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유가사지론 제 5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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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제 5 권
  
  미륵보살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3) 유심유사 등 3지 ②
  
  다음에 색계(色界)의 초정려지(初靜慮地)에서 생(生)을 받는 여러 천(天)들은, 즉 그 지(地)의 이생희락(離生喜樂)1)을 받고, 제 2정려지(靜慮地)의 여러 천(天)들은 정생희락(定生喜樂)2)을 받고, 제 3정려지(靜慮地)의 여러 천(天)들은 이희묘락(離喜妙樂)3)을 받고, 제 4정려지(靜慮地)의 여러 천(天)들은 사념청정(捨念淸淨)4)의 적정하고 움직이지 않는 락[寂靜無動樂]5)을 받으
  
1) 정(定)을 장애하는 욕계의 불선법(不善法)을 여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초선(初禪)의 희(喜) 락(樂)을 말한다. 이때 희(喜)는 마음[心]을 기쁘게[怡悅] 하는 것이며, 낙(樂)은 몸[身]을 기쁘게[怡悅]하는 것이다.
2) 초선정(初禪定)을 수습함으로써 생겨나는 제 2정려(靜慮)의 희(喜) 락(樂)을 말한다.
3) 제 2정려의 희(喜)는 오히려 과실(過失)이 있음을 보고 이를 여의어서 얻게 되는 묘락(妙樂)을 제 3정려(靜慮)의 묘락(妙樂)이라고 하는 것이다.
4) 제 4정려(靜慮) 이하 3정려(靜慮)의 일체의 움직임[動]을 여의고 마음[心]이 평등(平等)하고 정직(正直)하여 계속적인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사청정(捨淸淨)이라고 하고, 이미 일체의 움직임[動]을 초월하고 마음[心]을 잃지 않으면서도 명료하기 때문에 염청정(念淸淨)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유가론기(瑜伽論記)』 2상(上)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5) 제 4선정(禪定)에서는 그 이하 3정려(靜慮)에 있는 여덟 가지의 추(麤) 염(染) 동법(動法), 즉 심(尋) 사(伺) 고(苦) 락(樂) 우(憂) 희(喜) 입식(入息) 출식(出息)을 여의기 때문에 적정하고 움직이지 않는 락[寂靜無動樂]이라고 한다. 즉 초정려(初靜慮)에서는 우(憂)를 여의고, 제 2정려에서는 심(尋) 사(伺) 고(苦)를 여의고, 제 3정려에서는 희(喜)를 여의며, 제 4정려에서는 락(樂)과 입식(入息)과 출식(出息)을 여의는 것을 말한다. 이미 락(樂)을 여의였는데도 무동(無動)의 락(樂)이라고 하는 것은 심신(心身)이 편안한 것[安適]을 락(樂)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 체(體)가 낙수(樂受)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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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 무색계(無色界)의 여러 천(天)들은 매우 적정한 해탈의 락[極寂靜解脫樂]6)을 받는다.
  또한 여섯 가지의 수승(殊勝), 즉 첫째 형량수승(形量殊勝), 둘째 유연수승(柔軟殊勝), 셋째 연수승(緣殊勝), 넷째 시수승(時殊勝), 다섯째 심수승(心殊勝), 여섯째 소의수승(所依殊勝)에 의해서 고(苦) 낙(樂)의 수승(殊勝)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몸의 크기[身量]가 점차 늘어나고 광대해짐에 따라서 그에 따라서 괴로움[苦]이 계속 수승하게 되며, 의지(依止)7)가 점차 다시 유연(柔軟)해짐에 따라 그에 따라서 괴로움[苦]이 계속 수승해지며, 괴로움[苦]의 연(緣)이 점차 다시 맹성(猛盛)해져서 여러 가지의 차별이 있게 됨에 따라 그에 따라서 괴로움[苦]이 계속해서 수승해지며, 시분(時分)이 점차 끊임없이 멀어짐에 따라 그에 따라서 괴로움[苦]이 계속해서 수승해지며, 내심(內心)의 간택력(簡擇力)이 없는 것이 점점 커짐[增廣]에 따라 그에 따라서 괴로움[苦]이 계속해서 수승해지며, 소의(所依)의 고기(苦器)8)가 커짐에 따라 그에 따라서 괴로움[苦]이 계속해서 수승해진다.
  괴로움[苦]이 수승해지는 것이 위와 같듯이 즐거움[樂]이 수승해지는 뜻도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자세히 설해진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낙(樂)에는 두 가지, 즉 첫째 비성재소생(非聖財所生)9)의 낙(樂)과 둘째 성재소생(聖財所生)10)의 낙(樂)이 있다.
  
6) 무색계(無色界)의 공무변처(空無邊處)는 색상(色想)을 여의고, 식무변처(識無邊處)는 앞의 공상(空想)을 여의고, 무소유처(無所有處)는 식무변(識無邊)의 상(想)을 여의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무소유(無所有)의 상(想)을 여의기 때문에 극적정(極寂靜)이라고 한다. 또한 그에 따른 점차적인 장애를 여의는 것을 해탈의 낙(樂)이라고 한다.
7) 몸을 의미한다.
8) 악업(惡業)을 가리킨다. 악업은 괴로움의 과보[苦報]가 의지하는 처소이기 때문에 고기(苦器)라고 하는 것이다.
9) 비성재(非聖財)란 신성(神聖)하지 않은 바르지 않은 재료(材料)를 말한다.
10) 성재(聖財)란 신성(神聖)한 바른 재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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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성재소생(非聖財所生)의 낙(樂)이란, 즉 네 가지의 자구(資具)로서 첫째 적열자구(適悅資具), 둘째 자장자구(滋長資具), 셋째 청정자구(淸淨資具), 넷째 주지자구(住持資具)를 연(緣)하여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적열자구(適悅資具)란 타는 것[車乘] 의복(衣服) 여러 장엄구(莊嚴具) 가소(歌笑) 무악(舞樂) 도향(塗香) 화만(花鬘) 갖가지 진기한 놀이 기구[樂具] 광명으로 비추고 남자와 여자가 지키는[侍衛] 갖가지 창고[庫藏] 등을 말한다. 자장자구(滋長資具)란 무심사륜석(無尋思輪石)11)으로써 두들기고 밟아주고 안마하는 등의 것을 말한다. 청정자구(淸淨資具)란 길상초(吉祥草) 빈라과(頻羅果) 나패(螺貝) 만옹(滿瓮) 등의 물건을 말한다. 주지자구(住持資具)란 마시고 먹는 것을 말한다.
  성재소생(聖財所生)의 낙(樂)이란 일곱 가지의 성재(聖財)를 연(緣)하여 얻게 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들을 일곱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신(信)이요, 둘째는 계(戒)요, 셋째는 참(慚)이요, 넷째는 괴(愧)요, 다섯째는 문(聞)이요, 여섯째는 사(捨)요, 일곱째는 혜(慧)이다.
  다음에 열 다섯 가지 상(相)에 의해서 성(聖) 비성재소생(非聖財所生)의 낙(樂)이 차별된다.
  어떤 것들을 열 다섯 가지라고 하는가?
  즉 비성재소생(非聖財所生)의 낙(樂)은 능히 악행(惡行)을 일으키지만, 성재소생(聖財所生)의 낙(樂)은 능히 묘행(妙行)12)을 일으킨다. 또한 비성재소생(非聖財所生)의 낙(樂)은 유죄(有罪)의 희(喜) 낙(樂)과 상응하지만, 성재소생(聖財所生)의 낙(樂)은 무죄(無罪)의 희(喜) 낙(樂)과 상응한다. 또한 비성재소생(非聖財所生)의 낙(樂)은 작아서[微少] 소의(所依)13)에 편만(遍滿)하지 않지만, 성재소생(聖財所生)의 낙(樂)은 커서[廣大] 소의(所依)에 편만(遍滿)한다. 또한 비성재소생(非聖財所生)의 낙(樂)은 외연(外緣)에 의지
  
11) 기계적인 바퀴로 돌을 굴려서 그 몸을 두들겨 주고 만져주는 등을 말한다.
12) 바른 행위나 좋은 행동을 의미한다.
13) 신체(身體)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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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기 때문에 항상[一切時] 있는 것이 아니지만, 성재소생(聖財所生)의 낙(樂)은 내연(內緣)에 의지하기 때문에 항상[一切時] 있는 것이다. 또한 비성재소생(非聖財所生)의 낙(樂)은 오직 욕계(欲界)에만 있기 때문에 모든 곳[一切地]에 있지 않지만, 성재소생(聖財所生)의 낙(樂)은 3계계(界繫) 및 불계(不繫)에 통하기 때문에 모든 곳[一切地]에 있다. 또한 비성재소생(非聖財所生)의 낙(樂)은 다음 세상[後世]에 성(聖)과 비성(非聖)의 재물[財]을 끌어당길 [引發] 수 없지만, 성재소생(聖財所生)의 낙(樂)은 능히 다음 세상[後世]에 성(聖)과 비성(非聖)의 재물을 끌어당긴다. 또한 비성재소생(非聖財所生)의 낙(樂)은 수용(受用)할 때에 다하는 것이 있고 끝[邊]이 있지만 성재소생(聖財所生)의 낙(樂)은 수용(受用)하자 마자 다시 충만하고 증대하며 광대해진다. 또한 비성재소생(非聖財所生)의 낙(樂)은 왕(王)이나 도적[賊]이나 원수[怨]나 물이나 불의 다른 것에 의해서 빼앗기지[劫奪]만, 성재소생(聖財所生)의 낙(樂)은 빼앗기는 것이 없다. 또한 비성재소생(非聖財所生)의 낙(樂)은 금세(今世)로부터 지니어 후세(後世)에까지 가져갈 수 있지만, 성재소생(聖財所生)의 낙(樂)은 금세(今世)에는 지녀도 후세(後世)에는 가져갈 수 없다. 또한 비성재소생(非聖財所生)의 낙(樂)은 수용(受用)할 때에만 충족할 수 없지만, 성재소생(聖財所生)의 낙(樂)은 수용(受用)할 때에 끝끝내[究竟] 충만(充滿)한다.
  또한 비성재소생(非聖財所生)의 낙(樂)은 포외(怖畏) 원한의 상대[怨對] 재횡(災橫) 불타는 듯한 괴로움[燒惱]이 있고 후세의 대고(大苦)를 끊을 수 없다. 포외(怖畏)가 있다는 것은 앞으로 생겨날 괴로움[當生苦]을 두려워하는 것의 의지처[所依處]이기 때문이며, 원한 상대[怨對]가 있다는 것은 즉 투송(鬪訟) 위쟁(違諍)의 의지처[所依處]이기 때문이며, 재횡(災橫)이 있다는 것은 노(老) 병(病) 사(死)의 의지처[所依處]이기 때문이며, 불타는 듯한 괴로움[燒惱]이 있다는 것은 즉 이 낙(樂)의 성품이 마치 옴과 나병과 같이 진실하지 않아서 허망전도(虛妄顚倒)의 의지처[所依處]이기 때문이며, 수(愁) 탄(嘆) 우(憂) 고(苦)라는 갖가지 열뇌(熱惱)의 의지처[所依處]이기 때문이다. 후세(後世)의 대고(大苦)를 끊을 수 없다란 탐(貪) 진(瞋) 등의 본(本)과 수(隨)의 2혹(惑)14)의 의지처[所依處]이기 때문이다. 성재소생(聖財
  
