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유가사지론 제 16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4:40
[507 / 829] 쪽
  
유가사지론 제 16 권
  
  
  미륵보살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8) 사소성지(思所成地) ①
  
  이미 문소성지(聞所成地)를 설하였다.
  무엇을 사소성지(思所成地)1)라고 하는가?
  간략하게 세 가지의 상(相)에 의하여 설명됨을 알아야만 하니, 첫째는 자성청정(自性淸淨)에 의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소지(所知)를 사택(思擇)하는 데에 의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제 법(法)2)을 사택(思擇)하는 데에 의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자성청정(自性淸淨)이라고 하는가?3)
  말하자면 아홉 가지의 상(相)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어떤 사람이 홀로 공한처(空閑處)에서 진리를 살피되[審諦], 그 들은 바대로, 궁극으로 도달한 바[究達]대로 제 법(法)의 도리(道理)를 사유(思惟)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째는 모든 부사의처(不思議處)를 멀리 여의고[遠離] 진리를 살피되[審諦], 응당 생각해야 할 것[所應思處]을 사유하는 것이다. 셋째는 묵설(默說)4)과 대
  
1) 사소성지(思所成地)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되는데, 첫 번째는 자성청정(自性淸淨)에 의하며, 둘째는 소지(所知)를 사택(思擇)하는 데에 의하고, 셋째는 제 법(法)을 사택(思擇)하는 데에 의한다.
2) 불경(佛經)의 장행(長行)과 게송(偈頌)의 제 요의(要義)를 말한다.
3) 세 가지로 설명되는 사소성지(思所成地) 가운데에, 그 첫 번째로 자성청정(自性淸淨)에 의하여 사소성지(思所成地)를 설명한다.
4) 불도(佛道)의 정설(正說)에 위배되는 외도(外道)의 사설(邪說) 및 제 악설(惡說)을 말한다.
[508 / 829] 쪽
  설(大說)5)을 요지(了知)하는 것이다. 넷째는 무릇 사유하는 것[所思惟]이 이치[義]에 의지하고 문자[文]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다섯째는 법(法)에 대하여 적은 부분에서는 신해(信解)만을 일으키며6), 법(法)에 대하여 적은 부분에서는 혜(慧)로써 관찰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견고(堅固)하게 사유하는 것이다. 일곱째는 안주(安住)하여 사유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상속(相續)하여 사유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사유하는 것[所思惟]에 대하여 능히 잘 끝까지[究竟] 하여 결국 중도[中路]에 싫증내고 두려워하며 물러서고 굴복함[厭怖退屈]이 없는 것이다.
  이 9상(相)에 의하는 것을 청정(淸淨)하고 매우 청정한[善淨] 사유(思惟)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소지(所知)를 사택(思擇)하는 것이라고 하는가?7)
  관찰해야 할 이치[義]를 잘 사택하는 것이다.
  무엇을 관찰해야 할 이치[所觀察義]라고 하는 것인가?
  유법(有法)에 대하여 유상(有相)을 요지(了知)하고, 유법이 아닌 것[非有法]에 대하여 무상(無相)을 요지(了知)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관찰해야 할 이치[所觀察義]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관찰해야 할 유법[所觀有法]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 법에는 간략하게 다섯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만 하니, 첫째는 자상(自相)의 유법(有法)이며, 둘째는 공상(共相)의 유법이며, 셋째는 가상(假相)의 유법이며, 넷째는 인상(因相)의 유법이며, 다섯째는 과상(果相)의 유법
  
5) 불도(佛道)의 정설(正說)과 제 선설(善說)을 말한다.
6) 소지(所知)의 혜(慧)에 대하여 몰랐을 때는 신해(信解)해야 한다는 것이다.
7) 세 가지로 설명되는 사소성지(思所成地) 가운데에, 그 두 번째로 소지(所知)를 사택(思擇)하는 것에 의하여 사소성지(思所成地)를 설명한다. 소지(所知)를 사택(思擇)하는 데에는 네 가지로 설명되는데, 첫째는 총(總) 별(別)로 체(體)를 문답(問答)하는 것이며, 둘째는 유법(有法)을 다섯 부분[五門]으로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는 무법(無法)을 다섯 부분[五門]으로 해석하는 것이며, 넷째는 5종(種)의 유성(有性) 무성(無性)을 변별하는 것이다. 이하는 첫 번째의 총(總) 별(別)로 체(體)를 문답(問答)하는 부분이다.
[509 / 829] 쪽
  이다.
  무엇을 자상(自相)의 유법(有法)8)이라고 하는가?9)
  이 법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만 하니, 첫째는 승의상유(勝義相有)10)이며, 둘째는 상상상유(相狀相有)11)이며, 셋째는 현재상유(現在相有)이다.
  승의상유(勝義相有)란 제 법(法)에서 언설(言說)을 여읜 이치[義]로서 출세간지(出世間智) 소행(所行)의 경계(境界)인 안립하지 않은 상[非安立相]을 말한다.
  상상상유(相狀相有)란 네 가지의 관찰해야 할[所觀] 상상(相狀)에 의하는 것이다. 첫째는 이 곳[是處]에서 명언[名 : 名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12). 둘째는 이 곳[是處]에서 대상[事]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13). 셋째는 이 명언[此名]은 이 대상[事]에서 결정하지 않는 것[不決定]이 아닌 것이다.14) 말하자면 혹 미란(迷亂)일 경우에는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며15), 혹 무상(無常)일 경우에도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다.16) 넷째는 이 명언[此名]은 이 대상[此事]에서
  
8) 가법(假法)에는 취집(聚集)의 가(暇) 상속(相續)의 가(假) 분위(分位)의 가(暇)의 셋이 있는데, 이 셋이 아닌 것을 자상(自相)의 유법(有法)이다.
9) 네 가지로 소지(所知)를 사택(思擇)하는 내용 가운데에, 두 번째로 유법(有法)을 다섯 부분[五門]으로 해석한다. 첫째는 자상(自相)의 유법(有法)을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공상(共相)의 유법(有法)을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는 가상(假相)의 유법(有法)을 해석하는 것이고, 넷째는 인상(因相)의 유법(有法)을 해석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과상(果相)의 유법(有法)을 해석하는 것이다.
10) 근본지(根本智)의 경(境)인 진여(眞如)를 말한다.
11) 의타성(依他性)을 말한다.
12) 후득지(後得智)에서 증득한 의타기성(依他起性)은 명언(名言)을 떠날지라도 명언으로써 이를 나타낼 경우 명언과 서로 수순한다. 그러므로 명언[名]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원성실성(圓成實性)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13) 명언[名] 만이 있고 체(體)의 대상[事]이 없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는 구분된다는 것이다.
14) 이 명언[此名]은 오직 이 대상[事]에만 한정된다는 것이다.
15) 예를 들어서 지독한 병에 걸려서 착란[迷亂]을 일으켜서 청색(靑色)을 보고서 황색(黃色)이라고 할 경우에는 청(靑)과 황(黃)의 명언[名]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6) 예를 들어서 도자기가 깨져서 조각이 났을 경우에는 도자기라는 명언[名]은 사라지고 무상(無常)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명언[名]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510 / 829] 쪽
  걸림없이[無恚] 따라 구르기[隨轉]도 하고, 혹은 이 곳[是處]에서 따라 구르기도 하며, 혹은 이 곳에서 도로 물러서지[退還] 않기도 하는 것이다.17)
  현재상유(現在相有)18)란 이미 생긴 것[已生]이나 인과성(因果性)을 말한다.
  위와 같은 일체(一切)를 모두 하나의 자상(自相)의 유법(有法)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무엇을 공상(共相)의 유법(有法)이라고 하는가?
  이 상(相)에는 다시 다섯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만 하니, 첫째는 종류공상(種類共相)이며, 둘째는 성소작공상(成所作共相)이며, 셋째는 일체행공상(一切行共相)이며, 넷째는 일체유루공상(一切有漏共相)이며, 다섯째는 일체법공상(一切法共相)이다.
  종류공상(種類共相)19)이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등의 각각 다른 종류(種類)를 모두 한 종류의 공상[一種類共相]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소작공상(成所作共相)20)이란 선(善)의 유루법(有漏法)은 애(愛)의 과(果)를 부르는데, 능히 소작(所作)을 성취하는[成辦] 공상(共相)에 의하기 때문에 공상(共相)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선(善)의 유루법(有漏法)이 애(愛)의 과(果)를 부르는 것이 위와 같듯이 불선법(不善法)이 비애(非愛)의 과(果)를 부르는 것에 있어서도, 4염주(念住) 4정단(正斷) 4신족(神足) 5근(根) 5력(力) 7각지(覺支) 8도지(道支)의 보리(菩堤)를 얻는 것에 있어서도 능히 소작을 성취하는[成辦]하는 공상(共相)에 의하기 때문에, 공상이라고 설하는 것도 또한 그러한 줄
  
17) 예를 들어서 색(色) 등의 명언[名]은 모이거나 흩어지거나 간에 동일하게 색(色)이라는 명언이 따라 다닌다는 것이다.
18) 과거와 미래가 아닌 오직 현재세(現在世)의 의타기성(依他起性)을 말한다. 이는 상속(相續)의 가(假)와는 구분된다.
19) 5온(蘊)은 체(體)가 각기 다를지라도 적집(積集)의 의미[義]는 같기 때문에 모두 온(蘊)이라고 이름하며, 온(蘊)을 공상(共相)으로 하는 것이다.
20) 3업(業) 6식(識)의 사체(思體)가 다를지라도 선(善)의 유루(有漏)가 동일할 경우 모두 애과(愛果)를 부르는 것이니, 이를 소작(所作)의 공상(共相)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511 / 829] 쪽
  알아야만 한다.
  일체행공상(一切行共相)이란 일체행(一切行)의 무상성(無常性)21)의 상(相)을 말하며, 일체유루공상(一切有漏共相)이란 유루(有漏)의 행(行)이 모두 고성(苦性)의 상(相)인 것을 말하며, 일체법공상(一切法共相)이란 일체법(一切法)의 공(空) 무아성(無我性)의 상(相)을 말한다.
  위와 같은 일체를 모두 하나의 공상(共相)의 유법(有法)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무엇을 가상(假相)의 유법(有法)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이 곳[是處]에 간략하게 여섯 가지의 언론(言論)이 일어나는 것[生起]이 있으면, 이 곳[此處]을 가상유(假相有)라고 이름한다고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여섯 가지의 언론(言論)이라고 하는가?
  주인[主]에 속(屬)하여 상응(相應)하는 언론(言論)과 피차[此彼]를 멀리 떠난[遠離] 언론(言論)과 대중[衆]이 함께 시설(施設)하는 언론(言論)과 여러 법[衆法]이 모이는[聚集] 언론(言論)과 일체에 두루 하지 않는 언론과 항상 하지 않는[非常] 언론(言論)을 말한다.
  
