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99칙 혜충국사의 십신조어〔慧忠十身調御〕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4:24
 

 

 

제99칙 혜충국사의 십신조어〔慧忠十身調御〕


(수시)

용이 노래하면 안개가 피어나고 호랑이가 휘파람을 불면 찬바람이 인다. 출세간의 종지는 금옥(金玉) 소리가 서로 울려퍼지는 것과 같고, 사방으로 통달한 지략은 화살과 칼끝이 서로 버티는 것과 같다.

이는 온 세계 어디에다가도 감추지 못하고 멀고 가까이에서 일제히 나타나며 고금을 밝게 분별한다.

말해보라, 이는 어떤 사람의 경계인가를. 거량해보리라.


(본칙)

숙종황제가 충국사(忠國師)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십신조어(十身調御) 입니까?”

-작가다운 군왕이며 당나라의 천자로다. 그래도 이 정도는 돼야지. 머리 위엔 권륜관(捲輪冠)이요, 발에는 무우리(無憂履)이다.


“단월(檀越)이여! 비로자나의 정수리를 밟고 초월해가시오.”

-수미산 저 언덕에서 손을 잡고 함께 가는구나. 아직도 (밟고 간다는 흔적이) 남아 있군.


“모르겠습니다.”

-왜 모르실까? 참 잘했다, 안 가르쳐주기를. 황제가 당시에 대뜸 큰 소리를 질렀더라면, 아니 모르니 따위를 무엇에 쓸거냐!


“자기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있다고 잘못 알지 마시오.”

-비록 이같은 말을 했어도 벗어날 곳은 있다. 술 취한  뒤에 어줍잖게 남(황제)을 근심시키는군.


(평창)

숙종황제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 충국사를 참례했고, 그 뒤 즉위하자 더욱 도탑게 존경하여 출입하고 맞이하고 전송함에 몸소 수레와 가마로 받들었다. 하루는 질문거리를 가지고 국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여래의 십신조어입니까?”

“단월이여! 비로자나의 정수리를 밝고 가시오.”

평소 국사의 척추뼈는 하나의 무쇠처럼 견고하더니만 제왕의 앞에선 물크러진 흙처럼 흐물흐물하였다. 그러나 비록 이처럼 섬세하게 답변하였으나 그래도 잘한 점이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그대가 알고자 한다면, 단월이여! 모름지기 비로자나의 정수리 위로 가야만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알지 못하고 다시 “괴인은 모르겠다”고 하니, 국사는 뒤이어 참으로 매몰차지 못하게도 수준을 낮추어 다시 첫 구절에다 주석을 붙여 주었다.

“자기의 청정법신이 있다고 잘못 알지 마시오.”

이는 이른바 사람마다 모두 만족스럽고 하나하나 원만하게 성취되어 있다. 그가 한 번 놓아주고 한 번 거두어들인 것을 살펴보면 팔방에서 적을 대처한 것과 같다. 듣지 못하였는가, “훌륭한 스승이란 기연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어, 마치 바람결에 따라서 돛을 거는 것과 같다”고 한 말을. 만일 한 가지만을 고수하면 어떻게 서로가 어울릴 수 있겠는가?

살펴보면, 황벽(黃檗) 노장은 사람을 제접하는데 능하였다고 하겠다. 그는 임제스님을 만나자 세 차례나 통렬한 60방망이를 때려 그 자리에서 바로 임제스님을 깨쳐주었다. 그러나 배상국(裵相國)을 지도하는 데에서는 매우 말이 많았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잘 지도하는 훌륭한 스승이 아니겠는가.

충국사는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으로 숙종황제를 제접하였다. 이는 그에게 팔방으로 적을 받아들일 만한 솜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십신조어(十身調御)란 곧 열 종류의 타수용신(他受用身)이며, 법(法)․보(報)․화(化)․삼신(三身)이 곧 법신(法身)이다. 왜냐하면 보신․화신은 참다운 부처가 아니며, 설법하는 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법신을 따라 살펴보면 하나의 텅 비어 신령하게 밝은 고요한 비춤이다.

태원(太原)의 부상좌(孚上座)가 양주(楊州)의 광효사(光孝寺)에 있으면서 「열반경」을 강의하였는데, 때에 사방으로 행각하던 스님이 있었다. 그는 바로 협산전좌(夾山典座)였다.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혀 그 절에 머물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강의를 듣게 되었다. 삼인불성(三因佛性)과 삼덕법신(三德法身)의 부분에 대한 법신의 오묘한 이치를 널리 설명하는 데 이르러 전좌는 갑자기 실소(失笑)를 금치 못하였다. 부상좌는 그를 눈여겨 보아두었다가 강의를 끝마치고 그에게 물었다.

“저는 본디 지혜가 용렬하여 문자에 의거하여 뜻풀이를 하였습니다. 조금 전에 강의할 무렵 상인(上人)께서 웃으신 것을 보았는데, 저에게 반드시 부족한 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인께서는 이를 말씀해주십시오.”