14) 본혹(本惑)이란 탐(貪) 진(瞋) 치(癡) 만(慢) 의(疑) 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번뇌(根本煩惱)를 말하며, 수혹(隨惑)이란 분(忿) 한(恨) 뇌(惱) 등의 지말적(枝末的)인 수번뇌(隨煩惱)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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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所生)의 낙(樂)은 포외(怖畏)도 없고 원한의 상대[怨對]도 없으며 재횡(災橫)도 없고 불타는 듯한 괴로움[燒惱]도 없어서 능히 후세(後世)의 대고(大苦)를 끊을 수 있다.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위의 내용과 상위(相違)한 자세한 설(說)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바깥에 욕심이 있는 자[外有欲者]는 욕진(欲塵)15)을 수용하지만, 성혜명자(聖慧命者)16)는 정법(正法)을 수용한다. 다섯 가지 상(相)에 의해서 차별이 있다. 이 인연에 의해서 성혜명자는 무상혜명(無上慧命)을 청정한 자활(自活)이라고 말한다.
  어떤 것들을 다섯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정법(正法)을 수용하는 자는 염오(染汚)가 아니기 때문이며, 둘째는 정법을 수용하는 자는 마지막 끝[極畢竟]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정법을 수용하는 자는 한결같이[一向] 정(定)을 향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정법을 수용하는 자는 혜명자(慧命者)가 아닌 자와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정법을 수용하는 자는 마원(魔怨)17)을 꺽어 조복(調伏)하는 진실(眞實)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여러 가지의 욕심[欲]을 수용하는 자의 모든 욕락(欲樂)은 희처(喜處)를 수순(隨順)하는데 탐애(貪愛)를 따르게 되기 때문이며, 우처(憂處)를 수순(隨順)하는데 진에(瞋恚)를 따르게 되기 때문이며, 사처(捨處)를 수순하는데 간택(簡擇)하는 것이 없는 사(捨)를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성혜명자가 정법을 수용하는 것은 곧 이와 같지 않다.
  또한 여러 가지의 욕심이 있는 자가 욕진(欲塵)18)을 수용할 때에는 알 수
  
15) 5욕의 마음[五欲心]은 부정(不淨)한 진애(塵埃)와 같기 때문에 욕진(欲塵)이라고 한다. 또한 5경(境)은 이 욕진의 마음[心]에 연(緣)하게 되므로 욕진이라고 한다.
16) 성혜(聖慧)를 생명으로 하는 자를 말한다.
17) 악마를 의미한다. 악마는 사람들에게 원수가 되는 원적(怨敵)이므로, 마원(魔怨)이라고 불린다.
18) 탐욕(貪欲)이 몸을 더럽히는 것을 티끌에 빗대어서 욕진(欲塵)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번뇌(煩惱)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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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는[不可知] 본제(本際)19)이래로 항상 하지 않기[無常] 때문에 다른 욕진을 버리고 다른 욕진을 얻으며 혹 어떤 때[一時]는 전혀 얻는 것이 없지만, 성혜명자가 정법을 수용하는 것은 곧 이와 같지 않다.
  또한 욕심[欲]을 수용하는 자가 욕심을 수용할 때에는 곧 이러한 대상[事]에서 어떤 경우는 희애(喜愛)를 일으키고 어떤 경우는 우에(憂恚)를 일으키며 다시 곧 저것에 대해서 어떤 때에는 희(喜)를 일으키고 어떤 때에는 우(憂)를 일으키지만, 성혜명자가 정법을 수용하는 것은 곧 이와 같지 않다.
  또한 여러 욕을 떠난[離欲] 외혜명자(外慧命者)20)는 갖가지 견취(見趣)와 스스로 분별하여 일으키는 삿된 승해처[邪勝解處]에 대해서 그 마음이 맹리(猛利)하게 갖가지로 집착[取著]하고 항상 욕염(欲染)21) 때문에 따라 다니면서도 자신은 욕심[欲]을 여의었다고 하나 다시 도로 물러난다. 성혜명자(聖慧命者)가 정법(正法)을 수용하는 것은 이와 같지 않다.
  또한 욕심[欲]을 수용하는 자 및 여러 세간(世間)의 이미 욕을 여읜 자[已離欲者]의 모든 욕락(欲樂)22)과 욕락을 여읜 것은 모두 진실이 아니고 모두 마원(魔怨)이 따라다니는 것이라서 환(幻)과 같고, 메아리와 같고, 그림자와 같고, 불꽃과 같고, 꿈에서 본 것과 같고, 환(幻)으로 만든 여러 장식구와 같다.
  또한 즐거움[樂]을 집착하는 어리석은 범부[愚夫]로서 욕심을 수용하는 자와 여러 세간의 욕심을 이미 여읜 자가 무릇 수용하는 것은, 마치 미치광이와 같고 취해서 비틀거리는 것 등과 같다. 아직 마군(魔軍)을 제압하지 못하고서 수용하는 것이므로 저 즐거움은 진실(眞實)이 아닌 것이며, 또한 모든 마사(魔事)23)를 제압할 수 없는 것이다. 성혜명자가 정법을 수용하는 것은 이와 같지 않다.
  
19) 무시시(無始時)를 의미한다.
20) 삿된 외도(外道)를 하는 혜명자(慧命者)를 외혜명자(外慧命者)라고 말한다.
21) 욕망(欲望)으로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 또는 탐욕(貪欲)의 번뇌를 욕염(欲染)이라고 한다.
22) 욕구(欲求)하고 원(願)하고 희망(希望)하는 것을 의미한다.
23) 마구니의 소행(所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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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에 삼계유정(三界有情)의 소의신(所依身)은 어떻게 관(觀)해야 하는가?
  추중(麤重)이 따르는 것이므로 지독한 열(熱)이 나는 종기[癰]와 같다고 관해야 한다.
  이 몸에서 낙수(樂受)가 생기자마자 어떻게 관(觀)해야 하는가?
  지독한 열이 나는 종기[癰]가 잠시 냉촉(冷觸)을 만나는 것과 같다고 관해야 한다.
  이 몸에서 고수(苦受)가 생기자마자 어떻게 관(觀)해야 하는가?
  지독한 열이 나는 종기[癰]가 뜨거운 재[熱灰]에 접촉[觸]되는 것과 같이 관해야 한다.
  이 몸에서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가 생기자마자 어떻게 관(觀)해야 하는가?
  자성(自性)의 지독한 열(熱)이 본래부터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에 지독한 열이 나는 종기[癰]가 냉촉(冷觸) 등의 접촉[觸]을 여의는 것과 같이 관해야 한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낙수(樂受)는 괴고(壞苦)이기 때문에 괴로움[苦]이며, 고수(苦受)는 고고(苦苦)이기 때문에 괴로움[苦]이며,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는 행고(行苦)이기 때문에 괴로움[苦]인 줄 알아야만 한다'고 설하셨다.
  또한 '애미24)가 있는 희[有愛味喜]가 있고, 애미를 여읜 희[離愛味喜]가 있으며, 애미를 뛰어나게 여읜 희[勝離愛味喜]가 있다'25)고 설하셨으니, 이와 같은 등의 종류는 경(經)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이 2계(界)의 소속[攝]에 떨어짐26)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24) 애미(愛味)란 집착하여 탐(貪)하는 것을 의미한다.
25) 둔륜(遁倫)의 『유가론기(瑜伽論記)』 제 2권에서는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초정려(初靜慮) 제 2정려(靜慮)에 있는 희(喜)가 탐(貪)과 상응하는 것을 애미가 있는 희[有愛味喜]라고 하며, 이욕(離欲)하는 것을 애미를 여읜 희[離愛味喜]라고 하고, 무루(無漏)의 희(喜)를 애미를 뛰어나게 여읜 희[勝離愛味喜]라고 풀이한다.
26) 애미가 있는 희[有愛味喜]와 애미를 여읜 희[離愛味喜]는 색계(色界)에 포함되고, 애미를 뛰어나게 여읜 희[勝離愛味喜]는 계(界)를 떠난 단계(斷界)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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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상수멸(想受滅)의 낙(樂)을 건립하여 즐거움[樂] 가운데의 제일(第一)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낙(樂)에 머무름27)에 의지하며 낙(樂)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세 가지 낙(樂), 즉 탐을 여읨[離貪] 진을 여읨[離瞋] 치를 여읨[離癡]이 있다는 것을 설하셨다. 이 세 가지 낙(樂)은 오직 무루계(無漏界)에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낙(樂)을 상락(常樂)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무루계(無漏界)에 소속[攝]된다.
  다음에 음식수용(飮食受用)이란 3계(界)의 장차 태어나게 될 것[將生]과 이미 태어난 [已生] 유정의 수명(壽命)을 안주(安住)하게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 촉(觸) 의사(意思) 식(識)의 세 가지 식(識)에 의하여 일체의 3계(界)의 유정의 수명(壽命)을 안주하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단식(段食)의 한 가지만이 욕계(欲界)의 유정으로 하여금 수명을 안주하게 한다. 다시 나락가(那落迦)에서 생(生)을 받는 유정에게는 미세한 단식(段食)이 있으니, 즉 부장(腑藏)28)속에 미세하게 움직이는 바람이 있어서 이 인연(因緣)에 의하여 그들은 오래도록 머무르게 된다. 아귀(餓鬼) 방생(傍生) 인(人)에게는 조각내어 이를 씹어 먹는 거친 단식(段食)이 있다. 다시 미세식(微細食)이 있으니, 즉 갈라람(羯羅藍) 등의 위(位)에 머무르는 유정 및 욕계(欲界)의 여러 천(天)들29)은 이것을 먹기 때문에 모든 단식(段食)은 일체의 몸의 부분과 뼈 마디마디에 유입(流入)하는데, 보통 곧 소화(消化)하여 변예(便穢)30)가 없다.
  다음에 음욕수용( 欲受用)이란 나락가(那落迦)의 모든 유정들에게는 다 음행하는 일[
  事]이 없다. 왜냐 하면 그 유정들은 오랫동안 끊임없이 갖가지 극도로 맹리한 고통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이 인연으로 인(因)하여 그 유
  