  주인[主]에 속(屬)하여 상응(相應)하는 언론(言論)22)이란 말하자면 제 언론이라면 주인에 배속(配屬)되어 비로소 그 상(相)을 이해하는 것이지 주인에 배속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생(生)을 설할 때 '이것은 누구의 생(生)인가?'라고 소속(所屬)의 주인을 갖추어서 이 언론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색(色)의 생(生)과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생(生)은 색(色)을 설할 때, '이것은 누구의 색(色)인가?'라고 소속의 주인을 갖추어서 이 언론을 일으
  
21) 지금 이 문장에 의거하면 무상관(無常觀)이란 즉 현량(現量)이 아니며 공상관(共相觀)이다. 『집량론(集量論)』에 의하면 만약 의식(意識)의 정심(定心)이 유위(有爲)를 연(緣)하여 무상관(無常觀)을 지을지라도 하나 하나 낱낱이 제 행(行)의 체(體) 위에 무상(無常)을 증득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량(現量)이면서 자상(自相)의 경(境)이 된다고 한다.
22) 분위(分位)의 가(暇)를 설한다. 분위(分位)의 가(暇)란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이다. 생(生) 등의 4상(相)은 색(色) 심(心) 심소(心所)의 세 가지 분위(分位)에서 가립(假立)하는 것이니, 이를 주[主]에 속하여 상응(相應)하는 언론(言論)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512 / 829] 쪽
  키지는 않는 것이다. 생(生)과 같이 그렇게 노(老) 주(住) 무상(無常) 등의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일 경우에는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모두 알아야만 한다.
  이를 주인에 속하여 상응하는 언론(言論)이라고 한다. 만약 이 곳[是處]에서 이 언론(言論)을 일으키면 이 곳[此處]이 가상유(假相有)인 줄 알아야만 한다.
  피차[此彼]를 멀리 떠난[遠離] 언론(言論)23)이란 제 언론(言論)은 이것으로써 이것을 나타내지 않거나 또는 저것으로써 저것을 나타내지 않거나 하면 이를 피차를 멀리 떠난 언론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으로써 이것을 나타내는 언론이라면 이 언론은 또한 실상처(實相處)에서도 구르는 것이면서 가상처(假相處)에서도 구르는 것이다. 만약 저것으로써 저것을 나타내는 언론이라면 이 언론은 실상처(實相處)에서도 구르는 것이면서 또한 가상처(假相處)에서도 구르는 것이다. 만약 이것으로써 이것을 나타내지 않고 또한 저것으로써 저것을 나타내지 않는 언론이라면 이 언론은 한결같이[一向] 가상처(假相處)에서 구르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이것을 나타내는 언론(言論)이 실상처(實相處)에서 구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땅[地]의 견고함[堅]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다시 가상처(假相處)에서 구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돌[石]의 둥글음[圓]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땅의 견고함과 돌의 둥글음과 같이, 이와 같이 물[水]의 축축함[濕] 기름[油]의 방울짐[滴] 불[火]의 따뜻함[煖] 타는 불[燬]의 불꽃[焰] 바람[風]의 움직임[動] 질풍[飄]의 두드림[鼓]도 또한 그러하다.
  저것으로써 저것을 나타내는 언론(言論)이 실상처(實相處)에서 구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안(眼)의 식(識)과 신(身)의 촉(觸)의 이와 같은 등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23) 병(甁) 등과 같은 취집(聚集)의 가(暇)를 설한다.
[513 / 829] 쪽
  이것이 다시 가상처(假相處)에서 구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불수(佛授)와 덕우(德友)가 먹은 음식과 수레[車乘]와 의복(衣服)과 장신구[莊嚴具] 등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으로써 이것을 나타내지 않고 또한 저것으로써 저것을 나타내지 않는 언론이 한결같이[一向] 가상처(假相處)에서 구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집의 문 방의 벽 병의 입구 항아리의 배 군사의 수레 숲의 나무와 100의 10과 10의 3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위와 같은 등을 피차[此彼]를 멀리 떠난[遠離] 언론(言論)이라고 이름한다.
  대중[衆]이 함께 시설(施設)하는 언론(言論)이란 여섯 가지의 상상(相狀)의 언설(言說)의 자성(自性)에 대하여 언론(言論)을 가립(假立)하는 것을 말한다.
  여섯 가지의 상상(相狀)이란 첫째는 사(事)의 상상(相狀)이며, 둘째는 소식(所識)의 상상이며, 셋째는 정묘(淨妙) 등의 상상이며, 넷째는 요익(饒益) 등의 상상이며, 다섯째는 언설(言說)의 상상이며, 여섯째는 사행(邪行) 등의 상상이다.
  사(事)의 상상(相狀)이란 식(識)의 소취(所取)24)를 말한다. 소식(所識)의 상상이란 식(識)에서 능히 일어나는 작의(作意)의 소취(所取)를 말한다. 정묘(淨妙) 등의 상상이란 촉(觸)의 소취(所取)를 말한다. 요익(饒益) 등의 상상이란 수(受)의 소취(所取)를 말한다. 언설(言說)의 상상이란 상(想)의 소취(所取)를 말한다. 사행(邪行) 등의 상상이란 상(想)의 소취(所取)를 말한다.
  여러 법[衆法]을 모으는[聚集] 언론(言論)이란 여럿이 화합하여 자성(自性)을 건립하는 언론을 말한다. 안[內]의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에서 아(我) 등의 여러 가지 언론을 건립하며, 밖[外]의 색(色) 향(香) 미(味) 촉(觸) 등의 대상[事]이 화합하는 차별에서 집 방 병 옷 탈 것 군사 숲과 나무 등의 갖가지 언론(言論)을 건립하는 것과
  
24) 범어 Gr hya의 의역(意譯)이다.
[514 / 829] 쪽
  같다.
  일체(一切)에 두루 하지 않는 언론(言論)이란 제 언론은 어떤 곳에서는 따라 구르지만[隨轉] 어떤 곳에서는 옮아 다니는 것[施還]을 말한다. 집[舍宅)에 대한 집이라는 언론은 모든 집에 대하여 곳곳마다 따라 구르지만[隨轉] 작은 마을 큰 마을 정자[亭] 초계소[邏] 국가 등에서는 옮아 다닌다. 동이와 독에 대한 동이 등의 언론은 동이와 독 등에 대해서는 곳곳마다 따라 구르지만 병과 그릇 등에서는 옮아 다니며, 군사에 대한 군사라는 언론은 모든 군사에게는 따라 구르지만 다른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어린이 등의 종류에 있어서는 옮아 다니며, 숲에 대한 숲이라는 언론은 모든 숲에서 따라 구르지만 다른 나무와 뿌리 줄기 가지 잎 꽃 열매 등의 종류는 다시 옮아 다니는 것과 같다.
  항상하지 않는[非常] 언론(言論)이란 네 가지의 상(相)에 의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파괴되는 것[破壞]에 의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파괴되지 않는 것에 의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가행(加行)에 의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전변(轉變)에 의하기 때문이다.
  파괴되지 않는 것에 의하기 때문이란 병 등이 파괴되고 나면 병 등이라는 말을 버리고, 조각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는 것을 말한다.
  파괴되지 않는 것에 의하기 때문이란 여러 가지 물질이 함께 화합하고 나면 혹은 환(丸)이 되기도 하고 혹은 흩어지면[散] 여러 가지의 뒤섞인 물질의 차별적인 말을 버리고 환가루[丸散]라는 말이 생기는 것과 같다.
  가행(加行)에 의하기 때문이란 금 조각에 여러 가지 가행(加行)을 일으켜서 가락지와 팔찌 등의 다른 장신구[莊嚴具]를 만들면, 금 조각이라는 말을 버리고 가락지와 팔찌 등의 말이 생기게 되는 것을 말한다.
  전변(轉變)에 의하기 때문이란 음식 등이 전변할 때에는 음식 등이라는 말을 버리고 곧바로 똥 등의 말이 생기게 되는 것을 말한다.
  위와 같은 종류를 항상하지 않는[非常] 언론(言論)이라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제 물질[物]에 따라서 위와 같은 언론을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질[物]은 모두 가유(假有)이며, 가상(假相)의 유법(有法)이라고 함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515 / 829] 쪽
  무엇을 인상(因相)의 유법(有法)이라고 하는가?
  이 인(因)에는 간략하게 다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가애(可愛)의 인(因)이며, 둘째는 불가애(不可愛)의 인(因)이며, 셋째는 장양(長養)의 인(因)이며, 넷째는 유전(流轉)의 인(因)이며, 다섯째는 환멸(還滅)의 인(因)이다.
  가애(可愛)의 인(因)이란 선(善)의 유루법(有漏法)을 말한다.
  불가애(不可愛)의 인(因)이란 불선법(不善法)을 말한다.
  장양(長養)의 인(因)이란 전전(前前)에서 생긴[所生] 선(善) 불선(不善) 무기(無記)의 법(法)을 수습(修習)하고 잘 수습하고 많이 수습하기 때문에, 후후(後後)에서 생긴 선(善) 불선(不善) 무기법(無記法)을 전전(展轉)하게 하고 더욱 증가하게[增勝] 하는 것을 자양(資養)의 인(因)이라고 하는 것이다.
  유전(流轉)의 인(因)이란 이것의 종자(種子)25)에 의하여, 이것의 훈습(薰習)26)에 의하여, 이것의 조반(助伴)27)에 의하여 그 법이 유전(流轉)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그 법[彼法]에 대한 유전(流轉)의 인(因)이라고 한다.
  환멸(還滅)의 인(因)이란 제 행(行)의 환멸(還滅)과 잡염(雜染)의 환멸(還滅)의 모든 일체를 능히 적정(寂靜)하게 하는 도(道)를 말한다. 능히 반열반(般涅槃)하고, 능히 보리(菩堤)로 나아가고, 그것28)의 자량(資糧)과 그것의 방편(方便)을 능히 생기게 하고 능히 갖추게 하는 것을 환멸(還滅)의 인(因)이라고 한다.
  위와 같은 것을 모두 인상(因相)의 유법(有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자세하게 분별하면 사(思)의 인과(因果)29)에서와 같이 그 상(相)을 알아야만 한다.
  
25) 업종자(業種子)를 말한다.
26) 명언종자(名言種子)를 말한다.
27) 무명(無明) 애(愛) 취(取)를 말한다.
28) 보리(菩堤)를 가리킨다.
29) 규기(窺基) 논사는 본지분(本地分)과 결택분(決擇分)의 두 곳에 있는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모두 염(染) 정(淨)의 인과(因果)를 밝히는 것이라고 한다.
[516 / 829] 쪽
  무엇을 과상(果相)의 유법(有法)이라고 하는가?
  그 5인(因)으로부터 생기거나[生] 얻거나[得] 성취하거나[成] 갖추거나[辦] 구르는 것[轉]을 말한다. 이를 과상(果相)의 유법(有法)이라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관찰해야 할[所觀] 무법(無法)이라고 하는가?30)
  이 상(相)에도 다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미생무(未生無)이며, 둘째는 이멸무(已滅無)이며, 셋째는 호상무(互相無)이며, 넷째는 승의무(勝義無)이며, 다섯째는 필경무(畢竟無)이다.
  미생무(未生無)란 미래(未來)의 제 행(行)을 말한다.
  이멸무(已滅無)란 과거(過去)의 제 행(行)을 말한다.
  호상무(互相無)란 제 여법(餘法)이 그 밖의 상[所餘相]에 의하여, 즉 원리성(遠離性) 또는 비유성(非有性) 혹은 그 밖의 법[所餘法]과 제 여법(餘法)과 화합하지 않는 성품[性]을 말한다.
  승의무(勝義無)란 세속(世俗)의 말에 의하여 자성(自性)을 설하고, 언론을 짐짓[假] 시설하여 안립되는 성(性)을 말한다.
  필경무(畢竟無)란 석녀(石女)의 아이 등의 필경(畢竟)에 없는[無] 종류를 말한다.
  다시 다섯 가지의 유성(有性)과 다섯 가지의 무성(無性)이 있다.31)
  무엇을 다섯 가지의 유성(有性)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원성실상(圓成實相)의 유성(有性)이며, 둘째는 의타기상(依他起相)의 유성(有性)이며, 셋째는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의 유성(有性)이며, 넷째는 차별상(差別相)32)의 유성(有性)33)이며, 다섯째는 불가설상(不可說相)
  
30) 네 가지의 소지(所知)를 사택(思擇)하는 내용 가운데에 세 번째로 무법(無法)을 다섯 부분[五門]으로 해석한다.
31) 네 가지의 소지(所知)를 사택(思擇)하는 내용 가운데에, 네 번째로 다섯 가지의 유성(有性) 무성(無性)에 대하여 쌍으로 설명한다. 이에 대하여 첫째는 다섯 가지의 유성(有性)을 해석하며, 둘째는 다섯 가지의 무성(無性)에 대하여 해석한다.
32) 생(生) 로(老) 등의 상(相)을 말한다.
33) 생(生) 노(老) 등의 상(相)을 말한다.
 
