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유가사지론 제 19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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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제 19 권
  
  
  미륵보살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8) 사소성지 ④
  
  현성(賢聖)은 항상 맨 처음[最]으로 착한 말[善語]을 설하고
  애이면서 애 아닌 것도 아닌 말[愛非不愛語]을 두 번째로 하며
  제이면서 제 아닌 것도 아닌 말[諦非不諦語]을 세 번째로 하며
  법(法)이면서도 법 아니지도 아닌 말[法非非法語]을 네 번째로 하네.
  賢聖常說最善語  愛非不愛語第二
  諦非不諦語第三  法非非法語第四
  
  지금 이 게송에서 '착한 말[善語]'이라고 하는 것은 소위 착한 설명[善說]과 착한 언어[善言]과 착한 이론[善論]이다. 착한 설명[善說]에는 세 가지 상(相)이 있는 줄 알아야만 하리니, 소위 뜻을 기쁘게 하는 것과 염오가 없는 것[無染]과 오직 착함[善]만이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말에 의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경사스럽게 하고 기쁘게 하며, 두 번째 말에 의해서 자기의 시라(尸羅)를 끝내 무너뜨리지 않게 하며, 세 번째 말에 의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불선처(不善處)에서 나와 선처(善處)에 안주하게끔 하나니, 이로 인하여 이익과 안락을 끌어당긴다[引攝]48)
  
48) 인섭(引攝)이란 인도접취(引導接取)의 뜻으로 거두어 들여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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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경우에는 애어(愛語)이면서도 진실한 말[諦]도 아니고 법어[法]도 아닌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미묘(美妙)한 말로써 다른 사람의 진실하지 않은 덕(德)을 칭찬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한 말[諦語]이면서 애어[愛]도 아니고 법어[法]도 아닌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염오심(染汚心)을 가지고 추악(麤惡)한 말로 다른 사람의 진실한 과오(過惡)를 질책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법어(法語)이면서도 애어[愛]도 아니고 진실한 말[諦]도 아닌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칭찬과 꾸짖음을 잘 알고 칭찬할 만한 것과 꾸짖을 만한 것을 알고 나서도 칭찬도 하지 않고 꾸짖지도 않으며 오직 좋은 방편[善方便]으로써 정법(正法)만을 말해 주며 능히 그 사람으로 하여금 불선처(不善處)에서 벗어나 선처(善處)에 안주하게끔 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요점[標]과 풀이[釋]로 모든 착한 말[善語]을 현시하였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믿음[信] 부끄러움[慚] 계율[戒] 보시[施] 법(法)은
  선인(善人)이 칭찬하는 바요
  이것을 천으로 나아가는 도[趣天道]라고 하며
  능히 천세간(天世間)에 갈 수 있네.
  信慚戒施法  善人所稱讚
  是名趣天道  能往天世間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깨달은 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해서 바른 믿음[正信]을 획득하고 집에 있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고 청정한 계[淨戒]를 수지(受持)하고 의복과 음식과 와구(臥具)를 취득하고 곧 만족한 기쁨[喜足]을 일으켜 기물(器物)을 축소해 버리고[減除] 자연(資緣)49)
  
49) 의(衣) 식(食) 주(住)는 불도수행(佛道修行)을 도와주는 외부적인 연(緣)이므로 자연(資緣)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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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검소히 하며 무릇 여법(如法)하게 획득한 이익[利養]은 끝내 사사로이 숨기지 않고 반드시 지인(智人)과 범행(梵行)을 같이 하는 사람과 함께 수용하며, 모든 정법(正法)의 처음과 중간과 나중의 범행(梵行)을 잘 찬양하니, 이른바 계경(契經) 내지 논의(論議)를 모두 잘 수지하고 연구하고 통달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며 그들을 위해서 널리 열어 밝히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그가 이미 이러한 선법(善法)들을 성취한다면 반드시 세 가지의 뛰어난 이로움[勝利]을 얻게 됨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과 진실한 선인(善人)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요, 둘째는 만약 그가 시라(尸羅)와 재물 보시[財施]에서 끌어들인 복덕(福德)의 자량(資糧)과 법시(法施)에서 끌어들인 지혜의 자량(資糧)을 잘 원만히 한다면 곧 해탈을 증득하는 처소[證解脫處]50)와 청정한 여러 천(天)들의 동분(同分) 가운데에 취입(趣入)하게 되는 것이요, 셋째는 만약 그 두 가지의 자량이 아직 원만하지 못한다면 곧바로 그것으로 하여금 속히 원만하게 될 수 있도록 하여 몸이 무너지고 난 이후에는 반드시 선취(善趣)에 태어나고 대부분은 천상(天上)의 락세계(樂世界) 중에 가게 되는 것이다.
  다시 차별(差別)이 있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해서 바른 믿음[正信]을 획득하여 '나쁜 시라(尸羅)는 악취(惡趣)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라고 믿고 '간탐자(慳貪者)는 빈궁(貧窮)의 과보[報]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믿고 이와 같이 믿고 나서는 현법(現法) 중에 악계(惡戒)와 간탐(慳貪)에 깊이 수치스러움을 일으키며, 수치스러워하기 때문에 나쁜 시라(尸羅)를 버리고 청정한 계율[淸淨戒]을 받으며, 간탐을 버리고 무구심(無垢心)으로써 집에 편안히 머물면서 …… 내지 잘 보시를 행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이 인연에 의해서 현법(現法)에서 성현(聖賢)의 칭찬을 받고 몸이 무너진 이후에는 내지 선취(善趣)와 천상(天上)의 락세계(樂世界)에 반드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
  
50) 범천(梵天) 무상천(無想天) 이외의 나머지 천(天)들이 모두 해탈을 증득하는 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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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재가(在家)와 출가(出家)의 두 가지의 정행(正行)과 정행(正行)의 과보가 지니는 뛰어난 이익[勝利]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다문(多聞)은 능히 법(法)을 알 수 있고
  다문(多聞)은 능히 악(惡)을 여의며
  다문(多聞)은 무의(無義)를 버리며
  다문(多聞)은 열반(涅槃)을 얻는다네.
  多聞能知法  多聞能遠惡
  多聞捨無義  多聞得涅槃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선시(先時)에 의하여 바르게 지어야 할 시론(施論)과 계론(戒論)과 생천론(生天論)과 전도 없는 교법(敎法)에 대하여 공경하게 청문하고 듣고 나서는 드디어 그 이치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현법(現法) 중의 갖가지 악행(惡行)과 장차 악취(惡趣)의 괴로움은 무의(無義)의 원인이어서 모든 악행(惡行)은 마땅히 속히 원리해야 할 것이며, 그리고 선취(善趣)에 가고 악취(惡趣)에 태어나는 괴로움의 무의(無義)의 원인을 버려야 한다'고 그는 이와 같은 법의(法義)를 분명히 알아서 법과 수법행(隨法行)으로써 능히 괴로움의 원인[苦因]을 멀리 여의고, 능히 즐거움의 원인[樂因]을 능히 끌어당겨서, 이 인연으로 인해 즐거움을 얻고 괴로움을 버리는 것이다.
  또한 더욱 더[增上] 4성제(聖諦) 등과 상응하는 교법(敎法)에 대해서 공경히 청문하고 청문하고 나서 드디어 그 이치를 능히 아니[了知], 일체의 생사(生死)의 큰 괴로움[大苦]과 적정열반(寂靜涅槃)이다. 그는 이와 같은 법의(法義)를 분명히 알기 때문에, 만약 근(根)이 이미 있고 자량(資糧)이 이미 채워지면 곧 능히 이와 같은 이치[義]를 획득한다. 식(識) 심(心)이 청정해지기 때문에 잠시 법을 듣고 나서, 여러 성제(聖諦)에 대하여 아직 현관(現觀)하지 않는 자는 능히 현관(現觀)에 들어가고 이미 현관(現觀)을 성취한 자는 바로 누진(漏盡)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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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근(根)이 성숙하지 않고 자량(資糧)도 아직 채워지지 않았으면 곧 이와 같은 것에 의해서 여러 악(惡)을 멀리 여의고 증상계(增上戒)에 의지하여 증상심(增上心)을 일으키며, 증상심(增上心)에 의지하여 증상혜(增上慧)를 일으킨다. 이것에 의해서 모든 괴로움[一切苦]의 근본인 번뇌의 무의[煩惱無義]를 버리고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먼저 정법(正法)을 듣고 여리(如理)하게 사유(思惟)하며, 먼저 여리(如理)하게 사유(思惟)하고 법(法)과 수법행(隨法行)을 하며, 법과 수법행을 선인(先因)으로 삼기 때문에 뛰어난 이익의 결과[勝利果]를 얻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지자(智者)는 허공[空]과 같아서 염오(染汚)가 없으며
  움직이지 않음[無動]은 마치 천제(天帝)의 당기[幢]와 같으며
  청량함[淸凉]이 가득 찬 못에 떠다니는 것과 같아서
  진흙[淤泥]의 생사(生死)의 바다를 즐기지 아니하네.
  智者如空無染汚  不動猶如天帝幢
  如泛淸凉盈滿池  不樂淤泥生死海
  
  지금 이 게송에서는 마음이 잘 해탈하고 모든 희론(戲論)을 뛰어넘은 아라한필추(阿羅漢苾芻)는 마치 허공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왜냐 하면 마치 허공은 모든 희론(戲論)을 떠나고 정(淨)과 부정(不淨)에 모두 다 능히 물들지 않는 것처럼, 모든 아라한 또한 그러하여 일체의 세법(世法)에 수순하고[順] 또한 거슬러도 모두 다 물들지 않나니, 소위 이익[利]과 쇠손[衰]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에 이르기까지이다.
  
