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가장 행복한 공부] 정진-②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通達無我法者 2008. 1. 21. 09:27

    가장 행복한 공부


-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현대의 병은 무엇인가? 유물주의(唯物主義)라는 병입니다. 내 몸도 물질이고, 다이아몬드도 물질이고, 산도 물질이고 다 물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물질, 이것이 우리 중생이 보는 그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물론적인 제도는 설사 인간의 간혜지(乾慧地)로 이모저모 변용시킨다 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우주의 도리에 어긋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을 간 뒤에 봄이 바로 오겠습니까? 응당 겨울이 와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천지우주의 도리 그대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법이자연(法爾自然)이라고 합니다. 즉 조금도 무리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보는 눈이 짧아서 자기의 본래면목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자기가 아는 것이 절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대체 무엇을 아는 것입니까? 제법이 허망한 것인데 공도리를 모릅니다. 연기법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공의 도리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사상은 법계연기(法界緣起)입니다. 우주의 실상, 우주에 충만해 있는 끝도 갓도 없는 진여불성이 인연 따라서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진여연기(眞如緣起), 법계연기(法界緣起)라 합니다.

잘나나 못나나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두가 다 진여불성 자리에서 이렇게 저렇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바다에서 바람 따라 이루어진 파도가 똑같은 물이듯이, 법성에서 이루어진 일체 존재 모두가 그대로 진여불성입니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생물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 도리입니다. 돌이요, 나무요, 사람이요 다 다르지만, 본성품에서 본다면 모두가 다 하나의 부처님 성품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겉으로 드러난 상(相)밖에는 못 봅니다. 현상밖에는 못 봅니다. 현상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무상이요 무아요 공이란 말입니다.

참선이란 어떤 것인가? 부처님 공부는, 부처님께서 설사 유루적(有漏的)인 간단하고 쉬운 말씀을 하셨다 하더라도 가상(假相)을 떠나고, 가명(假名)을 떠나서 실상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는 그와 같이 유루적인, 있다 없다 하는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을 떠나야 합니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원래는 실상이 없습니다. 다만 가상으로만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공도 그냥 공이 아닙니다. 허무한 공이라 하면 인연 따라서 일어날 필요가 없겠지요. 진여불성, 우주의 본성은 바로 내 마음의 본성입니다. 내 마음이라는 것은 물질이 아닌 하나의 정신 아니겠습니까? 생명입니다. 우주는 어떤 형상으로 있든 간에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생명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한정적으로 여기에 있거나 저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공간성이 있는 물질이라면 여기가 있고, 저기가 있고, 대소 장단이 있겠습니다만, 공간성과 시간성이 없는, 따라서 물질이 아닌 순수생명 자리는 여기 있고, 저기 있고 또는 생겨나거나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반야심경》에서도 분명히 말씀하신,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또는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다는 도리를 그냥 방편설로 우리한테 하신 게 아닙니다. 우주의 실상 그대로를 말씀하신 겁니다.

참선 공부는 이런저런 방편설을 다 제해 버리고 심즉시불(心卽是佛), 즉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깨닫자는 공부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나무 그러면 나무 그대로 부처이고, 꽃 그러면 꽃 그대로 부처입니다. 우주의 실상 그 자리, 불성 그 자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두워서 못 볼 뿐, 밝은 눈으로 본다면 모든 것이 바로 그대로 부처란 말입니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천파만파의 파도라든가 수십억 개 되는 거품 모두가 다 그대로 물이듯이, 이 현상계를 이루는 삼라만상, 하늘에 있는 모든 별이라든가 일체 존재가 그대로 바로 부처입니다.

이렇게 믿고 하는 공부가 참선 공부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바로 돈오입니다. 이것이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의 도리입니다. 참선 공부라 하는 것은 마음 열고 하는 공부입니다. 마음을 닫아 놓고서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저것이 있고 이것이 있고, 이렇게 걸림이 있는 공부는 참선 공부가 못 됩니다. 석가모니와 내가 둘이 아닙니다. 또는 한 마리 곤충과 내가 둘이 아닙니다.

