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23/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4:04
 

 

서장 대 강좌 6- 1 강

 

  아주 반갑습니다. 저는 이 시간이 상당이 기다려집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이 법회가 그냥 법회가 아니라 모두 도에 관심 있고, 또 부처님 법에 관심 있는 우리 한 가족들이 이렇게 만나는 감정을 여러분들이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런 감정과 마음으로 이렇게 만나기 때문에 기다려지고, 한 달에 한 번씩 보면 그렇게 반갑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해관계로 모인 것도 아니고, 또 다른 학연이나 지연 때문에 만난 것도 아니고, 무슨 정당의 모임은 더욱 아니고, 정말 오로지 뜻을 같이하는 만남이기 때문에, 이런 만남이 어디 쉽습니까? 사실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 僧家를 衆中尊(중중존)이라고 그래요. 좀 더 광위적으로 해석하면 승가라면 出家僧(출가승)만이 아니라, 在家(재가) 신도들까지 다 포함해서 승가라고 그러거든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존중해서 따르는 무리. 단체라는 뜻이니까 우리 모두가 승가입니다. 승가는 이 세상에 그 어떤 모임보다도 가장 청정하고 훌륭하고 순수한 모임이라고 해서 모임 가운데 가장 우수한 모임! 衆中尊!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어렵고 각박한 세상일수록 이런 모임이 정말 저~ 깊은 산중에서 길 찾아 헤매다가 만난 아주 시원하고 맑고 푸른 못[淵(연)]을 만난 듯한 느낌입니다. 솔직하게 지금 이 시대에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부정적인 입장으로 보면 얼마나 험하고 힘들고 어렵습니까? 법화경에서 불난 집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들이 사는 정말 추한 모습만 아주 리얼하게 표현한 배경이 화택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거든요. 거기에 보면 서로 물고 뜯고, 싸우고 그저 고함지르는 모습들을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표현한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聖人(성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는 표현이지요.

  이 시대는 사실 더욱 더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가 이러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하고, 이만한 모임은 숨 쉴 구멍이다. 이런 시간이 있어야 그래도 한 번씩 숨을 쉬고 산다는 느낌도 듭니다. 부디 이런 시간이 많이 반복이 되고, 자주 크나 작으나 인연 따라서 모두 소규모라도 모여서 서로 토론하고 의견교환도 하는, 가정 법회 같은 그런 형식이 많이 확산 돼서, 불교가, 특히 선불교가 많이 보급이 돼서 우리가 사는데 조금이라도 숨을 쉬고 살 만한 그런 場(장)을 우리 불자들이 많이 만들어 줬으면 하는 생각도 아울러 함께 해 봅니다.

  절대 이것은 스님들이나 하고, 큰 단체에서나 하는 것이라고 미루지 마시고 그저 둘도 좋고, 셋도 좋고, 한 가족만 모여서 해도 좋고, 친구들 몇이 모여서 해도 좋고, 그렇게 함으로서 불교가 확산이 되고 파급이 되는 것이지요. 부디 그런 용기를 가지고 한번 시도해 보십시오. 의외로 뜻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p.  102.

        12. 강급사 소명에게 답함

  여기에 우리가 아주 생각해야할 내용들이 있는데, 인생의 가치관. 다시 말해서 삶의 가치관을 우리가 어떻게 세우고 살 것인가? 이것을 여기서 언급한 대목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에 살기도 힘들고, 또 공무에 바쁜데 그래도 그것이 다 가 아니다. 아무리 장관을 지내고, 대통령을 지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생 전부가 아니다. 또 다른 정말 가치 있는 삶이 있다. 이러한 생각을 한 분이 강급사 ←이 분입니다. 그래서 대혜스님이 그런데에 대해서 아주 크게 칭찬을 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인생 한 평생, 백년 세월이 그 얼마입니까? 시작이 아주 근사하네요. 당신은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가업을 일으켜 淸要職(청요직)을 두루 다 거쳤으니 淸要職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요직 중에서도 要職. 그런 직책이었던 분입니다.

이는 세간에서 제일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능히 부끄러움을 알아서 마음을 돌려 도를 향하여 출세간의 생사 벗어나는 법을 배우니 또 이 세간에 바른 가장 바른 길을 찾은 사람입니다.

