話頭·參禪

화두해설 안되는 이유

通達無我法者 2008. 2. 19. 12:06

화두해설 안되는 이유

 

 



손가락 보지 말고 바로 달을 보아야

선사들이 화두를 던져주는 목적은 도학자들에게 심행처가 없고(心行處滅)

말길이 끊어진 인간의 본래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적 분석이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화두를 대하는 도학자의 자세는 바로 화두를 통해 그 본래의 마음자리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미 언어와 문자가 끊어진 마음을 펼쳐보여주고 있는데,

그 화두의 말귀에 떨어져 이리저리 따져보고 분석한 들 어떻게 언어의 길이 끊어져버린 마음자리를 바로 볼 수 있겠는가?

 

서산대사께서도 <선가귀감>에서

“조사께서 보이신 구절(화두)은 말자취가 분별하는 의식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의 근원에서 드러난다”고 설명하셨다.

화두에 대하여 언어로 분별하고 헤아리는 것이 끊어지고,

다만 그 본래의 이치에 마음으로 계합하여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설파해주고 있다.

즉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바로 달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박산 무이(博山無異)선사의 선경어(禪警語)에

“공부를 지어가되 종사(宗師)께서 들어 보인 곳을 알아맞히려 하지 마라.

만약 알아맞히려 한다면 바로 어리석은 바보이니,

참구(參究)하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다만 반드시 의정(疑情)을 일으켜서 알려고 하는 곳도 없고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는 것에 대해 사무치게 하여야 할 것이다”고

경책해주고 있다.

 

언어의 길이 끊어진 경계를 설파해주고 있는데,

언어적 분석만을 하고 있는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약 그 경계가 어떤 경계인가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고 싶으면 화두에 집착하지 말고 교학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교학에서는 이러한 정신세계를 논리적인 체계를 갖추어 너무도 자세하고 완벽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보자! 그 화두에 담겨 있는 선사들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은 어떠한 세계인가?

<대승기신론>에서 “여실하게 공하지 않으니, 유(有) 자체로써 무루(無漏)의 성공덕(性功德)을 갖추었다”고

깨달은 뒤에 펼쳐지는 정신세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화두를 해설하는 학자들을 보면,

이 구절에 나오는 유(有)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 구절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다.

완전히 난센스 아닌가?

그렇게도 언어적 분별을 끊지 못하고 마치 말로써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논서의 구절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고 있다.

 

곧 언어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이론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못하면서 말길이 끊어진 화두에 대해서는 잡다한 해설을 붙이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언어도단 아닌가?

 

신규탁 교수의 경우를 살펴보자.

<선사들이 가려는 세상>이라는 책 137쪽에

운문선사가 “깨달음이 무엇이냐?”고 묻는 객승에게

대뜸 “호떡”이라고 답하는 화두가 나온다.

이 화두에 대한 신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이 말을 노골적으로 풀어보면 ‘엿 먹어라’이다.

깨달음이나 부처가 특별한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지껄이는 ‘주둥이’에 호떡을 물리는 것이다.

엿이 입에 붙어서 아무 말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상상이 갈 것이다.

”운문선사께서 “호떡”이라고 답한 그 바른 의미가 이렇게 유치한 것은 아니다는 것쯤은 불제자들은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이 답이 이렇게 바보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세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화두는 바로 선사들이 증득한 그 마음을 드러내보인 것이다.

그 마음은 바로 심행처멸이며 언어도단이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 분의 책에서 화두를 해설해주지 않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는 동산 양개(洞山良价) 선사의 말씀이 인용되어 있다.

(같은 책 263쪽)그 내용은 이렇다.

 

동산 양개선사가 스승인 운암(雲巖) 선사께서 제시한 한 마디 구절에 대해 의심이 풀리지 않다가

어느 날 강을 건너면서 그 의취(意趣)를 깨닫고 오도송을 썼다.

그 뒤에 운암선사의 제(祭)를 지낼 때 않은가?

설명해주지 않는 것이 너무도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어느 스님이 “화상은 처음에 남전 스님을 뵙고 발심을 하셨는데,

왜 운암스님의 제사를 지내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오직 나에게 설파(說破, 해설)해 주지 않은 것을 귀중하게 여길 뿐이다”고 설명한다.

화두에 대해 설파해주지 않은 것을 고맙게 여긴다고 말씀하고 있지

 

변상섭(동국역경원 역경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