  또한 여러 유학(有學)들은 욕탐(欲貪)을 여의고 나서 아라한(阿羅漢)을 향하여 4념주(念住)에 잘 그 마음을 머물게 하고, 무상심삼마지(無相心三摩地)를 닦을 때에는 마치 천제(天帝)의 당기[幢]와 같아서, 그 모든 움직임[發動]과 교만[憍擧]와 희론(戲論)과 영위(營爲)와 생원(生願)과 함께 행하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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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든 탐애(貪愛)에 대해서 능히 기울거나 흔들리지[頓動] 않는다.
  또한 여러 유학(有學)들은 욕탐(欲貪)을 여의고 나서 불환과(不還果)를 얻고 더욱 더 해탈[上解脫]에 대해서 마음으로 욕락(欲樂)을 일으키니, 마치 청량(淸凉)한 못[泉池]에 떠다니는 것과 같아서, 애미정(愛味定)51)의 상분(上分)의 제 결(結)이 타오르는 진흙 속에서는 끝내 즐거워하지[欣樂] 않는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즐거워하지[欣樂] 않기 때문에 또한 생사(生死)의 대해(大海)도 즐거워하지[欣樂] 않는 것이다.
  또한 차별(差別)이 있다. 말하자면 아라한(阿羅漢)의 모든 음식과 언설(言說)과 유행(遊行)은 무상주(無相住)에 처하나 유여의(有餘依)의 괴로움이 따르게 되는 것이므로 그 차례대로 3처(處)를 알아야만 한다.
  다시 차별(差別)이 있다. 혜해탈(慧解脫)의 여러 아라한(阿羅漢)과 유학(有學)의 신증(身證)과 그리고 구해탈(俱解脫)의 여러 아라한들을 말한다. 그 차례대로 3처(處)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3계(界)의 욕(欲)을 여의어도 아직 부처님의 성지(聖旨)에 오히려 여의(餘依)가 있다는 것과 욕계(欲界)의 욕(欲)을 여의어 승진도(勝進道)에 포함되는 것과 불환과(不還果)를 현시한다. 다음에 다시 차별(差別)이 있다. 간략히 말하면 해탈(解脫)의 뛰어난 이익[勝利]과 등지(等持)의 뛰어난 이익[勝利]과 지혜의 뛰어난 이익[勝利]52)을 현시한다. 다시 차별이 있다. 간략히 말하면 증상심혜학(增上心慧學)의 소득과(所得果)를 현시하고 증상심혜(增上心慧)의 2학(學)을 현시한다.
  만약 색(色)으로써 아(我)를 헤아리고53)
  
51) 자신이 처해 있는 선정에 집착하여 그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한다.
52) 해탈관(解脫觀)은 광명(光明)을 관하여 정(定)의 장애를 원리(遠離)하기 때문에 무염(無染)의 등지(等持)를 이루는 것이며, 공(空) 비아(非我)를 관하는 것은 부동(不動)의 지혜(智慧)를 비추는 것으로 청정한 물이 가득찬 곳에 뜨는 것과 같은 것이다.
53) 이하의 네 게송은 이생(異生)에 대해서 밝힌다. 이 첫 게송은 욕탐(欲貪)과 삿되게 분별[邪分別]하는 자를 드러낸다. 게송에서 '아(我)'란 부처님을 자칭(自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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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音聲)으로써 아(我)를 찾으면서
  욕탐(欲貪)에 집지(執持)된 자는
  그는 아(我)를 알 수 없느니라.
  若以色量我  以音聲尋我
  欲貪所執持  彼不能知我
  
  만약 안[內]에 대해서 분명히 알지만[了知]54)
  밖[外]에 대해서 볼 수 없다면
  안의 결과[內果]로 관찰한 것이므로
  그는 음성에 이끌린 것[所引]이네
  若於內了知  於外不能見
  由內果觀察  彼音聲所引
  
  만약 안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無知]55)
  밖에 대해서 볼 수 있다면
  밖의 결과[外果]로 관찰한 것이므로
  또한 음성에 이끌린 것이네.
  若於內無知  於外而能見
  由外果觀察  亦音聲所引
  
  만약 안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56)
  밖에 대해서도 볼 수 없다면
  그는 두루 막혀진 우부(愚夫)라서
  
54) 이 두 번째 게송은 천안(天眼)에 의해서 부처님을 보는 것을 부정하는 자를 드러낸다.
55) 이 세 번째 게송은 육안(肉眼)에 의해서 부처님을 보는 것을 부정하는 자를 드러낸다.
56) 이 네 번째 게송은 안팎의 모두에 장애가 있어서 도무지 부처님을 볼 수 없는 자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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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음성에 이끌린 것이네.
  若於內無知  於外不能見
  彼普障愚夫  亦音聲所引
  
  만약 안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고57)
  밖에 대해서도 볼 수 있다면
  영웅(英雄)의 출리(出離)의 지혜라서
  음성에 이끌린 것이 아니네.
  若於內了知  於外亦能見
  英雄出離慧  非音聲所引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본체[體]는 이생(異生)이어서 아직 허망분별(虛妄分別)의 욕탐(欲貪)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 세존(世尊)께서 갖추신 32대장부상(大丈夫相)을 보고서 드디어 바로 헤아리기를 '이 박가범(薄伽梵)께서는 반드시 여래(如來) 응공[應] 정등각(正等覺)이시라 그 설하신 법은 결정코 미묘(微妙)할 것이며, 그 제자들의 행하는 바[所行]도 반드시 착할 것이다'라고 관찰하다가, 그는 뒷날 착하지 못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바르지 아니한 법을 듣고 다른 이론[論]과 다른 음성(音聲)을 듣고 다른 사람을 믿고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이끌리게 되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에게 이끌렸기 때문에 불(佛) 법(法) 승(僧)에 대해서 오히려 훼방(毁謗)을 일으키니, 이와 같은 것은 모두 여실(如實)하게 여래(如來)의 법신(法身)을 모르기 때문에 여기까지 이르르는 것이다.
  다시 어떤 이생(異生)은 안[內]의 정려(靜慮)의 과보[果]의 천안통(天眼通)에 의해서 멀리서 세존(世尊)을 보고서는 곧바로 '이 박가범(薄伽梵)께서는 결정코 여래(如來) 응공[應] 정등각(正等覺)이시다'라는 알음알이[解]를 짓나니,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다시 밖[外]의 욕계계(欲界繫)의 업(業)의 과보의 육안(肉眼)에 의해서
  
57) 이 다섯 번째 게송에서는 성자(聖者)에 대해서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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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 나서 헤아리니, 그 또한 다른 사람의 이론[論]과 다른 사람의 음성(音聲)을 따르며 다른 사람을 믿고 따르고 다른 사람에게 이끌리게 된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다시 어떤 이생(異生)은 그와 같은 것을 보는 것도 전혀 없고 그는 두루 막혀져서 오랜 세월 동안[長時] 다른 사람의 음성에 이끌린다.
  만약 여러 성현(聖賢)의 경우라면 탐욕(貪欲)을 끊어 없애고 조복하며 초월하여 성스런 혜안(慧眼)을 얻나니, 그는 이와 같은 성스러운 혜안에 의하기 때문에, 안[內]으로 여래(如來)의 법신(法身)을 증득하여 알기 때문에 비록 밖[外]으로 여래(如來)의 색신(色身)을 보고 혹은 제다(制多)58)를 보거나 그림[圖畵]을 보더라도 능히 제일의(第一義)의 응공[應] 정등각(正等覺)이 아니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이와 같이 안으로 바르게 알고[正知] 밖으로도 바르게 관하기[正觀]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론과 다른 사람의 음성을 따르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믿고 따르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이끌리지도 않아서, 불(佛) 법(法) 승(僧)에 대하여 결정코 믿고 받는다[信受].
  위와 같이 모두 여실(如實)하게 여래(如來)의 법신(法身)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이와 같은 데에 이르른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오직 세속으로만 여래(如來)를 보는 것은 곧 결정적인 것이 아니며, 만약 승의(勝義)로서 여래(如來)를 보는 것만이 결정적인 것임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제 6의 증상왕(增上王)이
  물들 때[染時]는 물듦[染]을 스스로 잡고[自取]
  물듦[染]이 없는 데에서는 물들지 않나니
  물듦이란 우부(愚夫)를 이름하네.
  
58) 범어 Caitya의 음사어이다. 이 단어는 적집(積集)이라는 뜻을 지녔으며, 지제(支提) 지제(枝提) 제저(制底) 등으로도 음사된다. 곧 석존(釋尊)의 사리가 든 탑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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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六增上王  染時染自取
  於無染不染  染者名愚夫
  
  지금 이 게송에서 제 6의 증상왕(增上王)이란 심(心) 의(意) 식(識)을 말한다. 만약 이미 다섯 가지 폭류를 건넜지만 여섯 번째의 의폭류(意暴流)를 아직 건너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때 그 마음은 여러 선정(禪定)의 모든 애미(愛味)를 따르게 되기 때문에 '물든 때[染時]'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어떤 보특가라(補特伽羅)는 오랜 세월 동안[長夜] 물듦[染]을 잡아서 자기 소유로 삼고 사랑할만한 법[可愛法]을 집장(執藏)하고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을 설하여 '물듦[染]을 스스로 잡는다[自取]'고 하는 것이다.
  탐(貪)을 물듦[染]이라고 이름하고 탐(貪)으로 인해서 생겨나게 되는 미래세[當來世]의 괴로움을 또한 물듦이라고 한다.
  만약 물듦을 스스로 잡아서[自取] 물들어 버리는 마음[所染心]에 대하여 공용(功用)을 따르지 않고 섭수(攝受)하고 저지하고 의대치(意對治)의 작의(作意)를 닦는다면, 이 때문에 이와 같은 그 마음은 현법(現法) 중에서 염오(染汚)가 있지 않고 염오가 없는 마음에서, 이는 염오를 스스로 잡는 것[自取]이므로 미래세에 그로 인한 모든 괴로움 역시 물들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것59)을 따라 공용(功用)을 지으면서 섭수(攝受)하지도 않고 저지하지도 않으며 의(意)로써 대치(對治)의 작의(作意)를 닦지 않는다면 이 때문에 이와 같은 괴로움의 원인[苦因]으로 인하여 오랜 세월 동안 괴로움을 받으며, 이 괴로움의 원인을 능히 멀리 여읠 수 없기 때문에 '우부(愚夫)'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괴로움의 원인[苦因]을 멀리 여의는 모든 뛰어난 이익[勝利]을 현시하고 그리고 괴로움의 원인으로 스스로 괴로움을 받게 되는 것이 어리석은 범부[愚夫]의 성품임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59) 물듦[染]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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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어떤 성(城)에 뼈로 담을 만들고
  힘줄과 살로서 칠하고 장식했는데
  그 속에는 탐욕[貪]과 진에[恚]가 있고
  교만[慢]과 숨김[覆]을 유지[任持]하네.
  有城骨爲墉  筋肉而塗飾
  其中有貪恚  慢覆所任持
  