  제가 서두에 말한 것 하고 너무 궁합이 잘 맞아 떨어집니다. 우리가 의식주 문제를 잘 해결하고 사는 것은 아무나 다 합니다. 동물도 합니다. 동물도 보면 사람이 키우는 동물 말고, 지 멋대로 사는 동물들도 자기 의식주 문제는 다 해결합니다. 사실 큰 벼슬하려고 저렇게 시끄럽게 설치지만, 의식주 문제를 좀 더 근사하게 해결하자고 하는 것이지 그 외에 다른 것 없더라고요. 그 높은 자리에서도 그저 검은돈 후려치고, 나중에 들통 나고 문제되고, 전부 그것 아닙니까?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그것이 인생의 끝이라고요. 여기서도 보면 능히 부끄러움을 알아서 마음을 돌려 도를 향해 출세간의 생사 벗어나는 법을 배우니 이 또한 세간에서 가장 바른 길을 찾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의식주 문제는 이러나저러나 그 나름대로 해결이 되고, 여기서 좀 더 다른 차원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라야 그래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주 문제 끝나면... 의식주 문제는 동물도 다 하는 것이라니까요. 나무에 새 집을 지었는데, 제가 새 집을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사람 입장에서 보면 새가 뭐할 줄 알겠습니까? 기껏 날아다니고 모이 쪼고 그러는데... 집을 지어 놓은 것을 보니까 너무 기가 막힌 겁니다. 겉에는 아주 거친 나무로 싸고, 들어갈수록 차츰차츰차츰 부드러운 소재로서, 자기가 알을 낳는 데는 아주 부드러운, 솜 이상의 부드러운 것들을 어디서 물어왔는지 그렇게 해서 알을 낳아서 품고, 그렇게 자신의 의식주 문제와 종족 번식에는 아무 차질 없이 그렇게 할 줄 알더라고요. 날아다니는 새도 그러는데...

  그런데 사람으로 태어나서, 天地之間(천지지간) 萬物之中(만물지중)에 唯人(유인)이 最貴(최귀)라. 하늘과 땅 사이에 만물 가운데에서 오직 사람만이 가장 높다고 하면서, 의식주 문제해결에 그친다면 이것은 사실 좀 미안한 말씀이지만, 별로 의미 없는 인생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모름지기 손발을 급하게 움직이고 얼굴을 차게 하여 아주 맹렬하게 하라는 것이지요. 사람들의 그릇 안배함을 받지 않고 “그릇 안배함”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하려고 하면 숱한 정보가 많이 끼어 들어오니까, 잘못 지시하는 스승을 만날 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本分道理(본분도리)를 이해하여 가는 곳을 분명하게 하면, 문득 이 사람은 세간과 출세간에 하나의 일 마친 대장부가 될 것입니다. “일 마친 대장부” 바로 정말 세상에 진정 가치 있는 일!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것을 성불이라고 하던지, 견성이라고 하던지, 도통하는 일이라고 하던지, 불교공부라고 하던지 간에 결국 궁극적으로 인생문제거든요. 인생문제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추는 것. 그 사람이 “일 마친 대장부다.”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편지를 받아 보니, 연일 가서 李參政(이참정)과 더불어 말한다고 했습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그 분은 달려가서 추구하는 마음을 쉬어 “달려가서 추구하는 마음을 쉬어”그러니까 이것이 우리가 일단은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헤매면서 알려고 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단계가 끝나면 자신의 내면. 이미 가지고 있는 것. 이미 자기 자신이 충분하게 가지고 있는 거기에 눈을 돌려야 됩니다. 여기 이참정을 찬탄하기를 그 분은 달려가 추구하는 마음을 쉬었다그랬습니다. 그리고 말[言語]길이 끊어지고 말로 표현하는 것도 이것은 벌써 “차원을 넘어섰다.” 그 다음에 마음 자취가 사라졌으며 그러니까 사량 분별로 이리저리 꿰어 맞추는 이런 단계도 넘어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그 다음에 네 번째,