  
27) 상수멸(想受滅)의 낙(樂)이란 멸진정(滅盡定)의 상태이며, 정(定) 가운데에 부동(不動)의 낙(樂)에 머무른다고 하는 것이므로 낙수(樂受)를 받는 것은 아니다.
28) 오장육부(五臟六腑)를 의미한다.
29) 6욕천(欲天)을 가리킨다.
30) 소화되어 나오는 똥과 오줌 등의 찌꺼기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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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들은 남자일 경우는 여자에 대하여 여인에 대한 욕구[女欲]를 일으키지 않으며 여자일 경우는 남자에 대하여 남자에 대한 욕구[男欲]를 일으키지 않는데, 어찌 하물며 남녀가 엎치락뒤치락하며 둘씩 교회(交會)하겠는가?
  아귀[鬼] 방생(傍生) 인(人)의 모든 의신(依身)31)은 고(苦) 낙(樂)이 서로 섞이기 때문에 음욕( 欲)이 있으며 남녀가 엎치락뒤치락하며 둘씩 교회(交會)하여 깨끗하지 못한 것[不淨]을 유출(流出)한다.
  욕계(欲界)의 여러 천(天)들은 음욕( 欲)을 행할지라도 이러한 깨끗하지 못한 것[不淨]은 없으나 근문(根門)에서 바람의 기운[風氣]이 나와야만 번뇌(煩惱)가 곧 그치게 된다. 4천왕중천(天王衆天)은 둘씩 교회(交會)하고 열뇌(熱惱)32)가 드디어 그치게 되며, 4천왕중천(天王衆天)과 같이 삼십삼천(三十三天) 또한 그러하다. 시분천(時分天)은 서로서로 포옹만 해도 열뇌(熱惱)가 곧바로 그치게 되며, 지족천(知足天)은 손을 서로 잡기만 해도 열뇌(熱惱)가 곧바로 식으며, 락화천(樂化天)은 서로 쳐다보며 웃기만 해도 열뇌(熱惱)가 곧바로 식으며,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은 눈만 서로 바라보아도 열뇌(熱惱)가 곧바로 식는다.
  또한 3주(洲)33)의 사람은 처첩(妻妾)을 섭수(攝受)하고 가취(嫁娶)34)를 시설(施設)하지만, 북구로주(北拘盧洲)에는 아소(我所)가 없어서 섭수할 곳이 없기 때문에 일체의 유정은 처첩(妻妾)을 섭수하는 일이 없고 또한 가취하는 일도 없다. 3주(洲)의 사람이 위와 같듯이 대력귀(大力鬼)35) 및 욕계(欲界)의 여러 천(天)들도 그러한데, 락화천(樂化天)과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은 제외된다.
  또한 일체의 욕계의 천들[天衆]은 여자의 태장(胎藏)36)에 처(處)하는 일이 없으나, 4대왕중천(大王衆天)은 부모의 어깨 위나 혹은 품속에서 5세의 소아
  
31) 심(心)과 심소(心所)의 기댈 곳이 되는 몸, 즉 육신(肉身)을 의미한다.
32) 음욕( 欲)이 일어나서 번뇌가 끓어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33) 동비제하(東毘提訶) 서구타니(西瞿陀尼) 남섬부주(南贍部洲)의 3주(洲)를 가리킨다.
34)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35) 빼어난 능력이 있는 아귀(餓鬼)를 말한다.
36) 여자의 자궁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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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小兒)와 같은 (크기로) 홀연히[欻然] 화출(化出)37)하며, 삼십삼천(三十三天)은 6세와 같은 (크기로), 시분천(時分天)은 7세와 같은 (크기로), 지족천(知足天)은 8세와 같은 (크기로), 락화천(樂化天)은 9세와 같은 (크기로),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은 10세와 같은 (크기로 화출(化出)한다).
  다음에38) 생(生)의 건립(建立)이란 세 가지 욕생(欲生)39)을 말한다.
  혹 어떤 중생(衆生)은 현재[現]의 욕진(欲塵)에 머무르니, 이것은 현재의 욕진(欲塵)에 머무름에 의하여 부귀(富貴)가 자재(自在)하다.
  그것은 다시 무엇을 말하는가?
  일체의 인(人) 및 4대왕중천(大王衆天)에서 지족천(知足天)에 이르기까지를 말한다. 이를 제 1의 욕생(欲生)이라고 한다.
  혹 어떤 중생은 욕진(欲塵)을 변화시키니, 이것은 욕진(欲塵)을 변화시킴에 의하여 부귀(富貴)가 자재(自在)하다.
  그것은 다시 무엇을 말하는가?
  락화천(樂化天)을 말하는데, 그 천들은 자기(自己)를 위하여 욕진(欲塵)을 변화시키며 남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자기의 욕진(欲塵)만을 변화시킴으로써 부귀(富貴)가 자재(自在)하다. 이를 제 2의 욕생(欲生)이라고 한다.
  혹 어떤 중생은 남의 욕진(欲塵)을 변화시키고 남의 변화된 여러 욕진(欲塵)에 의하여 부귀(富貴)가 자재(自在)하다.
  그것은 다시 무엇을 말하는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을 말하는데, 그 천들은 자기의 인연(因緣)을 위해서도 능히 변화시키며 남의 인연(因緣)을 위해서도 능히 변화시키기 때문에 자신의 변화를 기이[希奇]하게 여기지 않으며 남을 변화시키는 욕진(欲塵) 때문에 부귀(富貴)가 자재(自在)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천(天)을 타화자
  
37) 화생(化生)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38) 이하는 8가지 상(相)에 의해서 계(界)를 시설하여 건립하는 가운데 여섯 번째로 생(生)에 대해서 건립한다.
39) 현수욕진생(現受欲塵生) 자변욕진생(自變欲塵生) 타화욕진생(他化欲塵生)을 말하한다. 욕생(欲生)이란 욕진(欲塵)의 경(境)을 수용하기 위하여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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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他化自在)라고 하는 것이다. 그 천들은 오직 남을 변화시키는 욕진(欲塵)을 수용할 뿐만이 아니라 또한 자신을 변화시키는 욕진(欲塵)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를 제 3의 욕생(欲生)이라고 한다.
  다시 세 가지 락생(樂生)40)이 있다.
  혹 어떤 중생은 이생희락(離生喜樂)41)으로써 그 몸을 씻으니, 초정려지(初靜慮地)의 여러 천들을 말하며, 이를 제 1의 락생(樂生)이라고 한다.
  혹 어떤 중생은 정생희락(定生喜樂)42)에 의하여 그 몸을 씻으니, 제 2정려지(靜慮地)의 여러 천들을 말하며, 이를 제 2의 락생(樂生)이라고 한다.
  혹 어떤 중생은 이희락(離喜樂)43)으로써 그 몸을 씻으니, 제 3정려지(靜慮地)의 여러 천들을 말하며, 이를 제 3의 락생(樂生)이라고 한다.
   무슨 까닭에 세 가지 욕생(欲生)과 세 가지 락생(樂生)을 건립(建立)하는가?
   세 가지 구(求), 즉 첫째 욕구(欲求)44), 둘째 유구(有求)45), 셋째 범행구(梵行求)46)에 의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문(沙門)들과 바라문(婆羅門)들 중에 욕구(欲求)에 떨어지는 자일 경우는 일체가 다 세 가지의 욕생(欲生)이 되며 다시는 더 이상의 늘어남[增過]이 없다. 사문들과 바라문들 중에 유구(有求)에 떨어지는 경우는 대체로 낙(樂)을 구하고 낙(樂)을 탐(貪)하기 때문에 일체가 다 세 가지 락생(樂生)이 되며, 세간(世間) 중에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적정(寂靜)한 생처(生處)47)를 위하여 추구(追求)하는 자는 매우 적기 때문에 이 이상에서는 생(生)이라고 세우지 않는다.
  
40) 낙(樂)을 수용(受用)하기 위하여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41) 욕망과 악(惡)을 떠난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희(喜) 낙(樂)을 의미한다.
42) 정(定)에 머물러서 발생하는 희(喜) 낙(樂)을 말한다.
43) 제 2정려(靜慮)에 있는 희(喜) 낙(樂)을 여읜 것을 의미한다.
44) 욕계(欲界)에 있는 제 사물(事物)에 대한 욕구(欲求)의 마음을 의미한다.
45) 색(色) 무색계(無色界)에 거주하는 유정(有情)의 색(色) 무색계(無色界)에 대한 욕구(欲求)의 마음을 말한다.
46) 범(梵)은 열반(涅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열반을 추구하는 것을 범행구(梵行求)라고 한다.
47) 제 4정려(靜慮) 이상의 사수(捨受)의 생처(生處)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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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문들 혹은 바라문들 중에 범행구(梵行求)에 떨어지는 자는 일체가 다 무루계(無漏界)를 구하게 되지만, 어떤 경우는 다시 어떤 삿된 범행구(梵行求)에 떨어지는 자가 있다. 즉 부동(不動)48)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구하기 위하여 삿된 분별을 일으키면서도 해탈(解脫)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유상(有上)의 범행구(梵行求)인 줄 알아야만 한다. 무상(無上)의 범행구(梵行求)는 무루계(無漏界)를 구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에49) 자체(自體)의 건립(建立)이란 3계(界)의 모든 중생(衆生)이 네 가지의 자체(自體)50)의 차별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는 스스로를 해치는 것에 의하고 다른 것을 해치는 것에 의하지 않는 자체(自體)51)를 얻는 것이 있다. 즉 유희망념(遊戲妄念)이라고 하는 욕계의 천(天)이 있는데, 그 천중(天衆)들은 어떤 때에는 갖가지 즐거움[戲樂]을 탐착(耽著)하여 오랫동안 상속하여 머무르고, 오랫동안 머무르기 때문에 억념(憶念)52)을 잃고[忘失], 염(念)을 망실하였기 때문에 저 곳에서 사라진다.
  혹은 다시 의분(意憤)이라고 하는 천(天)이 있는데, 그 천중(天衆)들은 어느 때 서로서로 눈을 찌르듯이 서로 노려보다가 서로 노려봄으로써 의분(意憤)이 점차 커가고, 의분(意憤)이 커져가기 때문에 그 곳에서 사라진다.
  어떤 경우는 다른 것을 해치는 것에 의하고 스스로를 해치는 것에 의하지 않는 자체(自體)를 얻는 것이 있다. 즉 갈라람(羯羅藍) 알부담(遏部曇) 폐시(閉尸) 건남(鍵南)의 위(位)나 어미 배속에 처해 있는 모든 중생을 말한다.
  어떤 경우는 스스로를 해치는 것과 다른 것을 해치는 것에 의하는 자체(自體)를 얻는 것이 있다. 이생위(已生位)53)에 처하여 제 근(根)이 원만하고 제
  