  지금 이 게송에서 '성(城)'이라고 말하는 것은 심(心) 의(意) 식(識)이다. 이 성(城)이야말로 뼈로써 벽돌을 충당하고 힘줄로 이음새를 대신하고 살로 칠하게 되니, 몸의 뼈로써 담을 만들어 주위를 둘러싼 것이다. 이 성(城)에서는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의 모든 선법(善法)을 해치는[違害] 네 가지 악법(惡法)이 있어서 유지된다. 첫째는 재가(在家)로서 여러 욕을 수용하는 탐욕[貪]과 진에[瞋]를 말하고, 둘째는 악설(惡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에 출가한 것으로서 교만[慢]과 숨김[覆]을 말한다. 여러 욕[諸欲]을 집착하여 여러 욕을 희구(希求)하고 더러운 행[鄙穢行]과 서로 등지지 않기 때문에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해서 오히려 신수(信受)하지 않거늘 하물며 선(善)을 닦음이겠는가.
  악설(惡說)의 법(法)을 믿고 교만(憍慢)을 일으키기 때문에 자연히 불(佛) 세존(世尊) 혹은 제자들에게 나아갈 수가 없으며, 설령 불(佛) 세존(世尊) 혹은 불제자(佛弟子)들이 가엾이 여겨서[悲愍] 스스로 그곳에 간다하여도, 그는 숨김[覆]의 수번뇌(隨煩惱)에 얽혀서 그 마음을 염오(染汚)한지라 오히려 여실(如實)히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거늘, 하물며 신해(信解)하여 여러 선법(善法)을 닦음이겠는가.
  이와 같이 그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와 상응하는 선법(善法)의 두 가지 마음의 성(城)에 모두 들어갈 수 없거늘, 어찌 하물며 다시 능히 잡아서 자기 소유로 삼을 수 있겠는가.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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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재가(在家)나 출가(出家)나 간에 모두 네 가지의 잡염(雜染)의 인연으로 인하여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를 잃고 무너뜨린다[失壞]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거북이가 팔다리[支]를 자신의 껍데기에 감춘 것과 같이
  필추(苾芻)는 의(意)의 심사(尋思)를 잘 거두어서
  의지하는 바도 없고60) 남을 괴롭히지도 않아서
  반열반(般涅槃)을 증득하니 비방하는 바 없어라.
  
  如龜藏支於自  苾芻善攝意尋思
  無所依止不惱他  證般涅槃無所謗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초정려(初靜慮)에 의지하여 세 가지 악한 심(尋)을 버리는 것과 같다. 이른바 욕심(欲尋)61)과 에심(恚尋)62)과 해심(害尋)63)이다. 또한 초정려지(初靜慮地)의 여러 가지 선(善)의 심사(尋思)를 능히 버리고 무심무사정(無尋無伺定) 중에 안주하니, 마치 거북이가 팔다리[支]를 자신의 껍데기에 감춘 것과 같다. 심사(尋思)를 줄여 거두는 것[略攝] 또한 이와 같다.
  무심무사정(無尋無伺定)이란 이것64) 위로부터 유정(有頂)에 이르기까지임을 알아야만 한다. 그는 이 정(定)에서 바로 안주할 때 애미(愛味)를 일으키지 않으며 나온 뒤에는 사랑할만한 락법(可愛樂法)을 성취하고 조순(調順)하고 유화(柔和)하여 함께 머물기 쉬우며 지혜 있는 사람과 범행(梵行)을 같이 하는 사람을 괴롭히지 않으며, 또한 지혜 있는 사람과 범행(梵行)을 같이 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기뻐하며[欣樂] 함께 살뿐만이 아니라 다툼이 없
  
60) 정(定)에 대하여 애미(愛味)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61) 욕(欲)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미세한 사고를 의미한다.
62) 진에(瞋恚)와 상응하여 일어나는 미세한 사고를 의미한다.
63) 남을 해치려는 마음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미세한 사고를 의미한다.
64) 초정려지(初靜慮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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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법[無違諍法]을 성취한다.
  그는 이와 같은 바른 방편[正方便]에 의하기 때문에 여러 성제(聖諦)에 있어서 현관(現觀)에 들 수 있으며, 누진(漏盡)을 얻을 수 있다. 그는 제 법(法)에 대하여 다른 것을 믿지 않아서 깨끗하고[善淨] 뛰어난[勝] 지견(智見)을 획득하기 때문에, 여실(如實)하게 법이 진실로 법임을 분명히 알고 비나야(毘奈耶)가 진실로 비나야임을 분명히 안다. 이와 같이 알기 때문에 끝내 제 견(見)의 전도(顚倒)에 의지하여 법에 대하여 법을 비방하거나 비법(非法)에 대해서도 비법(非法)이라고 비방하지 않으며, 끝내 비법(非法)을 법이라고 하거나 법을 비법(非法)이라고 하거나, 비나야 아닌 것을 비나야라고 하거나 비나야를 비나야 아니라고 하는 것을 현시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선설법자(善說法者)의 네 가지 요란(擾亂)을 끊는 대치도(對治道)를 현시한다.
  무엇을 네 가지 요란(擾亂)이라고 하는 것인가?
  첫째는 염오와 불염오를 심사(尋思)하는 요란(擾亂)이며, 둘째는 뛰어난 정[勝定]에 대하여 애미(愛味)하는 요란(擾亂)이며, 셋째는 서로 상위(相違)하고 쟁송(諍訟)하는 요란(擾亂)이며, 넷째는 정도(正道)에 대하여 비방하는 요란(擾亂)이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동등함[等]과 동등하지 않음[不等]으로 태어나시어
  모니(牟尼)께서는 존재의 작용[有行]을 버리시니
  안[內]으로 정(定)을 즐기는 차별(差別)은
  집[舍)과 함께하는 난생(卵生)과 같으니라.
  等不等而生  牟尼捨有行
  內樂定差別  如俱舍卵生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부처님께서 최후유(最後有)의 보살위(菩薩位)에 머무르는 것을 시현(示現)할 때에는 먼저 획득(獲得)한 32대장부상(大丈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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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相)과 80수호(隨好)의 원만(圓滿)하고 장엄(莊嚴)한 미묘한 색신(色身)으로 태어나시고, 뒤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縟多羅三藐三菩提)를 증득(證得)할 때에는 그 색신(色身)으로 태어나신 것은 앞에서와 똑같으나, 그 명신(名身)으로 태어나신 것은 뛰어난 무루(無漏)로써 상사(相似)하지 않기 때문에, 앞의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안의 적정락(寂靜樂)과 사문락(沙門樂)을 시현(示現)하는 것을 의지(依止)로 삼기 때문에, 정(定)의 자재(自在)를 얻고, 정심력(定心力)으로 모든 수명의 작용[壽行]과 모든 존재의 작용[有行]을 버리셨는데, 그것65)을 버리고 맨 마지막[邊際]으로 묘한 색신(色身)으로 태어난 것은 앞과 똑같으며, 그 명신(名身)으로 태어나신 것은 앞과 같지 않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그 알로부터 생기는 닭 등은 알을 의지하여 태어나고 곧 생기고 나서 점차 자라서 종류(種類)가 서로 비슷해지면[相似]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이와 같이 여래의 색신(色身)과 명신(名身)의 차별(差別)의 도리(道理)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여기에서 차별은 불(佛) 세존(世尊)께서 만약 모든 수행(壽行)66)을 버리시지 않았다면 응당 수명의 양[壽量]을 채우시고 비로소 반열반(般涅槃)하셨을 것이나, 정력(定力)으로 지키고 있던 수명의 작용[壽行]을 버리셨기 때문에, 수명의 양[壽量]을 채우지 않고 반열반(般涅槃)하셨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수행(壽行)을 버린 색신(色身)과 명신(名身)의 두 가지의 차별(差別)을 현시하고, 그리고 버림[棄捨]에 의지하게 되는 인연(因緣)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진흙[淤泥]과 같은 탐욕[欲]이 없고
  도깨비[魑魅]와 같은 진에[瞋]가 없고
  
65) 모든 수행(壽行)과 모든 유행(有行)을 말한다.
66) 긴 수명을 갖게 하는 잠재력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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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물[羅網]과 같은 어리석음[癡]도 없고
  강하(江河)와 같은 애욕[愛]도 없네.
  無恚泥等欲  無恚魅等瞋
  無羅網等癡  無江河等愛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능히 세속(世俗)에 부자재(不自在)한 법(法)이 되는 네 가지가 있으니, 세간에서 능히 유정(有情)으로 하여금 자재로이 구르지 못하게 하는 것을 실재로 본다[現見]는 것이다. 첫째는 진창[淤泥]에 빠지는 것이며, 둘째는 도깨비[鬼魅]에게 홀리는 것이며, 셋째는 그물[羅網]에 걸려드는 것이며, 넷째는 빠르게 흐르는 강물에 빠져서 흐름에 따라서 떠돌고 빠지는[漂溺] 것을 말한다.
  능히 진실(眞實)에 부자재(不自在)한 법(法)이 되는 네 가지가 있으니, 능히 유정(有情)으로 하여금 자재롭지 못하게 구르게 하는 것[轉]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욕계(欲界)에 태어나서 자라면서 깨끗하지 못하고 비린내 누린내[腥臊] 나는 여러 탐욕[諸欲]의 진흙[淤泥]에 빠져 있어서 자재롭게 선법(善法)을 끌어당기고[引發] 수호(守護)하고 증장(增長)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모든 욕[諸欲]을 버리고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로 출가(出家)하게 되어서는 마음으로 분노(忿怒)을 품고 성질[性]로 악언(惡言)을 많이 하고 분(忿)으로 지탱되어서 자재롭지 못하고, 학처(學處)를 살피지 않아서 행동[動]에 위반[違越]을 일으키며 여러 지자(智者)와 범행(梵行)을 같이 하는 사람에게 자주 추한 말[麤言]로써 대들고 배척하며 침범하여 괴롭히고 헐고 욕되게[毁辱] 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여러 탐욕[諸欲]을 버리고 악설(惡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로 출가(出家)하게 되어서는 여러 악마(惡魔)의 큰 어리석음의 견해[見]의 그물[網]에 걸려들었으므로 그는 들어가고 나서 생사(生死)에 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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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流轉)하며 자재(自在)를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상분(上分)의 여러 이욕지(離欲地)에 태어나 자라면서 여러 애결(愛結)에 대하여 아직 영원히 끊지 못하고 또한 두루 알지 못하고 자재(自在)를 얻지도 못하여 도로 하계(下界)에 태어나서 유전[流]에 따르면서 머물러서 출리(出離)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여러 세계[諸界]의 여러 품류의 어리석은 범부의 얽어 매는 것[纏縛]을 현시한다.
  다시 차별(差別)이 있다. 어떤 사람은 탐욕의 진흙[淤泥]의 빠져있기 때문에 자재롭게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로 청정하게 출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분노하는 성질 때문에 마음이 분노(忿怒)로 가리워 지고 분에(憤恚)로 얽혀서 오히려 자기 몸을 해치고 혹은 손상시키거늘 어찌 하물며 다른 사람의 경우와 같은 것이랴.
  또한 어떤 사람은 치품(癡品)의 여러 악하고 삿된 견해[惡邪見]를 성취하여 부모가 없다고 말하면서 부모를 헐뜯고 부모한테 도리어 공경[敬]과 이양[養]을 바라게 되는데 하물며 스스로 능히 하는 것과 같은 것이랴.
  또한 어떤 사람은 널리 여러 탐욕을 모으며 탐애(貪愛)에 표류되어서 자재할 수 없고 오히려 스스로 먹을 수도 없는데 하물며 남에게 베푸는 것과 같은 것이랴.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이야말로 여러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능히 장애하는 네 가지 마땅히 알아야 할 법[四應知法]인 줄 알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로 청정하게 출가하는 것이며, 진에[恚]와 해침[害]을 멀리 여의는 것이며,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는 것이며, 혜시(惠施)를 기꺼이 행하는 것이다.
  
