 나왔으리라고 생각 되는 것이, 제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이고, 결국은 대혜스님 말씀처럼 自證自悟(자증자오). 스스로 증득하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맛보는 것이지 제가 이 자리에서 뭐라고 한들 들으시는 불자 여러분들이 ‘아! 이거구나!’하는 것은 당사자의 일이 아닐까? 그래야 또 옳지 않을까? 무엇이 “無多子(무다자)”라고 이해하는 實體(실체)인가? 이것은 제가 손을 들어서 보였다손 치더라도 이것은 내[我]일이지, 질문하는 분의 것은 아니니까요. 결국은 스스로 해결해야할 문제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설명이 아마 만족하지 못한 설명 같습니다만, 저로서는 이렇게 밖에 이야기할 길이 없습니다.

 

  - 5강 終 -

'서장(書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장대강좌24/무비스님  (0) 2007.11.28
서장대강좌23/무비스님  (0) 2007.11.28
서장대강좌21/무비스님  (0) 2007.10.26
서장대강좌20/무비스님  (0) 2007.10.24
서장대강좌19/무비스님  (0) 2007.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