48) 제 4정려지(靜慮地)를 가리킨다.
49) 이하는 8가지 상(相)에 의해서 계(界)를 시설하여 건립하는 가운데 일곱 번째로 자체(自體)에 대해서 건립한다.
50) 자체(自體)란 몸을 의미한다.
51) 그 자신(自身)의 몸을 의미한다.
52) 억(憶)은 억지(憶持), 염(念)은 명기불망(明記不忘)의 뜻으로서 억념(憶念)이란 기억하는 것이란 뜻이 된다.
53) 이미 6근(根)이 성숙하여 태어난 단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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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根)이 성숙한 그 중생을 말한다.
  어떤 경우는 스스로를 해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을 해치는 것도 아닌 자체(自體)를 얻는 것이 있다. 색(色) 무색계(無色界)의 제 천(天) 일체의 나락가(那落迦) 나락가와 흡사한 아귀[鬼] 여래(如來)의 사자(使者) 최후신(最後身)에 머무르는 것 자정(慈定) 및 멸정(滅定)과 또는 무쟁정(無諍定)에 머무르는 것 또는 중유(中有)에 처(處)해 있는 이와 같은 등의 종류들이다.
  무엇을54) 인연과(因緣果)의 건립(建立)이라고 하는가?
  간략히 설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상(相)에 의하며, 둘째는 의처(依處)에 의하며, 셋째는 차별(差別)에 의하며, 넷째는 건립(建立)에 의하기 때문이다.
  인(因) 등의 상(相)이란55), 즉 어떤 경우에 이것56)을 먼저[先]57)로 하고 이것을 건립(建立)58)하 고 이것이 화합(和合)하기 때문에 저 법(法)59)이 생기고 혹은 얻고[得] 이루어지고[成] 갖추어지고[辦] 작용하는데[用] 이것을 그것의 인(因)이 된다고 설한다.
   무엇을 먼저로 하여, 무엇을 건립(建立)하며, 무슨 법을 화합하기 때문에 어떤 법(法)이 생기는가?
   자기의 종자[自種子]를 먼저로 하여, 종자의(種子依)를 제외한 그 밖의 유색(有色) 무색(無色)의 의(依) 및 업(業)을 건립(建立)하며, 조반(助伴)과 소연(所緣)을 화합(和合)하기 때문에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서 욕계(欲
  
54) 이하는 8가지 상(相)에 의해서 계(界)를 시설하여 건립하는 가운데 여덟 번째로 인연과(因緣果)에 대해서 건립한다. 이 인연과(因緣果)의 건립은 상(相) 의처(依處) 차별(差別) 건립(建立)의 네 가지로 분별하여 설명된다.
55) 인연과(因緣果)의 건립(建立)을 분별하여 설하는 상(相) 의처(依處) 차별(差別) 건립(建立)의 네 가지 가운데에 첫번째로 인연과(因緣果)의 상(相)에 대하여 밝힌다.
56) 인(因) 연(緣) 과(果) 가운데의 인(因)을 말한다.
57) 선(先)이라고 할 경우는 인(因)을 가리킨다.
58) 건립(建立)이라고 할 경우는 연(緣)을 가리킨다.
59) 과(果)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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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繫) 색계(色繫) 무색계(無色繫) 및 불계(不繫)의 제 법(法)이 생긴다.
   무엇을 먼저로 하여, 무엇을 건립(建立)하며, 무엇을 화합(和合)하기 때문에 어떤 법(法)을 얻는가[得]?
   성문(聲聞) 독각(獨覺) 여래(如來)의 종성(種性)60)을 먼저(先)로 하여, 내분력(內分力)을 건립(建立)하며, 외분력(外分力)을 화합(和合)하기 때문에 번뇌(煩惱)의 계(繫)를 여읜 열반(涅槃)을 증득(證得)하는 것이다.
  내분력(內分力)이란, 즉 여리작의(如理作意)61)와 소욕지족(少欲知足)62) 등의 안[內分]의 선법(善法)과 인간의 몸[人身]을 얻는 것과 성스러운 곳[聖處]에 태어나는[生在] 것과 제 근(根)에 결함이 없는 것과 사업(事業)에 장애가 없는 것과 그 좋은 곳[善處]에서 깊이 청정한 믿음[淨信]을 내는 이와 같은 법(法)을 내분력(內分力)이라고 한다.
  외분력(外分力)이란, 즉 제 불(佛)이 세간[世]에 일어남 묘법(妙法)을 선설(宣說)함 교법(敎法)이 여전히 존재함63) 정법(正法)에 머무르는 자를 수순(隨順)하여 구름[轉] 자비[悲]와 믿음[信]을 갖춘 사람을 시주(施主)로 삼는 이와 같은 등의 법(法)64)을 외분력(外分力)이라고 한다.
   무엇을 먼저[先]로 하여, 무엇을 건립(建立) 하며, 무엇을 화합(和合)하기 때문에 어떤 법(法)을 이루는가[成]?
   알아야 할 대상[所知]을 승해(勝解)하고 애락(愛樂)하는 것을 먼저[先]로 하여, 종(宗) 인(因) 비유(譬喩)65)를 건립(建立)하며, 뭇 선과 상위하지 않는[不相違衆善] 적론자(敵論者)66)와 화합(和合)하기 때문에 세운 의미[義]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60) 무루(無漏)의 종자(種子)를 말한다.
61) 이치에 맞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62) 아무리 작은 것에도 만족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욕심이 적어서 작은 것에도 만족한다는 의미이다.
63) 부처님의 멸도(滅度) 후에도 부처님의 교법(敎法)이 여전히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64) 5덕(德)을 나열한 것이다.
65) 종(宗) 인(因) 비유(譬喩)는 인명학(因明學)의 3단논법(段論法)의 논식(論式)이다.
66) 오류(誤謬)가 없는 입론자(立論者)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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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먼저[先]로 하여, 무엇을 건립(建立)하며, 무엇을 화합(和合)하기 때문에 어떤 법(法)이 갖추어지는가[辦]?
   공교지(工巧智)를 먼저[先]로 하여, 그에 따른 노력을 건립(建立)하며, 공교업처(工巧處)의 여러 가지 자구[衆具]를 화합(和合)하기 때문에 공교업처(工巧業處)를 갖춘다. 또한 애욕[愛]를 먼저로 하여, 음식으로 지탱하는 사람의 의지(依止)를 건립(建立)하며, 네 가지 음식[食]이 화합하기 때문에 생(生)을 받는 유정(有情)의 안주(安住)가 완전히 갖추어지는 것이다.
   무엇을 먼저[先]로 하여, 무엇을 건립(建立)하며, 무엇을 화합(和合)하기 때문에 어떤 법(法)이 작용하는가[用]?
   자기의 종자를 먼저[先]로 하여, 곧 이것67)의 생(生)을 건립하며, 곧 이 생의 연(緣)이 화합하기 때문에 자신의 업[自業]의 제 법(法)의 작용을 가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을 자신의 업의 작용(作用)이라고 하는가?
  눈은 보는 것을 업(業)으로 삼으니, 위와 같이 나머지 근(根) 각각68)의 자신의 업의 작용도 알아야 한다. 또한 땅[地]은 지탱할 수 있고, 물[水]은 흐느적거릴 수 있으며, 불[火]은 태울 수 있으며, 바람[風]은 말릴 수가 있는 이와 같은 종류는 외분(外分)의 자신의 업의 차별임을 알아야 한다.
  인(因) 등이 의지하는 곳[依處]이란69) 첫째는 말[語]70)이며, 둘째는 영수(領受)71)이며, 셋째는 습기(習氣)72)이며, 넷째는 유윤종자(有潤種子)73)이며,
  
67) 자기의 종자[自種子]를 가리킨다.
68)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근(意根)을 말한다.
69) 인연과(因緣果)의 건립(建立)을 분별하여 설하는 상(相) 의처(依處) 차별(差別) 건립(建立)의 네 가지 가운데에 두 번째로 인연과(因緣果)의 의처(依處)에 대하여 밝힌다.
70) 말의 의처(依處)를 말한다. 의(依)란 한자 '어(於)'와 같은 의미를 지니며, 말 등의 15가지 곳[處]에서 수설인(隨說因) 등의 10인(因)을 대상[義]으로 세우기 때문에 의처(依處)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명상(名想)을 일으키게 되는 말[語言]의 곳[處]에서 수설인(隨說因)이 세워지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이 말에 의해서 보고 들은 것에 따라서 여러 가지 대상[義]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71) 영수(領受)의 의처(依處)란 관대(觀待)하는 능수(能受) 소수(所受)의 성품을 말한다. 이때 능수(能受)란 수(受)의 심소(心所)를 말하고, 소수(所受)란 일체법(一切法)을 말한다. 이 곳에서 관대인(觀待因)을 세우는데, 이것을 관대(觀待)하여 여러 가지 현상[事]들을 생기게 하고 머무르게 하고 이루어지게 하고 작용하게 하기 때문이다.
72) 내(內) 외(外)의 종자(種子)와 함께하면서도 아직 성숙하지 않는 단계를 말한다. 곧 이 곳에서 견인인(牽引因)을 세우는데, 멀리 있는 자과(自果)를 끌어당기기[牽引] 때문이다.
73) 내(內) 외(外)의 종자(種子)가 이미 성숙된 단계를 의미한다. 곧 이 곳에 의하여 생기인(生起因)을 세우는데, 생기인(生起因)이 가까운 자과(自果)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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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째는 무간멸(無間滅)74)이며, 여섯째는 경계(境界)75)이며, 일곱째는 근(根)76)이며, 여덟째는 작용(作用)77)이며, 아홉째는 사용(士用)78)이며, 열째는 진실견(眞實見)79)이며, 열 한째는 수순(隨順)80)이며, 열 둘째는 차별공능(差別功能)81)이며, 열 셋째는 화합(和合)82)이며, 열 넷째는 장애(障礙)83)이며, 열 다섯째는 무장애(無障礙)84)의 열 다섯 가지를 말한다.
  