  허공에는 새의 발자취[鳥迹]가 없고
  외도(外道)에는 사문(沙門)이 없으며
  어리석은 범부[愚夫]는 희론(戲論)을 즐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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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래(如來)는 곧 (그것이) 있지 않네.
  虛空無鳥迹  外道無沙門
  愚夫樂戲論  如來則無有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어떤 중생은 뛰어난 탐욕[勝欲]을 바래서 욕구(欲求)에 소속되고, 또한 어떤 중생은 뛰어난 몸[勝身]을 바래서 유구(有求)에 소속되며, 또한 어떤 중생은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의 모든 해탈을 바래서 범행구(梵行求)에 소속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욕구(欲求)와 유구(有求)에 소속된다는 것은 '나는 조그마한 보시와 조그마한 지계(持戒)로 인해서 장차 선취(善趣)와 천상(天上)의 락세계(樂世界)에 왕생할 수 있으며, 묘오욕(妙五欲)을 스스로 맛보면서 재밌게 놀게 되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원(願)을 수습하고 나서 가장 뛰어난 욕[最勝欲]과 가장 뛰어난 몸[最勝身]을 얻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뭇 새들이 허공을 빙빙 돌면서 날지만 허공에 발을 편안히 붙일 곳이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중생들은 그 얻은 바 무상(無常)한 여러 탐욕[諸欲]과 몸에는 모두 안주할 것이 없는 것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의 모든 해탈을 즐기는 범행구(梵行求)에 소속되는 것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경우는 선설법(善說法)에 의지하는 것이고, 어떤 경우는 악설법(惡說法)에 의지하는 것이다. 악설법(惡說法)에 의지하는 모든 외도(外道)의 무리에게는 사문(沙門)이 없고 선설법(善說法)에 의지하는 삿된 범행구(梵行求)에 섭수되는 자에도 또한 사문(沙門)이 없다. 바른 범행구(梵行求)에 섭수되는 자에는 사문(沙門)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이 일체는 3문(門)에 포함된다. 어떤 경우는 욕구(欲求)의 문(門)이며, 어떤 경우는 유구(有求)의 문(門)이며, 어떤 경우는 범행구(梵行求)의 문(門)이다. 이와 같은 것을 모두 희론(戲論)에 집착한다고 이름한다. 여래(如來)는 일체의 모든 희구(希求)를 버렸기 때문에 희론(戲論)이 없다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곧 이러한 이치로써 견준다면 여래의 여러 제자 대중과 바른 범행구(梵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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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求)에 섭수되는 사람 또한 희론(戲論)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를 여의고서 부지런히 정진한 사람은 모두 공(空)하여 증익하는 것이 없음[無益]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희론(戲論)에 머무름이 모두 없고
  담과 구덩이를 넘고 탐애[愛]를 여읜
  모니(牟尼)께서 세간을 노닌다 하여도
  천(天) 인(人)은 알 수가 없느니라.
  住戲論皆無  踰牆塹離愛
  牟尼遊世間  天人不能識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아라한필추(阿羅漢苾芻)가 영원히 탐애(貪愛)를 여의는 것은 네 가지 상(相)에 의한다는 것이다. 악한 마구니[惡魔]와 원수와 일체의 어리석은 범부[愚夫]에게 매여있는 주인에게서 벗어나서 자재롭게 뜻대로 공한처[空閑]와 취락(聚落)에서 노니는 것을 말한다.
  어리석은 범부들은 우연히 이와 같은 아라한(阿羅漢)이 최구경(最究竟)에서 자재롭게 유행(遊行)하는 것을 보면 여실(如實)하게 모르므로 문득 두 처소에 있어서 헛되게 경시하고 훼손한다. '어째서 이 선남자(善男子)는 자기에게 속한 양명(養命)과 값진 재보[珍財]를 버리고 남에게 딸린 살림도구를 구하며, 무슨 까닭에 생천(生天)의 방편을 버리고 괴롭게 힘쓰며 정진하고 존재[有]의 단멸(斷滅)을 구한단 말인가?'라고 한다. 이 어리석은 범부들은 천상(天上)에 태어나는 뛰어남이 있는 공덕(功德)만을 보고 집에 있으면서 많은 재산을 지니는 것만을 보았기 때문에 모니(牟尼)에 대해서 헛되이 경솔한 생각을 일으킨다. 그가 섬기는 천(天)도 이 모니(牟尼)의 광대한 공덕에 대해서 오히려 알 수 없거늘 하물며 능히 섬기는 자가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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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탐애[愛]를 여읜 아라한들이 네 가지 상(相)에 의해서 악한 마구니와 원수와 일체의 어리석은 범부에게 매여있는 주인에게서 벗어나서 자재롭게 되는 것인가?
  말하자면 어리석은 범부들은 4식주(識住)에 의해서 마구니와 원수를 주인으로 삼아 쫓기고 부림을 당하면서 생사(生死) 가운데에 5취(趣)를 왔다 갔다 하지만 아라한(阿羅漢)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어리석은 범부들은 무거운 허물[重過]에 의해서 마구니와 원수를 왕으로 삼아서 쫓기고 부림을 당하면서 소위 증익(增益)하거나 혹은 다시 손감(損減)하는 여러 악견(惡見)들 때문에, 갖가지 칼과 몽둥이를 잡는 등의 악(惡) 불선법(不善法)을 일으키고 '여러 희론(戲論)'에 떨어지며 여러 악취(惡趣)에 태어나고 갖가지 악업(惡業)의 연(緣)들을 짓게 되지만 아라한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어리석은 범부들은 중간의 허물[中過]에 의해서 마구니와 원수를 왕으로 삼아 쫓기고 부림을 당하면서 욕애(欲愛)의 계박(繫縛)이라는 '담'에 처하게 되어 욕계(欲界)에 태어나는 괴로움에서 출리(出離)할 수 없지만 아라한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어리석은 범부들은 가벼운 허물[輕過]에 의해서 마구니와 원수를 왕으로 삼아 쫓기고 부림을 당하면서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나게 되어 무명(無明)이라는 깊은 '구덩이'가 둘레를 에워싸고 생사(生死)의 뭇 괴로움의 감옥에 갇혀 있으므로 태어나는 등의 괴로움으로부터 출리(出離)할 수 없지만 아라한은 그렇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모든 어리석은 범부[愚夫]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할 것[羞]을 응당 부끄러워하고, 응당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응당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두렵다는 견해를 일으키고 응당 두려워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두렵지 않다는 견해를 일으킨다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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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모든 심사(尋思)를 스며들어 없애게[熏除] 되면
  안으로 남김없이[無餘] 분별을 여의며
  모든 애착(礙著)과 색상(色想)을 뛰어넘으며
  네 가지 멍에[四 ]를 제거하면 왕생(往生)하지 않는다네.
  若有熏除諸尋思  於內無餘離分別
  超過礙著諸色想  四 蠲除不往生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이미 유학위(有學位)에 들어갔으나 아직 욕계(欲界)의 욕[欲]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초정려(初靜慮)에 의지하여 욕계의 여러 악(惡)의 심사(尋思)를 스며들어 없애고[熏除], 제 2정려(靜慮)의 내등청정(內等淸淨)의 심일취성(心一趣性)에 의하여 초정려지(初靜慮地)의 모든 분별을 남김없이 영원히 여의어 다시는 분별함이 없으며, 제 3정려(靜慮)에 의하여 제 2정려지(靜慮地)의 모든 기쁨[喜]의 애착(礙著)을 뛰어넘으며, 제 4정려(靜慮)에 의하여 제 3정려지(靜慮地)의 모든 즐거움[樂]의 애착(礙著)을 뛰어넘으며, 무색정(無色定)에 의하여 일체의 모든 색상(色想)을 뛰어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점차로 정(定)이거나 생(生)이거나 간에 유정(有頂)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선정(禪定)에 의지하기 때문에 네 가지 멍에[四 ]를 제거하는 것이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염오(染汚)의 심사(尋思)의 멍에[]를 제거하는 것이며, 둘째는 불염오(不染汚)의 심사(尋思)의 멍에[]를 제거하는 것이며, 셋째는 희락(喜樂)의 계박(繫縛)의 멍에[]를 제거하는 것이며, 넷째는 일체의 색상(色想)의 멍에[]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 인연에 의해서 여러 하지(下地)에서는 다시 왕생(往生)하지 않는다. 이생(異生)은 비록 정(定)이거나 생(生)이거나 간에 유정(有頂)에 이르더라도 여전히 네 가지 멍에[四 ]에 계박(繫縛)되기 때문에 여러 하지(下地)의 도로 다시 왕생(往生)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변제(邊際)67)가 있는 곳까지 이르르는 유학(有
  