[517 / 829] 쪽
  의 유성(有性)이다.
  이 가운데에 처음 것은 승의(勝義)의 상(相)이며, 두 번째 것은 연생(緣生)의 상(相)의 상(相)이며, 세 번째 것은 가시설(假施設)의 상(相)이며, 네 번째 것은 불이(不二)의 상(相)34)이다.
  생상(生相) 노상(老相) 주상(住相) 무상상(無常相) 고상(苦相) 공상(空相) 무아상(無我相) 사상(事相) 소식상(所識相) 소취상(所取相) 정묘상(淨妙相) 요익(饒益) 등의 상(相) 언설상(言說相)의 상(相) 사행(邪行) 등의 상(相)의 상(相)의 이와 같은 상(相)을 차별상(差別相)이라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다섯 번째 것은 네 가지의 불가설(不可說)에 의하기 때문에 불가설상(不可說相)이라고 한다.
  첫째는 무(無)이기 때문에 가히 설할 수 없는 것[不可說]이니, 보특가라(補特伽羅)의 경우에는 제 온(蘊)과 다른 것인지 다르지 않은 것인지에 대하여 잘 설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깊고 깊기[甚深] 때문에 가히 설할 수 없는 것[不可說]이니, 말을 떠난 법성(法性)과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여래의 법신(法身)과 불가사의 제 불(佛)의 경계(境界)와 여래의 멸후(滅後)는 있는 것[有]인지 없는 것[無]인지 등에 대하여 선설(宣說)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무의(無義)를 능히 끌어당기기 때문에 가히 설할 수 없는 것[不可說]이니, 법의(法義)와 범행(梵行)을 능히 끌어당기지 않는 제 법(法)일 경우는 제 불(佛) 세존(世尊)은 증득했을지라도 설하지 않으신 것을 말한다.
  넷째는 법상(法相)은 법이(法爾)에서 안립(安立)한 것이기 때문에 가히 설할 수 없는 것[不可說]이니, 소위 진여(眞如)은 제 행(行) 등에서는 같은 것인지 다른 성품[性]인지에 대하여 선설(宣說)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다섯 가지의 무성(無性)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승의상(勝義相)의 무성(無性)이며, 둘째는 자의상(自依相)의 무성
  
34) 소의(所依)의 법(法)과 체(體)가 다르기 때문에 불이(不二)의 상(相)이라고 한다.
[518 / 829] 쪽
  이며, 셋째는 필경자상(畢竟自相)의 무성이며, 넷째는 무차별상(無差別相)의 무성이며, 다섯째는 가설상(可說相)의 무성이다.
  무엇을 제 법(法)을 사택(思擇)한다고 하는가?35)
  이것에도 다시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소달람(素 纜)의 의미[義]36)를 사택(思擇)하는 것이며, 둘째는 가타(伽他)의 의미[義]를 사택하는 것이다.
  소달람(素 纜)의 의미를 사택하는 것은 섭사분(攝事分)과 보살장(菩薩藏)의 교수(敎授)에서 자세히 설할 것과 같다.
  가타(伽他)의 의미를 사택하는 데에는37)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승의(勝義)의 가타(伽他)38)를 건립하는 것이며, 둘째는 의취의(意趣義)의 가타(伽他)39)를 건립하는 것이며, 셋째는 체의(體義)의 가타40)를 건립하는 것이다.
  승의(勝義)의 가타(伽他)를 건립하는 것이란 경(經)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별도 주재[宰主] 및 작자(作者)와
  
35) 세 가지로 설명되는 사소성지(思所成地) 중, 세 번째로 제 법(法)을 사택(思擇)하는 데에 의함을 설명한다. 이에 대해서 첫째는 소달람(素 纜)의 의미[義]를 사택(思擇)하는 것이며, 둘째는 가타(伽他)의 의미[義]를 사택하는 것이다.
36) 12분교(分敎) 중에서 비나야장(毘奈耶藏)에 포함되는 연기(緣起) 비유(譬喩) 본사(本事) 본생(本生)을 제외하고,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에 포함되는 논의(論議)를 제외하고, 나머지 7분교(分敎) 가운데 단송(單誦)의 가타(伽陀), 즉 풍송행(諷誦行)을 제외한다. 이에 대해서는 바로 뒤의 가타(伽陀)의 의미를 사택하는 데에서 밝힌다. 지금 이것은 나머지 계경(契經) 응송(應訟) 기별(記別) 자설(自說) 방광(方廣) 희법(希法) 등의 여섯 가지 분교(分敎)를 말하는 것이다.
37) 두 가지로 제 법(法)을 사택(思擇)하는 데에 두 번째로 가타(伽他)의 의미[義]를 사택하는 내용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승의(勝義)의 가타(伽他)를 건립하는 것이며, 둘째는 의취의(意趣義)의 가타를 건립하는 것이며, 셋째는 체의(體義)의 가타를 건립하는 것이다.
38) 무아(無我)의 도리[理]를 밝히는 가타(伽他)를 말한다.
39) 수학(修學)의 의취(意趣)를 밝히는 가타(伽他)를 말한다.
40) 제 법(法)의 체성(體性)의 의리(義理)를 밝히는 가타(伽他)를 말한다.
[519 / 829] 쪽
  수자(受者)가 없으며
  제 법(法) 또한 작용[用]이 없지만
  작용의 구름[轉]이 없는 것이 아니네.
  都無有宰主  及作者受者
  諸法亦無用  而用轉非無
  
  오직 12지(支)가 있어서
  온(蘊) 처(處) 계(界)만이 유전(流轉)할 뿐
  이 일체를 심사(審思)하는 것은
  중생으로는 불가득(不可得)일세.
  唯十二有支  蘊處界流轉
  審思此一切  衆生不可得
  
  안[內]이나 밖[外]이나
  일체가 모두 공(空)이라
  그 공을 닦는 자는
  또한 항상 무소유(無所有)라네.
  於內及於外  是一切皆空
  其能修空者  亦常無所有
  
  나[我]와 나[我]는 정히 있지 않는데
  전도(顚倒)에 의하여 헛되이 계탁함이니
  유정과 나[我]는 모두 없고
  인(因)이 있는 법(法)이 있을 뿐이네.
  我我定非有  由顚倒妄計
  有情我皆無  唯有因法有
  
  제 행(行)은 모두 찰나이며
  머뭄도 없는데 하물며 작용이랴.
[520 / 829] 쪽
  즉 그것의 생기(生起)를 설하여
  작용[用]이라고 하고 작자(作者)라고 하네.
  諸行皆刹那  住尙無況用
  卽說彼生起  爲用爲作者
  
  눈[眼]으로 색(色)을 능히 보지 않고
  귀[耳]로 소리[聲]를 능히 듣지 않으며
  코[鼻]로 냄새[香]를 능히 맡지 않고
  혀[舌]로 맛[味]을 능히 맛보지 않네.
  眼不能見色  耳不能聞聲
  鼻不能嗅香  舌不能嘗味
  
  몸[身]으로 감촉[觸]을 능히 느끼지 않고
  의식[意]으로 법(法)을 능히 알지 않으며
  이것에서도 능히 임지(任持)하고
  구역(驅役)할 자도 없다네.
  身不能覺觸  意不能知法
  於此亦無能  任持驅役者
  
  법(法)은 다른 것을 생기게 할 수 없고
  또한 스스로 생겨날 수도 없으며
  중연(衆緣)이 있기 때문에 생기며
  그러므로 아닌 것[非]에서 새로운 것들[新新]이 있네.
  法不能生他  亦不能自生
  衆緣有故生  非故新新有
  
  법은 능히 다른 것을 멸하지 않으며
  또한 능히 스스로 멸할 수 없으며
  중연(衆緣)이 있기 때문에 생기며
[521 / 829] 쪽
  생기고 나서는 자연히 멸하네.
  法不能滅他  亦不能自滅
  衆緣有故生  生已自然滅
  
  두 가지 품(品)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 생김이 곧바로 얻을 수 있나니
  항상 경계[境]에 방일(放逸)하고
  또 다시 삿됨[邪]을 키움[昇進]일세.
  由二品爲依  是生便可得
  恒於境放逸  又復邪昇進
  
  어리석음[愚癡]에 떠돌게 되어
  그것은 드디어 삿됨[邪]을 키우며
  여러 탐애(貪愛)에 이끌려
  경계[境]에 항상 방일(放逸)하네.
  愚癡之所漂  彼遂邪昇進
  諸貪愛所引  於境常放逸
  
  인(因)이 있는 제 법(法)에 의하여
  중고(衆苦)도 다시 그러하며
  근본(根本)의 2혹(惑)41)때문에
  12지(支)는 둘로 갈리네42)
  由有因諸法  衆苦亦復然
  根本二惑故  十二支分二
  
  스스로 능히 작용하는 것도 없고
  
41) 무명(無明)과 탐애(貪愛)를 말한다.
42) 12지(支) 중에 앞의 7지(支)는 인시(因時)라고 하며, 애(愛) 이하의 5지(支)는 과시(果時)라고 한다.
[522 / 829] 쪽
  또한 다른 것에 의하여 작용(作用)하는 것도 아니며
  그 밖의 것에 능히 작용[用]이 있는 것도 아니며
  그러나 작용(作用)이 없는 것도 아니라네.
  自無能作用  亦不由他作
  非餘能有作  而作用非無
  
  안[內]도 아니고 또한 밖[外]도 아니며
  두 가지의 중간도 아니며
  행(行)이 아직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時]이 있어도 얻을 수 없다네.
  非內亦非外  非二種中間
  由行未生故  有時而可得
  
  설령 제 행(行)이 생겨났을지라도
  이것 때문에 얻을 수 없나니
  미래상(未來相)이 없는 것이며
  과거(過去)는 분별할 수 있는 것이네.
  設諸行已生  由此故無得
  未來無有相  過去可分別
  
  일찍이 겪었던 것을 분별하지만
  일찍이 겪지 않은 것도 분별하며
  행(行)은 비록 시작[始]이 있지 않지만
  그러나 시작이 있어도 얻을 수 없네.
  分別曾所更  非曾亦分別
  行雖無有始  然有始可得
  
  모든 색(色)은 거품이 모여 있는 것과 같고
  모든 수(受)은 거품이 떠돌아다니는 것과 같으며
[523 / 829] 쪽
  모든 상(想)은 아지랑이와 같고
  모든 행(行)은 파초에 비유된다네.
  諸色如聚沫  諸受類浮泡
  諸想同陽焰  諸行喩芭蕉
  
  여러 식(識)들은 허깨비 현상[幻事]과 같다고
  일친(日親)43)께서 설하셨던 내용이니
  제 행(行)은 일시(一時)에 생기고
  또한 일시에 머물고 멸하네.
  諸識猶幻事  曰親之所說
  諸行一時生  亦一時住滅
  
  어리석음[癡]은 어리석음을 어리석게 할 수 없고
  또한 그것을 어리석게 할 수도 없으며
  여타에 어리석은 자가 있을 수 있지 않지만
  그러나 어리석음[愚癡]이 없는 것도 아니라네.
  癡不能癡癡  亦不能癡彼
  非餘能有癡  而愚癡非無
  
  바르게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어리석음들이 생기게 되며
  이 바르지 않는 사유는
  어리석지 않는 자에게는 일어나지 않네.
  不正思惟故  諸愚癡得生
  此不正思惟  非不愚者起
  복(福)과 비복(非福)과 부동(不動)이 있어44)
  
43) Gotama는 여기에서 일종(一種)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부처님을 일친(日親)이라고 하는 것이다.
44) 제 식(識)에 복(福)과 비복(非福) 부동(不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524 / 829] 쪽
  행(行)에 또한 세 가지를 알아야 하리니
  다시 세 가지의 업(業)이 있어도
  일체는 화합하지 않는다네.
  福非福不動  行又三應知
  復有三種業  一切不和合
  
  현재는 속히 소멸하여 사라지고[滅壞]
  과거는 머물러도 방소[方]가 없고
  아직 생기지 않은 것[未生]은 중연(衆緣)을 의지하나
  그런데도 다시 마음은 따라서 구르네[隨轉]
  
  現在速滅壞  過去住無方
  未生依衆緣  而復心隨轉
  
  필경 함께 상응(相應)하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그러하며
  일체의 모든 것에서는
  마음 따라 구름[心隨轉]을 설하지 않네.
  畢竟共相應  不相應亦爾
  非一切一切  而說心隨轉
  
  
  이 유전[流]에 끊음이 없는 것은
  상사(相似)하고 상사하지 않는 것이니
  아견(我見)에 수순(隨順)하기 때문에
  세속(世俗)의 작용[用]은 없는 것이 아니네.
  於此流無斷  相似不相似
  由隨順我見  世俗用非無
  
  만약 색신(色身)은 멸하면
[525 / 829] 쪽
  명신(名身)도 따라 멸하는데
  그런데도 금세와 후세에
  스스로 짓고 스스로 과를 받는다고 말하네.
  若壞於色身  名身亦隨滅
  而言今後世  自作自受果
  
  전후가 차별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인과에 포함되기 때문에
  작자(作者)와 수자(受者)의
  같고 다름[一異]은 불가설(不可說)이라네.
  前後差別故  自因果攝故
  作者與受者  一異不可說
  
  인(因)의 도(道)는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화합하고 작용도 구르나니
  스스로의 인(因)에서 생기는 것이며
  소작(所作)을 섭수한다네.
  因道不斷故  和合作用轉
  從自因所生  及攝受所作
  
  희론(戲論)을 즐김이 인(因)이 되어서
  정(淨)과 부정(不淨)의 업(業)과
  모든 종자(種子)의 이숙(異熟)과
  애(愛)와 비애(非愛)의 과(果)를 낸다네.
  樂戲論爲因  若淨不淨業
  諸種子異熟  及愛非愛果
  모든 종자(種子)의 이숙(異熟)에 의하여
  아견(我見)이 그래서 생기나니
  스스로 안으로 증득한 바 앎[自內所證知]은
[526 / 829] 쪽
  색이 없도록 하여 가이 볼 수 없다네.
  依諸種異熟  我見而生起
  自內所證知  無色不可見
  
  
  요별(了別)45)이 없는 범부(凡夫)는
  그것을 안의 나[內我]라고 계탁하며
  아견(我見)을 의지로 삼기 때문에
  많고 많은 헛된 견해[妄見]을 일으킨다네.
  無了別凡夫  計斯爲內我
  我見爲依故  起衆多妄見
  
  모두 자기의 종자[自種]를 집착하기 때문에
  지나온 습기[宿習]의 조반(助伴) 때문에
  청문(聽聞)하고 수순하였기 때문에
  아견(我見)을 일으킨다네.
  總執自種故  宿習助伴故
  聽聞隨順故  發生於我見
  
  탐애(貪愛)와 그리고 연(緣)으로
  내아(內我)를 낳으며
  섭수(攝受)하고 희망(希望)하기 때문에
  잡염의 습기[染習]로 밖의 장소[所]를 만드네.
  貪愛及與緣  而生於內我
  攝受希望故  染習外爲所
  
  세간(世間)은 진실로 두려울 만 한데도
  
45) 분별(分別)을 말한다.
 