협산전좌는 말하였다.

“좌주(座主)께서 묻지 않으셨다면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만, 좌주께서 이왕 물으셨으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실로 좌주께서 법신을 몰랐기 때문에 웃었던 것입니다.”

“아까처럼 해설하면 어느 곳이 잘못된 것입니까?”

“좌주께서는 다시 한 번 말해보십시오.”

“법신의 이치는 마치 허공같아, 시간적으로는 삼제(三際)를 다하고 공간적으로는 시방(十方)에까지 뻗쳐, 팔극(八極)에 가득하고 하늘과 땅을 포괄하였습니다. 이는 인연따라 감응하며 두루두루하지 않는 바 없습니다.”

“좌주의 말씀이 옳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는 법신의 주변적인 것만 알았을 뿐 실제로 법신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객께서는 저를 위해 말씀해주십시오.”

“정 그러시다면 좌주는 잠시 강의를 그만두시고 열흘간만 고요한 방에서 고요히 생각하며, 마음을 거두고 생각으로 거두어 선악 따위의 모든 반연을 일시에 놓아버리고 스스로 궁구해보십시오.”

부상좌는 그의 말대로 똑같이 하였는데, 초저녁에서 오경(五更)에 이르러 북 울리는 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치게 되었다. 이에 곧바로 선객의 문을 두드리자, 전좌는 말하였다.

“누구시오?”

“접니다.”

전좌는 혀를 찬 후 말하였다.

“그대의 대교(大敎)를 전하여 부처님 대신 설법하라 하였는데, 야반에 무엇 때문에 술에 취하여 거리에 누웠오!”

“지금껏 경을 강의했던 것은 나를 낳아준 부모의 콧구멍을 눌렀다 비틀었다 한 것과 같습니다. 오늘 이후론 다시는 감히 이같은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 기특한 놈을 살펴보라. 밝고 밝으며 신령하고 신령한 것을 알고서 나귀 앞이나 말 뒤를 따라 다니는 종노릇하네. 모름지기 업식(業識)을 타파하여 한 실오라기만큼도 얻은 것이 없다 하여도 한 개는커녕 반 개 정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옛사람(지공화상)의 말에 “터럭 끝만큼도 닦아서 배우려는 마음〔修學心〕을 일으키지 않아도, 형상없는 빛〔無相光〕속에서 항상 자유로웠다”고 하니, 다만 항상 적멸(寂滅)을 알 뿐 성색(聲色)을 인식하지 말며, 영지(靈知)를 알 뿐 망상은 피우지 말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가령 철퇴가 정수리 위에서 왔다갔다 한다해도 정혜(定慧)는 또렷이 밝아 끝내 잃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달마스님이 이조(二祖)스님에게 물었다.

“그대가 흰 눈 위에서 팔을 끊은 것은 무슨 일을 하고자 함인가?”

“저는 마음이 편안치 못합니다. 스님께서 마음을 편케 해주십시오.”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대에게 편안함을 주리라.”

“마음을 찾아보아도 끝내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대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었다.”

이 말에 이조스님은 홀연히 깨쳤다. 말해보라, 이러한 시절을 당하여 법신은 어느 곳에 있을까?

장사(長沙)스님은 말하였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참〔眞〕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종전대로 식신(識神)으로 알려 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량겁이 흐르는 동안의 생사의 근본이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이것을 본래인(本來人)이라 한다.”

요즈음 사람들은 밝고 밝으며 신령하고 신령한 것을 인식하고선, 눈알을 부라리며 망상분별을 할 뿐이다. 이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자기의 청정법신이 있다고 잘못 알지 말라”고 하였는데, 여러분이 자기의 법신을 꿈속에서도 보지 못했는데, 또다시 무엇 때문에 잘못 알지 말라는 말을 하는가? 교학(敎學)에서는 청정법신을 극칙으로 삼는데 무엇 때문에 이를 오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듣지 못하였느냐? “인식해도 여전히 옳지 않다”는 말을.

쯧쯧! 바로 방망이로 때렸더라면 좋았을걸. 이 뜻을 알 수 있는 자라면 비로소 “자기의 청정법신이 있다고 인식하지 말라”는 말뜻을 알게 될 것이다. 설두스님은 그(국사)가 노파심이 간절했던 그 점을 의심하였지만 흐물거리는 진흙 속에 가시가 있는 것을 어찌하랴.

왜 보지 못하였느냐, 동산스님이 사람을 제접하는 데는 세가지 길이 있었던 것을. 이른바 현로(玄路)․조도(鳥道)․전수(展手)이다. 처음 발심한 사람이 도를 배우려면 이 세길을 밟아가야 한다.

어떤 스님이 동산스님에게 물었다.

“평소 스님께서 학인에게 조도(鳥道)로 가라 하셨는데, 어떠한 것이 조도입니까?”