67) 구경(究竟)의 수행의 끝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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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學)과 이생(異生)의 두 가지 차별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혜시(惠施)는 복(福)을 증가하게 하고
  잘못[非]을 막음은 원해(怨害)를 없애며
  선(善)을 닦음은 모든 악(惡)을 버리고
  혹(惑)을 다함은 열반(涅槃)을 얻는다네.
  惠施令福增  防非滅怨害
  修善捨諸惡  惑盡得涅槃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증득한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하여 바른 믿음[正信]을 획득했기 때문에 비록 집에 머물더라도 마음에 인색이라는 때[慳垢]의 얽어 매임[纏縛]을 멀리 여의고 일곱 가지에 의지하는 복된 사업[七種有依福業]68)을 수지(受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인연에 의하여 가거나 머무르거나 간에 …… 자세한 설명은 경(經)에서와 같이 내지 이와 같은 복덕(福德)을 일으키고 증장시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시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로 청정하게 출가하고, 이미 출가하고 나서 인력(忍力)을 구족(具足)하고 시라(尸羅)를 소화시키기 위해서, 비록 다른 사람의 욕설과 침범과 꾸짖음 또는 몸 손 기와 조약돌 칼 몽둥이로써 때리고 상해(傷害)하는 것을 만나더라도, 시라(尸羅)를 무너뜨려서 장차 장애가 되지 않을까하여, 마음에는 악한 생각[惡念]이 없고 악한 말[惡言]을 내뱉지 않으면서, 오직 그 경계를 연(緣)하여 자비[慈]와 함께하는 마음만을 모든 곳에 두루 차게 하면서 머무른다면, 이 인연에 의하여 현법(現法) 중에서 자(自) 타(他)에 상속(相續)하는
  
68) 첫째는 의지할 곳 없는 나그네에게 보시하는 것이며, 둘째는 길가는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며, 셋째는 병든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며, 넷째는 간병하는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원림(園林)을 보시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거지에게 보시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때에 따라 보시하는 것이다. 『구사론(俱舍論)』 13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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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원해(怨害)'가 끊어질 것이며, 괴로움 없는 락세계(樂世界)에 앞으로 태어나서 많은 원적(怨敵)이 없으며, 세간에 흠모[欣仰]를 받고 대중들이 즐겨 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바른 방편을 잘 닦은 뒤에는 증상계(增上戒)에 의하여 증상심(增上心)을 일으키고, 증상심(增上心)에 의하여 증상혜(增上慧)를 일으키며, 장차 성제(聖諦)에 있어서 현관(現觀)에 들어갈 때에는 곧 악취(惡趣)에 나아가는 업(業)과 여러 악취(惡趣)를 능히 영원히 버리게 된다.
  또한 먼저 얻었던 그대로의 도를 닦기 때문에 점차 영원히 온갖 모든 결(結)을 없애고 유여의열반계(有餘依涅盤界)에서 반열반(般涅槃)하게 되며, 이와 같이 하여 후시(後時)에는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에서 다시 반열반(般涅槃)하게 된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깨끗한 믿음[淨信]을 얻은 사람의 네 가지 정행(正行)을 현시하니, 첫째는 재부(財富)를 받게 되는 행(行)이며, 둘째는 선취(善趣)를 받게 되는 행(行)이며, 셋째는 악취(惡趣)의 괴로움을 여의는 청정한 행(行)이며, 넷째는 모든 괴로움을 여의는 청정한 수행(修行)이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여러 악[諸惡]들을 짓지 말고
  여러 선(善)들을 봉행(奉行)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조복(調伏)하는 것이
  바로 제 불(佛)의 성교(聖敎)이네.
  諸惡者莫作  諸善者奉行
  自調伏其心  是諸佛聖敎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하여 바른 믿음[正信]을 획득하고 온갖 종류[一切種]와 온갖 인연[一切因緣]과 온갖 처소[一切處所]69)에서의 모든 악행(惡行)을 다 능히 단멸(斷滅)하고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해서 능히 잘 시
  
69) 업을 짓는 경계 또는 유정(有情) 비유정(非有情) 및 자구(資具) 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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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尸羅)와 율의(律儀)를 잘 받아서 배우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그는 3상(相)70)에 의해서 뭇 선[衆善]을 봉행(奉行)하니, 말하자면 시라(尸羅)에 잘 머물러 별해탈(別解脫)의 청정한 율의(律儀)를 지키며 내지 모든 학처(學處)를 받아 배우는 것이다. 증상계학(增上戒學)에 의지하여 증상심학(增上心學)을 일으키고 증상심학(增上心學)에 의지하여 증상혜학(增上慧學)을 일으키나니, 그는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알아야 할 경계[所知境]에 대해서 여실(如實)히 지견(知見)한다. 이와 같이 여러 선법(善法)을 구족한 뒤에는 다시 3상(相)에 의하여 자심의 마음[自心]을 조복(調伏)하니, 말하자면 여실히 알기 때문에 능히 염환(厭患)을 일으키는 것이며, 염환(厭患)에 의하기 때문에 능히 염오를 여의게[離染] 되며, 염오를 여의기 때문에 해탈을 능히 얻는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3학(學)과 학(學)의 과(果)를 현시하고 자신의 성교(聖敎)가 다른 것과 공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조복하기 어려운 들뜸[輕躁]은
  모든 탐욕에 빠지는 것이니
  그 마음을 잘 조복한다면
  마음을 조복하여 안락(安樂)으로 이끈다네.
  難調伏輕躁  淪墜於諸欲
  善調伏其心  心調引安樂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심(心) 또는 의(意) 또는 식(識)이 오랜 세월동안[長夜]에 여러 시끄러운 곳을 애락(愛樂)하였음을 선설(宣說)하는 것이다.
  시끄러운 곳에서는 멀리 여의기 어렵고 조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록 억지로 여러 선법(善法)을 끊임없이 닦는 데에 편안히 처할지라도, 한결같이 탐
  
70) 첫째 계(戒)에 의지하여 정(定)을 일으키는 것, 둘째 정(定)에 의지하여 혜(慧)를 일으키는 것, 셋째 혜(慧)에 의지하여 경(境)을 증득하는 것의 셋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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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貪]을 여의고 진에[瞋]를 여의고 어리석음[癡]을 여의는 데에 머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결같이 들뜸을 책려하여 도거(掉擧)가 없고 적정(寂靜)한 곳에 머물 수가 없다. 더군다나 다시 빠르게 도리어 탐욕이 있고 진에가 있고 어리석음이 있는 하열(下劣)한 도거(掉擧)와 적정하지 않은 것을 일으키기 때문에, 비록 억지로 안으로 적정하게 그침[內寂止] 가운데에 편안히 처할지라도 오랜 세월동안[長夜]에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을 애락(愛樂)하였기 때문에 5욕(欲)의 경계[境]에 대해서 달려 나아가면서 빠진다.
  여러 성제자(聖弟子)는 이와 같은 등의 잡염(雜染)에 즐겨 집착하여[樂著] 능히 괴로움을 일으키는 마음에 대해서 끝내 그것을 내버려두어 자재롭게 구르게 하도록 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수순(隨順)하지도 않으며 자주 자주 사택(思擇)하여 멀리 여읨[遠離]을 성취[成辦]하고 항상 선법(善法)으로 심일경성(心一境性)을 닦는다. 그는 이와 같이 바른 정심(定心)에 의하기 때문에 능히 여실(如實)히 알며, 여실히 알기 때문에 능히 염환(厭患)을 일으키고, 염환에 의하기 때문에 능히 염오를 여읨[離染]을 얻을 수 있으며, 염오를 여읨에 의하기 때문에 능히 해탈을 얻는다.
  그는 이미 이와 같이 마음을 잘 조복하여 괴로움의 원인[苦因]을 다하기 때문에 현법(現法)에서 안락하게 머무름을 얻으며, 미래[當來]의 뭇 괴로움[衆苦]도 영원히 다하게 된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오랜 세월동안[長夜] 유전(流轉)하는 좌도(左道)71)를 따르지 않는 마음과 따르지 않는데서 얻게 되는 뛰어난 이익[勝利]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심상(心相)을 잘 알고
  원리(遠離)의 맛[味]을 능히 먹으면서
  정려(靜慮)로 항상 자세히 생각하면
  염오없는[無染] 희락(喜樂)을 받는다네.
  
71) 정도(正道)의 도리[理]에 어긋나는 도(道)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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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於心相善知  能餐遠離味
  靜慮常委念  受無染喜樂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유학(有學)의 자취[迹]를 보고서 능히 잘 지(止) 거(擧) 사(捨)의 상(相)을 분명히 알아서[了知], 이 인연에 의해서 4공덕(功德)을 얻는다. 말하자면 마음이 하나의 연(緣)에 머물러서 추중(麤重)을 멀리 여의어 몸과 마음의 안락(安樂)을 능히 잘 수용(受用)하는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공덕이다.
  또한 깨끗한 정심(定心)이 닦을 것을 다하고 닦은 바대로 하기 때문에 제 법(法)의 도리를 바르게 헤아려서 내법(內法)의 비발사나(毘鉢舍那)를 획득하는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공덕이다. 그는 이와 같이 청정한 지(止) 관(觀)을 의지로 삼기 때문에 수습한 바 보리분법(菩提分法)에 대하여 용맹하게 끊임없이 언제나 수습하고 자세히 수습하여 게으름 없고 거리낌도 없나니[無懈憚], 이것이 세 번째 공덕이다.
  그는 이와 같이 게으름과 거리낌없는 마음에 의하여 제일(第一)의 정념(正念)과 정지(正知)를 획득하고 마음이 잘 해탈하며 또한 해탈의 희락(喜樂)과 염오없는 낙(樂)을 수용하여 현법(現法)에서 안락(安樂)하게 머무름[住]을 얻나니, 이것이 네 번째 공덕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상(相)에 대한 선교(善巧)에 네 가지 공덕(功德)을 현시하니, 사마타(奢摩他)의 소작(所作)과 비발사나(毘鉢舍那)의 소작(所作)과 게으름 없고 거리낌 없는[無懈憚] 소작(所作)과 구경(究竟)에 이르르는 소작(所作)을 말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공교(工巧)한 생활[活]과 자기를 가벼이 함이 없으며
  뛰어난 제 근(根)72)을 즐기는 것을 다하여 해탈하며
  
72) 희근(喜根) 혜근(慧根) 염근(念根) 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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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도 없고 처소도 없고 희망도 없이
  탐욕[欲]을 끊고 홀로 행하면 진실한 필추[眞苾芻]이니라.
  無工巧活輕自己  樂勝諸根盡解脫
  無家無所無恚望  斷欲獨行眞苾芻
  
