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책진(禪關策進)

9.경산 대혜고 선사 답함.

通達無我法者 2008. 2. 18. 10:13
 

9.경산 대혜고 선사 답함.


근일에 자기 안목도 밝지 못하면서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맥없이 "쉬어 가라"하며, 또한 이르기를 "인연을 따라 마음을 잡으며 생각을 잊고 잠잠 히 비추라"하며, 또한 "모든 것을 상관하지 마라"하니 이와 같은 병든 소 견으로는 설사 힘써 공부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이 일은 마칠날이 없게 된 다. 단지 마음을 한곳으로만 지으면 아무도 얻지 못할자가 없는 것이니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저절로 축착합착하야 분연히 깨칠 것이다.


항상 세간 육진(六塵) 망상경계로 딸려가는 자기 심식을 잡아서 반야 위에 돌이켜 놓으면 비록 금생에 마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는 결코 악 업에 끌리지 않을 것이니 오는 생에는 반드시 반야중에서 분명히 수용하 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결정된 사실이라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느니라.


다만 항상 화두를 들어야 하니 설사 망념이 오더라도 생각으로 막고 제 하려고 하지말고 오직 힘써 간절하게 화두만을 들어라. 가나오나 서나 앉 으나 항상 화두를 들어, 화두로 오고 화두로 가면 아무 재미도 없게 될 것이니 이때가 참으로 좋은 시절이라 부디 놓아지내지 말라. 일조에 홀연 마음빛이 활짝 밝아 시방세계를 비추면 능히 한 터럭 끝에 불국토를 나투 며, 가는 먼지 속에 앉아서 대법륜을 굴릴 것이다.


<<평>> 사께서 "타인은 정(定)을 앞에 하고 혜(慧)를 후로 한다 하나 나 는 혜를 먼저 하고 정을 후로 하겠다"하신다. 그러나 화두만 타파하면 이 른바 "쉬어가고 쉬어 가라"하는 것은 하려하지 않아도 그대로 되는 것이 다.


[1]대혜고(大慧고): (1089-1163) 임제종의 대종장이다. 남악하 16세, 원오근(圓悟勤)선사의 법을 이었다. 송 철종(哲宗) 원우(元佑) 4년에 선 주의 영국(寧國, 지금의 安微省寅城)에서 출생. 속성은 해(奚)씨, 12세에 향고에 글을 배웠는데 장난하다가 벼루를 던진 것이 선생의 모자에 맞아 돈으로 변상하고 돌아와서 생각하기를 "대장부가 세간의 글을 배우느니 출세간의 도를 배움만 같지 않다."하고 출가하여 동산(東山) 혜운사(慧雲 寺)에 가서 혜제(慧濟)스님을 섬기다가 축발하고 종문 제어록을 널리 보 았다. 그중 운문(雲門), 목주(睦州) 어록을 가장 좋아 하였다 한다. 부모 의 권유로 제방에 유학하여 조동종 여러 종사를 섬겨 그 종지를 남김없 이 요달하여서 깨친 바가 있었으나 만족하지 아니하고, 여러 종장에 참예 하고 담당준(湛堂準) 회상에 시자가 되어 깨친 바가 있었다. 하루는 준이 말하기를 "너는 이치를 일일이 다 알아 듣느냐?" "예 다 압니다." "네가 말로 할 것은 다 하고 지으라 하는 것은 다 짓고 고금 선지식의 모든 법 문은 다 안다마는 다만 한가지만이 덜 됐다. 내가 이것을 아느나?" "무슨 일인지 모르겠읍니다." "네가 다만 왁! 한 소리(도地一聲) 하나만이 모자 란다. 그 까닭에 말할 때는 있고, 말하지 않을때는 없으며 방장 안에서는 있고 방장 밖에서는 없고, 깨었을 때는 있으나, 잠들었을 때는 없으니, 이래고서야 어찌 생사를 당적 하겠느냐!"한다. 사 말씀이 "고(고)가 의 심하고 있는 곳이 바로 그곳 입니다. 앞으로 누구를 의지하면 되겠읍니 까?" "극근(克勤)이 하나 있다. 내 그를 만나보지는못했으나 네가 찾아가 보아라. 마땅히 너의 일을 판단하여 줄 것이다. 만약에 네가 거기서 판단 짓지 못하거든 저 부처님의 일대장교를 보며 수행하라. 내생에는 결코 참 선하여서 이 일을 결정내고 훌륭한 선지식이 될 것이다."하고 얼마 안가 서 준이 열반에 드니 원오극근(圓悟克勤)을 찾아 갔다.