[527 / 829] 쪽
  어리석기 때문에 섭수하며
  먼저 애장(愛藏)을 일으키고 나면
  이것으로 인하여 희론(戲論)에 나아가네.
  世間眞可怖  愚癡故攝受
  先起愛藏已  由玆趣戲論
  
  그 애를 쌓는 자[愛藏者]는
  현성(賢聖)이 도달한 것을 괴로움[苦]이라고 하고
  이 괴로움은 어리석은 범부[愚夫]를 핍박하여
  찰나(刹那)에 잠시도 그칠 줄 모르네.
  彼所愛藏者  賢聖達爲苦
  此苦逼愚夫  刹那無暫息
  
  불평등(不平等)은 마음을 얽매어
  저 뭇 괴로움을 적집(積集)하나니
  적집하는 것이 어리석은 범부이며
  나[我]라고 계탁함이 고(苦) 낙(樂)의 연(緣)이네.
  
  不平等纏心  積集彼衆苦
  積集是愚夫  計我苦樂緣
  
  어리석은 범부들이 굳게 집착하는 것[固著]은
  큰 코끼리가 진창에 빠진 것과 같나니
  어리석음[癡] 때문에 더욱 더[增上]
  두루 행하고 두루 짓는 것이라네.
  諸愚夫固著  如大象溺泥
  由癡故增上  遍行遍所作
  
  이 못[池]은 여러 흐름[流]으로 갈리어
[528 / 829] 쪽
  세간의 흐름[世流]에서는 거세게 되나니
  불과 바람과 해로는 말릴 수 없으나
  오직 정법(正法)의 행(行)만이 제외된다네.
  此池派衆流  於世流爲暴
  非火風日竭  唯除正法行
  
  괴로움[苦]에 대하여 나의 느낌[我受]라고 계탁하고
  고(苦) 낙(樂)에서 괴로움이라고 요지(了知)하며
  이를 분별하여 견해[見]을 일으키고
  그것으로부터 생기고 그것을 낳네.
  於苦計我受  苦樂了知苦
  分別此起見  從彼生生彼
  
  염오(染汚)의 의(意)는 항상
  제 혹(惑)과 함께 생멸(生滅)하며
  제 혹(惑)에서 해탈하면
  먼저도 아니며 뒤도 아니라네.
  染汚意恒時  諸惑俱生滅
  若解脫諸惑  非先亦非後
  
  그 법이 생기고 나서
  뒤에 다른 청정[淨]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처음부터 염오(染汚)가 없는 것을
  중혹(衆惑)에서 해탈했다고 설하네.
  非彼法生已  後淨異而生
  彼先無染汚  說解脫衆惑
  그 염오(染汚)가 있는 자도
  필경(畢竟)의 성품[性]은 청정(淸淨)하며
  이미 깨끗하게 되는 것도 없는데
[529 / 829] 쪽
  어떻게 깨끗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其有染汚者  畢竟性淸淨
  旣非有所淨  何得有能淨
  
  제 종자(種子)가 멸하기 때문에
  제 번뇌(煩惱)가 다하기 때문에
  곧 이것에 염오가 없으니
  두 가지의 차별을 현시(顯示)하네.
  諸種子滅故  諸煩惱盡故
  卽於此無染  顯示二差別
  
  스스로 안으로 증득한 것이기 때문에
  오직 중고(衆苦)만이 다한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희론(戲論)을 끊었기 때문에
  일체에 희론(戲論)이 없네.
  自內所證故  唯衆苦盡故
  永絶戲論故  一切無恚論
  
  중생(衆生)의 명(名)의 상속(相續)과
  법상(法想)의 상(相)에는
  생사(生死)의 유전(流轉)도 없으며
  또한 열반이라는 것도 없다네.
  衆生名相續  及法想相中
  無生死流轉  亦無涅槃者
  
  여기에서는 보특가라무아(補特伽羅無我)의 승의(勝義)에 의지하여 위와 같은 승의(勝義)의 가타(伽他)를 선설(宣說)하니, 증익(增益)과 손감(損減)의 2변(邊)의 집착을 대치(對治)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섭수(攝受)하는 것에 대하여 '주재[宰主]'라고 설하는 것이며, 제 업용(業
[530 / 829] 쪽
  用)에 대하여 '작자(作者)'라고 하는 것이며, 제 과보(果報)에 대하여 '수자(受者)'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반 게송[頌]은 별의(別義)에서 분별되는 아(我)를 차단해 버리는[遮遺] 것이다. '제 법(法) 또한 작용[用]이 없다'란 즉 법에 상즉하여 분별되는 아(我)를 차단해 버리고 이것에 의하여 손감(損減)의 변집(邊執)을 멀리 여의는[遠離] 것이다.
  직용[用]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주재[宰主]의 작용이며, 둘째는 작자(作者)의 작용이며, 셋째는 수자(受者)의 작용이다. 이러한 작용에 인유[因]하기 때문에, 주재[宰主]와 작자(作者)와 수자(受者)를 가립하는 것이다.
  제 법(法)에 대하여 말할지라도 어떤 것이 법(法)인지에 대해서는 선설(宣說)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12지(支)가 있어서' 등의 반 게송을 설하는 것이다. 유지(有支)의 차례대로 '제 온(蘊) 등도 유전(流轉)한다'는 이것은 미세(微細)한 다아(多我)를 취하지 않는다. 곧 능히 주재와 작자와 수자의 잡착[執]을 대치할 수 있다는 것을 현시한 것이다.
  안(眼)이 색(色)을 연(緣)으로 하여 안식(眼識)의 과(果)를 낳는 것이니, '별도의 수자(受者)도 없다'는 이것에서는 곧 18계(界)는 수자(受者)의 성품[性]을 설명함을 현시(顯示)하는 것이다.
  주재[主]도 없다고 말하였지만, 아직 어떤 주재가 없는지에 대해서는 선설(宣說)하지 않았다. (이를) 현시(顯示)하고자 하기 때문에, 다음으로 '이 일체를 심사(審思)하는 것은 중생으로는 불가득(不可得)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심사(審思)라고 말하는 것은 3량(量)에 의지하여 자세하게 진리[諦]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어찌 안팎[內外]의 성취(成就)를 건립(建立)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다음에 '안이나 밖이나 일체가 공(空)'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것은 안과 밖은 오직 가(假)로 건립된 것임을 현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관찰의 주체[能觀]와 관찰의 대상[所觀]의 두 가지를 성취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다음으로 '그 공(空)을 닦는 자는 또한 항상 무소유(無所有)'라
[531 / 829] 쪽
  고 설하는 것이다.
  어떻게 성자(聖者)와 이생(異生) 두 가지의 성취(成就)를 건립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나[我]와 나[我]는 정히 있지 않는데, 전도(顚倒)에 의하여 헛되이 계탁함이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자와 이생의 아(我)는 결정적으로 진실(眞實)한 아의 성품[我性]이 있지 않은데도 오직 전도(顚倒)에 의하여 헛되게 계탁하여 있다고 하는 것을 현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피차(彼此)의 성취(成就)를 건립하는가?
  그러므로 '유정과 나[我]은 모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잡염(雜染)의 성취를 건립하는가? 그러므로 다음에 '인(因)이 있는 법이 있을 뿐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잡염(雜染)과 청정(淸淨)은 모두 불가득인 것이다.
  제 법(法)에는 모두 작용(作用)이 없다고 설했지만, 어째서 작용이 없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음으로 '제 행(行)은 모두 찰나이며, 머묾도 없는데 하물며 작용이랴'이 없는 범부(凡夫)는라고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설한 것처럼 작용의 구름[轉]이 없지 않는데, 어떻게 작용[用]이 없는데 작용의 구름이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다음으로 '즉 그것의 생기(生起)를 설하여 작용[用]이라고 하고 작자(作者)라고 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과(果) 때문에 작용[用]이라고 하는 것이며, 인(因) 때문에 작자(作者)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의 생기(生起)'란 여러 처(處)에서 제 식(識)이 생기게 되는 것을 현시하는 것이며, 그것이 생기게 되면 안(眼) 등을 떠나서 그것을 성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이 제 법(法)에는 작용[用]이 없는데, 이 작용 없음을 현시하는 데에는 간략하게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작용의 작용[作用用]이 없는 것이니, '눈으로 색(色) 등을 능히 보지 않고' 등을 말한다.
[532 / 829] 쪽
  둘째는 따라서 구르는 작용[隨轉用]이 없는 것이니, '이것에서도 능히 임지(任持)하고 구역(驅役)할 자가 없다'고 말한다. 그 차례대로 주재[宰主]와 작자(作者) 모두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능히 따라서 구르는 작용이 없는 것이다.
  셋째는 다른 것을 생기게 하는 작용[生他用]이 없는 것이니, '법은 다른 것을 생기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넷째는 스스로 생겨나는 작용[自生用]이 없는 것이니, '또한 스스로 생겨날 수도 없다'고 말한다.
  다섯째는 이전의 작용[移轉用]이 없는 것이니, '중연(衆緣)이 있기 때문에 생기며, 그러므로 아닌 것[非]에서 새로운 것들[新新]이 있다'고 말한다.
  여섯째는 다른 것을 멸하는 작용[滅他用)이 없는 것이니, '법은 능히 다른 것을 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일곱째는 스스로 멸하는 작용[自滅用]이 없는 것이니, '능히 스스로 멸할 수 없다'고 말한다.
   중연(衆緣)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과 같이, 역시 중연(衆緣)이 있기 때문에 멸하는 것인가?
   중연이 있기 때문에 생기고, 생기고 나면 자연히 소멸하는 것이다.
  인(因)이 있는 법(法)이 있다고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이, 재가(在家) 및 출가(出家)의 잡염(雜染)의 자성(自性)인 인(因)이 있는 법이 있음을 현시하고자 하기 때문에, 다음으로 '두 가지 품(品)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 생김이 곧바로 얻을 수 있다'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2게송에 의하여 무명(無明)과 애(愛)에 인(因)이 있는 법이 있음을 현시하는 것이다.
  다음에 뒤의 5송(頌)은 잡염품(雜染品) 차별에 소의(所依)의 인(因)과 시분(時分)을 현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因)이 있는 제 법(法)'이란 무명(無明)에서 수(受)까지를 말하고, '인(因)이 있는 중고(衆苦)'란 애(愛)에서 노사(老死)까지를 말한다. 이 말은 번뇌(煩惱)와 업(業)과 생(生)의 세 가지의 잡염(雜染)을 현시하는 것이다.
  '근본(根本)의 2혹(惑) 때문에'란 이 말은 번뇌(煩惱)의 잡염(雜染)을 현시하는 것이니, 오직 최승(最勝)의 번뇌의 잡염만을 취하는 것이다.
[533 / 829] 쪽
  '스스로 능히 작용하는 것도 없고' 등의 말은 다시 거듭 별도로 업(業)의 잡염(雜染)을 현시하는 것이니, 그것의 소작(所作)은 차별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의 과이숙(果異熟)은 부사의(不思議)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능히 작용할 것도 없다'란 선우[善] 악우(惡友)의 다른 것에 의한 끌어당김[他所引]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것에 의하여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란 스스로의 공용(功用)을 기다려서 성취[成辦]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것에 능히 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다'란 반드시 전생(前生)의 인(因)의 차별을 기다려서 비로소 소작(所作)이 있다는 것이다.
  '안[內]도 아니고 또한 밖[外]도 아니다' 등의 게송에서는 미래에 의지하여 잡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의 제 행(行)에 의지하여 잡염이 능히 생기는 것을 현시하는 것이다. 설령 행(行)이 이미 생기고 나더라도 곧 이 상(相)에는 분별이 있지 않기 때문에, 미래에는 상(相)이 없기 때문에 분별이 없으며, 이와 같이 이와 같이 미래도 결정적으로 가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이 다른 부류[異類]를 분별하지 않으면, 어떤 때에는 가히 얻을 수 있다.
  만약 과거에 대하여 가히 이런 저런 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은 일찍이 상모(相貌)가 있어서 가히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일찍이 겪었던 것만을 가히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겪지 않은 것도 비록 분명히 그 상모(相貌)를 취하지 않지만, 종류(種類)에 따라서 또한 분별할 수 있다. 이것은 곧 현재의 행(行)에 의지하여 분별하는 인(因)이라고 하며, 제 잡염(雜染)이 생기는 것을 현시하는 것이다. '행(行)은 비록 시작[始]이 있지 않지만 그러나 시작이 있어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잡염(雜染)의 시분(時分)의 차별은 현시하는 것이다. 무시시래로 항상 따라다니기 때문에, 찰나 찰나로 새롭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 이후부터는 청정품(淸淨品)을 현시하는 것이니, 여실하게 관찰할 때에 청정을 얻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는 자상(自相)에 의하기 때문에, '색(色) 등은 거품이 모여있는 것과 같다' 등이라고 말하며, 어떤 경우는 공상(共相)에 의하기 때문에, '유위(有爲)47)는 동일하게48) 생기고 머물며 멸하는' 모든
  
