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67칙 경상(經床)을 두들린 부대사〔傅大師揮案〕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0:45
 

 

 

제67칙1) 경상(經床)을 두들린 부대사〔傅大師揮案〕


(본칙)

양무제(梁武帝)가 부대사를 초청하여 「금강경(金剛經)」을 강의하게 하였다.

-달마 형제가 왔군. 어물전이나 술집에 관한 일이라면 몰라도 납승의 문하에서는 안된다. 이 늙

은이(부대사)는 나이 먹고도 이런 행동을 하는구나.


부대사가 법좌 위에서 경상을 한 번 후려치고 바로 자리에서 내려와버리자,

-불똥이 튀는구나. 비슷하긴 해도 옳지는 않다. 번거롭게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라.


무제는 깜짝 놀랐다.

-두 번 세 번 사람에게 속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가 알아들을 수가 있나?


이에 지공(誌公)스님이 물었다.

“폐하께서는 이를 아시겠는지요?”

-이치에 따를 뿐 인정에 끄달리지는 않았다. 팔은 밖으로 굽지는 않는다. 역시 서른 방망이는 때

려야 좋겠다.


“모르겠군요.”

-아깝다.


“부대사는 「금강경」 강의를 마쳤습니다.”

-이 또한 나라 밖으로 쫓아내야겠다. 당시에 지공스님까지 일시에 나라에서 쫓아냈어야 작가였   다. 두 놈 모두 한 구덩이에서 나왔으니 다를 리가 있겠는가.


(평창)

양(梁)나라의 고조(高祖)인 무제(武帝)는 소씨(蕭氏)이며 이름은 연(衍), 자(字)는 숙달(叔澾)이다.

대업을 일으켜 제(齊)나라를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한 뒤에 따로이 오경(五經)의 주(註)를 내

어 강의하였고, 황로(黃老)의 도교(道敎)를 두터이 신봉하였으며 타고난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웠

다.

하루는 출세간의 법을 얻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도교를 버리고 부처님을

받들면서 누약법사(婁約法師)에 귀의하여 보살계(菩薩戒)를 받았으며, 몸소 부처님의 가사(袈裟)를

입고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을 강의하며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당시 지공대사(誌公大士)는 괴이한 신통력으로 대중을 현혹시킨다 하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지공스님은 자기의 분신을 나투어 성읍에 다니면서 교화하였다. 무제가 하루는 이를 알고 느낀 바

있어 지극히 그를 추앙하고 존중하였다. 악은 막고 선은 보호하면서 은둔하고 나타나는 그의 행적

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때에 무주(婺州)에 어떤 대사(大士)가 운황산(雲黃山)에 거처하면서 손수 두 그루의 나무를 심고

이를 쌍림(雙林)이라 이름 붙이고, 자칭 미래의 선혜대사(善慧大士)라 하였다. 그가 하루는 글을

지어 제자에게 시켜서 무제에게 표(表)를 올려 황제께 여쭈었다. 때에 조정에서는 군신(君臣)의 예

의가 없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대사는 금릉성(金陵城) 속에 들어가 물고기를 팔았는데 당시 무제가 간혹 지공스님을 청하여

「금강경」을 강의하게 하자, 지공스님은 말하였다.

“빈도(貧道)는 강의를 하지 못합니다. 시중에 부대사라는 사림이 있사온데 그가 이 경을 강의할

수 있습니다.”

무제는 조서를 내려 그를 대궐로 불러들였다.

부대사는 입궐하여 법좌 위에서 경상을 한 번 후려치고 바로 내려와버렸다. 당시에 대뜸 떠밀쳐

넘어뜨려버렸더라면 한바탕 뒤죽박죽되는 꼴을 면하였을텐데, 도리어 지공스님이 “폐하께서는 아셨는지요”하자, 무제가 “모르겠군요”라고 말하여, “부대사는 「금강경」강의를 마쳤습니다”라는 지경을 당하고야 말았다. 이는 한 사람은 우두머리가 되고 한 사람은 꼴찌가 된 것이라 하겠다.

지공스님이 이처럼 말하긴 했어도 꿈엔들 부대사를 보았겠는가! 그네들 모두가 망상분별을 한 것

이다. 부대사가 그중에서 가장 기특하다 하겠다. 죽은 뱀(경전)이긴 하나 잘 부리면 살아난다.