이곳에서 조석으로 참정하는데 한번은 극근이 말하기를, "한 중이 운 문에게 묻되"어떤 곳이 제불이 나온 곳입니까?"하니, 운문 답하기를, "동 산이 물위로 간다."하였으니 너 한마디 일러봐라."하는데 계합하지 못하 여 1년을 참구하면서 49회나 대답하였으나, 다 인가를 받지 못하고 있더 니, 하루는 한 거사집에서 극근이 설법하는데 "한 중이 운문에게 묻기를 "어떤곳이 제불이 나온 곳입니까?"하는데 운문은 "동산이 물위로 간다. "하였지만 천녕(天寧)은 그렇지 아니하여 누가 와서 어떤 곳이 제불이 나 온 곳이냐?"하면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집안이 시원해진다."할 것이 다.함을 듣고 활연히 깨쳤다. 깨친바를 극근에게 말하니 가지가지로 시험 하여 보고는 "아직 멀었다. 네가 비록 얻은 바는 없지 않으나 아직 대법 은 밝지 못했다."하고 하루는 "너의 그 경지에 이르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다만 죽기만 하고 능히 살아나지 못했으니, 언구를 의심치 않는 것이 큰 병통이다.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고 뛴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승 당할 수 있으나,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은 남을 속이지 못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느냐! 모름지기 이런 도리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하였다.


사 말이 "고(고)는 지금의 얻은 것으로 이미 쾌활하니 다시 더 알아 얻을것이 있겠읍니까?"하였으나 근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는 매일 서 너번씩 입실하는데 근은 매양 저 "있으니 없느니가 나무에 의지한 등넝 쿨과 같다(有句無句如藤기樹)"는 공안을 가지고 힐난 하면서 입실하여 입 만열기만하면 "틀렸어! 틀렸어!"하여 이러기를 반년이 넘도록 인가를 받 지못하고 생각 생각에 잊지 않고 지내는데 하루는 관객들과 식사를 하다 가사가 손에 수저를 들은것도 잊고 멍멍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근이 웃 으면서 "저 놈이 황양목선(黃楊木禪-진취가 없는 공부)을 하여 도리혀 쭈 그러지는구나"하는데 사 비유를 들어 말씀 들이기를 "화상이시여, 이 도 리는 흡사 개가 뜨거운 기름가마를 본 것과 같아서 핥을려야 핥을수도 없 고 버리고 갈려야 버리고도 못가는 것과 같읍니다."하였더니 근이 "그 비 유가 극히 좋다. 단지 그것이 금강석으로 된 밤송이다."하였다. 또 하루 는 근에게 묻기를,"화상께서 오조에 계실때 오조화상께서 이 공안을 들으 셨다 하온데, 그때 오조화상에게 어떻게 대답하였는지 가르쳐 주십시요. "하니 근이 묵묵히 응하지 않으니 사 "그때 대중 앞에서 말씀하셨을 터인 데 이제 다시 말씀 하셔서 안될것이 있겠읍니까!"하니, 근이 드디어 "내 가 그때 묻기를 "있느니 없느니가 나무에 의지한 등넝쿨 같은 때는 어떠 합니까?"하니 오조말씀이 "말로 형용할수도 없고 그림으로 그릴수도 없느 니라"하시기에 또 묻기를 "문득 나무도 쓰러지고 등(藤)도 말라 죽었을 때 어떠합니까?"하니 "서로 따라 오느니라."하시더라."하는데, 사 곧 깨 치고 근에게 "제가 이제 알았읍니가."하니 근은 "아직 네가 저 공안을 뚫 지 못하였을까 걱정이다."하고 여러가지 까다로운 공안을 들어 대어도 조 금도 걸림이 없으니 이에 근은 손벽을 치며 기뻐하였다. 이후로는 병의물 을 거꾸로 세운것 같고 둥근 바위를 천길 언덕에서 내 굴리는 것과 같아 서 아무도 그 기봉을 당하는 사람이 없으니 혹 근에게 누가 와서 참문하 면 "나의 저 선자(禪者)가 마치 큰 바닷물과 같으니 너희들은 저 큰 바 닷물에 가서 물어 가라."하였다. 이때부터 극근과 분좌설법하고 낙자를 제접하니 그 이름이 총림에 떨쳤다.


