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보감(人天寶鑑)
대지(大知)율사가 지은 비구의 정명(正名)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범어로는 필추(苾萩 比丘)며 중국어로는 걸사(乞士)니 안으로는 법을 빌어 성품을 돕고 밖으로는 밥을 빌어 몸을 돕는다.
부모는 사람 중에 가장 가까이 할 사람이나 가장 먼저 그 인연을 끊고, 수염과 머리카락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지만 모조리 깍아 없앤다. 칠보가 창고에 넘치는 정도의 부(富)도 초개같이 버리고 일품(一品) 벼슬에 달하는 명예〔貴〕도 구름이나 연기만도 못하게 보내면 무상(無常)함에 진저리를 내어 모든 현상〔有〕의 근본을 깊이 캔다.
뜻을 높이고자 하면 반드시 몸을 낮추어야 하니 잡고 있는 주장자는 마른 찔레나무요 들고 있는 발우는 깨진 그릇과 다를 바 없다. 어깨에 걸친 회색 옷은 다 떨어진 누더기며 팔꿈치에 둘러 맨 걸망은 영락없는 푸대자루다. 청정한 생활은 이미 팔정도에 맞고 검약한 처신은 사의행(四衣行) 에 맞으니 구주사해(九州四海)가 모두 내가 가는 길이며, 나무 밑 무덤 사이가 모두 내가 쉬는 곳이다.
삼승(三乘)의 좋은 수레를 타고 부처님이 남기신 자취를 밟으며 거룩한 가르침을 어김없이 받아 가지니 진정한 불제자다. 세상 인연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으니 실로 대장부다. 마군과 싸워 이기고 번뇌 그물을 열어 제쳐 만금의 훌륭한 공양도 받을 만하며 사생(四生)의 복밭이 되는 것도 헛된 것이 아니니 걸사라는 뜻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영원 유청 (靈源堆淸 : ? ~ 1117, 임제종 황룡파)선사는 문에다 방( )을 써 붙였다.
“나 유청은 이름만 주지일 뿐 실로 길손과도 같다. 단지 대중을 통솔하고 불법을 널리 펴서 우러러 교풍을 돕는 것을 내 직분으로 삼을 뿐이다.
절에서 관리하는 상주물(常住物)은 내 것이 아니므로 이치로 보아서도 내 마음대로 할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소임자에게 모두 위임하고 분야를 나누어 일을 맡아 보게 하되 공과 사를 분명히 하고 합당한 것은 하고 쓸모없는 것은 버릴 것이다. 나는 그저 대중과 함께 밥 먹고 옷 입고 할 뿐이며 몸에 지닌 물병과 발우만으로 인연 따라 가고 머물 뿐이다.
생각컨대 사방 납자들은 목적이 있어서 여기 왔을 것인데 침식까지는 정성껏 살펴주겠지만 나머지는 따로이 공양하기 어렵다.
그 물건들은 세속법으로는 공공물이고 불법으로는 대중의 재산이니 이것을 훔쳐 남의 마음을 사고 자기 것으로 가로채는 일은 실로 본래 세웠던 뜻에서 보면 감히 하지 못할 일이다. 일찌감치 글로 써서 알려는 바이나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지화 암주(知和庵主)는 고소(始蘇)사람인데 성품이 고결하여 세상에 물들지 않았다. 한번은 호상(澈相) 지방을 행각하다가 밤이 되어 객실에서 자게 되었는데 보교(普交 : 1048~1124)스님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다. 지화스님은 보교스님이 침착하고 온후한 데다가 말없이 밤새도록 꼿꼿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기특하게 여겨서 물었다.
“스님은 만리 낯선 길을 왜 혼자 다니시오?”
“예전에는 도반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절교했습니다.”
“어째서 절교했소?”
“한 사람은 길에서 주운 돈을 대중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돈을 똥이나 흙처럼 보아야 하는데 그대가 비록 주워서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하더라도 이는 아직 이익을 떨치지 못한 것이다.’ 그러고는 헤어졌습니다.
두번째 도반은 가난하고 병든 어머니를 버리고 도를 닦는다기에 내가 말했습니다. ‘도를 닦아 비록 불조의 경계를 넘어선다 하더라도 불효하는 이를 어디에 쓰겠는가’불효하거나 이익을 따지는 이들은 모두 내 도반은 아닙니다.”
