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산록(僞山錄)

2-5. 상당

通達無我法者 2008. 2. 15. 18:00
 

41.

스님께서 하루는 향엄스님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백장스님의 처소에 살면서,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하고 열을 물으면 백을 대답했다고 하던데 이는 그대가 총명하고 영리하여 이해력이 뛰어났기 때문일 줄 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생사의 근본이다. 부모가 낳아주기 전 그대의 본래면목에 대해 한마디 말해 보아라."

향엄스님은 이 질문을 받고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방으로 되돌아와 평소에 보았던 모든 책을 뒤져가며 적절한 대답을 찾으려고 애를 써 보았으나 끝내는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탄식하며 말하였다.

"그림 속의 떡은 주린 배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런 뒤로 향엄스님은 여러번 스님께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였으나 그럴 때마다 스님은 말씀하셨다.

"만일 그대에게 말해준다면 그대는 뒷날 나를 욕할 것이네. 무엇이든 내가 설명하는 것은 내 일일 뿐 결코 그대의 수행과는 관계가 없느니라."

향엄스님은 이윽고 평소에 보았던 책들을 태워버리면서 말하였다.

"금생에서는 더이상 불법을 배우지 않고 이제부터는 그저 멀리 떠돌아다니면서 얻어 먹는 밥중노릇이나 하면서 이 몸둥이나 좀 편하게 지내리라."

이리하여 눈물을 흘리며 스님을 하직하였다. 곧바로 남양(南陽) 지방을 지나다가 혜충국사(慧忠國師)의 탑을 참배하고는 마침내 그곳에서 쉬게 되었다.

하루는 잡초와 나무를 베다가 우연히 기왓장 한 조각을 집어 던졌는데 그것이 대나무에 "딱"부딪치는 소리를 듣고는 단박에 깨닫게 되었다. 향엄스님은 급히 거처로 돌아와 목욕 분향하고 멀리 계시는 스님(위산)께 절을 올리고는 말하였다.

"스님의 큰 자비여! 부모의 은혜보다 더 크십니다. 만일 그때 저에게 말로 설명해 주셨더라면 어찌 오늘의 이 깨달음이


있을 수 있겠읍니까!"

이에 게송을 읊었다.

딱 소리에 알던 바를 잊으니

다시는 닦을 필요 없게 되었네

덩실덩실 옛길을 넘나드니

초췌한 처지에 빠질 리 없어라

곳곳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빛과 소리를 벗어난 몸짓이니

제방의 도를 아는 이들은

모두가 상상기(上上機)라 하더라.

一擊忘所知 更不假修時

動容揚古路 不墮悄然機

處處無蹤迹 聲色外威儀

諸方達道者 咸言上上機

스님께서 들으시고는 앙산스님에게 "향엄이 확철대오했구나" 하시자 앙산스님은 "이 게송은 알음알이로 따져서 쓴 것입니다. 제가 직접 확인해볼 터이니 기다리십시오" 하였다.

앙산스님이 그 후 향엄스님을 보고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사제(師弟)가 깨달은 일을 칭찬하셨는데 그 일을 한번 말해보게."

향엄스님이 일전에 읊었던 게송을 다시 들먹이자 앙산스님은 말하였다.

"이는 지난번 일을 기억으로 말하는 것이네. 정말로 깨쳤다면 달리 설명해보게."

향엄스님이 또 게송을 지어 말하였다.

지난해 가난은 가난이 아니고

금년의 가난이 진짜 가난이네

작년의 가난은 바늘 꽂을 땅이라도 있더니

금년의 가난은 바늘마저 없구나

去年貧未是貧 今年貧始是貧

去年貧猶有¿錐之地 今年貧錐也無

앙산스님은 말하였다.

"여래선(如來禪)은 사제가 알았다고 인정하겠네만 조사선(祖師禪)은 꿈에서도 보지 못하고 있군."

향엄스님은 다시 게송을 지어 말하였다.

나에게 한 기틀 있어

눈 깜박하는 사이에 그것을 보네

이 이치를 깨치지 못하는 자에게

더이상 사미(沙邇)라 부르지 말지어다!

我有一機 瞬目視伊

若人不會 別喚沙邇


앙산스님은 이에 스님께 보고드리고 말하였다.

"반갑게도 지한(智閑)사제가 조사선을 알았습니다."

현각(玄覺)스님은 말하였다.

"말해보라! 여래선과 조사선이 나뉠 수 있는지 없는지."