  차별되는 다른 길에 고인의 수단을 엿보아 고인의 방편 문자에 구속되지 않았습니다. 이참정을 네 가지로 이렇게 찬탄을 하는데 그 마지막 그야말로 “옛날 佛祖(불조)가 어떤 수단을 썼던지 간에 그것을 다 꿰뚫어 보고, 그들의 高峻(고준)한 가르침에 구속되지 않는다. 여기에도 끄달리지 않는다. 저는 사실 이것은 자신 없습니다. 대혜스님이나 임제스님이나 기타 아주 훌륭한 스님들의 대단한 가르침. 고준한 가르침을 접할 때, 정말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감동을 하거든요. 그것을 “구속되었다.”고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습니다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제가 그를 이와 같이 보고 다시 일찍이 그와 더불어 한 글자도 말하지 않은 것은 더 이상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않는다.”이 겁니다. 그것은 그를 잘못되게 할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말을 해서 오히려 더 잘못될 우려가 있다.”이겁니다. 식물을 키워도 잘 자라고 있는데 물을 더 많이 줘서 난초를 썩게 한다든지, 거름을 많이 줘서 오히려 썩게 한다든지 그럴 수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식물도 그렇거늘 공부하는데 그럴 경우가 사실은 아주 많습니다.

  바로 그가 오는 것을 기다려 스스로 저와 더불어 말하기를 요구하면 그때 바야흐로 비로소 그와 함께 눈썹을 겨루어서 이해를 하겠지만, 이것은

眉毛厮結(미모시결)이라고 척 보고, “눈썹을 겨룬다.”는 소리는 서로 얼굴을 대면해서 거기에서 불꽃이 튀는 法擧揚(법거량)이 있어야 그것이 서로에게 이익이 있는 것이지요. “글로 게송을 지어서 오고가고 하는 것은, 잘못하면 사람을 도리어 버려 놓는다.”는 차원입니다. 선불교의 입장은 우리가 지금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대혜스님의 편지를 되 뇌이면서 어떻게 하더라도 접근하려고 하고는 있습니다만, 사실 선불교의 진정한 맛을 보려면 제대로 안목을 갖춘 禪人(선인)이 사람을 대해서 바로 얼굴을 마주 했을 때, 거기서 그야말로 오고가는 어떤 법거량이 되어야 정말 선불교의 맛을 제대로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는 소리입니다. 바로 나한테 쫓아와서 서로 눈썹을 겨뤄가면서 뭔가 거량이 된다면, 그것은 내가 받아줄 수 있지만 그 외에 글이 오고가고 편지가 오고가고, 이제 그 사람하고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이겁니다. 다만 그렇지 않고는 문득 그만 둘 것입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달려가 구하는 마음을 쉬지 아니하면 비록 눈썹으로 겨루어 이해를 한다고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야~! 이것이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그 차원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차원이 있는데 도를 배우는 사람이 달려가서 구하는 마음을 쉬지 아니하면 아무리 도인 하고 서로 얼굴을 맞대고 법거량을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그런 말입니다.

  불교의 핵심은 특히 선불교의 핵심은, 우리 인간의 내면에 있는 기존의 것. 내면의 것.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듣는 일입니다. 춥고 더움을 느끼는 그 활발발한 살아있는 우리의 진실한 생명체! 그 문제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파악이지 다른 것이 아니거든요. 불교의 핵심은 거기에 있습니다. 특히 선불교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선불교는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데 여기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런 생명체의 이해와 또 그것의 발로. 들어내는 것. 선문답이 오고가고 주먹이 오고 가고 몽둥이가 오고가고 칼과 방이 오고가고 하는 것. 그것이 뭐겠습니까?

