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보감(人天寶鑑)
정범스님(淨梵法主 ; ? ~1130)은 가화(嘉未) 사람으로, 출가하여 신오스님(神悟處謙 ; 천태종. 律과 敎를 겸행함)에게로 갔다.
스님은 깨달음〔解〕과 실천〔行〕을 겸비하였으며 법을 위해 보시로 중생을 제도하였다. 만년에 북선사(北禪寺) 살 때는 늘 시장거리에서 걸식을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말리자 이렇게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남기신 규율을 말세 사람으로서 마땅히 실천하는 것이지 남에게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스님은 몸가짐이나 대중을 거느리는 모든 일에 법도가 있었다. 그런 까닭에 스님의 법석은 절강성(漸江省) 서쪽에서 가장 모범적이었다.
스님은 문도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였다.
“하루 스물네 시간 행주좌와(行住坐臥)하는 4위의 가운데에서 지켜야 할 법문이 있으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음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든지 모조리 마업이 되어버린다.
“우선 발우를 펼 때만 해도, 광야의 귀신들이 항상 주림을 느끼다가 스님네들이 부딪치는 발우 소리를 헛듣고 주렴과 불길이 더해져서 고통이 배가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폼과 마음을 고요히 하고 난 다음에 밥을 받고 나누어 먹어라’고 이르셨다. 그러므로 백장스님의 청규(淸規)에도 발우 씻은 물을 버리면서 하는 축원이 있으니 ‘옴 마휴라 사바하’가 그것이다. 백장선사는 오직 마음〔心印〕만을 전하는 분인데도 오히려 세세한 행을 지켰는데 하물며 계율의 가르침까지 겸수하신 우리 스님이야 더 이를 게 있으랴.
“나아가서 목욕을 할 때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옛날 한 비구가 목욕을 하면서 장난치고 웃고 하다가 바른 생각〔正念〕을 잃어 뒷날 끓는 물이 튀어오르는 업보를 받은 일이 있다. 그러므로 옛 성인들께서는 마음을 잡아매어 관찰하게 하고 늘 다음과 같은 발원문을 하게 하였다.
“내 이제 육신을 씻으며 발원합니다. 중생들의 심신에 때가 없어져 안팎으로 빛나고 깨끗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선은 이 두 가지 예만 들었지만 다른 일도 다 이와 같다. 그러니 일상생활에 조심조심 노력하며 물러서서 돌이켜 보고 마음을 잘 쓰지 않을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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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 준식 (慈雲遵式 ;천태종.晋代)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사명 볍지(四明法智)스님과 40년 동안이나 도반으로 지내왔는데, 막상 죽을 때에는 그의 방 앞에서 곡 한번 하지 못했다. 그래서 탄식하다가 못내 이런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하늘엔 두 달이 없고(天上無雙月)
인간엔 스님 하나뿐(人間有一僧)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내가 아는 사람에게는 후하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박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다만 그의 깨달음과 수행이 남다르게 뛰어남을 보고 극단적인 말로써 내 감회를 펴 본 것이다.
남다르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비릉(毗陸 ; 천태종5조. 荊溪濝然) 법사도 기억하지 못한 일대장교를 다 외웠고, 남들은 수행하기 어려운 네 가지 삼매〔四三味〕1)를 모두 수행하였다. 번갈아 찾아오는 추위와 더위에도 불구하고 옆구리를 자리에 붙인 일 없이 69세에 세상을 마쳤던 것이다. 병이 갑자기 심해졌는데도 쉬지 않고 도를 닦으며 후학을 가르쳤다. 문도들이 편안히 쉬라고 청해도 듣지 않았는데, 죽고나니 사리가 부지기수로 나왔다. 아!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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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사(龍湖寺) 문선사(聞輝師)는 당나라 희종(僖宗 : 872-887) 황제의 태자였다. 얼굴과 풍채가 그려놓은 듯 맑고 반듯하여 희종이 몹시 사랑하였으나 그는 세상을 다스릴 마음이 없었다. 왕은 백방으로 손을 써서 회유하였으나 끝내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상화산(霜華山 ; 石霜慶諸禪師)의 도풍을 홈모하여 꿈속에서 보곤 하였다.
중화(中和) 원년(881)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드디어 머리를 깎고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녔으나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석상 경저(石霜慶諸 ; 807-888) 선사를 찾아가니 선사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는 이렇게 감탄하였다.
“그대는 원력 덕에 왕가에 태어났으나 이제 그 몸을 벗고 나를 따르려하니 참으로 불속의 부용꽃이로다.”
밤이 되자 문선사는 방장실에 들어가 간청하였다.
“조사께서 따로 전하신 일을 가르쳐 주시렵니까?”
“조사를 비방하지 마라.”
“천하에 이 종지가 널리 퍼졌는데 그것이 빈 말이었습니까?”
“안산(按山)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 가서 그대에게 말해주겠다.”
문선사는 그날로 작별하고 떠났다. 소무성(邵武城) 바깥에 이르러 그곳 산이 깊고 울창한 것을 보고는 풀을 헤치고 들어갔는데, 거기서 은거하는 고행승을 만났다. 그는 흔쾌히 자기 토굴을 내어주면서 말하였다.
“스님께서 이곳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고는 깊숙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 떠났는데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문선사는 그곳에서 십여 년을 머물게 되었는데, 하루는 한 노인이 찾아와서 말하였다.
“나는 사람이 아니고 용(龍)입니다. 비를 내리는 일을 잘못하여 하늘의 벌을 받았는데 도력을 빌어야 이곳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더니 작은 뱀으로 둔갑하여 소매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렸다.