장경 혜릉(長慶慧稜:854~932)스님은 말하였다.

"한꺼번에 눌러버렸다."


운거 청석(雲居淸錫)스님은 따져 물었다.

"대중 가운데서 여래선은 얕고 조사선은 깊다고들 생각하는데, 향엄의 경우 당시에 어째서 `무엇이 조사선입니까?'하고 묻질 않았을까? 이 한마디 질문을 하였더라면 어느 곳에 조사선이 있으랴?"

낭야 혜각(慧覺)스님은 말하였다.

"무제(武帝)는 신선이 되고자 했으나 신선이 되지 못하였고, 왕교(王橋)는 단정히 앉아서 하늘로 올랐다."

위산 철(山喆)스님은 말하였다.

"향엄스님은 위로는 한 조각의 기와도 없고, 아래로는 꽂을 바늘도 없이 적나라하여 손을 댈 곳이 없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앙산스님이 아니었더라면 그를 놓칠 뻔했다. 어째서인가? 차디찬 눈과 서리가 없으면 송백(松栢)의 지조를 어찌 알겠는가!"

대혜 종고(大慧宗)스님은 말하였다.

"위산스님이 만년에 훌륭하였는데, 즉 한 장대의 육고기 꼭둑각시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이 정말 훌륭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정말 훌륭한 점일까? 얼굴마다 서로 보며 손발을 움직이나 말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임을 어찌 알랴!"


42.

스님께서 상당(上堂)하여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대기(大機)를 얻었을 뿐 대용(大用)을 얻지는 못하였다."

이때에 구봉 도건(九峯道虔)스님이 대중 가운데서 쓱 빠져나갔다. 스님께서 그를 불렀으나 다시는 돌아보질 않았으므로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법기(法器)가 될만하군."

하루는 스님을 하직하며 구봉스님이 말하였다.

"저는 스님을 이별하고 떠나갑니다만 천리 밖에서도 좌우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안색이 변하며 말씀하셨다.

"잘 해보게."

43.

영운 지근(靈雲圍勤)스님이 처음 위산에 있으면서 복숭아꽃을 보고는 도를 깨닫고 게송을 읊었다.

검(劍)을 찾기 30년 세월

몇 번이나 낙엽지고 싹이 돋았나

복숭아꽃 한번 본 뒤로는

지금까지 다시는 의심치 않네.


三十年來尋劍客 幾回落葉又抽卿

自從一見桃華後 直至如今更不疑


스님은 이 게송을 보시고 그가 깨달은 것을 따져 물어 서로 부합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연 따라 깨달아 통달하였으니 영원히 물러나거나 잃지 말고 잘 간직하여라."

44.

상림(上林)스님이 와서 참례하자 스님은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찌하여 왔는가?"

"갑옷과 투구를 완전히 갖추었습니다."

"모조리 풀어버리고 와야만 나를 만날 수 있네."

"풀어버렸습니다."

스님은 혀를 차시면서 말씀하셨다.

"쯧쯧, 도적도 아직 쫓지 않았는데 풀어버리고 어찌 하겠다는건가?"

상림스님이 대꾸가 없자 앙산스님이 대신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쳐 주십시오."

스님께서 손으로 읍(揖)을 하시며 "네, 네" 하셨다.

상림스님은 그 뒤 영태(永泰)스님을 참례하고서야 그 뜻을 깨닫게 되었다.

45.

소산 광인(疏山翠人)스님이 참례하러 왔다가 스님께서 시중(示衆)하시는 것을 들었다.

"행각(行脚)하는 선객이라면 모름지기 소리나 물질〔聲色〕 안에서 잠을 자고, 소리나 물질 안에서 앉고 누워야만 하느니라."

그러자 소산스님이 질문하였다.

"어떤 것이 소리나 물질에 떨어지지 않는 소식입니까?"

스님께서 불자를 번쩍 세우자 소산스님은 말하였다.

"이는 소리나 물질에 떨어진 소식입니다."

스님께서 불자를 내려놓고는 방장실로 돌아가 버리셨다. 소산스님이 깨닫지 못하고 바로 향엄스님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가려 하자 향엄스님이 물었다.

"왜 더 머물지 않는가?"

"저는 스님과 인연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인연을 말하는지 어디 얘기나 좀 해보게."

소산스님이 이윽고 앞에 했던 대화를 전해주니 향엄스님은 말하였다.

"나에게 할 말이 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말이 나와도 소리가 아니고 물질〔色〕 이전이어서 물건도 아니."