74) 무간멸(無間滅)의 의처(依處)는 심(心) 심소(心所)의 등무간연(等無間緣)을 말한다. 이하의 여섯 가지 의처(依處)에 의하여 섭수인(攝受因)을 세우는 것이다.
75) 경계(境界)의 의처(依處)는 심(心) 심소(心所)의 소연연(所緣緣)을 말한다.
76) 근(根)의 의처(依處)는 심(心) 심소(心所)의 소의(所依)인 6근(根)을 말한다.
77) 작용(作用)의 의처(依處)란 지은 업(業)에 있는 작용[作]의 도구[具]의 작용(作用)을 말한다.
78) 사용(士用)의 의처(依處)란 지은 업(業)에 있는 작자(作者)의 작용을 말한다.
79) 진실견(眞實見)의 의처(依處)란 무루지견(無漏智見)을 자체(自體)로 삼아서 무루법(無漏法)을 돕고 끌고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80) 수순(隨順)의 의처(依處)란 선(善) 염(染) 무기(無記)의 현행(現行)과 종자(種子)의 제 온(蘊)이 같은 부류의 승품(勝品)의 제 온(蘊)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곧 이것에 의하여 인발인(引發因)을 세우는 것이다.
81) 차별공능(差別功能)의 의처(依處)란 유위법(有爲法)의 각각의 자체의 과[自果]를 일으킬 수 있으며, 증득할 수 있는 등의 차별적인 세력(勢力)을 말한다. 곧 이것에 의해서 정리인(定異因)을 세우는데, 각각이 자체의 계(界) 등의 과(果)를 낳고 각각이 자체의 계(界) 등의 과(果)를 얻기 때문이다.
82) 화합(和合)의 의처(依處)란 영수(領受)의 의처(依處)에서 차별공능(差別功能)의 의처(依處)까지를 총칭하는데, 생기고 머무르며 이루어지고 얻는 화합력(化合力)을 말한다. 곧 이것에 의해서 동사인(同事因)을 세우는데, 영수(領受)의 의처(依處) 내지 차별공능(差別功能)의 의처(依處)에 의해서 생기고 머무르며 이루어지고 얻는 동일한 현상[事]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83) 장애(障礙)의 의처(依處)란 생기고 머무르며 이루어지고 얻는 현상[事]을 장애할 수 있는 법을 말한다. 즉 이것에 의해서 상위인(相違因)을 세우는데, 생기고 머무르며 이루어지고 얻는 현상[事]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84) 불장애(不障礙)의 의처(依處)란 생기고 머무르며 이루어지고 얻는 현상[事]를 장애하지 않는 법을 말한다. 이것에 의해서 불상위인(不相違因)을 세우는데, 생기고 머무르며 이루어지고 얻는 현상[事]를 거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의 15인(因)에 대해서는 『성유식론(成唯識論)』 제 8권에서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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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因) 등의 차별이란85) 10인(因)과 4연(緣)과 5과(果)를 말한다. 10인(因)이란 첫째는 수설인(隨說因)86)이며, 둘째는 관대인(觀待因)87)이며, 셋째는 견인인(牽引因)88)이며, 넷째는 생기인(生起因)89)이며, 다섯째는 섭수인(攝受因)90)이며, 여섯째는 인발인(引發因)91)이며, 일곱째는 정리인(定異因)92)이며, 여덟째는 동사인(同事因)93)이며, 아홉째는 상위인(相違因)94)이며, 열째는 불
  
85) 인연과(因緣果)의 건립(建立)을 분별하여 설하는 상(相) 의처(依處) 차별(差別) 건립(建立)의 네 가지 가운데 세번째로 인연과(因緣果)의 차별(差別)에 대하여 밝힌다.
86) 법(法)에 의하여 사상(思想)이 있으며, 사상(思想)이 있기 때문에 명칭[名]이 있으며, 명칭이 있기 때문에 말[語言]을 일으키는데, 이 제 온(蘊)을 드러내어 분별하는 말[語言]을 수설인(隨說因)이라고 한다.
87) 관(觀)이란 마주함[對]을 의미하며, 대(待)란 빌림[藉]을 의미한다. 이 인(因)은 능수(能受)와 소수(所受)에 모두 통하는데, 능수(能受)는 영수(領受)의 수(受)의 심소(心所)를 말하고, 소수(所受)란 영수(領受)의 대상의 경계(境界)를 말한다.
88) 아직 성숙하지 않은 단계에 있는 내(內) 외(外)의 종자(種子)를 말한다. 습기(習氣)의 의처(依處)에 의하여 이를 세우며, 종자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까운 자체의 과(果)는 끌어당기지 못하지만 먼 자체의 과(果)를 끌어당길 수는 있다.
89) 성숙한 단계에 있는 내(內) 외(外)의 종자(種子)를 말한다. 유윤종자(有潤種子)의 의처(依處)에 의해서 세우는데, 종자가 윤택해져서 가까운 자체의 과(果)를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90) 심(心) 심소(心所)의 등무간연(等無間緣)과 심(心) 심소(心所)의 소연연(所緣緣)과 심(心) 심소(心所)의 소의(所依)인 6근(根)과 작업(作業)에 있어서의 작용도구[作具]의 작용(作用)과 종자(種子)를 제외한 그 밖의 현재의 연(緣) 모두를 의미한다.
91) 선(善) 염(染) 무기(無記)의 현행(現行)과 종자의 제 온(蘊)은 동류(同類)의 승품(勝品)의 제 온(蘊)을 수순하는 것인데, 이것은 동류(同類)의 승법(勝法)과 무위법(無爲法)을 이끌기 때문이다.
92) 유위법(有爲法) 각자(各自)의 과(果)를 일으킬 수 있고 증득할 수 있는 차별적인 세력(勢力)을 말하는데, 3계(界) 각자의 과(果)를 낳고 3승(乘) 각자의 과(果)를 얻기 때문이다.
93) 관대인(觀待因)으로부터 정리인(定異因)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말하며, 이러한 인(因)에는 생기고 머무르며 이루어지고 얻는 화합력(化合力)이 있다. 왜냐 하면 관대인(觀待因)으로부터 정리인(定異因)까지는 모두 생기고 머무르며 이루어지고 얻는 동일한 현상[事]을 얻기 때문이다.
94) 생기고 머무르며 이루어지고 얻는 현상[事]를 장애하는 법(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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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위인(不相違因)95)이다.
  4연(緣)이란 첫째는 인연(因緣)이며, 둘째는 등무간연(等無間緣)이며, 셋째는 소연연(所緣緣)이며, 넷째는 증상연(增上緣)이다.
  5과(果)란 첫째는 이숙과(異熟果)96)이며, 둘째는 등류과(等流果)97)이며, 셋째는 이계과(離繫果)98)이며, 넷째는 사용과(士用果)99)이며, 다섯째는 증상과(增上果)100)이다.
  인(因)의 건립(建立)이란101) 말의 인[語因]이 의지하는 곳[依處]에 의하여 수설인(隨說因)을 시설(施設)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욕계계(欲界繫)의 법(法)과 색(色) 무색계(無色繫)의 법(法) 및 불계(不繫)의 법에서 시설하는 명칭을 먼저로 하기 때문에 상(想)이 구르고, 상(想)을 먼저로 하기 때문에 말이 구르며, 말 때문에 보고[見], 듣고[聞], 깨닫고[覺], 아는 것[知]에 따라서 여러 가지 언설(言說)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말이 의지하는 곳에 의하여 수설인(隨說因)을 시설하는 것이다.
  영수인(領受因)의 의지하는 곳에 의하여 관대인(觀待因)을 시설한다. 왜냐 하면 욕계(欲繫)의 즐거음[樂]을 구하고자 하는 유정들은 그것과 이것을
  
95) 생기고 머무르며 이루어지고 얻는 현상[事]를 장애하지 않는 법(法)을 말한다.
96) 유루(有漏)의 선(善) 또는 악(惡)의 업력(業力)에서 부르게 되는 이숙무기(異熟無記)의 과보(果報)를 말한다.
97) 인(因)과 동류(同類)의 과(果)를 말하거나, 앞의 업[先業]과 흡사한 뒤의 과(果)에 따라서 구르는 것[隨轉]을 말한다.
98) 무루도(無漏道)에 의하여 혹(惑) 장(障) 계(繫) 박(縛)을 끊고 얻는 무위법(無爲法)을 말한다.
99) 작자(作者)의 작용도구[作具]를 짐짓 갖추는 사업(事業)을 말한다.
100) 앞의 네 가지 과(果)를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얻는 과(果)를 말한다. 5과(果)에 대해서는 『성유식론(成唯識論)』 제 8권에서 설명하고 있다.
101) 인연과(因緣果)의 건립(建立)을 분별하여 설하는 상(相) 의처(依處) 차별(差別) 건립(建立)의 네 가지 가운데 네번째로 인연과(因緣果)의 건립(建立)에 대하여 밝힌다. 인연과(因緣果)의 건립을 밝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인연과(因緣果)를 의처(依處)에 의하여 건립하는 것이며, 둘째는 인연과(因緣果)의 의미에 대하여 밝히는 것이며, 셋째는 거듭 건립의 인(因)을 밝히는 것이다. 이하는 먼저 의처(依處)에 의하여 10인(因)을 시설(施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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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대(觀待)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욕구(欲具)에 대하여 얻으려 하기도 하고 쌓아 모으기[積集]도 하며 수용(受用)하기도 한다. 색(色) 무색계(無色繫)의 즐거움을 구하고자 하는 유정들은 그것과 이것을 관대(觀待)하여 그 여러 가지 연(緣)에 대하여 얻으려 하기도 하고 수용(受用)하기도 한다. 불계(不繫)의 즐거움을 구하고자 하는 유정들은 그것과 이것을 관대하여 그 여러 가지 연(緣)에 대하여 얻으려 하기도 하고 수용하기도 한다.
  여러 가지 괴로움[苦]을 바라지 않는 유정들은 그것과 이것을 관대하여 거기에서 생기는 연(緣)과 거기에서 끊어지는 연(緣)을 멀리 여의기도 하고 얻으려 하기도 하며 수용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영수(領受)가 의지하는 곳에 의하여 관대인(觀待因)을 시설(施設)하는 것이다.
  습기인(習氣因)이 의지하는 곳에 의하여 견인인(牽引因)을 시설한다. 왜냐 하면 깨끗하고 깨끗하지 않는 업의 훈습(薰習)에 의하여 3계(界)의 제 행(行)102)은 애(愛)와 불애(不愛)의 취(趣)에서 애(愛)와 불애(不愛)의 자체(自體)를 끌어당긴다[牽引]. 또한 이것의 증상력(增上力)으로 인하여 외부 대상[外物]이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 행(行)의 깨끗하고 깨끗하지 않는 업의 습기(習氣)가 의지하는 곳에 의하여 견인인(牽引因)을 시설하는 것이다.
  유윤종자인(有潤種子因)이 의지하는 곳[依處]에 의하여 생기인(生起因)을 시설한다. 왜냐 하면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계(無色界繫)의 법(法)의 각각은 자체의 종자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애(愛)를 능윤(能潤)이라고 하며, 종자를 소윤(所潤)이라고 한다. 이 소윤(所潤)의 종자들에 의하여 먼저 끌여당겨진 각각 다른 자체(自體)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경(經)에서 "업은 생(生)을 받는 데에 인(因)이 되며, 애욕[愛]은 일어나는 데에 인(因)이 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유윤종자(有潤種子)가 의지하는 곳에 의하여 생기인(生起因)을 시설(施設)하는 것이다.
  무간멸인(無間滅因)이 의지하는 곳에 의하여 그리고 경계(境界) 근(
  