  바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우리 생명의 한 표현입니다. 차원이 다르지요. 우리가 불교 교양대학에서 6根 6塵 6識이 어떻고, 3法印이 어떻고, 37助道品(조도품)이 어떻고, 이런 이야기 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르지요. 불교가 발전하고 발전하다가 이제 최첨단, 마지막에 온 것입니다. 선불교라는 것은요. 그럼 결국은 뭐냐? 다른 잡다한 교리. 다 가지와 잎입니다. 다 잘라 버리고 정말 그 근본에 나아가서 이야기가 되어야 도인을 만나서 한 두 마디 듣고 이익이 있는 것이지, 계속 다른 고준한 경전이나 어록에 쫓아다니는 차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야 하는 수 없이 이렇게 어록을 쫓아서 공부하고는 있습니다만, 이것은 한 방편일 뿐이지요. 여기 말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向外馳求(향외치구). 밖을 향해서 계속 쫓아다닌다. ‘밖을 향해서 계속 쫓아다닌다.’ 우리가 하는 수 없이 이렇게 와서 서장 공부를 하지마는, 이것이 궁극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꼭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궁극이 아니고, 정말 궁극은 내 자신에게 이미 있는 것. 기존의 것. 나 내면의 것. ←이것을 주문 외우듯이 그냥 외우세요. 얼른 납득은 안 되더라도 ‘아, 내 내면이 뭔가?’ ‘나에게 이미 있다고 하는 것이 뭔가?’ 그것이 얼른 가슴에 와 닿지 않으면 말이라도 그냥 막 주문 외우듯이 자꾸 외워야 된다니까요. 그래야 내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주문처럼 외우는 겁니다. ‘나에게 이미 있는 것.’  ‘내 내면의 것.’  ‘이것이 진짜다.’  ‘이것이 진짜 불교란다.’  ‘이것이 진짜 참선이란다.’ 이렇게 일단 해 놓는 겁니다. 그래야 이런 서장이나 기타 선 어록이 눈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정히 이것은 어리석고 미쳐서 밖으로 달리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는 수 없이 하지마는, 이것은 어리석고 미쳐서 밖으로 달리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도반의 문제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이것도 우리가 공부하는데 대단히 중요하고, 세상 사는데도 아주 중요한 것이거든요.

p. 103

  고인이 말하기를 “善人(선인)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안개와 이슬 속을 다녀서 비록 옷이 축축하게 푹 젖지는 않지만, 점차 눅눅하게 젖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안개 속을 거닐면 단박에 푹 젖지는 않지요. 그러나 한참 다니다 보면 옷이 눅눅해집니다. 그것이 습기가 많이 스며들었다는 뜻입니다. 近墨者黑(근묵자흑)이라. 먹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검은 물이 튀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도반과 늘 가까이 하세요. 전화도 그 사람과 하고, 차를 한잔 마셔도 그 사람과 마시고, 식사를 한 끼 해도 그 사람과 하고, 그러면 계속 이야기 소재가 늘 그런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젖어드는 겁니다. 자기도 모르게요.

  누가 썼더라? 옛날에 아름다운 여인인가요? 소설... 어떤 여인이 진정 아름다운 여인인가? 그 사람은 결혼을 몇 번 하거든요? 그런데 만나는 남편마다 그 남편의 전공분야에 이 사람이 푹푹 빠져들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전공분야에... 그 전공이 상당히 수준이 있는 것인데도 아주 푹 빠져들어서 그 사람이 예를 들어서 우편 관계의 일을 한다면 우편 관계에 대해서 거의 박사가 되어요. 그리고는 또 미술 관계의 사람을 만나면 그러면 그 사람은 미술 관계의 박사가 되어버려요. 우편 관계의 일은 언제 있었더냐 하는 정도로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다 읽어본 소설이라 아시겠지만, 그와 같이 젖어들 줄 아는 것이 참 중요하거든요.

  “도반이 중요하다. 이참정을 자주 만나라.” 그랬습니다. 여기 우리는 모두 그야말로 좋은 도반들로 이렇게 만났습니다만, 자녀들에게도 이 이야기는 꼭 필요합니다. 그렇잖아요. 이것은 금방 알아들을 수 있고, 실지로 우리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늘 있는 일입니다. 生我者(생아자)는 父母(부모)요. 成我者(성아자)는 朋友(붕우)라고 그랬습니다.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지만 나를 나 되게 하는 사람은 벗이라고 그랬습니다. 도반 잘 만나야 됩니다. 멀쩡한 사람이 친구 잘못 만나서 신세 망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곳곳을 헤매다가 또 좋은 도반 만나서 사람 달라지는 경우들도 많잖아요.