어차피 경전 강의인데 무엇 때문에 내용을 크게 둘로 나누어 설명하는 이의석(二義釋)을 쓰지 않

았을까? 평소 좌주는 한결같이 말하기를 “금강의 바탕은 견고하여 어느 물건도 이를 부수지 못하

며, 날카롭기 때문에 만물을 꺾을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처럼 강의하여야만이 경전 강의를 했다

고 할 수 있다. 그러하기는 그렇지만 여러분은 부대사가 오로지 향상의 핵심을 드러내고 칼날을

약간 노출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귀착점을 알게 하여 곧바로 깎아지른 만 길 벼랑에 우뚝 서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모른 것이다.

지공스님이 좋고 나쁨도 분간하지 못하고 “부대사는 「금강경」강의를 마쳤습니다”라는 말을 하

였으니, 이는 (부대사의) 좋은 마음씨를 좋게 보답하지 못한 꼴이다. 이는 마치 한 잔의 못좋은 술

에다 지공스님이 물을 쏟아붓는 격이며 한 솥의 국물에 지공이 한 알의 쥐똥을 넣어 더럽힌 것과

같다 하겠다.

말해보라, 경전 강의가 아니라면 결국 무엇이라 해야 할까?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쌍림(雙林)에 이 몸 의탁하지 않고

-그를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머니 속에 뾰족한 송곳을 넣었으니 어찌 밖으로 삐져나오지   않으리요?


양나라 땅에서 티끌 먼지 일으켰네.

-세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떻게 분명한 것을 나타내리요? 풍류가 없는 곳이 참 풍류로다.


당시에 지공 늙은이를 만나지 않았던들

-도적질하는 데는 밑천이 필요치 않다. 제짝을 끌고 가는군.


황급히 나라를 떠나는 사람이었으리요.

-(저놈들의 죄를) 한 건에 처벌하라. (원오스님은) 쳤다.


(평창)

“쌍림에 이 몸 의탁하지 않고 양나라 땅에서 티끌 먼지 일으켰다”는 것은, 부대사가 앞니 빠진

달마스님과 똑같이 (양무제를) 만났다는 것이다. 달마스님이 처음 금릉(金陵)에 도착하여 무제를

뵙자, 무제가 물었다.

“어떤 것이 성스런 이치〔聖諦〕, 으뜸가는 뜻〔第一義〕입니까?”

“텅텅 비어 성스런 이치〔聖諦〕라 할 것도 없습니다.”

“나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모르겠습니다.”

무제가 이에 계합하지 못하자, 달마스님은 드디어 양자강을 건너 북위(北魏)에 이르렀다. 무제가

다시 이를 들어 지공스님에게 물으니 지공스님은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이 사람을 아시는지요?”

“모릅니다.”

“이는 관음대사(觀音大士)로서 보처님의 심인(心印)을 전수하는 사람입니다.”

무제는 후회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모셔오도록 하였으나, 지공스님은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사신을 보내어 모셔오라는 말씀을 마십시요. 온 나라 사람이 간다 해도 그는 되돌아

오질 않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설두스님은 “당시에 지공 늙은이를 만나지 않았던들 황급히 나라를 떠나는 사람이었

으리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당시에 지공스님이 부대사를 위하여 (그의 존재를 임금에게) 말해주

지 않았더라면 그도 나라를 떠났을 것이다.

지공스님이 주둥이를 나불대어 무제가 그에게 한 번 되게 속임을 당한 것이다. 설두스님의 생각

은 “그가 양나라 땅에 찾아와서 경전을 강의하며 경상을 후려칠 필요조차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

러므로 “왜 쌍림에 몸을 의탁하여, 죽이나 밥이나 먹으면서 분수 따라 시절을 보내질 않고 양나라

땅에 찾아와 이처럼 주석을 내어 한 번 경상을 후려치더니 바로 법좌에서 내려왔느냐?”고 한 것

이다. 바로 이것이 티끌 먼지를 일으킨 것이다.

제대로 되려면 하늘을 바라보면서 위로는 부처가 있는 것도 보지 않고, 아래로는 중생이 있는 것

도 보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만일 세간을 벗어난 일을 의논한다면 머리에는 재 쓰고 얼굴에는

흙 바르고, 무(無)를 가지고 유(有)라고 하며, 유를 가지고 무라고 하며,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며,

거친 것을 곱다고 하는 꼴이다. 그러기보다는 차라리 어물전이나 술집을 이러저리 누비면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밝히도록 했어야 했다. 이처럼 놓아버리지 않는다면 설령 미륵 부처님

이 하생(下生)한다 하여도 한 사람은커녕 반 사람도 (‘이것’을) 아는 이가 없을 것이다.

부대사는 흐리멍텅했지만 다행히 지기(知己)인 지공스님이 있었다. 지공스님이 아니었더라면 나

라를 떠났을 것이다. 말해보라,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를.

1) 제67칙에는 〔수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