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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 Aggregates]

通達無我法者 2008. 4. 2. 15:08
 

 

 

3.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 Aggregates]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오취온)는 물질[色蘊] 즉 형상, 느낌[受蘊], 지각[想蘊], 의도[行蘊, volitional activity]와 의식[識蘊]입니다. 그것들은 무엇일까요? 그것들은 수행자들이 항상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수행자들은 오취온을 찾으려고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수행자 안에 있습니다. 수행자들이 볼 때, 그것들은 보는 데에 있습니다. 수행자들이 들을 때, 그것들은 듣는 데에 있습니다. 수행자들이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감촉하고 생각할 때, 그것들은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거나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수행자들이 팔다리를 구부리거나 펴거나 움직일 때, 오취온은 구부리고 펴고 움직이는 데 있습니다. 단지 수행자들이 그것들이 오취온인 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수행자들이 오취온을 알아차리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오취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합니다.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기에, 수행자들은 오취온을 갈애와 잘못된 견해로 집착합니다.


수행자들이 팔을 구부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먼저 구부리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구부림의 물질적 특성이 하나씩 하나씩 나타납니다. 그런데 구부리려는 의도 안에는 네 가지 정신적 무더기가 있습니다. 구부리려고 하는 마음은 의식[識蘊]입니다. 구부림을 생각한 다음 구부릴 때, 구부림에 대해서 수행자들은 좋아하거나, 혹은 싫어하거나, 혹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게 느낄 것입니다. 좋아하면서 구부리면 즐거운 느낌이 있습니다. 싫어하거나 화를 내면서 구부리면 괴로운 느낌이 있습니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구부리면 덤덤한 느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구부림을 생각할 때 '느낌 무더기[受蘊]'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구부림을 인식하는 '지각 무더기[想蘊]'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수행자를 구부리도록 하는 마음 상태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구부려! 구부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것입니다. 그것이 '의도[行蘊]'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부리려는 의도 안에는 느낌, 지각, 의도와 의식이라고 하는 모두 네 가지 정신적 무더기가 있습니다. 구부리는 움직임은 물질 즉 형상입니다. 그것은 '물질 무더기[色蘊]'입니다. 그러므로 구부리려는 의도와 구부림은 합해서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팔 하나를 굽히는데 오취온이 있습니다. 수행자가 일단 움직이면 오취온이 생깁니다. 수행자가 다시 움직이면 추가로 오취온이 존재합니다. 수행자가 오취온에 대해서 올바로 알아차리지 않아서 오취온을 올바로 알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수행자 스스로 압니다.


그러니까, 수행자는 '내가 구부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구부린다'라고 생각하죠? 누구나 그렇습니다. 아이들에게 물어도 같은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어른에게 물어도 그가 마음 속에 있는 대로 말한다면 같은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박식한 사람이라면 경전에서 읽은 기억을 되살려 답을 만들어서 '마음과 물질'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안 것이 아닙니다. 단지 경전을 모방하는 것뿐입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구부리려고 하는 것은 '나'다. 구부리는 것은 '나'다. 움직이려고 하는 것은 '나'다. 움직이는 것은 '나'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이 '나'는 전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고, 미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상주론(常住論, notion of permanence)이라고 합니다. 아무도 '이 구부리려는 의도는 단지 이 순간 존재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항상 '이 마음은 전에도 존재했었다. 마찬가지로 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내'가 지금 구부림을 생각하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또한 '이 생각하고 있는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팔을 굽히거나 움직일 때, 수행자는 '과거로부터 존재하고 있는 팔과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은 같은 팔이다. 과거로부터 존재하고 있는 '나'와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은 같은 '나'이다.'하고 생각합니다. 움직인 다음에 수행자는 다시 '이 팔과 이 '나'는 항상 존재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이 사라진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것도 상주론입니다. 그것은 무상한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것이며, 개아(personality)가 아닌 것을 개아로, 자아(ego)가 아닌 것을 자아라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팔을 굽히거나 펴고서는 수행자는 기분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팔이 뻣뻣할 때 수행자가 팔을 움직여서 근육을 풀어주면 뻣뻣함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수행자는 편안해져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수행자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용가들과 아마추어 무용가들은 춤추면서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춤을 즐깁니다. 그들은 춤추기를 좋아하고 스스로 즐깁니다. 수행자들은 서로 이야기하면서 손과 머리를 자주 흔들면서 즐거워합니다. 수행자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던 일이 성공적으로 되어가도 수행자는 그것이 좋은 것이며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수행자가 갈애에 의해 세상사에 집착하여 기뻐하는 방식입니다. 수행자는 무상한 것을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고 즐깁니다. 행복이 아니고, 개아가 아니고, 단지 마음과 물질의 무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을, 행복이고, 개아라고 여기고 즐깁니다. 수행자는 그것들을 즐기고, 그것들을 집착합니다. 수행자는 또한 그것들을 자아 혹은 에고로 잘못 알고 그것들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팔다리를 구부리고 펴거나 움직일 때, '내가 구부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집착의 무더기입니다. 구부리는 것은 집착의 무더기입니다. '내가 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집착의 무더기입니다. 펴는 것은 집착의 무더기입니다. '내가 움직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집착의 무더기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집착의 무더기입니다. 우리가 집착의 무더기를 알아차려야 한다고 할 때의 집착의 무더기란 바로 이런 것들을 의미합니다.


보거나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자가 볼 때, 보는 근원인 눈이 의식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대상이 보입니다. 둘 다 물질입니다. 그것들은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보는 동안 알아차리지 않는다면 그것들에 집착하게 됩니다. 수행자는 눈을 포함한 몸 전체가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아라고 생각하고, 집착합니다. 수행자는 대상을 포함한 물질 세계 전체가 영원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이며, 자아라고 생각하고, 집착합니다. 그러므로 물질인 눈과 물질인 보이는 대상은 집착의 무더기입니다.


그리고 수행자가 볼 때, '봄'이 의식에 나타납니다. 그것은 네 가지 정신적 무더기들입니다. 단순히 봄을 자각하는 것은 의식의 무더기입니다. 볼 때 즐겁거나 괴로운 것은 느낌의 무더기입니다. 보여진 대상을 지각하는 것은 지각의 무더기입니다. 보려고 주의를 끌게 하는 것은 의도의 무더기입니다. 이것들이 네 가지 정신적 무더기들입니다.


보는 동안 알아차리지 않는다면, 수행자는 '봄'이 '전부터 계속 존재하는 것이고, 지금도 존재한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혹은, 좋은 것을 볼 때, 수행자는 '보는 것은 좋은 것이다'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수행자는 보는 것을 즐기려고 좋은 것과 색다른 것을 구하러 다닙니다. 수행자는 돈과 잠과 건강을 대가로 지불하면서 영화나 비디오(pwes and films)를 보러 다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수행자는 돈을 낭비하고 건강을 해치면서 다니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거나 즐기는 것이 '나'이고, '내가 즐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갈애와 잘못된 견해로 집착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집착하기 때문에, 볼 때 의식에 나타나는 마음과 물질을 집착의 무더기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거나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로 집착합니다. 수행자가 '나'라든가 에고라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숙고하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는 더욱더 집착합니다. 그러므로 오취온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수행자가 보고, 듣고, 느끼거나 지각할 때마다 육문[眼耳鼻舌身意]에 나타나는 정신적 물질적인 것입니다. 수행자는 이 오취온들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오취온들에 대해서 알아차려서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위빠싸나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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