102) 3계(界)의 과보(果報)를 받는 복(福) 비복(非福) 부동(不動)의 유루업(有漏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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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根) 작용(作用) 사용(士用) 진실견(眞實見)의 인(因)이 의지하는 곳에 의하여 섭수인(攝受因)을 시설한다. 왜냐 하면 욕계(欲繫)의 제 법(法)은 무간멸(無間滅)에 섭수(攝受)되고, 경계(境界)에 섭수(攝受)되며, 근(根)에 섭수(攝受)되며, 작용(作用)에 섭수(攝受)되며, 사용(士用)에 섭수(攝受)되기 때문에 제 행(行)이 구르기 때문이다. 욕계(欲繫)의 법(法)이 이와 같은 것처럼 색(色) 무색계(無色繫)의 법(法)도 또한 그러하다.
  혹은 진실견(眞實見)에 섭수되기 때문에 그 밖의 불계(不繫)의 법이 구른다. 그러므로 무간멸(無間滅) 경계(境界) 근(根) 작용(作用) 사용(士用) 진실견(眞實見)이 의지하는 곳에 의하여 섭수인(攝受因)을 시설하는 것이다.
  수순인(隨順因)이 의지하는 곳에 의하여 인발인(引發因)을 시설한다. 왜냐 하면 욕계(欲繫)의 선법(善法)은 욕계(欲繫)의 여러 가지 뛰어난 선법(善法)을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욕계(欲繫)의 선법은 색(色) 무색계(無色繫) 및 불계(不繫)의 선법을 이끄는데, 그것에 수순(隨順)하기 때문이다. 욕계(欲繫)의 선법과 같이 그렇게 색계(色繫)의 선법은 색계(色繫)의 여러 가지 뛰어난 선법과 무색계(無色繫)의 선법과 불계(不繫)의 선법을 이끌 수 있다. 색계(色繫)의 선법(善法)과 같이 위와 같이 무색계(無色繫)의 선법(善法)도 무색계(無色繫)의 여러 가지 뛰어난 선법과 불계(不繫)의 선법을 이끌 수 있으며, 무색계(無色繫)의 선법과 같이 이와 같이 불계(不繫)의 선법도 불계(不繫)의 여러 가지 뛰어난 선법을 이끌 수 있으며 그리고 능히 무위(無爲)를 끌어서 작증(作證)하게 한다.
  또한 불선법(不善法)도 여러 가지 뛰어난 불선법(不善法)을 끄는데, 말하자면 욕탐(欲貪)은 진(瞋) 치(癡) 만(慢) 견(見) 의(疑) 몸의 악행[身惡行] 말의 악행[語惡行] 생각의 악행[意惡行]을 끈다. 욕탐(欲貪)이 이와 같듯이 진(瞋) 치(癡) 만(慢) 견(見) 의(疑)도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서 모두 알아야 한다.
  위와 같이 무기법(無記法)도 선(善) 불선(不善) 무기법(無記法)을 이끌며 선(善) 불선(不善) 무기(無記)와 같이 종자(種子)의 아뢰야식(阿賴耶識) 또한 무기법(無記法)으로서 무기(無記)의 뛰어난 법을 이끄는데,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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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 단식(段食)이 생(生)을 받는 유정(有情)을 이끌어서 머무르고 안주(安住)하게 하며 세력을 증장시키는 것과 같다.
  그것에 수순(隨順)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수순(隨順)이 의지하는 곳[依處]에 의해서 인발인(引發因)을 시설하는 것이다.
  차별공능인(差別功能因)이 의지하는 곳에 의해서 정리인(定異因)을 시설한다. 왜냐 하면 욕계(欲繫)의 제 법(法)의 자성(自性)은 공능(功能)에 차별(差別)이 있기 때문에 갖가지 자성(自性)의 공능(功能)을 내기 때문이다. 욕계(欲繫)의 법이 위와 같듯이 색(色) 무색계(無色繫) 및 불계(不繫)의 법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차별공능(差別功能)이 의지하는 곳[依處]에 의해서 정리인(定異因)을 시설하는 것이다.
  화합인(和合因)이 의지하는 곳에 의해서 동사인(同事因)을 시설한다. 왜냐 하면 반드시 자체에서 화합(和合)이 생겨나는 것을 획득해야만 욕계(欲繫)의 법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욕계(欲繫)의 법이 위와 같듯이 색(色) 무색계(無色繫)와 불계(不繫)의 법 또한 그러하다. 화합(和合)이 생겨나는 것이 위와 같듯이 얻고 이루고 갖추고 작용하는 화합(和合)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화합인(和合因)이 의지하는 곳에 의해서 동사인(同事因)을 시설하는 것이다.
  장애인(障礙因)이 의지하는 곳에 의해서 상위인(相違因)을 시설한다. 왜냐 하면 욕계(欲繫)의 법(法)이 생기려고 할 때 장애가 나타나면[現前] 곧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욕계(欲繫)의 법(法)이 위와 같듯이 색(色) 무색계(無色繫) 및 불계(不繫)의 법도 또한 그러하다. 생겨나는 것이 위와 같듯이 얻고 이루고 갖추고 작용하는 것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장애인(障礙因)이 의지하는 곳에 의해서 상위인(相違因)을 시설하는 것이다.
  무장애인(無障礙因)이 의지하는 곳에 의해서 불상위인(不相違因)을 시설한다. 왜냐 하면 욕계(欲繫)의 법이 생기려고 할 때 장애가 나타나지[現前] 않아야만 이때 곧 생기기 때문이다. 욕계(欲繫)의 법이 위와 같듯이 색(色) 무색계(無色繫) 및 불계(不繫)의 법도 또한 그러하다. 생겨나는 것이 위와 같듯이 얻고 이루고 갖추고 작용하는 것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무장애인(無障礙因)이 의지하는 곳에 의해서 불상위인(不相違因)을 시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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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에103) 종자연(種子緣)이 의지하는 곳104)에 의해서 인연(因緣)을 시설하며, 무간멸연(無間滅緣)이 의지하는 곳에 의해서 등무간연(等無間緣)을 시설하며, 경계연(境界緣)이 의지하는 곳에 의해서 소연연(所緣緣)을 시설하며, 그 밖의 연(緣)이 의지하는 곳에 의해서 증상연(增上緣)을 시설한다.
  다음에105) 습기(習氣) 수순(隨順)의 인(因)과 연(緣)이 의지하는 곳에 의해서 이숙과(異熟果) 및 등류과(等流果)를 시설하며, 진실견(眞實見)의 인(因)과 연(緣)이 의지하는 곳에 의해서 이계과(離繫果)를 시설하며, 사용(士用)의 인(因)과 연(緣)이 의지하는 곳에 의해서 사용과(士用果)를 시설하며, 그 밖의 인(因)과 연(緣)이 의지하는 곳에 의해서 증상과(增上果)를 시설한다.
  다음에106) 순익(順益) 의미가 인(因)의 의미이며, 건립(建立)의 의미가 연(緣)의 의미이며, 성취[成辦] 의미가 과(果)의 의미이다.
  또한107) 인(因)을 건립(建立)하는 데에는 첫째 능생인(能生因), 둘째 방편인(方便因), 셋째 구유인(俱有因), 넷째 무간멸인(無間滅因), 다섯째 구원멸인(久遠滅因)의 다섯 가지가 있다. 능생인(能生因)은 생기인(生起因)을 말하고, 방편인(方便因)은 그 밖의 인(因)을 말하고, 눈은 안식(眼識)과 관계하고 위와 같이 귀 등은 그 밖의 식(識)과 관계하듯이 구유인(俱有因)은 섭수인(攝受因)의 일부분이며, 무간멸인(無間滅因)은 생기인(生起因)을 말하며, 구원멸인(久遠滅因)은 견인인(牽引因)을 말한다.
  
