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암잡록(山艤雜錄)

산암잡록(山艤雜錄) / 서

通達無我法者 2008. 3. 5. 17:32
 

서(2)



온 서중(無恕中)스님은 호구(虎丘)스님의 8대손으로서 큰 도량에 앉아 법을 설하고 중생을 제도하여, 승속 모두에게 귀의할 바를 제시해 주었다. 그의 “이회어(二會語)”는 무상거사 송렴(無相居君 宋濂:明代 學者)이 서문을 쓴 바 있지만 “산암잡록(山艤雜錄)”에 대해서는 서문이 없었는데 스님의 큰제자 쌍림사(雙林寺) 주지 현극 정(玄極頂)선사와 전 남명사 주지 운중 선(萊中垣)스님이 함께 나를 찾아와 서문을 청하였다. 나는 한두 차례 훑어본 후 현극스님과 운중스님에게 말하였다.

”지난 날 “이회어(二會語)”를 읽어보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천갈래 강물이 한 근원에서 흐르듯 세찬 문장력을 구사했는지, 어쩌면 그렇게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번개처럼 번뜩이는 필치를 휘둘렀는지, 어쩌면 그렇게도 다듬은 흔적을 찾을 수 없이 막힘없고 원만하게 써내려갔는지, 어쩌면 그렇게도 가지와 덩쿨을 잘라버려 쓸모없는 말이 없으면서도 구별[町疃:밭두덕〕 을 초월하여 정식(情識)의 경계에 떨어지지 않았는지! 그것은 아마도 참다운 불법에서 흘러나온 문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쪽 저쪽에서 주워 모아 문장을 구사하는 자들과 비교해 보면 어찌 구만리 차이 뿐이겠는가. 그의 말을 통해 그의 깊이를 살펴보면 그는 부처와 보살의 경지에 이른 분이시다. 그러나 후인을 격려하고자 간간이 제창하신 법문은 불법의 요체를 밝히고 자신의 큰일을 끝마치는 것으로 목적을 삼으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널리 미쳐줄 수 있는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이 책을 살펴보니,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마을과 시장거리 및 아래로는 산림속에 이르기까지 인물, 행적, 사실, 문장 등을 선하다고 써야 할 곳과 그렇지 못한 곳, 옳다고 써야 할 곳과 그렇지 못한 곳, 마땅히 이래야 할 곳과 그래서는 안될 곳, 우수하다고 써야 할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을 빠짐없이 써놓고 있다. 이로써 선을 권장하기도 하고 악을 징계하기도 하니, 유학자․불교도․도교인․관리․은거한 선비․늙은이․어린이․부귀한 자․비천한 자․상인․예술가․백정․농사꾼,

그리고 나아가서는 부녀자와 가마꾼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유익한 책이 되었다.

자비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면 한 치의 땅도 덮어주지 않는 곳이 없고, 불법의 비가 줄기차게 내리면 한 포기 풀잎까지도 적셔주지 않는곳이 없고 해와 달이 동쪽에서 솟아 서쪽으로 기울 때 어두운 거리를 비춰주지 않는 곳이 없으며, 위로는 하늘이 덮어주고 아래로는 땅이 실어주어 모든 생명을 붙잡아 주지 않는 게 없다. 이 책을 지으신 마음도 이와 같아서 대자대비로 일체중생을 가엾게 여기사 많은 방편으로 교묘히 인도하여 삿됨과 망녕됨을 버리고 참다운 지혜에 어둡지 않도록 하니, 차이가 없는 평등이란 이런 것이다. 부처님 같은 스님의 자비가 여기에 있기에 참으로 부처와 보살의 지위에 이른 분이라 한 것이다.

이 책을 한 번 보고서 훌쩍 돈오(頓悟)한다면,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지 않는 데에서 비롯하여 무엇이든 권하고 징계하는 데에 이르게 되고, 권하고 징계하지 않는 것이 없는 데에서 다시 권하니 징계하니할 것도 없어진다. 그리하여 바른 길로 말미암아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감으로써 굳어진 습기(習氣)에 부림을 당하지 않고 업식(業識)에 매이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스님께서 이 책을 편찬하신 깊은 마음을 체득하는 것이며, 현극스님과 운중스님이 이를 서둘러 간행하고 이를 유포하는 그 마음도 스님의 같은 마음이다.

아! 그저 보통 붓 나가는대로 기록하여 부질없이 견문만을 넓히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지껄여대는 따위의 책들과 이를 견주어 볼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말로서 서문을 가름하는 바이다.


홍무(洪武) 25년(1392) 겨울 10월 24일 무문거사 미산(無聞居君 眉山)소백형(蘇伯衡)서





서(3)


도는 말을 통해 밝혀지고 말은 덕에 의해 전해진다. 그러므로 덕 있는 자의 말은 한 시대 사람에게만 믿음을 줄 뿐 아니라, 후세까지도 의심없이 전해진다.

서중(無慍恕中:1309~1386)스님은 서암사(瑞岩寺)의 일을 그만두고 태백산 암자에 한가히 머물면서 스스로 도를 즐겼다. 쓸쓸한 방에는 물건들이 넉넉하지 못했는데도 도를 배우려는 사람들의 신발이 매일 문 밖을 메웠다. 그들은 밀어내도 가지 않고, 어쩌다가 한 말씀 얻어 들으면 천금처럼 귀중히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감로수(甘露水)나 제호(醍醐)를 마신 듯 마음과 눈이 한층 빛났다. 이는 스님께서 평소 여러 큰스님의 문하를 참방하여 보고 들었던 아름다운 말과 선한 행실들을 마음 속 깊이 원만히 체득해서 말로 표현하였기에, 아름답게 꾸미지 않아도 자연히 훌륭한 격식을 이룬 것이리라. 총림의 큰스님과 유학의 선각자, 그리고 아래로는 마을의 어린아이들까지 그들을 격려시킬 수 있는 선한 이야기와 그들을 경계시킬 수 있는 악한 이야기가 있으면 사람들에게 들려주어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이를 기록하여 “산암잡록(山艤雜錄)"이라는 책으로 만들어냈다.

