話頭·參禪

화두, 말보다 마음으로 계합해야

通達無我法者 2008. 2. 19. 12:18

화두, 말보다 마음으로 계합해야


최근 선 논의와 관련, 불교와 선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확산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단 김용옥 선생의 잘못만이 아니고 널리 일반화되어진 상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폐단이 어디에서부터 출발된 것인지 재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의 세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근본적인 문제는 선(禪)이나 도(道)에 대한 접근 방법론이 잘못되어 있다는 점이다.

선은 실참수행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논자들은 선이나 도를 수행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 결과 그분들은 선이나 도가 추구하고 있는 정신세계가 어떠한 세계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즉 선을 닦는 목적이나 방법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선을 수행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는 마음속에서 언어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사량과 분별을 끊어버리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선종에서 표방하고 있는 것이 심행처멸(心行處滅), 언어도단(言語道斷)이 아닌가?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언어를 통해 헤아리고 생각하는 사량과 분별이 있다.

이러한 사량과 분별로 인하여 온갖 번뇌와 망상을 일으켜 고통을 받으며,

바른 지혜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부처님께서 이러한 번뇌와 망상을 끊어버리면 곧 열반을 증득한다고 설하여 주신 것이다.

그런데 언어와 문자가 끊어져 버린 경계를 언어와 문자에만 의지하여 풀어내려고 한다.

이것을 철학적 관점에서 다시 비판해 본다면,

동양의 직관적 사유의 세계 즉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이 합일하는 정신세계를 서양의 사변적이고 실증주의적인 시각 즉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이 분리되어진 사유의 방식으로 풀이하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서양철학에서도 종래의 주객분리의 사유를 부정하고,

주객합일의 직관적 사유에 대한 연구가 심도있게 이루어지고 있다.

에드문트 훗설이나 마르틴 하이데거가 주장하고 있는 ‘순수직관’과 ‘존재현전’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러한 철학의 주제와 사조의 변천도 모르면서 철학을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둘째, 학자로서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학문이란 연구의 목적과 방법론이 분명하여야 한다.

그렇게도 사변적 사유를 끊지 못하고 선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으면 교학을 전공하면 될 것이다.

교학에서는 언어와 문자를 통해 정신세계에 대한 완벽한 인식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연기설은 중생의 언어와 문자로 말미암아 생각하고 사유하여 인식하는 그 경계가 의식속에서 행온(行蘊)의 작용에 의해 희론(戱論)되어 일어나는 허망한 것이라고 설하여 주고 있다.

 

이것은 곧 선정을 수행하여 그러한 허망한 분별과 망상을 끊어야 한다는 당위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성기설은 모든 분별과 사량(思量)이 끊어진 뒤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 참답고 청정한 인식의 세계 즉 주관과 대상이 합일하는 인식의 세계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렇게도 언어와 문자에 집착하여 학문적으로 연구를 하고 싶으면 교학에 대해 연구하면 될 것인데,

실천적 수행을 하는 선에 대해서 언어와 문자에 의지하여 연구하고 분석하려고 하는 것은 학문의 목적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셋째, 그들은 선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화두를 해석하고 풀이해 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화두를 만든 목적이 무엇인가?

<벽암록>의 서문에

삼교노인(三敎老人)이 화두의 역할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도를 닦는 도학자들을 평가하는 저울추의 역할과,

수행자들이 선을 수행하는데 번뇌와 망상을 끊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화두라고 설명하고 있다.

선을 수행한다는 것은 극히 개인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수행자의 마음의 상태가 어떤 경지에 도달하였는지

또는 바르게 수행하는지 평가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 평가의 척도로써 화두를 던져주어 그에 대한 답을 들어봄으로써

수행자가 어떤 경계에 이르렀는지 알기 위한 목적도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목적은 번뇌와 망상을 끊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선정을 닦는다고 묵묵히 고요한 상태에 머물다 보면,

혼침과 산란에 빠지기 쉬워 바른 선정을 닦기가 힘들다.

그래서 상식이나 언어적 사유로는 풀이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말을 던져 주어 그 화두에 대해 간절한 의심을 촉발시킨다.

만약 화두를 대하며 의심에 사무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헤아리고 따지는 것은 번뇌와 망상을 더욱 증장시키는 결과밖에 얻지 못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선사들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즉 말에 떨어져서 헤아리고 분석하지 말고 마음으로 바로 계합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논자들은 마음으로 계합하지 못하고 말길에 떨어져 이렇게 저렇게 분별과 망상만을 일으키고 있다.

 

더구나 화두를 해설한 책을 보고 사람들이 “화두의 의미가 이런 것이구나”하고 잘못 이해해 버리고,

다시 이 화두에 대해 간절한 의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것은 부처가 될 종자를 송두리째 썩혀버리는 폭거에 다름 아니다.

선사들께서 화두를 해석하고 헤아려 알아맞히려 하지 말라고 간곡히 설명해 주고 있는데,

기어코 화두를 해설하려고 하는 그 저의가 무엇인가?

ㅡ변상섭(동국역경원 역경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