103) 인연과(因緣果)의 건립을 밝히는 세 가지 가운데 첫 번째인 인연과(因緣果)의 의처(依處)는 10인(因) 4연(緣) 5과(果)로 나누어 분별되는데, 이하는 4연(緣)을 시설하는 것이다.
104) 『성유식론(成唯識論)』의 제 8권에서는 종자연(種子緣)의 의처(依處)에 대하여 두 가지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105) 인연과(因緣果)의 건립을 밝히는 세 가지 가운데 첫 번째인 인연과(因緣果)의 의처(依處)는 10인(因) 4연(緣) 5과(果)로 나누어 분별되는데, 이하는 5과(果)를 시설하는 것이다.
106) 인연과(因緣果)의 건립을 밝히는 세 가지 가운데에 두 번째인 인연과(因緣果)의 의미를 해석한다.
107) 인연과(因緣果)의 건립을 밝히는 세 가지 중 세 번째로 거듭 건립(建立)의 인(因)을 나타낸다. 이하는 건립의 인(因) 가운데 가까운 것과 먼 것[親疎]에 대하여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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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108) 인(因)을 건립(建立)하는 데에는 첫째 가애인(可愛因), 둘째 불가애인(不可愛因), 셋째 증장인(增長因), 넷째 유전인(流轉因), 다섯째 환멸인(還滅因)의 다섯 가지 상(相)이 있다.
  또한109) 인(因)을 건립(建立)하는데 일곱 가지 상(相)이 있다. 말하자면110) 무상법(無常法)이 인(因)이 되며 상법(常法)은 법(法)의 인(因)이 될 수 없으니, 어떤 경우는 생겨나는 데에 인[生因]이 되고 어떤 경우는 얻는 데에 인[得因]이 되고, 어떤 경우는 성립하는 데에 인[成立因]이 되고, 어떤 경우는 성취하는 데에 인[成辦因]이 되고, 어떤 경우는 작용하는 데에 인[作用因]이 된다.
  또한111) 무상법(無常法)은 무상법(無常法)의 인(因)이 되지만, 다른 성품[性]에게도 인(因)이 되며 뒤의 자성(自性)에게도 인(因)이 되는데 곧 이 찰나(刹那)에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112) 다른 성품에게도 인(因)이 되고 뒤의 자성(自性)에게도 인(因)이 되지만, 이미 생겨나서 아직 멸하지 않은 것[已生未滅]이 비로소 인(因)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아직 생겨나지 않고 이미 멸한 것[未生已滅]은 되지 않는다.
  또한113) 비록 이미 생겨나서 아직 멸하지 않은 것[已生未滅]이 인(因)이 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다른 연(緣)을 얻어야 비로소 인(因)이 되며 얻지 못하면 되지 않는다.
  또한114) 비록 다른 연(緣)을 얻을지라도 달라져야 비로소 인(因)이 될 수 있으며 달라지지 않았을 때는 되지 않는다.
  또한115) 달라지더라도 반드시 공능(功能)과 상응해야만 비로소 인(因)이 될 수 있으며 공능(功能)을 잃고서는 될 수 없다.
  
108) 인연과(因緣果)의 건립을 밝히는 세 가지 중 세 번째인 거듭 건립(建立)의 인(因)을 나타내는 가운데 이하는 염(染)과 정(淨)에 대하여 밝힌다.
109) 인연과(因緣果)의 건립을 밝히는 세 가지 중 세 번째인 거듭 건립(建立)의 인(因)을 나타내는 가운데 이하는 인(因)의 일곱 가지 상(相)에 대하여 밝힌다.
110) 인(因)의 일곱 가지의 상(相) 가운데에 첫 번째 상(相)에 대한 설명이다.
111) 인(因)의 일곱 가지의 상(相) 가운데에 두 번째 상(相)에 대한 설명이다.
112) 인(因)의 일곱 가지의 상(相) 가운데에 세 번째 상(相)에 대한 설명이다.
113) 인(因)의 일곱 가지의 상(相) 가운데에 네 번째 상(相)에 대한 설명이다.
114) 인(因)의 일곱 가지의 상(相) 가운데에 다섯 번째 상(相)에 대한 설명이다.
115) 인(因)의 일곱 가지의 상(相) 가운데에 여섯 번째 상(相)에 대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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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116) 비록 공능(功能)과 상응하더라도 그러나 서로 부르고 서로 따라야만 비로소 인(因)이 될 수 있으며 서로 부르고 서로 따르지 않으면 될 수 없다.
  위와 같은 일곱 가지 상(相)에 의하여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인(因)이 건립됨을 알아야 한다.
  무엇을 상시설건립(相施設建立)이라고 하는가?117)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한다.
  
  체성[體]와 소연(所緣)과 행상(行相)과
  등기(等起)와 차별(差別)과
  결택(決擇)과 유전(流轉)으로
  간략히 상(相)을 말함을 알아야 하네
  體所緣行相  等起與差別
  決擇及流轉  略辯相應知
  
  이 상(相)에 간략히 첫째 체성(體性), 둘째 소연(所緣), 셋째 행상(行相), 넷째 등기(等起), 다섯째 차별(差別), 여섯째 결택(決擇), 일곱째 유전(流轉)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심(尋) 사(伺)의 체성(體性)이란 말하자면 소연(所緣)을 깊이 미루어 헤아리지[推度] 않는 사(思)를 체성(體性)으로 하거나, 깊이 소연(所緣)을 미루어 헤아리는 혜(慧)를 체성(體性)으로 함을 알아야 한다.
  심(尋) 사(伺)의 소연(所緣)이란 말하자면 명신(名身) 구신(句身) 문신(文身)에 의한 의미를 소연(所緣)으로 하는 것이다.
  심(尋) 사(伺)의 행상(行相)이란 말하자면 이 소연(所緣)에 대하여 심구(尋求)하는 행상(行相)이 바로 심(尋)이며, 이 소연(所緣)에 대하여 사찰
  
116) 인(因)의 일곱 가지의 상(相) 가운데에 일곱 번째 상(相)에 대한 설명이다.
117)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 등의 3지(地)를 간략히 5문(門)으로 시설(施說)하여 건립(建立)하는 가운데에 이하는 두 번째의 상(相)을 시설하여 건립[相施說建立]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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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伺察)하는 행상(行相)이 바로 사(伺)이다.
  심(尋) 사(伺)의 등기(等起)란 말하자면 말[語言]을 일으키는 것이다.
  심(尋) 사(伺)의 차별(差別)이란 일곱 가지 차별이 있으니,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유상(有相)과 무상(無相) 내지 불염오(不染汚)를 말한다.
  심(尋) 사(伺)의 결택(決擇)이란 '심사(尋伺)가 분별(分別)인가? 분별(分別)이라면 심사(尋伺)인가?'라고 물으면 '모든 심(尋) 사(伺)는 반드시 분별(分別)이며, 어떤 경우의 분별(分別)은 심(尋) 사(伺)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며, '출세간지[出世智]에 대해서는 모든 3계(界)의 심(心)과 심소(心所)를 제외한 것은 다 분별(分別)이면서 심(尋) 사(伺)는 아니다'고 말하는 것이다.
  심(尋) 사(伺)의 유전(流轉)이란 '나락가(那落迦)의 심(尋) 사(伺)는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접촉하는 것이며, 무엇을 끌어당기는 것이며, 무엇과 상응하며, 무엇을 구하는 것이며, 어떤 업(業)이 구르는 것인가?'라고 하고, 나락가(那落迦)와 같이 방생(傍生) 아귀(餓鬼) 인(人) 욕계천(欲界天) 초정려지천(初靜慮地天)에 있는 심(尋) 사(伺)도 위와 같이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접촉하는 것이며, 무엇을 끌어당기는 것이며, 무엇과 상응하며, 무엇을 구하는 것이며, 어떤 업(業)이 구르는 것인가?'라고 하면, '나락가(那落迦)의 심(尋) 사(伺)는 오직 근심[]만을 행하고, 좋지 않은 경계를 접촉하고, 괴로움을 끌어당기며, 근심[憂]과 상응하며, 항상 괴로움에서 벗어나길 구하며, 괴로워하는 마음[嬈心]의 업(業)이 구른다. 나락가의 심 사가 한결같이 괴로움을 받는 것과 같이 아귀(餓鬼)의 심(尋) 사(伺)도 또한 그러하며, 방생(傍生) 인취(人趣)와 대력아귀(大力餓鬼)에게 있는 심(尋) 사(伺) 대부분이 근심[]을 행하고 일부분만이 기쁨[欣]을 행하며, 대부분이 좋지 않은 경계를 접촉하고 일부분만이 좋은 경계를 접촉하며, 대부분이 괴로움을 끌어당기고 일부분만이 즐거움을 끌어당기며, 대부분이 근심[憂]과 상응하고 일부분만이 기쁨[喜]과 상응하며, 대부분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길 구하며 일부분만이 즐거움을 만나길 구하며, 괴로워하는 마음의 업이 구른다.
  욕계(欲界)의 여러 천(天초)들에게 있는 심(尋) 사(伺)는 대부분이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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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쁨을 행하고 일부분만이 근심[]을 행하며, 대부분이 좋은 경계를 접촉하고 일부분만이 좋지 않은 경계를 접촉하며, 대부분이 즐거움을 끌어당기고 일부분만이 괴로움을 끌어당기며, 대부분이 기쁨과 상응하고 일부분만이 근심[憂]과 상응하며, 대부분이 즐거움을 만나길 구하고 일부분만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길 구하며, 괴로워하는 마음의 업이 구른다.
  초정려지천(初靜慮地天)에 있는 심(尋) 사(伺)는 한결같이 기쁨을 행하고, 한결같이 안[內]의 좋아하는 경계를 접촉하며, 한결같이 즐거움을 끌어당기며, 한결같이 기쁨[喜]과 상응하며, 오직 즐거움을 떠나지 않으려는 것만을 구하며, 괴로워하지 않는 마음의 업(業)이 구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엇을 여리작의(如理作意)의 시설건립(施設建立)이라고 하는가?118)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한다.
  