47) 게송에서는 '제 행(行)'으라고 표현하고 있다.
48) 게송에서는 '일시(一時)'라고 표현하고 있다.
[534 / 829] 쪽
  공상(共相)임을 관찰한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세속(世俗)과 승의제(勝義諦)에 의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는 없을지라도 어리석음[愚癡]은 없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뭇 연(緣)에서 생기는 세속제(世俗諦)이기 때문에, '어리석음을 능히 어리석게 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또한 다시 어리석지 않는 자는 '바르게 사유하지 않지 않음'을 현시한다. 그러므로 그 어리석음 때문에 어리석게 되는 것[所癡]이다.
  또한 세속(世俗)에 의하여 '제 식(識)은 복(福) 등의 행(行)을 따라 다니는 것'을 선설하며, 만약 승의(勝義)에 의거하면 따라 다니는 것이 없다. '또한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란 과거 미래 현재를 말한다. '세 가지 업(業)'이란 신(身) 등의 업을 말한다. '일체는 화합하지 않는다'란 다시 서로 상망(相望)하여 화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현재는 속히 소멸하여 사라지고[滅壞], 과거는 머물러도 방소[方]가 없고, 아직 생기지 않은 것[未生]은 중연(衆緣)을 의지하나, 그런데도 다시 마음은 따라서 구르기[隨轉]' 때문이다. 만약 피차(彼此)가 다시 서로 상응하면 복(福) 등의 행과 같이 화합이 없다는 것이다.
  그 마음이 상응하는 도리도 또한 그와 같은데, 어떻게 진실로 항상 따라서 구르는[隨轉] 성품[性]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왜냐 하면 마음[心]과 제 행(行)은 상응하고 혹은 상응하지 않기도 하고, 피차는 어떤 때는 상응하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상응하기도 하며, 또한 일체의 마음은 때로는 상응하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승의제(勝義諦)에 의해서는 마음 따라서 구르는[心隨轉] 성품[性]을 성취할 수 없지만, 지금은 세속에 의하여 현시하기 때문에 '마음 따라서 구르는[心隨轉]' 모든 인연을 말하는 것이다. '이 유전[流]에 끊음이 없다'란 지금 이 게송은 세속제는 작용과 따라서 구름[隨轉]은 없지 않다는 것을 현시하는 것이다. 또한 승의(勝義)에 의하면 작자(作者)와 수자(受者)가 없지만, 세속제에 의하기 때문에 '스스로 짓고[自作] 스스로 받는다[自受]'는 것을
[535 / 829] 쪽
  선설하게 된다. '작자(作者)와 수자(受者)의 같고 다름은 모두 불가설(不可說)이기' 때문에, 이 이치[義]를 현시하기 위하여 다음에 '전후(前後)가 차별하기 때문' 등의 게송을 설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승의(勝義)에 의하기 때문에, 주재[宰主] 작자(作者) 수자(受者)가 없고 오직 인과(因果)만이 있다는 것이다. 인과상(因果相)에 대한 의심[疑]과 비난[難]을 풀이하여 알리는 데에는 간략하게 다섯 게송으로 하며, 여기에서는 나에 대한 전도[我顚倒]를 일으키는 것을 현시한다. 첫 번째의 게송은 비록 나[我]는 있지 않지만 후유(後有)가 있어서 단절이 없으며, 또한 모든 인과는 단박에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일체로부터 일체가 생기게 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이 '인(因)의 도(道)는 단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현시하는 것이다. 게송 가운데에 4구(句)는 그 차례대로 위의 네 가지 의심과 비난을 해석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게송에 의해서는 인과상(因果相)을 현시하는 것이며, 뒤의 세 게송에 의해서는 무아(無我)의 제 인과(因果) 가운데에 나에 대한 전도[我顚倒]를 일으키게 됨을 현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것의 소연경(所緣境)과 그것의 소의지(所依止)와 그것의 인(因)과 그것의 과(果)를 현시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게송은 그것의 소연경(所緣境)을 현시하니, '스스로 안으로 증지한 것[自內所證]은 색(色)이 없도록 하여 가히 볼 수 어렵고 심사(尋思)하기 어렵기 때문에'49), 무색(無色)이라고 하는 것이다. 경(經)에서는 "색상(色相)은 심사(尋思)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설시(說示)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히 볼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두 번째의 게송50)에 의하여 그것의 의지[依]와 과(果)를 현시하였으니, 범부(凡夫)는 의지이며 중견(衆見)51)은 과(果)이다.
  세 번째의 게송에 의하여 그것의 인(因)을 현시하였으니, 구생(俱生)52)의 '아견(我見)은 모두 자기의 종자[自種]를 모두 집착하여' 계탁하는[執計] 수
  
49) 게송에서는 '심사(尋思)하기 어렵기 때문에'라는 1구(句)가 생략되어 있다.
50) '요별(了別)이 없는 범부는 그것을 내아(內我)라고 계탁하며 아견(我見)을 의지고 삼기 때문에 많고 많은 헛된 견해[見]를 일으킨다네'의 게송을 가리킨다.
51) 많고 많은 헛된 견해[妄見]을 말한다.
52)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나온 선천적인 것을 의미한다.
[536 / 829] 쪽
  면(隨眠)에서 생기(生起)하는 것이다. 제 외도(外道)들이 분별하는 아견(我見)은 '숙세의 습기[宿習]' 등으로 생기는 것인데, 이 외도의 견해[見]는 반드시 자주 익히기[數習] 때문에, 바르지 않는 심사(尋思)이기 때문에, '수순(隨順)'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정법(正法)이 아닌 것을 '청문'하기 때문에, 키우게[生長]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소의지(所依止)와 작의(作意)와 소연(所緣) 등의 여러 과실(過失) 때문에, 분별(分別)의 아견(我見)이 비로소 생기(生起)하게 됨을 현시한다.
  그 다음의 다섯 게송53)은 그 아견(我見)은 적집[集]의 차제(次第)에 의하여 괴로움[苦]을 일으키는 것이며, 또한 곧 이 괴로움과 아견(我見)의 이 두 가지 괴로움의 인연(因緣)은 또한 해탈을 능히 장애한다는 것을 현시한다.
  이 가운데에 첫 번째의 게송은 적집[集]을 현시하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행고(行苦)에 섭수되는 것[所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이것을 애장(愛藏)하고서 희론(戲論)에 나아가 '나는 반드시 있다. 반드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등을 현시한다. 애장(愛藏)이라고 하는 것은 거두어서 자기의 체(體)로 삼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이 괴로움은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따라다니며 일 찰나도 잠시 쉬는 일이 없다.
  네 번째의 게송에 의하여 이 괴로움은 능히 아(我)를 계탁하고, 고(苦) 낙(樂)의 연(緣)임을 현시한다.
  다섯 번째의 게송에 의하여 아(我)를 계탁하는 것은 어리석기 때문이며 해탈을 장애하는 것을 현시한다. '더욱 더[增上]'라고 하는 것은 그 밖의 두 가지 괴로움을 대하기 때문이며, '두루 행한다'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수(受)를 따라다니기 때문이며, '두루 짓는 것이다'란 선(善)과 악(惡)과 무기(無記)에 두루 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아뢰야식(阿賴耶識)에 포함되는[所攝] 행고(行苦)는 다른 것과 함께 상사함[相似]을 현시하고, 다시 차별(差別)을 현시할 것이다. 정법(正
  
53) '탐애(貪愛)와 그리고 연(緣)으로 내아(內我)를 낳으며 섭수(攝受)하고 희망(希望)하기 때문에 잡염의 습기[染習]로 밖의 장소[所]를 만드네'라고 하는 게송 이하의 다섯 게송을 말한다.
 
[537 / 829] 쪽
  法)의 행(行)에 의하여 비로소 말릴 수 있기 때문에 '세간의 흐름[世流]에서는 가장 거세게 되는' 것이다. '여러 흐름[衆流]'이라고 하는 것은 안(眼) 등의 여섯 가지와 5취(趣)와 3계(界) 등을 비유한 것이다. 또한 '정법[法]의 행(行)'이란 해탈변지(解脫遍知) 및 박변지(縛遍知)를 완전히 이해함[解了]을 현시하는 것이다. 박변지(縛遍知)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곧 괴로움을 훤히 아는 것[了知]이니, 내가 괴로움을 받고 즐거움을 받는 것은 모두 괴로움[苦]에 의지하게 됨을 훤히 아는 것이다. 또한 이 분별(分別)은 능히 모든 견해[見]을 일으키고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것 또한 그것을 능히 낳는 것이다. 박변지(縛遍知)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을 현시하고 나서 그 밖의 여섯 게송에서는 해탈변지(解脫遍知)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을 현시한다. 즉 '염오(染汚)의 의(意)는 항상[恒時] 제 혹(惑)과 함께 생멸(生滅)하며, 제 혹(惑)에서 해탈하면 먼저도 아니며 뒤도 아니다'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먼저도 아니다'란 제 번뇌와 항상 구생(俱生)하기 때문이며, '뒤도 아니다'란 제 혹(惑)과 구시(俱時)54)에 멸하기 때문이다.
  또한 설한 해탈의 상(相)을 현시한다. 즉 그 법이 생기고 나서 뒤에 비로소 청정(淸淨)하게 되니, 달리 그 밖의 청정(淸淨)의 의(意)가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곧 그 처음부터 염오(染汚)가 없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 염오(染汚)가 있는 자도 필경(畢竟)의 성품[性]은 청정(淸淨)하다' 등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게송에서는 또 다시 두 가지의 해탈을 현시하니, 번뇌해탈(煩惱解脫)과 사해탈(事解脫)을 말한다. '제 종자(種子)를 멸하기 때문에, 제 번뇌(煩惱)가 다하기 때문에'란 번뇌해탈(煩惱解脫)을 현시하며, '곧 이것에 염오가 없으니'란 사해탈(事解脫)를 현시하는 것이다. 경(經)에서 "필추(苾芻)여 만약 눈[眼]에서 탐욕(貪欲)을 영원히 끊으면, 이와 같이 이 눈도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 내지 ……"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유여의해탈(有餘依解脫)를 현시(顯示)하였다.
  다음으로 무여의해탈(無餘依解脫)를 현시해야만 한다. '스스로 안으로 증
  
54) 같은 시간을 의미한다.
[538 / 829] 쪽
  득한 것[自內所證]'이란 그것의 부사의(不思議)를 현시하기 때문이다. '오직 중고(衆苦)만이 다한 것이다'란 헛되이 오직 무성(無性)만이 있다고 계탁하는 집착[執]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유여의(有餘依)가 영원히 적멸(寂滅)하기 때문에, 적멸(寂滅)이라고 설하는 것이며, 완전한 무성(無性)만은 아닌 것이다. '희론(戲論)이 없다'55)란 이 해탈성(解脫性)은 오직 안으로 증득한 것[內所證]이라서, 다르다거나 다르지 않다거나, 사후(死後)에 있을 것이다 혹은 없게 될 것이다 등의 일체(一切)의 희론(戲論)을 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특가라(補特伽羅)와 법(法)은 모두 생사(生死)에 유전(流轉)하고 혹은 반열반(般涅槃)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현시하기 때문에, 다시 게송에서 '중생(衆生)의 명(名)의 상속(相續)과 법상(法想)의 상(相)에는 생사(生死)의 유전(流轉)도 없으며 또한 열반이라는 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승의(勝義) 성교(聖敎)의 가타(伽他)를 설하였다. 다음으로 의취의(意趣義)의 가타(伽他)를 건립할 것이다.
  경(經)에서 어느 때 삭가세계(索訶世界)의 주인[主]인 대범천왕(大梵天王)이 세존께서 계신 곳에 가셔서 부처님의 발에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서 묘한 가타(伽他)로써 찬탄하며 청하여[讚請] 말한 것과 같다.
  