지화스님은 그의 현명함에 존경하여 드디어 같이 행각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약속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옛날 은산(隱山)화상을 본받아 우뚝한 산꼭대기에 띠풀 암자를 짓고 구름과 하늘을 내려다보면서 세상 바깥 사람이 될 것이며, 세속에 떨어지지 말자”고.
그러나 마침내 보교스님은 맹세를 어기고 천동사(天童寺)의 주지가 되었다. 보교스님이 지화스님을 찾아갔으나 돌아보지도 않았다. 정언(正言) 진숙이(陳叔異)가 그의 서실을 암자로 만들어 주니 그곳에서 이십년을 혼자 살았다. 너절한 물건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호랑이 두 마리만이 시봉할 뿐이었다. 스님께서 한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대 나무 홈통에는 두서너 되의 찬물이 흐르고
창문 틈새 로는 예닐곱 조각 한가로운 구름이여
도인의 살림살이 이만하면 될 뿐인 걸
인간에 머물러 보고듣고 할 것인가.
竹二三什野水
間七五片閑雲
道人活計只如此
留與人間作見聞
조산 탐장(費山耽章 : 840∼901)선사는 천주(泉州) 사람인데, 동산 양개(洞山良介)선사에게서 비밀스런 종지를 받았다. 청을 받고 무주(撫州) 조산(曹山)에 처음 머물게 되었는데, 도가 널리 퍼져 납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한 스님이 물었다.
“이 나라에서 칼 만지는 이가 누구입니까?”
“나 조산이다.”
“누구를 죽이시렵니까?”
“닥치는 대로 다 죽인다.”
“홀연히 낳아주신 부모를 만나면 어찌하시렵니까?”
“무엇을 가리겠는가?”
“자기 자신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누가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어째서 죽이지 않습니까?”
“손 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또 지의 도자(紙衣道者)라는 사람이 동산(洞山)에서 찾아왔는데 스님이 물었다.
“지의(紙衣) 안에 있는 일은 어떤 것인가?”
“한 조각 가죽을 겨우 몸에 걸쳤으나 만사가 다 그럴 뿐이요.”
“그 지의 속에서는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가?”
지의 도자는 가까이 다가서더니 옷을 벗어 던지고 차수(叉手)한 채 떠났다. 그러자 스님은 웃으면서 “그대는 이렇게 갈 줄만 알았지 이렇게 올 줄은 모르는구나”하였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눈을 뜨고 말하였다.
“신령스러운 진성(眞性) 이 여자의 뱃속을 빌리지 않고 태어난다면 어떻소?”
“아직 묘하다고는 할 수 없다.”
“어떤 것이 묘한 것이요?”
“불차차(不借借).”
그러자 그는 법당에 내려와 죽었다.
당시 홍주(洪州)의 종씨(鍾氏)가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떠나지 않고 단지 대매 법상(大梅法常) 선사의 산거시(山居詩) 한 수로 답을 보냈다.
천복 신유(天復辛酉 : 901)년 6월 여름밤에 소임자에게 오늘이 몇일이냐고 물어 그가 유월 보름이라고 대답하자 스남은 이렇게 말하였다.
“평생 행각에서 반드시 구십일로 한 철을 났으니 내일 진시(辰時)에 행각길에 나서련다.”
그러고는 때가 되자 향을 사르고 입적하였다.
법운사(法雲寺) 법수(法秀 : 1027∼1090)선사는 진주(秦州) 사람인데 전생에 노화상(魯和尙)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하루는 노화상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대밭 언덕 아랫집으로 나를 찾아오시오”라고 하였다. 그 집에 아기가 태어나자 노화상이 찾아가서 보았더니 아기가 한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세살 때 노화상을 따라가겠다고 하여 출가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인물이 남달랐고 온 대중 가운데 있으면 그려놓은 듯 우뚝하고 훤칠하였다.
스님은 늘 독설〔愁罵〕로 불사를 지었다. 당시 사마온공(司馬遍公 :光)이 등용되었는데, 불법이 너무 성하다하여 이를 억제하려 하자 스님이 이렇게 말하였다.
“상공(相公)은 총명하여 사람 중에 영걸이오. 불법 인연으로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소. 그런데도 하루아침에 부처님의 부촉을 저버린단 말이오?”
그러자 공은 마음을 돌렸다.
또 이백시 (李伯時)는 말 그림을 잘 그렸는데 한간(韓幹 :당 현종때의 화가)의 말 그림 값에 뒤지지 않게 받았다. 스님은 그를 꾸짖었다.