"본래 여기에 눈 밝은 사람이 있었군요."

이윽고 향엄스님에게 "앞으로는 스님께서 머무는 곳이면 제가 꼭 찾아 뵙겠습니다."

그리고는 떠나갔다.

스님께서 향엄스님에게 물으셨다.

"소리와 물질에 관하여 물었던 그 조무래기 중은 어디에 있느냐?"

"이미 떠났습니다."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해보게."

향엄스님이 앞에 했던 대화를 말씀드리자 스님은 말씀하셨다.

"그가 뭐라 말하더냐?"

"저를 매우 칭찬하였습니다."

스님은 비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그 조무래기에게 봐줄만한 데가 있는가 했더니 원래 그랬었구나. 그 사람은 이후로 어디에 머물더라도 산이 가까이 있어도 땔감을 구할 수 없고, 물이 가까이 있어도 물을 마실 수 없으리라."


46.

자국 감담(資國惑潭)스님이 참례하자 스님께서 달을 가리켜 보여 주었는데 자국스님은 손을 세 번 내저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보지 못했다고 말하진 않겠네만 다만 대강 보았을 뿐이다."

47.

스님께서 법당에 앉아계신데 고두(庫頭)스님이 목어를 치자 화두(火頭)스님은 불덩이를 던지고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스님께서는 "대중 가운데 저런 사람이 있다니" 하시고, 이윽고 불러서 "왜 그랬느냐?" 하고 물으시니 화두스님은 말하였다.

"제가 죽을 먹지 않았더니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목어소리를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스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뒷날 경청 도부(鏡淸道:864~937)스님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위산스님의 대중 가운데 사람이 없는 줄 알 뻔하였다."

와룡 구(臥龍球)스님이 말하였다.

"하마트면 위산스님의 대중 가운데 사람이 있는 줄 알 뻔하였다."

48.

스님께서 진흙으로 벽을 바르시는데 상공 이군용(李軍容)거사가 찾아와 관복을 입은 채로 스님 뒤에 와서 홀(笏)을 단정히 들고 서 있었다. 스님께서 돌아보시고는 다시 곁의 진흙 소반에서 진흙을 집으려는 시늉을 하자 이군용거사는 홀을 움직여 진흙을 받아내는 시늉을 하였다. 스님께서는 진흙 소반을 던져버리고 함께 방장실로 돌아갔다.

  암두 전할(巖頭全豁:828~887)스님은 이 말을 듣더니 말하였다.

"아아! 약해져가는 불법이여. 가엾은 위산스님이 벽 바르는 것도 마치질 못하다니."

명초 덕겸(明招德謙)스님은 말하였다.

"당시에 어떻게 했어야 암두스님에게 간파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더니, "진흙 소반을 돌려 벽을 바르는 시늉을 하다가 버리고 돌아갔어야지"라고 대신하였다.

황룡 오신(黃龍悟新)스님은 말하였다.


"암두스님이 평을 잘못했으니, 위산스님과 이군용거사의 기막힌 솜씨가 졸작이 되는 줄을 전혀 몰랐다 하리라."

49.

시어사(侍榮史)1) 육(陸)거사가 큰방으로 들어가면서 물었다.

"스승 노릇하는 많은 스님네들이 밥이나 축내는 스님들입니까? 아니면 참선하는 스님들입니까?"

스님께서 이 소리를 듣고 말씀하셨다.

"밥이나 축내는 스님도 아니고, 참선하는 스님도 아니라네."

"그러면 여기서 무얼 합니까?"

"시어사께서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시게나."

50.

스님께서 하루는 유철마(劉鐵磨)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어서 오시오. 노자우(老牛:`이 늙은 암소야'의 뜻)!"

철마스님이 말했다.

"내일 오대산(五台山)에 큰 재회(齋會)가 있는데 스님께서도 가시겠습니까?"

스님께서 벌렁 눕는 시늉을 하시자 유철마스님은 나가버렸다.


정자 사일(淨慈師一:1177~1176)스님은 말하였다.

"대중들은 말하기를 `누워버린 것은 가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유철마는 분하고 수치스러워 가버렸다'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 평소에 위산 늙은이의 허리를 꺾을래야 꺾을 수 없더니 철마스님에게 한번 밀려 자빠지고는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하리라. 위산스님을 부추켜 일으키려 하느냐. 대중은 한마디 던져 보아라."

대꾸가 없자 스님은 주장자로 대중들을 몽땅 쫓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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