인류는 20세기의 문명사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만, 현대의 고도 산업사회는 단지 물질을 많이 만들고 자기가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면서 모두가 물질이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물질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어서 내가 많이 소유하려면 다른 사람들은 적게 소유해야 되므로 싸우고 맙니다. 따라서 유물주의 사상에 입각한 자본주의, 또는 공산주의 등은 결국 우주의 진리에 따르지 않았으므로 인류에게 해악을 남기고 결국에는 붕괴되고 맙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도 한두 번 시행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공산주의가 무너졌으니까 앞으로는 자본주의 사회가 옳다고 생각해서 정말로 자유경쟁을 하고, 끝도 갓도 없이 소유관념을 확대해 간다면 그것 역시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부처님주의 혹은 생명주의, 즉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우리가 성공도 하고 마음도 편하고, 드디어는 해탈을 하게 됩니다. 살생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음란한 짓 하지 말라는 등의 부처님 계율도 그냥 부처님께서 도덕적인 차원을 위해서 덕목으로 시설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도리로 보아 우주는 하나의 생명이니까 진여불성의 도리에 따르는 것이 계율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함부로 해버립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것저것, 가지, 이파리 다 제해 버리고서 근본 줄기와 뿌리만 가지고 하는 공부, 이것이 참선 공부입니다. 따라서 중국을 거쳐 온 조사선 도리는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꼭 거쳐야 하고, 가장 발전된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스님께서도, "내 법문은 본체를 안 여읜다"고 하셨습니다. 상(相)에 걸리지 않고 본체를 여의지 않는단 말입니다. 본체를 여의지 않아야 참선입니다. '이뭣고'를 하고 '무(無)'자를 들고, 어떠한 화두를 든다 하더라도 본체를 떠나서 그냥 의심만 품어서는 참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하였습니다. 참선은 바로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바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우주만물은 오로지 불심뿐입니다.

중세의 데카르트나 여러 철인들은 물질 따로 마음 따로, 이른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주장했습니다. 사실 서구문명은 대체로 이러한 물심 양원론(兩元論)과 창조주 하나님에게 우리가 섭리를 받는다는 두 가지 사상이 지배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창조주 하느님이 우주를 지배한다'는 식의 서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허심탄회하게 기독교 성경을 본다면,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확대시켜 말하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우리 사람을 떠나서 대상적으로 하늘 어디엔가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면, 기독교는 그야말로 형편없는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고 하질 않습니까? 아니 계신 데가 없고, 또 능히 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이른바 범신론이 되어야 기독교의 가르침이 참다운 진리가 됩니다.

아무튼 어설픈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하느님이 우리 밖의 저 하늘에 계시다가 우리가 잘못하면 벌을 주고, 또 종말론이 있어서 천구백 어느 해에 천지우주가 다 파괴되어 기독교를 믿는 사람만이 '휴거', 즉 선택받아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식의 가르침이 20세기의 문명시대를 풍미했습니다.

- 참철학 참종교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것은 정말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입니다. 어쩌다가 금생에 다행히 부처님 법을 만났습니다. 부처님 법은 무가정(無假定)의 원리입니다. 이것저것 다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과학도 가장 참과학이고, 철학도 가장 참철학이고, 종교도 가장 참종교입니다. 따라서 참선 공부를 할 때는 먼저 신(信)이 앞서야 합니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화두를 의심하면 참선이고,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본체를 본 사람, 법성자리를 아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본체가 여기 있고, 저기 있고 하겠습니까?

여기 있고 저기 있다면 그것은 진여불성이 아닙니다. 우주는 진여불성 하나일 뿐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가르침은 진여불성 일원론입니다. 우주는 오직 불심일 뿐입니다. 불심 이외에 다른 것이 있지 않습니다. 진여불성이 연기법을 따라서, 법계연기를 따라서 우주가 이루어지고 사람이 생겨나고 다른 모든 것이 이루어지곤 합니다. 따라서 물질이 아닌 우주의 정기인 진여불성이 우주가 되고 무엇이 되고 했기 때문에 설사 상(相)으로 해서 사람 같은 상을 나투든, 산(山)과 같은 모양으로 있건 그런 것은 물질이 아니라, 산 그대로 바로 불성이고 사람 그대로 바로 불성입니다. 그러기에 보조국사가 어록의 돈오에서도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한 것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이며, 본래로 모두 부처인 것입니다.