“한 사람도 만나지 않는다.”

“어떻게 갑니까?”

“똑바로 발밑에 흔적 내지 말고〔足下無私〕가라.”

“조도로 가는 것은 본래 면목이 아닐는지요?”

“화상아, 왜 전도 되었느냐?”

“학인이 전도된 곳이 어디입니까?”

“전도되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종을 주인으로 생각하느냐?”

“어떤 것이 본래면목입니까?”

“조도로 가지 않는다.”

모름지기 견해가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야만이 조금이나마 서로 응할 수 있는 것이다. 대뜸 하나가 되어 자취를 없애고 소리를 삼킨다 해도 납승의 문하에서는 사미(沙彌)․행자의 견해일 뿐이다. 반드시 속제(俗諦) 속으로 머리를 돌려 대용(大用)을 크게 일으켜야 한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한 나라의 국사 또한 억지 이름,

-그럴 필요가 있을까? 눈에 어른거리는 허공 꽃이며 물 위의 달일 뿐이다. 바람이 스치니 나무 끝이 흔들린다.


혜충국사 홀로 명성을 떨쳤구나.

-과연 요새가 되는 나루터를 꽉 틀어막았군. (그런 사람은) 천만 명 중에 한 명은커녕 반  명도 없다.

당나라를 떠받치는 참다운 천자,

-가엾구나. 제접해서 무엇에 쓸려고.


일찍이 비로자니의 정상을 뛰어넘었노라.

-모든 사람들은 왜 이러하질 못할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고 말았군. 그대는 어떻게 뛰어넘겠는가?


철퇴로 황금 뼈를 쳐부수니

하늘과 땅 사이에 무슨 물건이 있겠는가?

-아득한 사해에 지기(知己)가 적구나. 온몸에 짐을 짊어졌다. 모래를 뿌리고 흙을 뿌린다.


삼천찰해(三千刹海) 침침한 밤에

-높이 쳐다보아라. 제 영역을 꼭 잡고 있구나. 그대는 귀신 굴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느냐?


누가 창룡굴(蒼龍窟)에 들어갈지 모르겠네.

-서른 방망이에서 한 방망이도 빼지 말고 때려라. 염송했구나. 알겠느냐? 쯧쯧! 여러분의 콧구멍이 설두스님에게 뚫려버렸다. 자기의 청정법신이 있다고 잘못 인식  하지 말라.


(평창)

“한 나라의 국사 또한 억지 이름, 남양 홀로 명성을 떨쳤다”는 것은 하나같이 참으로 찬탄한 듯하다. 듣지 못하였느냐, “지극한 사람〔至人〕은 이름 붙일 수 없다”는 말을. 국사라 부르는 것도 억지로 붙인 이름일 뿐이다. 국사의 도는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 이처럼 훌륭하게 사람을 제접하니, 오로지 혜충국사만이 작가답다고 인정한 것이다.

“당나라를 떠받치는 참다운 천자, 일찍이 비로자나의 정상을 뛰어넘었노라”는 것은, 안목을 갖춘 납승의 견해라면 비로자나의 정상을 뛰어넘어야 십신조어(十身調御)를 볼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부처를 조어라 말하는 것은 부처의 십호(十號)가운데 하나이다. 한 몸이 십신(十身)으로 변화하고 십신이 백신(白身)으로 변화하여, 천․백․억의 몸까지 이르시지만 그 근본은 한몸〔一身〕일 뿐이다. 이 송은 설명하기 쉽지만 뒤의“ 자기의 청정법신이 있다고 인식하지 말라”고 노래한 송은, 물로 씻을 수조차 없어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다.

“철퇴로 황금 뼈를 쳐부순다”는 구절은 “자기의 청정법신이 있다고 잘못 인식하지 말라”는 뜻을 송한 것이다. 설두스님은 각별히 그를 찬탄하여 황금 뼈를 철퇴로 일격에 쳐부숴버렸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무슨 물건이 있겠는가”라는 것은, 바로 청정하고 훌훌 벗고 텅 비어 말끔하여야만 결코 한 물건도 없게 되니, 이게 바로 본지풍광(本地風光)이라는 것이다.

이는 “삼천찰해의 침침(沈沈)한 밤”과 같다. 삼천대천세계 향수바다〔香水海〕 가운데 가이 없는 세계가 있고, 그 한 세계에 하나의 바다가 있는데, 바로 고요한 깊은 밤이 되어 일시에 천지가 고요하고 맑으니, 말해보라, 이는 무엇일까? 절대로 눈을 감고 이를 알려고 말라. 이처럼 이해했다면 곧 독 바다〔毒海〕에 떨어지게 된다.

“누가 창룡굴에 들어갈지 모르겠네”라는 것은 다리를 폈다 오므렸다 하니 누구일까? 말해보라.

여러분의 콧구멍이 일시에 설두스님에게 뚫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