  학(學)에서 구경(究竟)에 이르고
  잘 제 의심의 그물[疑網]을 끊으셨으니
  지금 학(學)과 소학(所學)을 청하노니
  수학(修學)을 나를 위하여 설하여 주소서.56)
  於學到究竟  善斷諸疑網
  今請學所學  修學爲我說
  
  대선(大仙)이여 잘 들을지어다
  학(學)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으니
  증상(增上)의 계(戒)와 심(心)과 혜(慧)이며
  
55) 게송에서는 '희론(戲論)을 끊었기 때문에'라고 되어 있다.
56) 범왕(梵王)이 세존께 청문한 것이다.
[539 / 829] 쪽
  그것에 대하여 수학(修學)해야만 하느니라.57)
  大仙應善聽  學略有三種
  增上戒心慧  於彼當修學
  
  6지(支)를 원만히 해야만 하고
  4락주(樂住)를 성취하며
  네 가지의 각각의 4행(行)에 대하여
  지혜(智慧)가 항상 청정(淸淨)해야만 한다.58)
  應圓滿六支  四樂住成就
  於四各四行  智慧常淸淨
  
  처음에 잘 근본(根本)에 머무르고
  다음으로 마음의 적정[心寂靜]을 즐기며
  나중에 성견(聖見)과 악견(惡見)은
  상응(相應)하고 상응하지 않는다.
  初善住根本  次樂心寂靜
  後聖見惡見  相應不相應
  
  먼저 깨끗이 하고[淨] 정려(靜慮)를 즐기고
  그리고 진리[諦]에 대하여 선교(善巧)하며
  곧 제 진리[諦]에 대하여
  생기게 하고 기리 증장(增長)해야 한다.
  先淨樂靜慮  及於諦善巧
  卽於諸諦中  應生遠增長
  
  제 학처(學處) 가운데에
  4취(趣)와 3처소[所]59)가 있으니
  
57) 범왕(梵王)의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이다.
58) 수학(修學)해야 할 것을 14단(段)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59)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말한다.
[540 / 829] 쪽
  2취(趣)를 멀리 여의고[遠離]
  2취(趣)를 증득(證得)한다.
  於諸學處中  有四趣三所
  遠離於二趣  於二趣證得
  
  둘은 두 가지에 안주(安住)하고
  하나는 능히 열반(涅槃)에 나아사
  점차(漸次)로 인연(因緣)이 되어서
  순잡(純雜)으로 수습(修習)한다.
  二安住二種  一能趣涅槃
  漸次爲因緣  純雜而修習
  
  가장 먼저[最先] 악작(惡作)을 여의고
  맨 나중[最後]에 즐거움[樂]을 원만하게 성취하니[成滿]
  제 학(學)은 이를 처음[初]으로 삼아서
  이 학(學)에 대하여 총예(聰叡)한다.
  最先離惡作  最後樂成滿
  諸學是爲初  於此學聰叡
  
  이것에 의하여 지혜의 깨끗함[淨]을 닦고
  깨끗함[淨]이 생겨서 즐거움이 원만하게 성취되며[成滿]
  제 학(學)은 이를 중간[中]으로 삼아서
  이 학에 대하여 총예(聰叡)한다.
  由此智修淨  淨生樂成滿
  諸學是爲中  於此學聰叡
  
  이것으로부터 마음[心]이 해탈하고
[541 / 829] 쪽
  영원히 제 희론(戲論)을 멸하니
  제 학(學)은 이를 존귀[尊]로 삼아서
  이 학에 대하여 총예(聰叡)한다.
  從此心解脫  永滅諸戲論
  諸學是爲尊  於此學聰叡
  
  만약 행(行)이 부정(不淨)을 취하고
  또한 선취(善趣)를 취하면,
  이 행(行)을 처음[初]이라고 설하며
  이것은 함께하는 것[共]이 아님을 알라.
  若行趣不淨  亦趣於善趣
  是行說爲初  當知此非共
  
  만약 행(行)이 청정(淸淨)을 취하더라도
  제 취(趣)가 구경(究竟)이 아니면
  이 행(行)을 중간[中]이라고 설하며
  역시 함께하는 것이 아님[非共]을 알라
  若行趣淸淨  非諸趣究竟
  是行說爲中  當知亦非共
  
  
  만약 행(行)이 청정(淸淨)을 취하고
  제 취(趣)에 있어서 구경(究竟)이면
  이 행(行)을 존귀[尊]라고 설하며
  이것은 반드시 함께하는 것[共]임을 알라.
  若行趣淸淨  於諸趣究竟
  是行說爲尊  當知此必共
  
  만약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이면
[542 / 829] 쪽
  나란히 총예(聰叡)라고 알라
  만약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이면
  나란히 우부(愚夫)라고 알라
  若有學無學  當知並聰叡
  若有學無學  當知並愚夫
  
  만약 섭수(攝受)를 내버리고[棄捨]
  또한 추중(麤重)을 끊어 없애고[斷除]
  및 소지(所知)를 현견(現見)하면
  3학(學)을 수지(受持)한 것이다.
  若棄捨攝受  亦斷除麤重
  及現見所知  是受持三學
  
  유연(有緣)과 무연(無緣)과
  또한 세(細)와 추(麤)의 현현(顯現)은
  수지(受持)와 원리(遠離)와
  말[言]의 발오(發悟)에 의하여 끌어당긴 것이다.
  若有緣無緣  亦細麤顯現
  由受持遠離  言發悟所引
  
  초학(初學)은 오직 한 가지만이 있고
  제이(第二)의 학(學)은 두 가지가 있으며
  제삼(第三)의 학(學)은 세 가지를 갖추며
  지혜있는 자[慧者]는 모두 초월(超越)한다.
  初學唯有一  第二學二種
  第三學具三  慧者皆超越
  
  시라(尸羅)를 허물어버리지[毁壞] 않고
  학(學)에 대해 서원하여[誓] 능히 수순하며
[543 / 829] 쪽
  궤범(軌範)에 기론(譏論)이 없으며
  5처(處)에서 원리(遠離)한다.
  不毁壞尸羅  於學誓能順
  軌範無譏論  於五處遠離
  
  
  만약 범함[犯]이 없는 출리(出離)는
  악작(惡作)이 없는 악작(惡作)이며
  그 학(學)을 심구(尋求)하면서
  그리고 그 행(行)을 부지런히 닦는다.
  若無犯出離  無惡作惡作
  於彼學尋求  及勤修彼行
   
  끝내 저버리는 일[棄捨]이 없으며
  명난(命難)에 이지러짐이 없으면서
  항상 정행(正行) 가운데에 머무르고
  비나야(毘奈耶)에 따라서 움직인다.
  終無有棄捨  命難亦無虧
  常住正行中  隨毘柰耶轉
  
  서원[誓]을 닦아 대치함[修治]을 우선[先]으로 하여
  또한 정명(淨命)을 닦아 대치하며
  2변(邊)을 모두 원리(遠離)하며
  또한 삿된 원[邪願]을 버린다.
  修治誓爲先  亦修治淨命
  二邊皆遠離  亦棄捨邪願
  
  여러 장애법(障礙法)에 대하여
  끝내 빠져서 물드는 일[耽染]이 없고,
[544 / 829] 쪽
  마음을 어지럽히는 법[亂心法]이 생기자마자
  바로 속히 원리(遠離)해야 한다.
  於諸障礙法  終無有耽染
  亂心法遠生  尋當速遠離
  
  크게 떴다가 크게 가라앉지 않고
  항상 정념(正念)에 잘 안주(安住)하여
  근본(根本)의 권속(眷屬)을 깨끗이 하면서
  범행(梵行)을 수행한다.
  非太沈太浮  恒善住正念
  根本眷屬淨  而修行梵行
  
  부지런한 정진(精進)에 나아가면서
  항상 견고(堅固)하고 용맹(勇猛)하면서
  항상 불방일(不放逸)을 닦고
  5지(支)를 잘 안주하게 해야 한다
  應發勤精進  常堅固勇猛
  恒修不放逸  五支善安住
  
  마땅히 자신의 제 선(善)을 숨기고
  또한 중악(衆惡)을 들추어 내며[發露]
  여러 의복(衣服) 등을 얻었을 때는
  거칠거나 아름답거나 다 환희해야 한다.
  當隱自諸善  亦發露衆惡
  得諸衣服等  麤妙皆歡喜
  
  세상 일[世務]에 적게 따르면
  거칠고 해진 것[麤蔽]에 따라서 구르며[隨轉]
  두타[杜多]의 공덕(功德)을 수지[受]하라.
[545 / 829] 쪽
  번뇌를 고요히 여의기[寂離] 위하여
  少隨於世務  麤弊亦隨轉
  受杜多功德  取寂離煩惱
  
  위의(威儀)를 구족(具足)해야 하며
  양(量)에 알맞게 섭수(攝受)해야 하며
  끝내 하는 일[所爲]을 속이면서[詐]
  위의상(威儀相)을 나타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當具足威儀  應量而攝受
  終無有所爲  詐現威儀相
  
  실덕(實德)을 스스로 말하지 말며
  또한 남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하며
  마침내 구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이상(異相)을 나타내지 아니 한다.
  不自說實德  亦不令他說
  雖有所方求  而非現異相
  
  다른 편[他邊]으로부터 빌며 구하면서[乞求]
  끝내 억지로 위협[威逼]하지 않으며
  법(法)으로써 획득(獲得)하되
  얻은 뒤에는 가벼이 훼손하지 않는다.
  從他邊乞求  終不强威逼
  以法而獲得  得已不輕毁
  이익[利養]과 모든 공경(恭敬)에
  탐착(耽著)하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 견해[見]의 증익(增益)과
  손감(損減)에도 집착[執]하지 아니한다.
  不耽著利養  及所有恭敬
[546 / 829] 쪽
  亦不執諸見  增益與損減
  
  
  세간(世間)에 따르는 도리에 맞지 않는 글구[無義文]와
  주술(呪術)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도리에 맞지 않는[無義] 가외의 옷과 바리[長衣鉢]를
  축적(畜積)하길 좋아하지 아니한다.
  不著順世間  無義文呪術
  亦不樂畜積  無義長衣鉢
  
  번뇌들이 늘어날까 두려워하며
  집에서 살길[居家] 익히지 않으며
  깨끗한 지혜(智慧)를 닦기 위하여
  현성(賢聖)을 가까이[親近] 해야 한다.
  恐增諸煩惱  不染習居家
  爲淨修智慧  當親近賢聖
  
  붕우(朋友)의 집[家]을 축적하지 말라
  걱정[憂]과 슬픔[悲]의 어지러움이 일어나서
  능히 괴로운 번뇌가 일어날까 두렵나니
  일어나면 곧 바로 원리(遠離)하라.
  不畜朋友家  恐發憂悲亂
  能生苦煩惱  纔起尋遠離
  
  믿음의 보시[信施]를 받지 말라
  해침[害]과 종기[瘡 ]가 더할까 두렵나니
  여래의 정법(正法)에서는
  일찍이 버릴 것이 있던 적이 없다.
  不受於信施  恐加害瘡
 
[547 / 829] 쪽
  於如來正法  嘗無有棄捨
  
  남이 잘못하여 범하는 데에도
  공용을 짓지 않고[無功用] 안락(安樂)하며
  항상 자신의 허물을 살피다가
  알고 나면 속히 드러내야 한다.
  於他愆犯中  無功用安樂
  常省自過失  知已速發露
  
  만약 범한 것[所犯]을 범하면
  여법(如法)하게 출리(出離)해야 하며
  응당 경영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용맹하게 힘써서 스스로 짓는다.
  若犯於所犯  當如法出離
  所應營事中  能勇勵自作
  
  부처님과 제자들의
  위덕(威德)과 언교(言敎)에 대하여
  일체를 모두 믿어 받들어[信受]
  대죄(大罪)를 보아도 비방하지 않는다.
  於佛及弟子  威德與言敎
  一切皆信受  觀大罪不謗
  
  매우 깊고 깊은 법[極甚深法]으로서
  사량할 수 없는 것[不可思度處]에 대하여
  옛 스승의 종지[宗]를 버리고
  자신의 견해[自見]도 굳게 집착하지 않는다.
  於極甚深法  不可思度處
  能捨舊師宗  不堅執自見
[548 / 829] 쪽
  