극근이 운거사(雲居寺)에 옮기자 거기서 제일좌(第一座)가 되고, 극근 이 성도(成都)로 떠난 뒤는 여러곳을 거쳐 경산(俓山-절강성 여항현)에 있었는데 낙자 도속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대중이 항상 2천명이 넘어 종 풍을 크게 떨치니, 세상 사람들은 임제(臨濟)의 재흥이라 하였다. 소흥 (紹興) 11년(서기 1141년 송 고종때)진회(秦檜)의 모함으로 장구성(張九 成)당으로 정사를 비방하였다는 구실로 의첩(衣牒)을 빼앗기고 형주(衡 州)로 귀양갔다. 여기서 10년 있는 동안, 고인의 기연(機緣)을 모으고 염 제(拈提)를 가하여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썼고, 다시 매주(梅州)로 옮겼 다. 이곳은 기후가 불순하고 악병이 돌고 약이라고는 아주 없는 곳이었으 나 여기서도 한여름에 13명의 큰 법 그릇을 만들어 내기까지 하였다. 이 곳에서의 신고는 말할 수 없었으니 사가 귀양갈때 사를 따라갔던 제자가 백여명이었는데 이 지방의 풍토병에 걸려 반수 이상이 죽었다. 가히 고인 의 위법망구(爲法忘軀) 정신을 엿보게 한다. 여기서 5년만에 소흥 26년 효종(孝宗)의 특사를 받고 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68세였다. 사방에 서 청하여도 가지 않더니 칙명으로 명주(明州) 아육왕산(阿育王山) 광리 선사(廣利禪寺)에 갔다가 곧 다시 칙명으로 경산에 돌아왔다. 효종은 보 안군왕(普安君王)때부터 사의 가르침을 받은 바 있었으므로 사를 극진히 공경하였다. 만년에 묘희암(妙喜庵) 명월당(明月堂)에 퇴거, 여기서 입적 하였다.효종 융흥(隆興) 원년이다. 향수 75세. 사의 저술로는 앞서 말한 정법안장(正法安藏) 6권, 대혜어록(大慧語錄) 30권, 법어(法語) 3권, 종 문무고(宗門武庫) 1권, 서장(書狀) 2권, 대혜선사보설(大慧禪師普說) 5권 이 있고, 법을 이는 제자가 94인이 된다. 가이 가풍의 성한 것이 짐작된 다. 사가 교화한 가운데 특히 힘써 주장한 것은 천동정각(天童正覺)이 주 장한 묵조선(默照禪)을 타파하고 활구선(活句禪)을 강조한 것이다. 임종 에 당하여 시자가 유게(遺揭)를 청하니, "송 없이 갈 수 없다."하고 붓을 들어 큰 글자로 "생(生)도 다만 이러하고 사(死)도 다만 이러한데,게송 이 있던 없던 이것이 무슨 큰 일이냐?"쓰고는 붓을 던지고 갔다.


[2]축착합착: 속이 그대로 "척 척"들어 맞는다는 뜻.


[3]터럭 끝에 불국토: 능엄경에 "하나가 무량이 되고, 무량이 하나가 되며, 적은 것으로 크게 나투고 큰 것으로 적게 나투며 도량을 움직이지 않고 시방세계에 두루 하고, 한 몸속에 시방 무진 허공을 머그머며 한터 럭 끝에 보왕찰(寶王刹)을 나투고 가는 먼지속에 앉아서 대법을 굴린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