본래 바로 부처라는 것은 사람만이 바로 부처란 말이 아닙니다. 어떤 당체, 책상이면 책상 모두가 다 그대로 부처입니다. 다만 중생이 못 볼 뿐입니다. 설사 중생이 못 본다 하더라도, 석가모니를 위시한 무수한 성자들이 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을 먼저 믿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참선도 먼저 신(信)이 앞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흐리멍덩한 눈으로 봐서 안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우주 이대로 진여불성이요, 이대로 비로자나불이요, 이대로 충만한 광명의 세계요, 이대로 극락세계입니다. 경(經)에 더러는 극락세계가 저 십만 억 국토 밖에 있다고 하나, 이것은 우리 중생이 너무 모르니까, 그렇게 말씀하셔야 중생이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같이 모든 물질이 다 비어 있고 물질의 근본이 에너지뿐이라는 대명천지 과학문명시대에 와서는 그런 법문이 통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 저 공간세계에 극락세계가 있고,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의 식(識)이 맑은 정도에 따라서 맑은 식이 사는 색계(色界)도 있고, 무색계(無色界)도 있습니다. 가장 맑아서 천지우주의 본래적인 진여불성과 같은, 맑은 식이 사는 세계가 극락세계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 마음이 참말로 맑아서 한 점도 티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 자리에서 바로 극락의 행복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몸이 저 공간 속에 몇만 리 성층권에 있으나, 자기권에 있으나 또는 전리권(電離圈)에 있으나, 공중 높이에 있으나, 지금 이 자리에 있으나 할 것 없습니다. 어디에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 식이 얼마만큼 맑은가에 따라서 인간 정도 맑으면 이 대기권 속에서 고생만 하는 것이고, 더 맑으면 그때는 저 공거천(空居天)이라는 높은 차원의 세계에서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보조국사 어록에서 말한 것처럼, 본래시불, 즉 본래 부처이므로 때묻지 않은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자성을 본래로부터 갖추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할 데 없이 깨끗하여 한 점도 때묻지 않은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상(相)으로 볼 때는 이것은 허망한 것이지만, 본성품으로 볼 때는 우리 모두가 이대로 석가모니의 지혜, 예수의 지혜, 공자의 지혜와 같은 무량의 지혜를 갖추고 있습니다. 참선 공부하는 신앙은 이런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부터 어느 것과 비교해도, 설사 진여불성과 비교한다 해도 전혀 차이가 없는 불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불성 차원에서는 나나 너나 여기 지금 우리는 다 불성일 뿐입니다. 이 공간이라고 불성이 아니겠습니까? 공간은 산소나 수소 등으로 채워져 있는 공간인데, 산소나 수소나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본래 성품은 진여불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여불성 차원에서 본다면, 나만을 위해서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나를 위해서 남을 구박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열려서 자타(自他)가 없고, 천지우주에 참말로 있는 것은 공간성도 시간성도 인과율도 초월한 진여불성뿐이라고 생각해야 비로소 참선하는 마음의 준비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확실히 믿을 때만 마음을 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 열고 하는 공부가 참선 공부입니다. 염불을 하든 주문을 하든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염불이나 주문이나 명상이나 부처님 공부는 모두가 다 마음 열고 하는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중생이 모르기 때문에 그때그때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이래저래 말씀하신 것이지, 부처님의 참뜻은 시간성, 공간성, 또는 인과율을 떠나버린 참다운 진여불성에 있습니다. 법계, 법성, 여래장(如來藏) 모두가 다 같은 뜻입니다. 그러한 법계 도리를 확실히 믿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런 때는 화두를 들어도 좋고, 염불을 해도 무방하고 또는 주문을 외워도 무방합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인 자리를 알았다 하더라도 아직은 해오(解悟), 즉 이치로만 알았단 말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정도로는 생사해탈이 못 됩니다. 그러므로 닦고 닦아서 증오(證悟)를 해야 합니다. 불성광명을 증명하는 그런 깨달음이 되어야 참다운 깨달음인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 탐욕심도 번뇌도 어리석은 마음인 무명도 뿌리를 뽑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삼명육통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량하고 부사의한 부처님의 지혜를 다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진여불성은 우주의 본래면목인 동시에 삼명육통, 무량한 신통 지혜를 다 갖춘 그 자리입니다. 그렇게 믿어야 그렇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