밤이 되자 바람과 천둥이 선상을 뒤흔들며 산악이 진동하였으나 문선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꼿꼿이 앉아 있었다. 날이 새고 하늘이 개니 뱀은 땅에 내려와 어디론가 가버리고, 얼마 있으니 노인이 나타나서 사례하였다.
“대사의 힘이 아니었으면 피비린내로 이 산을 더럽힐 뻔하였습니다. 무엇으로 보답할 길이 없으니 바위 밑에 구멍을 파서 샘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뒷날 대중이 모이면 물이 많이 모자라게 될 것이니 그래서 스님을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그 샘은 지금 호수가 되었고 이 인연으로 용호사(龍湖寺)라 이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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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사(仗錫寺) 수기(修己) 선사는 부산 법원(浮山法遠) 선사와 함께 행각하였고, 여산(盧山) 불수암(佛手嚴)에 암자를 짓고 살기도 하였다.
뒷날에는 사명산(四明山) 깊숙히 들어가 십여년을 홀로 살았는데, 범과 표범이 나타나도 삼매를 닦은 힘 때문에 한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한번은 이렇게 말하였다.
구불구불 험한 산길에 찾아오는 사람 없고
적막한 구름 속에 한 사람뿐이어라
羊膓鳥道無人到 寂寞雲中一箇人
뒤에 승-속이 모두 그의 도풍을 듣고 홈모하게 되었는데, 산에 산 지 사십여년 되어 집안에 쌓아둔 물건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누더기 한 벌로 지내며 오직 절 일으킬 것만을 생각하여, 여러 해에 걸쳐 힘쓴 끝에 선림을 이루게 되었다. 대중들에게 필요한 물건은 많이 갖추어 놓았으나 방장실만은 짓지 않고 대중과 함께 거처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수기선사가 방을 따로 쓰면서 편안하게 지내는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지사(知事) 온궁(蘊躬)이라는 사람이 선사가 먼 곳에 출타한 틈을 타서 방장실을 지어놓았다. 당시 달관(達觀) 담영(曇穎) 선사는 설두산(雪竇山)에서 법을 펴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이렇게 감탄하였다.
“본색종장이 아니면 좋은 보필이 있을 수 없고 좋은 보필자가 아니라면 도인의 덕을 높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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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재 원정(辯才元凈) 법사는 항주(杭州) 어잠(於潛) 사람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왼쪽 어깨살이 가사의 매듭같이 솟아올라 있었다가 81일 만에 없어지니 그의 아버지가 감탄하여 말했다.
“이 아이는 전생에 사문이었느니 그 원(願)을 빼앗지 말고 자라면 부처님을 모시게 하겠다.”
법사가 세상을 떠난 그 해가 실로 81세였으니 아마도 이는 숙명인 것 같다. 출가한 후에는 법좌를 볼 때마다 감탄하며 말하기를 “저기에 올라 설법을 해서 사람들을 제도하는 것이 나의 원(願)이다”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자운(慈雲)스님을 찾아가서 밤낮으로 열심히 정진하였다. 배움과 실천이 함께 향상하여 몇해 안 가서 자운스님의 상좌들과 나란히 앉게 되었는데, 자운스님이 죽고 난 뒤에는 다시 사명 조소(四明祖韶)스님을 모셨다. 조소스님이 천태지관(天台止觀)을 가르치다가 “한끼의 밥으로 일체에게 보시하며 모든 불보살에게 공양한 다음에야 먹을 수 있다” 하신 방편오연(方便五緣)에 나오는 유마거사의 말씀까지를 이야기하니, 원정스님은 그 말 끝에 깨달음을 얻고 말하였다.
“오늘에야 마침내 색, 소리, 냄새, 맛이 본래 제일의제(第一義啼)를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사물을 대할 대 마음 속에 의심이 없을 것입니다.
당시 심숙재(沈叔才)가 항주(杭州)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생각하였다. “관음도량(觀音道場)은 경공부와 참회로 불사를 하는 곳이니 선수행자들이 살곳은 아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님에게 교학하던 곳을 선도량으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스님이 그곳에 도착하자 오월(吳越) 사람들은 마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기라도 한 것처럼 귀의하고 부모를 공양하듯 스님을 모셨다. 돈, 베, 비단 등의 보시가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천축사(天竺寺)에 머문 지 14년 되던 해, 그 절의 부(富)를 탐내는 사람이 스님을 협박하여 쫓아내니, 스님은 기꺼이 떠나면서 그것을 마음에 품지 않았다. 이 일로 천축사 대중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사건이 조정에 알려져 다음 해에 스님이 다시 옛사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스님은 마지못해 돌아오는 듯하였고, 대중들은 다시 크게 모였다. 스님과 세속의 도반이었던 조청헌(趙淸獻)은 이 일을 보고 찬(讚)을 지었다.
스님께서 천축사를 떠나니
산은 비고 귀신이 울었는데
천축사에 스님께서 돌아오니
도량에는 빛이 찬란하도다.
師去天竺山空鬼哭
天竺師歸道場光輝
스님은 그곳에 다시 이년을 머물다가 하루는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성인이었던 우리 조사 지자(智者)대사도 중생 교화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기에, 수행위로는 철륜왕(鐵輪王)1)이 되어야 하는데도 오품위(五品位)1) 까지 밖에 증득하지 못하셨는데, 하물며 나 같은 범부야•••” 하고는 그곳을 떠나서 종남산(終南山) 용정(龍井)에서 노년을 보냈다.
갈대와 대나무로 지붕을 덮고, 문 닫고 좌선하여 종일 아무 소리가 없었다. 이는 나뭇잎이 떨어지고 뿌리가 자라는 겨울의 마른 나무와 같은 경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가라앉은 옛우물과도 같은 경지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스님을 ‘눌(訥;말더듬이)’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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