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스님] 나호야록(羅湖野綠)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15:11

나호야록(羅湖野綠)

「나호야록」은 송나라 임제종 양기파 효영 중온曉塋仲溫스님이 1155년경 나호에 머물 때 지은 책으로, 불법문중에 드나들면서 보고 들었던 말씀과 행적, 책에서 본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자신의 의견을 붙인 이야기 모음집이자 승보사僧寶史이다.

1. 황룡사 들어가는 문에 써 붙인 글
사심死心선사는 대관大觀 원년(1107년) 정해 9월에 홍주자사 이경직李景直의 명으로 황룡사黃龍寺 주지가 되었는데, 그 이듬해 절문에 방을 써 붙였다.

“문을 맡은 행자들에게 바라노니 손님이 오거든 시간을 정하여 알려 주고, 부랑자와 소인배들이 이곳에 와서 도박을 벌이도록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언제나 깨끗이 청소하라. 사찰에 세 개의 문을 세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공空, 무상無常, 무작無作의 세 가지 해탈문이니라. 이제 보리菩提의 경지에 오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와야 한다. 이 문은 높고 낮은 데를 모두 응하고 멀고 가까운 데서 함께 돌아오는 문이나 이 문으로 들어오려는 자는 먼저 자기 마음을 비워야 한다. 자기 마음이 비워지지 않았으면 여전히 문 밖에 있는 것이다.
무자년(1108년) 9월 18일, 사심死心 노인 씀“
사심선사는 평소에 불조가 계신 것처럼 제자들을 꾸짖었으며 빈객들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의 말은 법이 되면서도 준엄하고, 간단하면서도 뜻이 갖취 있으니 세간과 출세간에 모두 알맞는 말이랄 수 있다. 만일 법을 지키는 자가 모두 이와 같이만 한다면 총림이 부진할까를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2. 용문사 연수당 벽에 써 붙인 글
불안佛眼선사가 서주舒州 용문사龍門寺에 주지로 있을 때, 연수당(延壽堂,늙고 병든 승려들이 머무는 당우) 벽에다 글을 썼다.
“부처님께서 병이 있는 자는 당연히 치료하라고 허락하셨지만, 쉬려고 하는 자에게 이 장소를 제공할 수 있겠는가? 총림에는 몇 가지 당우가 있다. 즉 열반당涅槃堂이란 법신이 상주함을 보고 법이 나지 않음(不生)을 깨닫게 하는 곳이며, 성행당省行堂이란 이 몸의 잘못된 인연이 고苦를 행한 데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하는 곳이다. 또한 연수당延壽堂이란 혜명慧命을 얻고자 색신色身을 부지 한다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곳을 깨닫도록 하는 곳이다. 흔히 보는 일인데 조금만 몸이 불편해도 곧 이런 집으로 들어오고, 견뎌 보려고는 하지 않고 몸보신이나 생각하다가 병이 오래되면 고향을 생각할 뿐 잘 돌이켜 괴로움의 근본을 없앨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옛 성인이 말하기를 ‘병은 중생에게 좋은 약이니 잘만 복용하면 치유되지 않는 경우가 없다’고 하셨고, 어느 큰 스님도 ‘병들지 않는 자가 없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이 때문에 이 글을 적어 뒷사람에게 고한다.”

선사가 변변찮은 사람들을 꼬집어 바로잡고자 한 글을 살펴보면 괴로움의 근본을 돌이켜 생각하도록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율을 지키며 가르침에 따라서 죽어야 함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명백하고도 간절한 그의 말은 약석藥石과 같으니. 아! 큰 의원이란 불안선사 같은 분을 두고 하는 말이다.

3. 양서암의 여름 결제
묘희妙憙 노스님은 소흥紹興 4년(1134년) 봄 민현閔縣 감서주 광인난야廣因蘭若에 들어와 여름 결제를 하다가 해제가 되기 전에 해상사海上寺 양서암洋嶼庵으로 옮겨갔는데, 그곳 대중방에 방을 붙였다.

“옛사람의 말씀에, 잡독雜毒이 마음(心識)에 들어가면 마치 기름이 국수에 들어간 것처럼 영원히 없앨 수 없다고 하였다. 이제 형제들이 참선을 해도 깨치지 못하는 것은 독이 골수까지 깊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오로지 깨칠 것이 있다는 생각으로 늘상 참선을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한 소식(一句) 얻었을 때 환희심을 내니 이러한 무리는 부처님도 구제할 수 없다. 오늘부터 책을 볼 때는 경전만 볼 것이며 기타 잡서를 보아서는 안 된다. 만일 어기면 책상까지도 절 밖으로 내버릴 것이다.”

아! 그 당시 대중스님은 겨우 쉰 명 남짓하였는데 여덟 달 동안 깨친 자는 열세 명이었으니 스님의 격려 덕분이라고 하겠다.

4. 인절미 장수
금릉金陵 유도파(兪道婆:임제종 양기파)에 대하여 선림禪林에 전하는 말로는 낭야 계琅耶啓 선사를 친견한 여인이라고 한다. 그는 인절미 장사로 생계를 꾸려가는 여인이었는데, 어느 날 저자에서 거지가 부르는 연화악連華樂을 듣게 되었다.

유의柳毅가 편지를 전하지 않았는데
무슨 일로 동정호에 왔느냐.

