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른 인생관
초기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교만할 때는 더러 당신 몸을 하늘로 나투셔서 하늘을 걷고 나는 모습 등을 보이셨는데, 그것은 동화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안 믿는 분들께 알려드릴 길이 없어서 답답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정통 조사는 모두가 다 중생이 말을 안 들으면 그냥 신통지혜를 갖추셔서 몸으로 보여주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중생들의 마음을 다 조복시킨단 말입니다. 그런 지혜가 우리한테도 다 분명히 다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런 신통묘지를 갖추고 우리가 참선 공부나 염불 공부를 한다면 그런 도리에 걸음걸음 가까워집니다.
그와 같은 우리 중생들이 무엇 때문에 있지도 않은 그림자 같은 물질 때문에 다투고 싸우겠습니까? 또 권력이나 감투 같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두가 다 유루(有漏)라고 하는 유물주의에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병 때문에 사회가 혼란스럽고 도덕도 피폐했습니다. 그러나 그 병을 고치려면 그저 윤리를 바르게 한다거나 남한테 베풀라는 식으로는 곤란합니다. 그 정도로는 이 총명한 시대에 통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바른 인생관을 지녀야 합니다. 내 생명은 원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사는 집도 따지고 보면 내 것이 아니고, 내 재산이나 내 권리나 모두가 다 내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사회는 자연스럽게 평등이 되고, 평화스러워지고, 자유롭게 됩니다.
우리는 금생에 나와서 배운 것이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집에서 배운 것이나 학교에서 배운 것이나, 대학에서까지 배웠다 하더라도 모두가 '있다' '없다'고 하는 공간성과 시간성의 범위 내에서 배웠습니다.
사실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철학하는 사람들 외에는 거의 못 배웁니다. 그러므로 승려가 되어도 '있다'는 생각을 떠나기 어렵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못 느끼고는, 반야사상을 왔다갔다한다 하더라도 공부가 별로 진전이 없습니다. 과거 전생에 사람으로 있다가 또는 다른 동물로 있다가, 천상에도 있다가 또는 더러 보살도 되었다가, 이렇게 돌고 돌다가 금생에 왔는데, 금생에 또한 나쁜 버릇만 많이 배웠습니다. 나쁜 버릇만 많이 심어 놓아서 그 습성을 떼자니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 습성을 뽑아버리기 위해서 기도도 모시고 참선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과 싸울 때 집중적으로 공격을 해야지 싸우다 말다 싸우다 말다 하면 결국은 적이 다시 세력을 만회해 가지고 덤벼 온단 말입니다.
번뇌와 싸울 때도 집중적으로 번뇌를 조복받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삼동결제(三冬結制)나 백일기도를 합니다. 공부하는 우리 스님들, 얼마나 소중한 스님들이십니까? 출가하신 스님네들이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상객(上客)이라 하여 '오호사해위상객(五湖四海爲上客)'이라 하지 않습니까?
재가불자님들께서는 우리가 공부도 제대로 못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면 '하나의 아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스님이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젊은 나이에 온갖 오욕을 뿌리치고 스님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삼동 동안, 또 여름 석 달 동안 산문(山門)도 안 나가고 오직 부처님을 지향하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있다, 없다' 하는 나쁜 습성이 별로 많지 않아서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습성이 짙은, 업장이 무거운 중생들은 할 수가 없는 노릇이 스님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스님들 가운데는 더러 명실상부하지 못한 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체로 오호사해위상객입니다. 중생 가운데 상객입니다. 우리 출가한 상객들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최상의 도리인 '심즉시불(心卽是佛)', 즉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 즉 마음과 중생과 부처의 이 셋이 원래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도리를 증명해 보이도록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우주는 오직 부처님 하나일 뿐입니다. 부처님 일원주의입니다. 오직 불심인 것입니다. 