  항상 원리(遠離)에 있음과
  맨 마지막 남은 와구(臥具)를 즐기며
  항상 선법(善法)을 즐기되
  굳게 정진(精進)하며 용맹히 하라.
  常樂居遠離  及邊際臥具
  恒修習善法  堅精進勇猛
  
  욕심이 있지 않은 데에서 욕심을 내며
  증오(憎惡)하지 않으면서 증오(憎惡)하며
  잠[睡眠]을 여의고서 잠을 자며
  때로는 적정(寂靜)에 머무르지 않는다.
  無有欲生欲  不憎惡憎惡
  離睡眠睡眠  時不居寂靜
  
  악작(惡作)을 여의고서 악작(惡作)하며
  희망함[希慮]이 없으면서 희망을 내며
  일체종(一切種)에 항시(恒時)에
  바른 방편(方便)을 성취(成就)한다.
  離惡作惡作  無希慮希慮
  一切種恒時  成就正方便
  
  끌어 일으킴[引發]과 깨달음[覺悟]과
  화합하여 맺는 것[和合所結]과
  유상(有相)과 친함[親?]과
  또한 여러 가지의 희락(喜樂)과
  引發與覺悟  及和合所結
  有相若親昵  亦多種喜樂
  
[549 / 829] 쪽
  침핍(侵逼)과 매우 침함[極親昵]을
  허망분별(虛妄分別)이라고 이름하여
  
  능히 탐욕(貪欲)을 내게 하니
  지자(智者)는 원리(遠離)해야만 한다.
  侵逼極親昵  名虛妄分別
  能生於欲貪  智者當遠離
  
  모든 탐욕[欲]은 만족[飽]이 없게 하여
  여러 가지를 공유(共有)하는 것인데
  이는 비법(非法)의 인연(因緣)으로서
  능히 탐욕(貪欲)을 증장한다.
  諸欲令無飽  衆多所共有
  是非法因緣  能增長貪欲
  
  현성(賢聖)은 마땅히 여의어야 할 것이니
  속히 괴멸(壞滅)에 나아가라
  중연(衆緣)에 의탁하고 있는 것은
  위험과 방일[危逸]의 소의지(所依地)이니라.
  賢聖所應離  速趣於壞滅
  仗託於衆緣  危逸所依地
  
  모든 탐욕은 마치 마른 뼈와 같고
  또한 연한 고기 덩어리와 같으며
  풀의 횃불과 상사(相似)하며
  마치 큰 불구덩이와 같으니라.
  諸欲如枯骨  亦如軟肉段
  如草炬相似  猶如大火坑
  
  비유하면 이무기와 독사(毒蛇)와 같고
[550 / 829] 쪽
  또한 꿈에서 본 것과 같으며
  빌린 장엄구(莊嚴具)와 같으며
  또한 나무 끝에 익은 열매 같다.
  譬如蟒毒蛇  亦如夢所見
  如借莊嚴具  如樹端熟果
  
  이와 같이 모든 탐욕을 알아서
  모두 빠지거나 즐겨서는[耽樂] 안 된다.
  마땅히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하고
  항상 사유(思惟)하고 수습하라.
  如是知諸欲  都不應耽樂
  當聽聞正法  常思惟修習
  
  먼저 추정(麤靜)을 보고[觀見]
  다음으로 닦음를 한결 같이 하며[一向]
  번뇌의 추중(麤重)을 버려서
  끊음[斷]에서 흔락(欣樂)을 낸다.
  先觀見麤靜  次於修一向
  捨煩惱麤重  於斷生欣樂
  
  제 상(相)에 대하여 관찰하여
  가행(加行)의 구경(究竟)을 얻으며
  능히 욕계(欲界)의 욕(欲)을 여의고
  그리고 색계(色界)의 욕(欲)을 여의어라.
  於諸相觀察  得加行究竟
  能離欲界欲  及離色界欲
  
  진제현관(眞諦現觀)에 들어가서
  일체(一切)의 욕(欲)을 능히 여의며
[551 / 829] 쪽
  현법열반(現法涅槃)을 증득하고
  유여의[餘依]를 영원히 다한다.
  入眞諦現觀  能離一切欲
  證現法涅槃  及餘依永盡
  
  '학(學)에서 구경(究竟)에 이르고 잘 제 의심의 그물[疑網]을 끊으셨으니, 지금 학(學)과 소학(所學)을 청하노니 수학(修學)을 나를 위하여 설하여 주소서'란 이 게송에서는 대범천왕(大梵天王)이 먼저 세존(世尊)을 찬탄한 뒤에 청문(聽聞)을 내는 것이다. 세존을 찬탄하는 것은 일체의 학(學) 중에 이미 제일(第一)의 구경(究竟)을 얻으셨음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자리행(自利行) 원만(圓滿)인 불공(不共)의 덕(德)에 의하여 설하는 것이다. 또한 전전(展轉)하며 생겨나는 일체의 의심의 그물[疑網]을 능히 잘 끊으셨다는 이것은 의타행(依他行) 원만(圓滿)인 불공(不共)의 덕(德)에 의하여 설하는 것이다. 청문(聽聞)을 내는 것이란 '무엇을 학(學)이라고 하며, 학에는 몇 가지가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수학(修學)해야만 하는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존의 의도는 소작(所作)이 많은 것을 두려워하는 해태(懈怠)한 중생을 책려(策勵)하기 위하여 일체를 모두 거두어 간략하게 3학(學)을 설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대선(大仙)이여, 잘 들을지어다. 학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으니, 증상(增上)의 계(戒)와 심(心)과 혜(慧)이며 그것에 대하여 수학(修學)해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가운데에 계(戒) 심(心) 혜(慧)에 의하여 산란(散亂)하는 자의 경우는 산란하지 않게끔 하는 방편(方便)으로 증상(增上)의 계학(戒學)를 설하며, 마음이 아직 정을 얻지 못한 자[心未定者]의 경우는 정(定)을 얻게끔 하기 위한 방편으로 증상(增上)의 심학(心學)을 설하며, 마음에 이미 정을 얻었으나 해탈하지 못한 자[心已得定未解脫者]의 경우는 해탈하게끔 하기 위하여 증상(增上)의 혜학(慧學)을 설한다. 이 인연(因緣)에 의하여 수행자(修行者)들의 일체의 소작(所作)은 모두 구경(究竟)을 얻는다는 것을 현시(顯示)한다. 이 세존의 밀의(密意)에서 일체의 제 학(學)을 선설(宣說)하고 이 3학(學) 가운데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현시한다.
[552 / 829] 쪽
  또한 제 학(學) 중에서는 이 방편에 의하여 소학(所學)을 성취한다는 것[成辦]을 현시(顯示)하기 위하여 그 때문에 다음에 '6지(支)를 원만히 해야만 하고, 4락주(樂住)를 성취하며, 네 가지의 각각의 4행(行)에 대하여 지혜(智慧)가 항상 청정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이 게송에서는 그 차례대로 3학(學)을 성판(成辦)하는 방편을 현시한다. '6지(支)를 원만히 해야만 한다'란 증상(增上)의 계학(戒學)에 의한 방편을 수학(修學)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6지(支)라고 하는가?
  첫째는 깨끗한 시라[淨尸羅]에 안주(安住)하는 것이며, 둘째는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를 수호(守護)하는 것이며, 셋째는 궤칙(軌則)이 원만한 것이며, 넷째는 소행(所行)이 원만한 것이며, 다섯째는 작은 죄(罪)에 대해서도 큰 포외(怖畏)를 보는 것이며, 여섯째는 학처(學處)를 수학(受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6지(支)는 네 가지 시라(尸羅)의 청정을 현시한다.
   깨끗한 시라에 안주하는 것이란 이것은 소의(所依)의 근본(根本)이다.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를 수호하는 것이란 출리시라(出離尸羅)의 청정(淸淨)을 현시하니, 해탈을 구하기 위하여 출리(出離)하기 때문이다. 궤칙(軌則)과 소행(所行)이 모두 원만한 것이란 이 두 가지는 헐뜯는[譏毁] 것이 없는 시라의 청정(淸淨)을 현시한다. 작은 죄들에 대해서도 큰 포외를 보는 것이란 뚫림과 결함[穿缺] 없는 시라의 청정을 현시한다. 학처를 수학(受學)하는 것이란 전도(顚倒) 없는 시라의 청정을 현시한다. 이와 같은 6지(支)가 극히 원만하기 때문에, 증상(增上)의 계학(戒學)은 그 밖의 방편에게 소의지(所依止)가 되는 것이다.
  '4락주(樂住)를 성취한다'란 증상(增上)의 심학(心學)의 방편(方便)을 현시한다. 네 가지의 정려(靜慮)를 4심주(心住)라고 하며, 현법의 즐거움에 머물기[現法樂住] 때문에 낙(樂)이라고 하는 것이다.
  '네 가지의 각각의 4행(行)에 대하여 지혜가 항상 청정해야만 한다'란 증상(增上)의 혜학(慧學)에 의하여 설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4성제(聖諦)의 하나 하나에는 모두 곧 무상(無常) 등의 4행(行)이 있다는 것이며, 증상(增上)의 혜학(慧學)은 이 정지(淨智)60)에 의하여
  
60) 4제(諦)의 16행상(行相)을 관하는 지(智)를 말한다.
[553 / 829] 쪽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잘 근본에 머무르고 다음으로 마음의 적정(寂靜)을 즐기며, 나중에 성견(聖見)과 악견(惡見)은 상응하고 상응하지 않는다.'라는 이 게송은 증상(增上)의 3학(學)은 차례로 생기(生起)함을 현시한다. '근본(根本)'이란 증상(增上)의 계(戒)를 말하며, 뒤의 두 가지는 이 처음의 학(學)61)에서 흐르게 되는 종류에 의하기 때문이다. 이미 시라를 갖추었다면 무회(無悔) 등에 의하여 차례대로 수습하여 능히 제이(第二)의 마음의 정정(靜定)를 즐기게 되며, 마음에 정(定)을 얻은 자는 진실 그대로 보기 때문에 능히 제삼(第三)의 성견(聖見)을 성취하며 악견(惡見)을 능히 멀리 여의게[遠離] 된다.
  '먼저 깨끗이 하고[淨] 정려(靜慮)를 즐기고 그리고 진리[諦]에 대하여 선교(善巧)하며, 곧 제 진리[諦]에 대하여 생기게 하고 길이 증장해야 한다'란 이 게송은 3학(學)의 차례대로 청정(淸淨)의 차별을 현시한다.
  '먼저 깨끗이 하고'란 초학(初學)62)이며, '정려(靜慮)를 즐기고'란 제이학(第二學)63)이며, '진리에 대하여 선교하며'란 제삼학(第三學)64)이다.
  또한 이와 같은 '진리의 선교(善巧)에 대하여 '생기게 한다[應生]'란 도제(道諦)를 말하며 응당 생기(生起)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리해야 한다[應遠]'란 고(苦) 집제(集諦)를 말하며 응당 멀리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증장해야 한다'란 멸제(滅諦)를 말하며 연(軟) 중(中) 상품(上品)의 번뇌가 차례차례 수시로 점차 끊어지면서 멸(滅)을 증장하기 때문이다.
  '제 학처(學處) 가운데에 4취(趣)와 3소(所)가 있으니, 2취(趣)를 멀리 여의고[遠離] 2취(趣)를 증득한다'는 이 게송은 증상(增上)의 계(戒) 심(心) 학처(學處)를 현시한다. 수학(修學)하는 데에는 성패(成敗)가 있기 때문에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소득(所得)의 과보(果報)에는 4취(趣)의 차별(差別)이 있다는 것을 현시한다. 말하자면 욕계(欲界)의 인(人)과 천(天)에 포함되는 모든 선취(善趣)는 증상(增上)의 계(戒)를 이루는 데서 오는 과(果)이며, 즉
  
