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간록(林間錄) 서(序)
혜홍 각범(慧洪覺範 :1071~1128)스님은 운암(雲庵) 노스님
에게서 자재삼매(自在三昧)를 얻었기에 문필계에 자유롭게 노
닐 수 있었는데, 그 곳에서 읊고 나누었던 모든 이야기는 아름
다운 문장이 되었다. 또한 산림의 스님들과 손을 맞잡고 나눈
법담은 모두 옛 큰스님의 고곡한 행실, 총림의 유훈(遺訓), 많은
불보살들의 묘한 종지, 그리고 훌륭한 이들의 한담(閑談)
등이었다. 스님은 그러한 얘기들을 들을 때마다 기록하여 10여
년 사이에 3백여 가지를 수집하였다.
당시 스님을 따르던 본명(本明)스님은 겉으로는 엉성한 듯하
나 속은 매우 꼼꼼하고 날카로운 분이어서 틈틈이 각범스님의
기록들을 상. 하권으로 나누어 정리하고 이를 「임간록(林間
錄」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글은 기록한 순서대로 되어 있을
뿐 시대순으로 정리하지는 않았다. 또한 어거지로 조작해낸 것
이 아니라 대화속에 나온 내용이 므로 문장이 자연스럽고 평
이(平易)하여 까다롭거나 어려운 부분이 없다.
사람들은 본명스님에게 이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스님이
가는 곳마다 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법석을 이루었다. 이에 본
명스님은 글씨가 마모되거나 베껴쓰는 과정에서 진본과 틀리게
될까 걱정한 나머지, 이를 간행하여 후세에 길이 남기고자 하
면서 나에게 서문을 청하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 글 자체
가 흉년의 기장(黍) 이나 겨울의 솜옷처럼 불교문중에 귀중한
도움이 되는데 굳이 내가 서문을 쓴 뒤에야 후세에 길이 전하
니,이 점이 내가 잠자코 있으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던 이유
이다.
옛날 악광(樂廣 : 晋人)은 청담(淸談)은 잘하였지만 문장력이
좋지 못하여 반악 (潘岳 : 字 安仁, 문장가)에게 글을 부탁하면
서 먼저 2백 마디로 자기의 뜻을 써 달라 하였는데 반악은 그
의 뜻대로, 그것을 정리하여 명문장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만일 악광이 반악의 문장을 빌지 아니하고, 반악이
악광의 뜻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아름다운 문장을 이
룰 수는 없었을 것이다." 라고 평했다 한다.
그러나 오늘날 각범스님은 법담과 문장에 있어서 앞서 말한
두 사람의 장점을 한 몸에 겸비하였다. 무슨까닭일가? 대부
분 깊고 치밀한 생각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도를 체득
한 자만이 편견과 집착을 여의고 안정과 혼란을 다 녹여 마음
이 맑은 거울 같으므로 사물을 대하면 그대로 분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 나오는대로 이야기하고 붓 가는대로 글을 써도 어
느 곳에서나 진실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각범스님이 두 사
람의 장점을 겸할 수 있었던 까닭은 도를 체득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사람이라면 도를 몰라서는 안된다
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각범스님의 이름은 헤홍 (慧洪) 이며, 균양(筠陽) 사람이다.
지금은 임천(臨天) 북쪽 경덕선사(景德禪師)에 주지로 있는데,
이는 현모각 대제(顯謨閣待制) 주공(朱公)의 청을 사양할 수
없어 부임한 것이다.
대관(大觀) 원년(1107) 11월 1일,
임천 사일(臨川謝逸)이 찬(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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