  이 게송에서 밝히는 것은 말하자면 5지(支)를 성취하고 5지(支)를 영원히 끊어야 진실한 필추(苾芻)라고 하는 이름을 얻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다섯 가지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방편을 교설(矯設)하는 삿된 활명법(活命法)에 의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력있는 집안을 믿거나 의지하지 않고 명칭과 가문의 명망을 닦지도 아니하며 또한 제 불(佛)의 소설(所說)과 성제자(聖弟子)의 말씀을 거짓으로 받지 않는 것이다. 마치 공교처소(工巧處所)에 의지하여 비법(非法)으로 의복과 음식을 희구(希求)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초지(初支)라고 한다.
  또한 기물(器物)과 여러 도구를 줄여 없애고 값진 재보[珍財]를 족히 버려서 옷은 겨우 몸만을 가리고 음식은 간신히 배만을 채워도 만족할 줄 알고 환희하면서 무릇 유행(遊行)하는 데에는 반드시 의발(衣鉢)을 지니니, 이것이 제 2지(支)이다.
  또한 사문(沙門)을 흠모[悕慕]하고 사문(沙門)을 애락(愛樂)하며 학처(學處)를 흠모하면서 학처(學處)를 애락(愛樂)하여 생명이 곤란한 인연으로써도 오히려 배워야 할 금계(禁戒)를 어기지 않거늘, 어찌 하물며 소소(少小)한 이익[利養]의 인연이겠는가. 이것이 제 3지(支)이다.
  또한 그는 이와 같이 바르게 방편을 닦고 깨끗한 생활[淨命]을 만족[喜足]하여 학처(學處)를 애락(愛樂)하고 제 성제(聖諦)에 대하여 아직 현관(現觀)하지 못한 사람은 능히 현관(現觀)에 들어서 청정한 견해[見]를 얻으며, 때로는 그 생각[念]을 잃어서 잠시 악(惡) 불선(不善)의 심사[尋]를 일으키고 탐욕(貪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와 더딤[遲緩]과 망념(妄念)을 이끌더라도 속히 다시 없애버리니, 이것이 제 4지(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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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그는 먼저 얻었던 것대로 도(道)를 수습하여 모든 결박(結縛)과 모든 수면(隨眠)과 수번뇌(隨煩惱)의 전(纏)에서 심해탈(心解脫)을 얻나니, 이것이 제 5지(支)이다.
  이와 같은 것을 5지(支)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다시 5지(支)를 영원히 끊는다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아라한필추(阿羅漢苾芻)는 5처소(處所)에 있어서 다시는 범하는 일이 없나니, 소위 배워야 할 곳[所學處]를 능히 버리고 다시 물러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또한 다시 저축한 것이 있더라도 집착하여 자기소유로 삼아 이를 수용(受用)하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 욕(欲)의 경계를 수용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다시 재물[財]을 위해서, 생활[命]을 위해서 알면서도 망어(妄語)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다시 여러 욕을 능히 버렸기 때문에 불여취(不與取)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다시 탐욕을 영원히 여의어 홀로 머물고 홀로 다니면서 범행이 아닌 법[非梵行法]을 가까이 익히고 둘둘씩 교회(交會)하거나, 혹은 스스로 지어서[自作] 고(苦) 낙(樂)을 초래한다고 계탁[計]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짓는 것[他作]이라고 계탁하거나, 혹은 자신과 타인이 짓는 것[自他作]이라고 계탁하거나, 혹은 자신이 짓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짓는 것도 아니어서 원인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닌데도 고(苦) 낙(樂)을 초래한다고 계탁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위와 같은 것을 5지(支)를 영원히 끊는다고 하는 것이다.
  
  마음[心]은 멀리 행하고[遠行] 홀로 행하며[獨行]
  몸 없고[無身] 굴(窟)에서 잠자니
  능히 조복[伏]하기 어려운 것을 조복(調伏)한다면
  나는 바라문(婆羅門)이라고 설하네.
  心遠行獨行  無身寐於窟
  能調伏難伏  我說婆羅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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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이 게송에서 말한 바 '마음[心]'이라고 하는 것은 또한 의(意)라고도 이름하며 식(識)이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에 일체 어리석은 범부[愚夫]의 무량(無量)한 차별적인 자체(自體)가 전전(展轉)하고 그리고 원인[因]도 전전(展轉)한 것이라 비록 작자(作者)는 없을지라도 생사(生死)에 유전(流轉)하는 전제(前際)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멀리 행한다[遠行]'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에 하나 하나 움직이다가 두 번째의 도반인 심소(心所)를 멀리 여의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종류[一切種]의 마음으로 단번에 구르지 않기 때문에 '홀로 행한다[獨行]'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현재에 그 자체(自體)를 따라서 처음 현전(現前)에 일어나되 어떤 경우에는 탐성(貪性)에 의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진성(瞋性)에 의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치성(癡性)에 의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하나 하나의 그 밖의 번뇌(煩惱)와 수번뇌성(隨煩惱性)에 의하기도 하지만 곧 그 자체(自體)는 필경 구르지 않는다73).
  5색근(色根)과 같이 하면 어떤 경우에는 같고 어떤 경우에는 다르며 어떤 경우에는 열등하고 어떤 경우에는 뛰어나게 그 자체(自體)를 따라 처음 현전(現前)하여 곧 그 자체(自體)는 필경에 구르지만 마음은 그와 같지 않다. 왜냐 하면 마음은 이런 저런 낮과 밤[日夜] 찰나(刹那) 랍박(臘縛) 등의 단계[位]를 지나치는 동안,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품류들은 생시(生時)와 다르게 생겨나고 멸시(滅時)와 다르게 멸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자성(自性)은 염오(染汚)의 바탕[體]으로 이루어지거나 차있지 않기 때문에 '몸 없고[無身]'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세(未來世)에 4식주(識住)로 머무르면서 수면(隨眠)이 있고 가히 후생(後生)에 왕래(往來)하는 이치[義]가 있게 되므로 '굴(窟)에서 잠자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73) 시종(始終) 상사상속(相似相續)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마음이 자주 자주 변이(變易)하고 끊어짐이 없이 있다는 것을 필경 구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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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뛰어난 지혜로움[聰慧]이 있는 사람이 이 4상(相)74)에 의해서 능히 과거 현재 미래세의 마음을 여실(如實)하게 분명히 알아서[了知] 염리(厭離)의 멸(滅)을 닦아서 심해탈(心解脫)하게 되다면 그는 모든 살가야(薩迦耶)를 뛰어넘어 피안(彼岸)에 이르르며 육지(陸地)에 안주(安住)함으로 '바라문(婆羅門)'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마음은 과거에 오랜 시간 동안 염오(染汚)되었기 때문에 작자(作者)의 성품[性]도 없으며 현재세(現在世)에서 성품[性]은 찰나(刹那)이면서 자성(自性)은 청정(淸淨)하며 미래세(未來世)에 있어서는 방일(放逸)과 불방일(不放逸)이 있기 때문에 염오(染汚)하기도 하고 청정(淸淨)하기도 하다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이 능히 세간(世間)을 덮으며[覆]
  무엇이 능히 나타나지 않게 하며[不顯]
  무엇이 다시 능히 더럽히며[染塗]
  무엇이 대포외(大怖畏)가 되나이까.
  誰能覆世間  誰能令不顯
  誰復能塗染  誰爲大怖畏
  
  무명(無明)이 세간을 가리며
  방일(放逸)이 나타나지 않게끔 하며
  희론(戲論)이 더럽히며
  괴로움[苦]이 대포외(大怖畏)가 되느니라
  無明覆世間  放逸令不顯
  戲論能塗染  苦爲大怖畏
  
74) 과거(過去)의 식(識)을 원행(遠行)하는 것 현재식(現在識)을 독행(獨行)하는 것 몸이 없는 것[無身]은 미래식(未來識)으로서 굴(窟)에서 잠자는 것을 말한다. 이 3세(世)의 네 가지 의미[義]의 식(識)을 4상(相)이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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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흐름[諸流]들은 곳곳에서 새는데[漏]
  이 새는 것[漏]을 누가 그치게 할 수 있으며
  무엇을 설하여 막을[防護] 수 있으며
  뭇 흐름[衆流]은 무엇으로 둑이 되나이까.[堰]
  諸流處處漏  是漏誰能止
  當說誰防護  衆流誰所偃
  
  세간에는 여러 흐름들이 새는데
  이러한 새는 것[漏]을 누가 염(念)으로 그치게 할 수 있으며
  나의 말[我說]로써 막을 수 있으며
  지혜에 의해서 둑이 될 수 있느니라.
  世間諸流漏  是漏念能止
  我說能防護  由慧故能偃
  
  염(念)과 혜(慧)와 명색(名色)을
  지금 이 일체를 묻사오니
  어떻게 영원히 멸진(滅盡)시킬 수 있습니까.
  오직 원컨대 저희를 위해 설하소서.
  念慧與名色  今問是一切
  何當永滅盡  唯願爲我說
  
  염(念)과 혜(慧)와 명색(名色)을
  나는 이 일체를 설하리라
  만약 모든 식[諸識]이 영원히 멸하면
  여기에 있어서도 영원히 멸진(滅盡)하느니라.
  念慧與名色  我說是一切
  若諸識永滅  於斯永滅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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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소행(所行)을 염(念)하여
  모든 식[諸識]을 영원히 멸합니까.
  이제 청하오니 방편을 드리우사
  풀이하셔서 의심이 없도록 하소서.
  云何念所行  諸識當永滅
  今請垂方便  爲釋令無疑
  
  안팎[內外]의 모든 느낌[諸受]에서
  즐거워 함[欣樂]을 모두 일으키지 않고
  이와 같이 소행(所行)을 염(念)하면
  모든 식[諸識]은 영원히 멸하게 되리라.
  於內外諸受  都不生欣樂
  如是念所行  諸識當永滅
  
  만약 여러 선설법자[善說法]와
  유학(有學)의 다른 부류[異類]일 경우
  그들은 상위(常委)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청컨대 대선(大仙)이시여. 설해주옵소서.
  若諸善說法  及有學異類
  彼常委能趣  請大仙爲說
  
  여러 탐욕[諸欲]에 탐착하지 않고
  그 마음은 탁[濁]하고 염오함[染]이 없으며
  제 법(法)에 대해서 잘 염(染)하면
  이러한 필추(苾芻)는 능히 나아갈 수 있느니라.
  不耽著諸欲  其心無濁染
  於諸法巧念  是苾芻能趣
  