이 노래를 듣고 홀연히 느낀 바가 있어 자기도 모르게 껄껄 웃으며 인절미를 던져 버리니 저자의 아이들이 앞을 다투어 주어 갔다. 그의 남편이 “당신 미쳤어?” 하고 화를 내는데 그 여인을 손뼉을 치며 “당신이 알 수 있는 경지가 아니오” 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스님들을 만나면 으레 시험해 보았다. 하루는 한 스님이 문앞을 지나가는데 노파가 갑자기 “아가야!” 하고 불러 세웠다. 그러자 그 스님이 “어머니! 아버지는 어디 있소?” 라고 대꾸하였다. 이에 노파가 몸을 돌려 노주 露柱에 절을 하니 그 스님은 노파를 차서 넘어뜨리고 말하였다.
“대단한 데가 조금 있다고 생각했지...”
뒷날 또 다시 한 스님을 보고 물었다.
“스님은 어디서 왔소?”
“오조사五祖寺에서 왔습니다.”
“오조사 노스님도 내 아이다.”
“할머니는 누구의 아이오?”
“이 노파가 스님 묻는 말에 선 채로 오줌 싸겠소.”
이 노파는 한 노파가 조주선사의 죽순 훔친 인연에 대해서 게송을 지었다.

호랑이 굴과 마귀 궁에 찾아오는 사람 드무니
노파는 설 자리 잃고 의아해 하였다.
조주스님 따귀 맞는 일 아무도 몰라
지금까지 시비거리를 만들었네.

정화政和에서 선화(宣和:1111년~1125년) 연간까지 강회江淮 지방은 선승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노파는 그 당시 구멍 없는 피리를 불어 그 소리가 하늘까지 퍼지니, 화답하려는 자가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그때 있었던 기연과 게송은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스스로 그 소리를 음미하여 한 곡조에 긴 여운을 남겼다.

5. 도둑은 잡았으나 장물은 어디에
무진거사無盡居士 장천각張天覺은 일찍이 선禪공부를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으나 그래도 큰스님을 찾아 의심을 풀고자 하였다. 급사給事 주세영朱世英과 이야기 하다가 강서江西 도솔사 종열從悅(임제종 황룡파) 선사의 공부가 고매하고 총민하여 남달리 뛰어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원우元祐 6년(1091년) 무진거사가 강서의 조운사漕運使가 되어 분령分寧 지방까지 다스리게 되었다. 그 때 다섯 스님들을 객사로 모셔 인사를 나누던 차에 도솔선사에게 오래 전부터 스님의 총민하신 명송을 들어 왔다고 하니 종열선사는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대답하였다.
“나는 임제의 자손입니다. 총민함을 가지고 문장을 논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선을 말로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무진거사는 그 말을 훌륭히 여기면서도 마음은 언짢았다. 이에 게송을 지어 다섯 선사에게 설법하도록 명하였다.

다섯 분의 기연이 한곳에 모였지만
신비한 기봉은 저마다 소매 속에 감추었네
내일 아침 노익장이 단에 오르기만 하면
창을 비껴 들고 한판 결전을 청하리라.

종열스님은 맨 끝자리에 있었으므로 그의 법문은 앞 분들의 말을 하나로 꿰는 요지였다. 거사는 마음속으로 기뻐하여 마침내 도솔사를 찾아가 밤늦도록 이야기하다가 종문의 일에 대해여 스님에게 말하였다.
“요사이 전등록을 보니 천 칠백여 명 큰스님들 기연에서 오직 ‘덕산德山 선사의 탁발화두’* 에만 의심이 납디다.”
“탁발화두가 의심난다면 그 나머지도 알음알이로 따지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야 어떻게 큰 안락의 경지에 이르겠습니까?”
그는 분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하였다. 새벽녘에 자기도 모르게 요강을 걷어차 엎어 버렸는데 그 순간 크게 느낀 바 있었다. 몹시 기뻐서 그 길로 종열선사의 방장실 문을 두드리며 “도적을 잡았습니다!” 라고 소리쳤다. 스님께서 도둑질한 물건은 어디 있느냐고 되묻자 그가 뭐라고 말하려는 차에 스님께서 “그대는 잠이나 자시오”하였다. 뛰어난 유학자 가운데 무진거사처럼 불도를 숭상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스님의 예리한 솜씨가 아니고서는 거사를 감동시킬 수 없었을 것이며, 거사 역시 상근기가 아니었다면 쉽사리 받아들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6. 탁발 설법
삼조 회(三祖會衆:운문종)선사는 천성이 엄격하여 대중을 번거롭게 하니 총림에서는 그를 좋다 하는 사람이 없고 ‘회도깨비(會魔子)’라 불렀다. 하루는 탁발하고 돌아와서 대중에게, 세존께서 사위성에 들어가 걸식하고 돌아오시자 수보리가 부처님께 ‘회유합니다. 세존이시여’ 라고 말한 구절을 들어 설법하였다.
“이번에 내가 어느 산골 좁은 길에 이르렀을 때 가마를 타고 오는 할머니 한 분과 마주쳐 각기 가마에서 내려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스님은 어디로 가시오?’라고 묻기에 나는 발우를 들어 보이면서 가니 ‘아! 무슨 일에 그렇게 집착하시오’라고 하더라. 대중들이여! 말해 보아라. ‘아! 무슨 일에 그렇게 집착하시오’라는 할머니 말과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라는 수보리의 감탄이 같은지 다른지를. 만일 같다면 어느 것이 같은가? 만일 다르다고 한다면 아직 납승의 안목을 갖추지 못한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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