61) 증상(增上)의 계학(戒學)을 가리킨다.
62) 증상(增上)의 계학(戒學)을 가리킨다.
63) 증상(增上)의 심학(心學)을 말한다.
64) 증상(增上)의 혜학(慧學)을 가리킨다.
[554 / 829] 쪽
  욕계(欲界)의 나머지 취(趣)에 포함되는 모든 악취(惡趣)는 증상(增上)의 계(戒)를 깨뜨리는 데서 오는 과(果)이며, 색(色) 무색계(無色界)의 천취(天趣)에 포함되는 모든 위에 있는 취[上趣]는 증상(增上)의 심(心)의 과(果)이며, 3계(界)에 포함되지 않는 열반(涅槃)의 취(趣)는 증상(增上)의 혜(慧)의 과(果)이다. 이 증상(增上)의 혜(慧)의 과(果)는 위와 같이 제 취(趣) 가운데에 앞의 두 가지 선취(善趣)와 악취(惡趣)를 멀리 여의고 난 후에야 뒤에 두 가지의 위에 있는 취(趣)와 열반(涅槃)의 취(趣)를 증득해야 한다. 이 말은 세간과 출세간의 두 가지 도(道)의 소득(所得)65)을 현시한다.
  '둘은 두 가지에 안주(安住)하고 하나는 능히 열반(涅槃)에 나아가고 점차로 인연이 되어서 순잡(純雜)으로 수습(修習)한다'라는 이 게송에서는 최초(最初)의 증상의 계학(戒學)과 증상의 심학(心學)은 점차(漸次)로 능히 증상(增上)의 심학(心學)과 증상(增上)의 혜학(慧學)이 안주하는 데에 인연(因緣)이 되는 것을 현시하며, 중간(中間)의 증상의 혜(慧)와 정려(靜慮)와 율의(律儀)에 포함되는 증상의 계학(戒學)은 능히 두 가지가 안주하는 데에 인연이 되는 것을 현시하며, 최상(最上)의 한 가지는 능히 열반이 안주하는 데에 인연이 되는 것을 현시한다. 여기에서는 수습(修習)하는 데에 개별적66)이고 총체적67)으로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현시되는 줄을 알아야 한다.
  '가장 먼저[最先] 악작(惡作)을 여의고 맨 나중[最後]에 즐거움[樂]을 원만하게 성취하니[成滿)], 제 학(學)은 이를 처음[初]으로 삼아서 이 학에 대하여 총예(聰叡)한다'는 이 게송은 증상(增上)의 계학(戒學)은 무회(無悔) 등을 점차로 수습함으로써 뒤에 전인(轉因)이 되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에 의하여 지혜의 깨끗함[淨]을 닦고 깨끗함[淨]이 생겨서 즐거움이 원만하게 성취되며[成滿], 제 학(學)은 이를 중간[中]으로 삼아서 이 학에 대하여 총예(聰叡)한다'는 이 게송은 증상(增上)의 심학(心學)은 수소성(修所成)의 혜(慧)의 가장 뛰어난[最勝]의 선근(善根)을 점차게 생기게 하기
  
65) 4취(趣) 가운데 앞의 3취(趣)는 세간도(世間道)의 소득(所得)이고 열반취(涅槃趣)는 출세간도(出世間道)의 소득(所得)이다.
66) 게송에서는 '순(純)'이라고 한다.
67) 총체적으로 3학(學)을 함께 닦는 것을 게송에서는 '잡(雜)'이라고 설한다.
[555 / 829] 쪽
  때문에, 최상(最上)의 학(學)에 인(因)이 되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으로부터 마음[心]이 해탈하고 영원히 제 희론(戲論)을 멸하니, 제 학(學)은 이를 귀[尊]로 삼아서 이 학에 대하여 총예(聰叡)한다'는 이 게송은 증상(增上)의 혜학(慧學)에 의하여 능히 가장 뛰어난 열반과(涅槃果)의 인(因)이 되는 것을 현시한다.
  '만약 행(行)이 부정(不淨)을 취하고 또한 선취(善趣)를 취하면, 이 행(行)을 처음[初]이라고 설하며 이것은 함께하는 것[共]이 아님을 알라'는 이 게송은 증상(增上)의 계학(戒學)에 만약 깨뜨려 버리는[敗毁]일 있으면 악취(惡趣)의 인(因)이 되며, 만약 능히 성립(成立)하면 선취(善趣)의 인(因)이 되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은 함께하는 것이 아니니[不共], 뒤의 두 가지 학(學)을 떠나서도 능히 성립하기 때문이다.
  '만약 행(行)이 청정(淸淨)을 취하더라도 제 취(趣)가 구경(究竟)이 아니면, 이 행(行)을 중(中)이라고 설하며 역시 함께하는 것이 아님을 알라'는 이 게송은 중간(中間)의 학행(學行)은 욕계(欲界)의 욕(欲)을 여의고 청정(淸淨)을 얻기 때문에 청정(淸淨)으로 나아간다[趣]고 이름하지만, 아직은 상계(上界)의 욕(欲)을 다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또한 아직은 욕(欲)의 수면(隨眠)을 영원히 뽑지 못했기 때문에 제 취(趣) 가운데에 구경(究竟)의 청정(淸淨)을 얻었다고는 이름할 수 없다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은 최상(最上)과는 떨어져 있으면서도 또한 능히 성취[成辦]하기 때문에 불공(不共)이라고 이름하고, 최초(最初)와 분리되는 않는 것이다.
  '만약 행(行)이 청정(淸淨)을 취하고 제 취(趣)에 있어서 구경(究竟)이면, 이 행(行)을 존귀[尊]라고 설하며 이것은 반드시 함께하는 것[共]임을 알라'는 이 게송은 최상(最上)의 학행(學行)은 3계(界)의 제 욕(欲)을 모두 멀리 여의기 때문에, 또한 능히 제 수면(隨眠)을 영원히 뽑기 때문에, 제 학(學) 가운데에 최상의 구경이 되며 앞의 두 가지를 여의고 능히 홀로 성취[成辦]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함께하는 것[必共]이라고 이름한다는 것을 현시한다.
  '만약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이면 나란히 총예(聰叡)라고 알라'는 이 처음의 반 게송은 3학(學) 가운데의 총예자(聰叡者)의 상(相)을 현시하니, 정학(正學)이 있기 때문이며 사학(邪學)이 없기 때문이다.
[556 / 829] 쪽
  '만약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이면 나란히 우부(愚夫)라고 알라'는 이 후반의 반 게송은 3학(學) 가운데의 우부(愚夫)의 상(相)을 현시하니, 사학(邪學)이 있기 때문이며 정학(正學)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섭수(攝受)를 내버리고[棄捨] 또한 추중(麤重)을 끊어 없애고[斷除] 및 소지(所知)를 현견(現見)하면 3학(學)을 수지(受持)한 것이다'는 이 게송은 어떤 경우는 능히 가족과 친척 등의 섭수하는 것을 버리기 때문에, 어떤 경우는 삼마지(三摩地)의 장애인 제 추중(麤重)을 끊어 없애기 때문에, 어떤 경우는 4성제상(聖諦相)의 알아야 할[所知] 도리[理]를 현견(現見)하기 때문에, 그 차례대로 3학(學)을 원만하게 성취한다는 것[成滿]을 현시한다.
  '유연(有緣)과 무연(無緣)과 또한 세(細)와 추(麤)의 현현(顯現)은'이라는 이 처음의 반 게송은 뒤의 2학(學)과 최초(最初)의 학(學)은 그 차례대로 유연(有緣) 무연(無緣) 추(麤) 세(細)의 차별이 있다는 것을 현시한다.
  '수지(受持)와 원리(遠離)와 말[言]의 발오(發悟)에 의하여 끌어당긴 것이다'는 이 뒤의 반 게송은 초(初) 중(中) 후(後)의 그 차례대로 인발하는 인연을 현시한다. 말하자면 서원[誓期]에 의해서 끌어당긴 것이기 때문이며, 신심(身心)의 원리에 의하여 끌어당긴 것이기 때문이며, 다른 이의 언음(言音)에 의한 안의 정사유(正思惟)에 의하여 끌어당긴 것이기 때문이다.
  '초학(初學)은 오직 한 가지만이 있고 제이(第二)의 학(學)은 두 가지가 있으며, 제삼(第三)의 학(學)은 세 가지를 갖추며 지혜있는 자[慧者]는 모두 초월한다'는 이 게송의 처음의 하나는 불공(不共)을, 중간[中]은 처음을 여의지 않는다는 것을, 상(上)은 두 가지를 여의지 않고 그 일체를 초월한다는 것을 현시하니, 무학(無學)은 아라한(阿羅漢)임을 현시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시라(尸羅)를 허물어버리지[毁壞] 않고 학(學)에 대해 서원하여[誓] 능히 수순하며, 궤범(軌範)에 기론(譏論)이 없으며 5처(處)에서 원리(遠離)한다'는 이것은 뒤에 계(戒)를 수지(受持)하는 상(相)을 현시한다. '시라(尸羅)를 허물어버리지[毁壞] 않고 학(學)에 대해'란 정계(淨戒)에 안주하는 것을 말한다. '서원하여[誓] 능히 수순하며'란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를 수
 
[557 / 829] 쪽
  호(守護)하는 것을 말한다. '궤범(軌範)에 기론(譏論)이 없으며'란 궤칙(軌則)에 범하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5처(處)에서 원리(遠離)한다.'란 소행(所行)에 범하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제 비구 등은 마땅히 해서는 안 될 간략하게 5처(處)가 있으니, 왕가(王家) 창령가(唱令家) 고주가(酤酒家)68) 창예가(倡穢家) 전다라(旃茶羅)와 갈치나가(羯恥那家)를 말한다. 창령가(唱令家)란 양(羊)을 죽이는 등을 말하며, 이 양 등을 죽이는 것을 두루 알려줌[宣告]으로써 극중죄(極重罪)를 짓고 많은 악업(惡業)을 짓는다. 양 등을 살해(殺害)하기 때문이다.
  '만약 범함[犯]이 없는 출리(出離)는 악작(惡作)이 없는 악작(惡作)이며'란 여러 가지 작은 죄(罪)에 대해서 큰 포외(怖畏)를 보아서 그 출리(出離)와 같이 또한 악작(惡作)이 없고 그 악작과 같이 또한 범하는 일이 있지 않은 것을 현시한다. '그 학(學)을 심구(尋求)하면서 그리고 그의 행(行)을 부지런히 닦는다'란 학처(學處)를 수학(受學)하는 것을 현시한다.
  '끝내 저버리는 일[捨棄]이 없으며 명난(命難)도 이지러짐이 없으면서, 항상 정행(正行) 가운데에 머무르고, 비나야(毘奈耶)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이 게송의 4구(句)는 그 차례대로 항상하는 시라의 성품[常尸羅性] 견고한 시라의 성품[堅尸羅性] 항상 짓는 것이 있는 성품[恒所作性] 항상 따라 움직이는 성품[恒隨轉性]을 현시한다.
  '서원[誓]을 닦아 대치함[修治]을 우선[先]으로 하여'라는 이 처음의 반 게송은 궤범(軌範)과 명(命)의 청정(淸淨)을 현시한다. 여러 궤범(軌範)에 의해서 우선 서원(誓願)을 일으키고 비로소 이에 수행하기 때문에, 서원[誓]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2변(邊)을 모두 원리하며 또한 삿된 원[邪願]을 버린다'는 뒤의 반 게송은 욕락(欲樂)69)과 자고(自苦)70)를 수용하는 2변(邊)을 멀리 여의고[遠離] 생천(生天) 등의 서원[願]을 기쁘게 버리기[喜捨] 때문에, 시라(尸羅)의 청정(淸淨)해 지는 것을 현시한다.
  
68) 술을 파는 집을 의미한다.
69) 고(苦) 낙(樂)의 2변(邊) 가운데의 낙(樂)을 의미한다.
70) 고(苦)만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558 / 829] 쪽
  '여러 장애법(障礙法)에 대하여 끝내 빠져서 물드는 일[耽染]이 없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법[亂心法]이 생기자마자 바로 속히 원리해야 한다'는 이 게송은 제 근문(根門)을 수호(守護)하지 않는 등의 청정(淸淨)인 배워야 할 것[所學]을 장애하는 법에 대하여 공덕(功德)을 보지 않고 빠져서 물드는 일[耽染]이 없기 때문에, 제 불선(不善) 욕에(欲恚) 심(尋) 등의 의(意)를 요란(擾亂)시키는 법(法)이 비록 잠시 생기더라도 곧 제거[除遣]되기 때문에, 학(學)이 청정(淸淨)하게 되는 것을 현시한다.
  '크게 떴다가 크게 가라앉지 않고 항상 정념(正念)에 잘 안주(安住)하여, 근본(根本)의 권속(眷屬)을 깨끗이 하면서 범행(梵行)을 수행한다'는 이 게송은 미열(微劣)의 악작(惡作)을 멀리 여의기[遠離] 때문에, 비처(悲處)의 악작(惡作)을 멀리 여의기 때문에, 실념(失念)을 멀리 여의기 때문에, 구경(究竟)의 시(時)와 방편(方便)의 시(時)에서 범행(梵行)을 수행(修行)하여 모두 청
  정(淸淨)하게 되는 것을 현시한다.
 

'經典 >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가사지론 제 18 권  (0) 2007.12.24
유가사지론 제 17 권  (0) 2007.12.24
유가사지론 제 15 권  (0) 2007.12.24
유가사지론 제 14 권  (0) 2007.12.24
유가사지론 제 13 권  (0) 2007.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