  이는 『파라연(波羅延)』75)에서 아씨다(阿氏多)76)가 청문(請問)한 것에 의
  
75) 경명(經名)으로서 피안취(彼岸趣)라고 번역된다. 청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경명(經名)이라고 하나 지금은 현전(現傳)하지 않는 경(經)이다.
76) 범어 Asita의 음사어로서 무승(無勝)이라고 번역된다. 미륵(彌勒)의 자(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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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게송이다. '세간(世間)'이라고 하는 것은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욕세간(欲世間)이고 둘째는 색세간(色世間)이고, 셋째는 무색세간(無色世間)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의미는 출가(出家)와 재가(在家)의 두 가지 세간을 말하는 것이다. 출가(出家)의 세간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악설법(惡說法)이고 둘째는 선설법(善說法)이다. 악설법(惡說法)은 무명(無明)으로 덮힌 것[所覆]이며, 선설법(善說法)은 명(明)이 있기 때문에 응당 분명하게 나타날 수 있어야 하지만 방일(放逸)에 의하기 때문에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여러 재가(在家)의 여러 종류[異類]의 백의(白衣)들은 제 희론(戲論) 때문에 더럽혀지는 것[染塗]이다.
  희론(戲論)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세 가지의 언사(言事)77)를 희론이라고 이름하며, 네 가지 언설(言說)78)에 선담(宣談)하는 바가 있으면 이 또한 희론(戲論)이라고 이름하며, 능히 어언(語言)을 일으킨 모든 심사(尋伺)를 역시 희론(戲論)이라고 이름한다.
  과거(過去) 미래(未來) 현재(現在)의 세 가지 언사(言事)에 대하여 네 가지 언설(言說)에 의지하여 다른 부류[異類]의 분별(分別)의 사유(思惟)를 일으키되, 어떤 경우에는 어기기도[違] 하고 어떤 경우에는 수순[順]하기도 하는 것을 '더럽혀진다[塗染]'고 하는 것이다. 앞의 희론(戲論)이거나 뒤의 더럽혀지는 것[塗染]이거나 간에 모든 재가자(在家者)는 다분히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들은 제 희론으로 더럽혀진다고 설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 악설법(惡說法)은 무명(無明)에 덮히고, 선설법(善說法)은 방일(放逸)에 나타나지 않으며, 여러 재가자들은 희론(戲論)에 더럽혀지는 것[塗染]이다. 그들은 현법(現法)에서 괴로움의 원인[苦因]이 구를 때 이 괴로움의 원인에 대해서 여실(如實)하게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알 수
  
77) 과거법(過去法) 현재법(現在法) 미래법(未來法)의 3세(世)의 법(法)을 말한다.
78) 견(見) 문(聞) 각(覺) 지(知)의 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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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기 때문에 이 괴로움의 원인에 대해서 애락(愛樂)하며 머무른다. 이 인연에 의해서 미래의 괴로움을 일으키니, 곧 이 괴로움을 설하여 '대포외(大怖畏)'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악설법자(惡說法者)는 무명(無明)의 문(門)에 의해서 6처(處)의 흐름[流]으로부터 뭇 괴로움[衆苦]이 새며[漏泄], 여러 재가자는 희론(戲論)의 문(門)에 의해서 6처(處)의 흐름[流]으로부터 뭇 괴로움[衆苦]이 새며[漏泄], 선설법자(善說法者)는 방일(放逸)의 문(門)에 의해서 6처(處)의 흐름[流]으로부터 뭇 괴로움[衆苦]이 샌다[漏泄]. 이와 같이 무명(無明)과 방일(放逸)과 희론(戲論)의 여러 문(門)에서 흐름[流]이 새는 것[漏]이다.
  타음(他音)을 듣고 안으로 바르게 작의(作意)하여 제 법(法)에 대한 과환(過患)을 분명히 알고 이것과 상응하는 염(念)은 흐름[流]을 거스르며 움직이기 때문에, 능히 막고 그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방편을 복대치(伏對治)라고 이름한다. 만약 출세간(出世間)의 정견(正見)에 포함되는 여러 가지의 무루혜(無漏慧)는 세 가지 흐름[流]에 대하여 모두 둑을 쌓아서 막을 수 있으므로 이와 같은 방편을 단대치(斷對治)라고 이름한다. 이 흐름[流]이 새는 것에 대하여 혹은 조복하거나[伏] 영원하게[永] 하는 두 가지 대치(對治)는 모두 다 능히 끊기 때문에 '막는다[防護]'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악설법자(惡說法者)와 재가자(在家者)는 한결같이 염오품(染汚品)의 소속[攝]에 떨어지고, 또한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에서는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다. 제멋대로 방일하는 자들은 잡염품(雜染品)에 떨어지므로 분명하게 나타나는[顯了]데에 소속[攝]되지 않으며 제멋대로 방일하지 않는 자는 청정품(淸淨品)에 떨어지므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데에 소속[攝]된다. 또한 이미 분명하게 나타났거나 응당 분명하게 나타나야할 것의 두 가지 종류는 모두 방일함이 없는 아라한들인 줄 알아야만 한다. 이는 이미 분명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불방일(不放逸)에 대해서 다시 불방일(不放逸)한 일[事]을 지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4념주(念住)에 대하여 염(念)과 혜(慧)를 이미 잘 수습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청정(淸淨)한 식(識)을 이미 잘 증득하였기 때문에, 오직 결정(決定)적으로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 중에 선(善) 청정(淸淨)한 식(識)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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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히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염(念)과 혜(慧) 또한 따라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며, 그 밖의 의지[依;依止]에 포함되고 선업(善業)으로 끌리게 되는 일체의 명색(名色) 역시 따라서 멸진(滅盡)될 것이다. 내지 그 법(法)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데서 오는 6항주(恒住)에 언제나 잘 안주하고 이욕지(離欲地)의 모든 안의 느낌[內受]과 제 욕[諸欲]과 상응하는 밖의 느낌[外受]에 흔쾌한 즐거움[欣樂]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것을 제 아라한의 정념(正念)이 현행(現行)하고 내지 수명[壽]이 다하면 식(識)이 비로소 영원히 사라진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유학(有學)의 경우에는 이것이 분명히 나타나야만[顯了] 하므로 불방일(不放逸)에 있어서 응당 다시 불방일(不放逸)한 일[事]을 반드시 지어야 한다. 그는 다시 두 가지 불방일(不放逸)과 불방일(不放逸)한 일[事]에 대해서 말하자면 항상 짓는 것[常所作]과 자세하게 다 짓는 것[委悉所作]이다.
  유학(有學)의 다른 부류[異類]인 극칠반유(極七反有)79)의 여러 유학(有學)들이거나 혹은 다시 가가(家家)80) 일래과(一來果) 등과 현법(現法)에서 반열반(般涅槃)할만한 이는 하분결(下分結)과 상분결(上分結)에 있어서 마음에 염오(染汚)가 없고, 그것을 끊기 위해서 대치(對治)를 수습한다. 또한 여러 욕[諸欲]에 대하여 탐착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하분결(下分結)로 능히 염오할 수 없으며, 마음에 탁함이 없기 때문에 여러 상분결(上分結)로도 능히 염
  
79) 예류과(預流果)의 성자(聖者)를 말한다. 그는 욕계(欲界)의 수혹(修惑)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 욕계(欲界)의 인(人)과 천(天)으로 일곱 번 왕래하여 생(生)을 받게 되면 반드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해서 열반(涅槃)에 들어간다. 욕계(欲界)에 태어나는 것을 일곱 번 반복하는 것을 그 극한(極限)으로 하기 때문에 극칠반유(極七反有)라고 하는 것이다.
80) 일래향(一來向) 중에서 극과(極果)를 증득한 성자(聖者)를 말한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삼생가가(三生家家)로서 욕계(欲界)의 9품(品)의 수혹(修惑) 가운데 앞의 3품(品)을 끊은 자가 나머지 6품(品) 때문에 오히려 욕계(欲界)에서 3대생(大生)을 받는 것이며, 둘째는 이생가가(二生家家)로서 앞의 4품(品)을 끊은 자가 나머지 5품(品) 때문에 오히려 욕계(欲界)의 2대생(大生)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들 성자들은 욕계의 인(人) 천(天)의 가(家)를 왕래하여 후에 극과(極果)를 증득하여 열반에 들기 때문에 가가(家家)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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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할 수 없다.
  또한 일체의 괴로움이 있는 법[一切有苦法]에 대하여 여실(如實)히 알고 집(集) 내지 출리(出離)까지 알며 4념주(念住)에 잘 그 마음을 머물게 하며 먼저 얻은 것과 같이 성도(聖道)를 수습하여 능히 구경(究竟)에 나아간다. 이와 같이 대치도(對治道)를 수습하기 때문에 그는 일체의 불방일(不放逸)에서 마땅히 지어야 할 불방일(不放逸)의 일[事]을 구경(究竟)하는 것을 얻는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여러 재가자와 외도법(外道法)에서 출가한 사람은 결정코 잡염(雜染)되는 것을 현시하고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로 출가한 사람 가운데에 만약 방일(放逸)을 행하면 염오품(染汚品)에 떨어지고 불방일(不放逸)을 행하면 청정품(淸淨品)에 떨어짐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여러 욕[諸欲]에 대해서 희구(希求)하다가81)
  혹은 바라는 바의 결과[果]를 이루기도 하고
  얻은 뒤에는 마음이 반드시 기뻐하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보존하며 사랑하느니라.
  於諸欲希求  或所期果遂
  得已心定喜  至死而保愛
  
  여러 욕[諸欲]을 즐기는 중생은
  만약 여러 욕[諸欲]을 잃게 되면[退失]
  그 색(色)은 곧바로 변하여[變壞]
  마치 독화살을 맞는 것과 같느니라
  諸樂欲衆生  若退失諸欲
  
81) 이하의 세 게송은 제 유학(有學)의 염(染)을 관해서 원리(遠離)하는 것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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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其色便變壞  如毒箭所中
  
  만약 여러 욕[諸欲]을 멀리 여의기를
  마치 독사의 머리와 같이 한다면
  그는 애욕[愛]의 세간에서
  정념(正念)으로 능히 뛰어넘으리라.
  若遠離諸欲  猶如毒蛇首
  彼於愛世間  正念能超度
  
  밭이라는 대상[田事]과 금(金) 은(銀)과82)
  말과 소와 구슬과 팔찌와
  여자[女]와 노복[僕]은 여러 욕을 증익[增]하는
  이러한 사람은 즐거움에 빠지는 것이니라.
  田事與金銀  牛馬珠環釧
  女僕增諸欲  是人所耽樂
  
  반연(攀緣)하여 하열(下劣)에 빠지고
  변하는 여러 번뇌[諸漏]를 내나니
  이로부터 뭇 괴로움[衆苦]이 쌓이는 것은
  마치 배가 파손되어 물이 넘쳐 드는 것과 같으니라.
  攀緣沈下劣  變壞生諸漏
  從此集衆苦  如船破水溢
  