물질은 중생이 잘못 보아서 상(相)을 보고 물질이라 하는 것이지, 순간마다 변화해 마지않는 것이 물질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스님네는 '물질은 없다'는 생각을 꼭 하시고 공부를 해야 할 것이고, 우리 재가불자님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 의지해 나올 때 우리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는 중음계에서 식(識)으로 헤매다가 부모님 연(緣)을 따라 태중에 들어가서 이렇게 인간이 되었습니다. 죽은 뒤에 우리 식은 식대로 갑니다. 우리 몸은 지수화풍 사대가 각각 지(地)는 지대로, 수(水)는 수대로, 화(火)는 화대로, 풍(風)은 풍대로, 산소는 산소대로, 수소는 수소대로 다 흩어지고 맙니다. 지금 이 몸은 전생이나 내생에는 분명히 없습니다. 이런 도리는 우리가 대체로 알지만, 이대로 공(空)인 줄은 잘 모릅니다. 이대로 공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물질이 그대로 공이라 하여 '색즉공'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마음만 열어서 제법이 공하다는 도리를 안다면 걸림이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공부는 순풍에 돛단배입니다. 우리 사부대중들께서도 모두가 다 허망하다고 먼저 아셔야 합니다. 허망하다고 해서 어버이 도리를 함부로 한다거나 또는 게으름 부린다거나 하는 것은 공도리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은 소중한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실상도리를 순간 찰나도 안 여의고 공부하기 위해서 염불이 있고 주문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실상도리를 안 여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화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가 무엇인가[如何是佛]?"나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如何是祖師西來意]?"또는"본래면목이 무엇인가[如何是本來面目]?"와 같은 것은 모두 우리가 진여불성의 도리를 깨우칠 수 있도록 이래저래 서술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선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참말로 알았으면 가만히 묵조(默照)해서 그대로 비춰 보아도 무방합니다. 본체성, 근본 진여불성 자리만 여의지 않으면 염불을 해도 선(禪)이요, 가만히 비추어 명상을 해도 선인 것이고, 화두를 의심해도 선입니다. 물론 참선 공부에는 문자와 이치로만 알고, 참답게 닦지 않는 문자선(文字禪)도 있고, 자기 마음이 얼마만큼 밝아 있는가, 혹은 내 마음이 얼마만큼 닦여 있는지도 모르면서 하는 암중선(暗中禪)도 있습니다. 그러한 잘못된 참선도 있습니다.
공부할 때는 무수히 많은 경계가 나옵니다. 성불까지 단박에 벗는 분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특수한 경우이고, 석가모니 부처님도 육 년 고행을 하셨듯이, 우리 중생들이야말로 오랜 세월 동안 닦고 닦아 습기가 녹아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단박에 되기는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과정에서 무수한 경계가 나옵니다. 더러는 기쁘고 더러는 부처님 같은 모양도 나오고, 더러는 광명도 비춥니다. 그런 모양들은 모두 다 허상입니다.
내 몸 자체가 천지우주의 진여불성과 하나가 되기 전에는 모두가 허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경계가 오든 간에 실상이 아니라고 느껴야 합니다. 그렇게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특별히 스승도 필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꼭 마음을 훤히 열어버려서, 정말로 습기를 녹여서, 진여불성 자리를 한사코 증명하실 것을 기원하며 부탁드립니다. 사회에 참여를 한다 하더라도 나나 너나 모두가 다 하나인 본질자리, 본성품 자리를 깨닫는 데에다 역점을 두는 것이 참다운 사회참여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근본적인 사회병리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사회참여를 못했습니까? 사회주의가 사회참여를 못했습니까? 함부로 참여하면 날뛰기만 하는 결과가 됩니다. 아무 도움도 못 됩니다. 본질적으로 내 자성이 무엇이며, 우주의 본질은 또 무엇인가 하는 것, 즉 우주는 모두 다 진여불성의 생명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자리를 깨닫기 위해서 나가는 길이면 다 참다운 사회참여가 됩니다. 설사 선방에 있든, 자기 방에서 명상만 하고 있든, 또는 사회에 나가서 기치를 들고 이런저런 자기 주의(主義)를 표방하고 운동권이 되든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진여불성 자리, 우주의 본래성품 자리를 분명히 자기가 깨닫고자 애쓰고, 또는 만중생이 깨닫도록 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지닐 때는 농장에 있으나 회사에 있으나 공장에 있으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진정한 사회참여입니다.
이렇게 해서 꼭 금생에 위없는 대도를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관세음보살.
<불기 2535년 11월, 태안사 동안거 결제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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