  의지하는 곳[依處] 및 현상[事]과
  구함[求]과 수용(受用)과 정행(正行)과
  두 가지 보리(菩堤)의 자량(資糧)과
  피안(彼岸)에 이르는 방편(方便)이라네
  依處及與事  求受用正行
  二菩提資糧  到彼岸方便
  건립(建立)하는 데에 간략히 여덟 가지 상(相)에 의함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의지하는 곳[依處]에 의하기 때문이며, 현상[事]에 의하기 때문이며, 구함[求]에 의하기 때문이며, 수용(受用)에 의하기 때문이며, 정행(正行)에 의하기 때문이며, 성문승(聲聞乘)의 자량방편(資糧方便)에 의하기 때문이며, 독각승(獨覺乘)의 자량방편(資糧方便)에 의하기 때문이며, 바라밀다(波羅蜜多)을 끌어당기는 방편[引發方便]에 의하기 때문이다.119)
  
118)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 등의 3지(地)를 간략히 5문(門)으로 시설(施說)하여 건립(建立)하는 가운데에 이하는 세 번째의 여리작의를 시설하여 건립[如理作意施說建立]하는 것이다.
119) 여리작의를 시설하여 건립[如理作意施說建立]하는 가운데에 첫 번째로 여리작의(如理作意)의 심사(尋伺)의 여덟 가지의 상(相)에 대하여 그 차례대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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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리작의(如理作意)와 상응(相應)하는 심사(尋伺)의 의지하는 곳[依處]에는 말하자면 여섯 가지의 의지하는 곳[依處]가 있으니, 첫째는 결정할 때[決定時]이며, 둘째는 멈출 때[止息時]이며, 셋째 작업할 때[作業時]이며, 넷째는 세간의 욕심을 떠날 때[世間離欲時]이며, 다섯째는 출세간의 욕심을 떠날 때[出世離欲時]이며, 여섯째는 유정을 섭익할 때[攝益有情時]120)이다.
  여리작의(如理作意)와 상응하는 심사(尋伺)의 현상[事]에는 여덟 가지의 현상[事]이 있다. 말하자면 첫째는 보시로 이루게 되는 복(福)의 작용(作用)의 현상[事]이며, 둘째는 계율로 이루게 되는 복(福)의 작용(作用)의 현상[事]이며, 셋째는 수행[修]으로 이루게 되는 복(福)의 작용(作用)의 현상[事]121)이며, 넷째는 들음[聞]으로 이루게 되는 현상[事]이며, 다섯째는 사유[思]로 이루게 되는 현상[事]이며, 여섯째는 그 밖의 닦음[修]으로 이루게 되는 현상[事]122)이며, 일곱째는 간택(簡擇)으로 이루게 되는 현상[事]이며, 여덟째는 유정을 품어서 이롭게 함[攝益]으로 이루게 되는 현상[事]이다.
  여리작의(如理作意)와 상응하는 심사(尋伺)의 구함[求]이란 마치 어떤 한 사람이 비법(非法)을 쓰지도 않으면서도 흉험(兇險)하지도 않게 재물(財物)을 추구(追求)하는 것과 같다.
  여리작의(如理作意)와 상응하는 심사(尋伺)의 수용(受用)이란 말하자면 마치 그가123) 재물을 추구하고 나서 물들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고 묶이지도 않고 고민하지도 않고 잡지도 않고 또한 굳세게 붙들지도 않고 깊이 과환(過患)124)을 보고 벗어나길[出離] 완전히 알아서 이를 수용(受用)하는 것과 같다.
  여리작의(如理作意)와 상응하는 심사(尋伺)의 정행(正行)이란 어떤 한 사람이 부모(父母) 사문(沙門) 바라문(婆羅門) 및 가장(家長) 등을 알고 나서 공경하고 공양하고 이롭게 하며 모시고, 금세(今世)와 후세(後世)에서 지은 죄(罪)에 대하여 큰 두려움[大怖畏]를 보고 보시를 행하고 복(福)을지
  
120) 이 때는 불해(不害)의 마음이 일어난다.
121)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4무량(無量)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
122) 4무량(無量)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선(善)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
123) 앞에서 말한 '어떤 한 사람'을 가리킨다.
124) 잘못과 허물을 의미하며, 번뇌와 업을 생기게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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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며 재(齋)를 받고 계를 지키는 것과 같다.
  성문승(聲聞乘)의 자량방편(資糧方便)에 대해서는 성문지(聲聞地)에서 나는 자세히 설하겠다.
  독각승(獨覺乘)의 자량방편(資糧方便)에 대해서는 독각지(獨覺地)에서 나는 자세히 설하겠다.
  바라밀다(波羅蜜多)를 끌어당기는 방편[引發方便]에 대해서는 보살지(菩薩地)에서 나는 자세히 설하겠다.
  다음에125) 시주(施主)에는 네 가지 상(相)이 있다. 첫째는 욕락(欲樂)이 있는 것이며, 둘째는 편당(偏黨)이 없는 것이며, 셋째는 궤핍(匱乏)을 제거하는 것이며, 넷째는 정지(正智)를 갖추는 것이다. 시라(尸羅)를 갖추는 사람에게도 네 가지 상(相)이 있으니, 첫째는 욕락(欲樂)이 있는 것이며, 둘째는 교량(橋梁)126)을 맺는 것이며, 셋째는 드러내어 행하지 않는 것이며, 넷째는 정지(正智)를 갖추는 것이다. 수행[修]을 성취하는 사람에게도 네 가지 상(相)이 있으니, 첫째는 욕해(欲解)가 청정(淸淨)한 것이며, 둘째는 인섭(引攝)127)이 청정한 것이며, 셋째는 승해(勝解)의 정(定)이 청정한 것이며, 넷째는 정지[智]가 청정한 것이다.
  다음에128) 보시를 받는 사람에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배움을 받기 위하여 보시를 받는 것이며, 둘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보시를 받는 것이며, 셋째는 가난하고 모자라서 보시를 받는 것이며, 넷째는 버리기[棄捨] 위하여 보시를 받는 것이며, 다섯째는 떠돌아다니기 위하여 보시를 받는 것이며, 여섯째는 탐착(耽著)하여 보시를 받는 것이다.
  
125) 여리작의를 시설하여 건립[如理作意施說建立]하는 가운데에 두 번째로 여덟 가지 상(相)의 어려운 대상을 해석한다. 이하는 이 가운데에 밖의 세속(世俗)의 보시[施] 지계[戒] 닦음[修]의 세 가지 복업(福業)을 수행하는 사람의 상(相)에 대하여 해석한다.
126) 시라(尸羅)는 생사(生死)를 벗어나는 교량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127) 신통(神通)을 끌어당기는 힘을 의미한다.
128) 여리작의를 시설하여 건립[如理作意施說建立]하는 가운데에 여덟 가지 심사의 상(相)의 어려운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 두 번째로 안의 승의(勝義)의 3혜(慧)를 닦는 사람은 밖의 세속(世俗)의 보시[施] 지계[戒] 닦음[修]의 세 가지 복업(福業)을 수행하는 사람의 보시를 받아야 함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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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여덟 가지 시달림[損惱]이 있다. 첫째는 배고픔으로 시달리는 것이며, 둘째는 목마름으로 시달리는 것이며, 셋째는 거친 음식으로 시달리는 것이며, 넷째는 피곤[疲倦]으로 시달리는 것이며, 다섯째는 추위로 시달리는 것이며, 여섯째는 더위로 시달리는 것이며, 일곱째는 가리고 덮는 것이 없음으로 인하여 시달리는 것이며, 여덟째는 가리고 덮음이 있음으로 인하여 시달리는 것이다.
  다시 여섯 가지 시달림이 있다. 첫째는 태어나면서 함께하는 것[俱生]이며, 둘째는 구하는 것이 결핍하는 것[匱乏]이며, 셋째는 핍박받는 것[逼切]이며, 넷째는 시절(時節)이 달라지는 것이며, 다섯째는 번뇌[漏]가 흐르는 것이며, 여섯째는 사업(事業)을 그만두는 것[休廢]이다.
  다시129) 여섯 가지 섭익(攝益)이 있다. 첫째는 맡아 지님의 섭익[任持攝益]130)이며, 둘째는 줄어듬이 없이 씩씩함의 섭익[勇健無損攝益]131)이며, 셋째는 덮고 지킴의 섭익[覆護攝益]132)이며, 넷째는 도향(塗香)의 섭익(攝益)이며, 다섯째는 의복(衣服)의 섭익(攝益)이며, 여섯째는 함께 머무름의 섭익[共住攝益]133)이다.
  다시 네 가지의 선우(善友)가 아닌 상(相)이 있다. 첫째는 원망하는 마음[怨心]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그것134)의 좋아하지 않는 것[不愛]을 끌어당기는 것이며, 셋째는 그것의 좋아하는 것[所愛]을 막는 것이며, 넷째는 옳지 않은 것을 끌어당기는 것135)이다. 이것과 서로 다른 것이 네 가지 선우(善友)의 상(相)인줄 알아야 한다.
  다시 세 가지의 끌어당기는 것[引攝]이 있다. 첫째는 자생(資生)의 도구[具]를 끌어당기는 것이며, 둘째는 희(喜) 낙(樂)이 있는 것136)을 끌어당기는
  
129) 여리작의를 시설하여 건립[如理作意施說建立]하는 가운데에 심사(尋伺)의 여덟 가지의 상(相)의 어려운 대상을 해석하는 데에 세 번째로 지덕(智德)과 은덕(恩德)을 해석한다.
130) 4식신(食身)을 맡아 지니는[任持] 것이다.
131) 4대(大)가 조화로우면서 위세(威勢)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132) 도반[徒衆]을 보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133) 함께 머무르는 도반(道伴)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134) 원망하는 마음[怨心]을 가리킨다.
135) 독약(毒藥) 등을 주는 것 등을 말한다.
136) 희(喜) 낙(樂)이 있는 색계(色界)의 초정려(初靜慮) 제 2정려(靜慮) 제 3정려(靜慮)의 세 가지 정(定)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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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며, 셋째는 희(喜) 낙(樂)을 떠나는 것137)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다시 네 가지의 따라다니며 공양하고 섬기는 것[隨轉供事]이 있다. 첫째는 옛날부터 알지 않던 사람을 따라다니며 공양하고 섬기는 것이며, 둘째는 여러 친한 벗들을 따라다니며 공양하고 섬기는 것이며, 셋째는 존중받는 사람을 따라다니며 공양하고 섬기는 것이며, 넷째는 복(福)과 혜(慧)를 갖춘 사람을 따라다니며 공양하고 섬기는 것이다.
  이 네 가지의 따라다니며 공양하고 섬기는 것이 의지하는 4처(處)에 의하여 5과(果)를 획득함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4처(處)인가?
  첫째는 섭수(攝受)가 없는 것[處]이며, 둘째는 괴롭힘이 없는 것이며, 셋째는 공양해야 할 것이며, 넷째는 동분(同分)을 따라 다니는 것이다.
  이 4처(處)에 의하여 5과(果)를 받을 수 있으니, 첫째는 큰 재물의 복(福)을 받고, 둘째는 명칭(名稱)을 두루 들으며, 셋째는 번뇌(煩惱)를 여의며, 넷째는 열반(涅槃)을 증득하며, 다섯째는 선취(善趣)에 나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총명한 지혜가 있는 사람은 세 가지의 총명한 지혜의 상(相)이 있다. 첫째는 선(善)을 받아 행하는 것[受行]이며, 둘째는 선(善)을 결정(決定)하는 것이며, 셋째는 선(善)을 견고(堅固)히 하는 것이다.
  또한 세 가지 상(相)이 있다. 첫째는 증상의 계율[增上戒]을 받아 배우는 것[受學]이며, 둘째는 증상의 마음[增上心]을 받아 배우는 것이며, 셋째는 증상의
   지혜[增上慧]를 받아 배우는 것이다.
  
137) 제 4정(定)의 희(喜) 낙(樂)을 여읜 사수(捨受)의 정심(定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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