  그래서 대혜스님도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여기 강급사,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그래도 그 당시 상당한 사람인데 왜 이런 어린아이들, 초등학생들에게나 일러 줄만한 그런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늙어 죽는 순간까지도 필요한 생활지침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다만 자주 참정과 대화하기를 지극히 바랍니다. 고인이 내려준 말씀을 가지고 어지럽게 穿鑿(천착) 해서는 안 됩니다. 너무 깊이 파고들지 말라는 겁니다. 

  馬大師(마대사)는 讓和尙(양화상)을 만나 “비유하자면 소가 수레를 끄는데 가지 않으면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소를 때려야 옳은가?” 누구 책 제목 같네요. 제가 이것을 읽고, 여기에 맞춘다고 지난 시간에 제가 책을 드렸는데 어떻게 강의 진도가 조금 늦어져서 타이밍이 조금 안 맞아졌어요. 그 설법을 듣고 바로 돌아갈 곳을 알았습니다. 참 이 만고에 우리 명언이지요. “소를 때려야 옳은가?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이것은요. 도 닦는 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참선하는 데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다 적용이 되는 말이 이 말입니다.

  그 유래는 잘 아시지요? 책 읽어보셨지요? 그 앉아만 있는 사람보고 가서는 교훈을 준다고 기왓장을 쓱쓱 갈아가지고서는... 옛날 사람들이 교육방법이 얼마나 근사 합니까? 좌선만 하는 것이 최고인 줄 아는 겁니다. 앉아 있는 것만 최고인 줄 아는 겁니다. 이런 말이 옛날에 있었는데 아직도 앉아서 버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까요. 그래서 무릎에 관절이 와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앉아만 있으니까 저것이 ‘말로 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좌선하는 앞에 가서는 기왓장을 벅벅 가는 겁니다. 하도 시끄러우니까 “스님 뭐하는 겁니까?” “이걸 갈아서 거울 만들려고 그러지.” “기왓장 갈아서 거울 만드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아니, 앉아서 부처되는 사람은 또 어디 있느냐?” 거기서 척 알아차렸지요. 야! 근사하잖아요? 교육은 그렇게 시킬 줄 알아야 됩니다.

  이 한 마디로 여러 사람들이 설법하기를 우레와 같고 천둥과 같이 하며 구름과 비 같이 하되,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잘못 말하고 말을 따라 분별심을 내는 일이 그 얼마입니까? 그 당시 禪院(선원)의 풍조가 좌선을 위주로 했거든요 좌선을... 앉아서 참선하는 것을 위주로 했습니다. 그래서 전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대혜스님은 앉아서 참선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워서 생활 속에서 하도록, 운전하면서 하고, 사무 보면서 하고, 장사하면서 去來(거래)하면서 하고, 누구하고 싸울 일이 있으면 한바탕 싸워가면서 할 수 있는 공부 방법을 간화선을 택했습니다.

  간화선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는 전부 앉아야만 공부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전부... 여기는 전부 일반 사람들 아닙니까? 특히 공무원들입니다. 거의가 공무원들입니다. 그럼 공무원들이 공무를 보면서 공부되는 방법. 우리 결론부터 이야기합시다. 청소하는 공무원이라고 합시다. 그럼 청소하는 것 하고, 이 참선하고 그것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느냐? 하나가 될 수 있느냐? 그럼 바로 그것이 하나라는 사실을 대혜스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놈. 청소하는 놈. 이것이 두 놈이냐? 그것이 한 사람 아니냐? 이겁니다. 그 이치 깨닫는 것입니다.

그 이치를 깨닫는 것이 결국은 참선이라면, 청소하면서 왜 공부가 안 됩니까? 운전하면서 왜 공부가 안 되냐고요. 요즘 잘 모르는 사람들이 “스님, 화두 들고 운전하면 차사고 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벌써 참선을 잘못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벌써 참선을 잘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어떤 확신이 서야 될 텐데 여기에 앞으로 계속 그런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시시비비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소를 때려야 옳은가?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이 너무나도 확실한 일을... “소를 때려야 옳은가?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고, 초등학생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왜 이리 시시비비가 많았느냐? 너무 좌선 일변도로 나가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래요. 생활 속에 생활하는 그 놈이 바로.......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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