  만약 여러 욕을 영원히 끊어서
  마치 다라(多羅)83)의 정수리를 끊는 것 같이한다면
  모든 근심과 걱정[愁憂]을 버리게 되어
  
82) 이하의 세 게송은 제 무학(無學)의 염(染)을 관해서 영원히 끊어지는 것을 밝힌다.
83) 범어 T la의 음사어로서 다라수(多羅樹)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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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연꽃에 물방울과 같이 되느니라.
  若永絶諸欲  如斷多羅頂
  棄捨諸愁憂  猶蓮華水滴
  
  이는 의품(義品)의 여러 욕[諸欲]에 의거한 게송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미래의 모든 욕들을 희구(希求)하고 획득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방편을 일으키고 얻고 나서 현전(現前)에 탐착하고 수용(受用)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희구(希求)하고 곧바로 얻은 욕들을 수용하고 이러한 인연에 의해서 기쁨[喜]을 일으키고 즐거움[樂]을 일으키나니, 이와 같은 것을 모두 여러 욕[諸欲]의 애미(愛味)라고 이름한다. 또한 그는 희구(希求)하고 곧바로 수용하는 데에 그 얻고 수용하는 것을 만약 잃게[退失] 될 때에는 그는 여러 욕을 따라가며 그리워하면서 애미(愛味)를 집착하니, 애욕[愛]의 화살이 심장에 들어가 독화살을 맞는 것과 같아서, 큰 고통[大憂苦]을 받고 혹은 죽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것을 여러 욕의 과환(過患)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다시 독사를 여러 욕의 경계[欲境]로 비유하고 독사의 머리를 여러 욕의 모든 애미(愛味)에 비유하는 것이다. 여러 어리석은 범부[愚夫]들이 여러 욕을 애미(愛味)하고 탐착하고 수용한다면 마치 뱀에게 물린 것과 같으며, 만약 다문(多聞)의 성제자(聖弟子)들이 여러 욕의 모든 애미(愛味)를 멀리 여읜다면 마치 독사의 머리와 같아서 끝내 염오에 애착하지 않고 이를 수용하지 아니하며 …… 내지 탐착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는 제 색(色)의 모든 탐애로부터 내지 촉(觸)의 모든 탐애에 이르기까지 모두 능히 조복하고 끊어 없애고 뛰어넘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을 여러 욕에서 출리(出離)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여러 욕의 자성(自性)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사욕(事欲)이며 둘째는 번뇌욕(煩惱欲)이다.
  사욕(事欲)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곡식으로써 그가 의지하는 것은 말하자면 밭이라는 대상[田事]이며, 둘째는 재물[財]로써 그가 의지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금(金) 은(銀) 등의 대상[事]이다. 왜냐 하면 모든 곡식을 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밭이라는 대상을 구하게 되고, 모든 재물을 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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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사람들은 반드시 금(金) 은(銀) 등의 대상을 구하기 때문이다. 금(金) 은(銀) 등을 구하는 데에도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왕을 섬기는 것이며, 둘째는 장사를 하는 것이다. 곡식을 구하고 밭을 구하는 방편으로는 소가 필요하고 재물을 구하고 왕을 섬기는 방편으로는 말이 필요한 것이다. 재물을 구하는 장사를 하는 모든 방편으로 한다. 금(金) 은(銀) 등과 함께 상응하는 것은 여러 보배와 구슬을 말하며, 금(金) 은(銀)과 다른 종류[異類]로써 상응하지 않는 것은 팔찌 등을 말한다. 이것들은 가장 뛰어난 것을 (예로) 든 것이다. 또한 사고 파는 곳에서 하는 언설(言說)과 사무(事務)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위와 같이 재물과 곡식이라는 대상[事]을 쌓고 모은 뒤에는 수용하면서 희락(戲樂)하는 데의 모든 조반(助伴)은 여러 여색(如色)을 말한다. 만약 아직 적집(積集)하지 못했을 경우에 불러모으고 수호하고 식리(息利)84)의 모든 조반(助伴)은 종[僮僕]들을 말한다. 이와 같이 재물과 곡식을 광대(廣大)하게 적집하고, 이 처소에 대해서 탐착하고 버리지 않나니, 이와 같은 일체를 모두 사욕(事欲)이라고 한다.
  번뇌욕(煩惱欲)이란 사욕(事欲)을 따라다니며 애미(愛味)하고 탐착하는 식(識)에 의지하여 갖가지 망분별(妄分別)의 탐욕[貪]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사욕(事欲)에 있어서 번뇌욕(煩惱欲) 때문에 마음을 침몰(沈沒)시키고 하열(下劣)한 성품을 이루는 것이니, 만약 그는 사욕(事欲)이 달라지고[變壞] 흩어지면[散失] 곧바로 모든 번뇌[諸漏]를 일으키고 근심[愁]과 한탄[歎]과 걱정[憂]과 슬픔[悲]의 갖가지 고뇌(苦惱)가 그 마음을 얽어맨다. 그는 이와 같은 것에 의해서 현법(現法)에서 제 번뇌로 가리워 지고 눌려서 대치(對治)하는 일이 없다. 마치 배가 파손되어 물이 점차로 넘쳐 들어차는 것과 같으니, 미래(未來)의 생(生) 로(老) 병(病) 등의 갖가지 고뇌(苦惱)를 불러모은다.
  만약 여러 욕에 대해서 이미 출리(出離)하게 되면 곧바로 욕[欲]의 애미(愛味)에 따라서 탐착을 일으키는 모든 염오식(染汚識)을 영원히 끊으니, 마
  
84) 이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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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 다라(多羅) 나무의 정수리를 끊으면 다시는 크지[生長] 않는 것과 같다.
  또한 사랑할 만하고 즐길 만하고 내지 뜻에 맞는 그 사욕(事欲)이 만약 달라질 때면 청정식(淸淨識)에 여러 걱정과 근심[憂愁] 등의 일체의 고뇌가 모두 다 머물 수 없게 되니, 마치 연꽃잎에 물방울이 붙지 않는 것과 같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여러 욕의 애미(愛味)와 과환(過患)과 출리(出離)의 세 가지 자성을 현시하며, 또한 애미(愛味)가 능히 과환(過患)이 되는 것과 그것으로부터 출리(出離)의 모든 공덕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과거를 연연[戀]하지 않고
  미래를 희구(希求)하지 않으며
  현재의 제 법[諸法]에 대해서
  곳곳으로 두루 관찰하는
  지자(智者)가 증장(增長)하는 것은
  빼앗김도 없고 움직임도 없느니라.
  於過去無戀  不希求未來
  現在諸法中  處處遍觀察
  智者所增長  無奪亦無動
  
  이것은 현선(賢善)을 세우는 게송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해서 깨끗한 믿음[淨信]을 획득하고 바른 신심[正信心]으로써 가법(家法)을 버리고 비가(非家)에 나아가서 다섯 가지 상[五種相]에 의해서 범행(梵行)을 수행(修行)하여 매우 청정[善淸淨]하게끔 하는 것과 같다. 재가[居家]의 제 행(行)을 능히 버려도 연연[顧戀]할 것이 없고 또한 그것을 연(緣)하여 마음으로 돌이켜 연연함[追戀]을 일으켜 도로 염착(染著)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첫 번째 상[初相]이라고 한다.
  또한 현법(現法)에 있어서의 이익[利養]과 공경(恭敬)과 미래의 여러 가지 종류(種類)의 모든 제 행(行)에 대해서 희망을 일으키지 않으며 또한 미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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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人) 천(天)의 모든 제 행(行)을 구하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범행(梵行)을 수행(修行)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제 2의 상(相)이다.
  또한 현재와 현재의 5취온(取蘊)에 포함되는 색(色) 등의 제 법과 그것의 안립(安立)에 대해서 능히 바르게 관찰하고, 또한 현법(現法)과 미래세[當來世]의 여러 몸의 악행(惡行)과 악한 과보[惡果報]에 대해서 '나는 몸에서 모든 악행(惡行)을 일으키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자세한 설명은 경(經)에서와 같이 내지 '몸의 모든 악행(惡行)을 끊고 몸의 선행(善行)을 닦겠다. 어(語) 의(意)의 선행(善行)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고 하며. 또한 색(色) 등의 제 온(蘊)에 대해서 능히 따라서 관찰하여 '과거 미래 현세[今世]가 모두 무상(無常)하나니,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우며, 괴롭기[苦] 때문에 무아(無我)이며, 무아이기 때문에 저 일체에 대해서 아소(我所)라고 집착하지도 않을 것이며, 내지 그것에 대해서 아(我)라고 집착하지도 않겠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여실(如實)하게 정혜(正慧)로써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이 제 3의 상(相)이다.
  또한 초법(初法)의 비발사나(毘鉢舍那)에 의하여 제 근(根)이 성숙(成熟)하고 복덕(福德)과 지혜(智慧) 두 가지 자량(資糧)을 미래세[當來世]에서 통달(通達)하고 증장(增長)하여 여러 왕들에 의해 겁탈되지 않는다. 이것이 제 4의 상(相)이다.
  또한 제 2법(法)의 비발사나(毘鉢舍那)에 의하여 현법(現法)에서 열반(涅槃)의 공덕(功德)을 능히 잘 증장(增長)하고 여러 번뇌(煩惱)와 수번뇌(隨煩惱)에 의해 가벼이 움직이지[輕動] 않는다. 이것이 제 5의 상(相)이다.
  이 5상(相)에 의해서 범행(梵行)을 수행(修行)하여 매우 청정하게끔 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것에 의해서 하루 낮과 하루 밤을 하면 역시 현선(賢善) 중 제일(第一)의 현선(賢善)이 되며, 이 나머지 일체 모든 범행(梵行)도 뛰어넘게 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선설(善說)의 법과 비나야에서 닦게 되는 범행(梵行)은 일체의 상(相)을 모두 매우 청정하게 하며 다른 것과 공통되지 않는다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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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만 한다.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하겠다.
  
  악(惡)과 설(說)과 탐(貪)과 류(流)와 포(怖)와
  류(類)와 예(譽)와 지(池)와 류(流)와 탐(貪)과
  작(作)과 구로(劬勞)와 득의(得義)와
  논의(論義)의 40종(種)이라네.
  惡說貪流怖  類與池流貪
  作劬勞得義  論議十四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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