취암사 주지로 있는 그의 제자 현극 정공(玄極頂公)이 이를 간행하면서 멀리 서울까지 찾아와 특별히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나는 읽으면서 차마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태평성대의 말이란 모두 바른 법을 따르므로 거친 말과 부드러운 말이 모두 진리다”한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비유하자면 훌륭한 의원이 다루면 모든 초목이 약이 되지만 모르는 자는 손에 약을 쥐고서도 병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하겠다.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법이 불법 아닌 것이 없으므로 이치에 밝은 자가 이를 얻으면 모두가 세상에 전해지는 가르침이 된다. 덕이 있으면 말을 남기게 된다함은 스님을 두고 이르는 말로서 스님은 약과 병을 잘 아는 자이며, 불법을 잘 말하는 자이다.

나와 스님과는 한 문중이라는 우의가 있으므로 비록 한 차례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지만 그의 명성과 행적은 몇년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으며 그가 대중을 감복시킬 만한 덕을 지녔고 세인을 가르칠 만한 말씀을 남겼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터이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믿어 의심치 않을텐데 더구나 이 책의 내용은 모두가 있었던 사실이다. 사실을 통해 이치를 밝히고 가까운 일을 들어 먼 것을 가리키는 법이니, 이 책으로 당세를 유익하게 하고 끝없이 전해주어야 한다.


홍무(洪武) 기사년(1389) 여름 6월  승록사 좌선세(僧錄司左善世) 홍도(弘道)서




서(4)



나는 평소 병 많은 몸으로 노년에 일본의 주청(奏請)에 관한 일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서울에 올라가게 되었다. 이에 혼자 생각해 보니 설령 일본을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겠나 싶었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성상폐하께서 나를 가엾게 여겨 특별히 일본의 주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궁궐에 머물게 하셨다. 그리고 나서도 온갖 병들이 끊임없이 나의 몸을 침범하여 세번이나 죽을 뻔 했지만 또한 천행으로 폐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천동사(天童寺) 옛절로 돌아가도록 명하시니, 친구들은 내가 마치 다시 세상에 태어나기라도 한 듯이 반겼다.

내 나이 칠십에 가까운데 만번 죽을 고비를 겪고 다시 한번 삶을 얻게 되었기에, 이제 문을 닫고 모든 인연을 끊은 채 여생을 마칠까 하였는데 법질(法姪) 장경중(莊敬中)이 자주 나의 암자에 찾아와 이렇게 청하였다.

”당․송 시대 큰스님들의 말씀과 저서는 끊이지 않고 간간이 세상에 나왔었는데 원나라부터는 이러한 일이 드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근래 큰스님들의 법문과, 총림의 귀감이 될 만한 아름다운 말씀이나 행실들이 대부분 없어져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노스님께서는 총림의 전성시대를 맞이하여 많은 큰스님을 두루 참방하여 넓은 견문을 지니셨습니다. 제가 항상 노스님을 모시면서 들은 한두 가지 일만 해도 모두 이제껏 듣지 못했던 이야기로서 저를 더욱 깊이 일깨워주었습니다. 바라옵건대 노스님께서는 그저 유희 삼아[遊戱三昧]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위로는 옛 스님의 숨겨진 빛을 나타내시고 아래로는 후학들의 고질병을 벗겨 주신다면 불법문중의 경사가 되리라 믿기에 감히 간청을 드리는 바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의 마음이야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내 말은 문장이 될 수 없으니 말을 하되 문장으로 잘 표현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먼 훗날까지 전해질 수 있겠는가? 이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경중은 또다시 말하였다.

”이제 불법은 쇠하고 선배스님들도 거의 사라지셨습니다. 이런 때 노스님께서 먼곳에서 돌아오실 줄은 실로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는데, 노스님께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거절하신다면 장차 누가 이 일을 맡겠습니까? 문장이 잘되고 못되고를 어찌 따지겠습니까? 사실대로 기록하여 그 일을 밝힐 수만 있다면 충분합니다. 바라옵건대 굳이 사양하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나는 평소 스승과 도반이 강론했던 법어들과 강호에서 보고 들은 일 가운데 기연(機緣)의 문답과 선악의 인과응보, 그리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낱낱의 처신 등을, 시대의 선후와 인물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후배들을 일깨울 수 있는 일이라면 생각나는대로 붓 가는대로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하고 이를 “산암잡록(山艤雜錄)”이라 이름하였다.

지난 송대(宋代)에 큰스님이 편수한, 이른바 “나호야록(羅湖野錄)” “운와기담(雲臥紀談)” 등에 기재된 바는 불법의 제일의제(第一義諦)를 고무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내 젊은 시절 이러한 류에 대한 기억이 있었으나 이제는 십중팔구는 잊어버렸고, 노년에 바다 한쪽 끝에 살다보니 사람들에게 물어 많은 자료를 채집할 수도 없었다. 이에 따라 빠진 것이 많음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바이다.

말을 하되 도로써 하는 것은 지극한 말로써 일찍이 말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이밖의 것은 나의 분수에 벗어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총림에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의 붓을 잡는 자가 있다면 어쩜 이를 채택해 주지 않을까 한다.


홍무(洪武) 8년(1357) 12월 15일  천태산인(天台山人) 석 무온(繹無)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