“그대는 사대부로서 그림으로 이름이 났는데, 하물며 말 그림을 그린단 말인가?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묘를 얻었다고 봐 주기를 기대하겠지만, 공교롭게도 그대는 말 뱃속에 들어갈 것이다.”
이백시는 이에 다시는 붓을 들지 않았다.
또 황정견(蘭庭堅 :노직)이 즐겨 저속한 시를 지었고 사람들이 다투어 그것을 전하니, 스님이 이렇게 말하였다
“묘한 문장올 내게도 달갑게 시주하시오.”
그러자 황노직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도 말 뱃속으로 집어넣을 참입니까?”하자 스님이 말하였다.
“그대는 저속한 말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음난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어찌 말 뱃속에 그치랴.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고산 지원(孤山知圓)법사는 뛰어난 재주와 깊은 학문으로 경론에 대하여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서호(西湖)가에 높이 누웠으니, 권세나 부귀로 스님을 꺾을 수 없었고 속된 무리들은 스님과 벗할 수 없었다.
이 때 문목왕공(文樓王公)이 전당(錢樓)에 오게 되었는데 군(郡)의 스님네들이 모두 관문까지 마중올 나가자고 하자, 스님은 몸이 아프다면서 가지 않고는 심부름꾼을 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자운법사에게 내 말을 전하시오. 전당 땅에 중이 하나 있다고.”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일이라고 찬탄하였다.
스님은 늘 비장(脾臟)에 병이 있어 침상에 붓과 벼루를 깔아놓고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는 가운데서도 저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는 대중에게 고하였다.
“내 나이 마혼아홉인데 이미 오래 못 살 것을 안다. 내가 죽거든 땅을 골라 후하게 장례를 치러서 내 허물을 더 불리지 말라. 너희들이 항아리를 합쳐서 장사 지내다오.”
죽음에 임박해서 스스로 제문(察文)을 지어 부탁하였다.
삼가 강산(湖山)과 달구름〔雲月〕을 차려놓고 중용자(中庸子:지원법사의 호)의 영을 제사지내노라. 그대는 본래 법계의 원상(元常)이며 보배롭고 완전한 묘성(妙性)으로서, 아직까지 동정의 조짐이 없었으니 어찌 오고 감에 자취가 있겠는가 이제 일곱 구멍(七穴: 사람 몸에 나있는 구멍)을 뚫으니 혼돈(混沌)이 죽고 6근이 나뉘어 정명(精明:一心)이 흩어지게 되었도다. 그리하여 그대 스스로의 마음을 보건대 바깥 경계와 다른 바가 있도다. 생존과 사멸 두쪽을 집착해서 항상 흔들려 쉴 날이 없으며 어둑어둑히여 비출 줄을 모르는구나.
내 혼돈(混沌)을 회복하여 정명(輔明)으로 돌아가려 하노라. 그리하여 허깨비 아닌〔非幻〕법에서 허깨비 언설을 지어내는 것이니, 허깨비 아님도 없거늘 어찌 허깨비라는 법이 있으랴. 그대 중용자도 묘하게 이 뜻을 알아들을지어다. 그대가 이미 허깨비 생을 받았으니 허깨비 죽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허깨비 몸이 있어서 허깨비 병이 있게 되었고, 입으로는 허깨비 말을 빌어 허깨비 제자에게 허깨비 붓을 잡아 허깨비 글을 쓰게 하노라. 그리하여 미리 그대 허깨비 중용자를 제사 지내고 끝없는 뒷사람들에게 모든 법이 허깨비 같음을 알게 하고자 하노라.
이렇게 하면 여환삼매(#n幻三味)가 여기 있다 하리라. 아! 삼매, 그것도 허깨비로다. 잘 받아 먹으라.
그리고는 가부좌한 채 열반에 드셨다.
'성철스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철스님] 인천보감(人天寶鑑) 9 (0) | 2007.12.26 |
---|---|
[성철스님] 인천보감(人天寶鑑) 8 (0) | 2007.12.26 |
[성철스님] 오직 우리의 깨끗하고 밝은 본마음을 보려면 (0) | 2007.12.12 |
[성철스님] 인천보감(人天寶鑑) 6 (0) | 2007.12.10 |
[성철스님] 인천보감(人天寶鑑) 5 (0) | 2007.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