話頭·參禪

화두참선에 있어서 의정에 대한 바른 이해는

通達無我法者 2008. 5. 3. 19:00

 

 

 

언제부터인가

참선이 좋다하기에, 화두가 어떻고 의정이 어떻고,
은산철벽이 어떻고, 의심이 어떻고...
등등 가지가지 참선에 대한
언어들이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언어들은 공부인들이 공부경험 과정에서
체험을 말해 놓은 것이기는 하나,
일반인들이 이해를 해서 쓰기에는 오해되기가 십상이다.

왜냐하면 공부에 대한 믿음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이런 언어들의 전달은 본질을 등질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을 점검하기 전에
결과만을 얻으려고 하니 앞뒤가
뒤바뀌어져서 말만 어려워진다.


의정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日用事 중에 항상 있는
삶의 妙用을 말하는 것인데,
이 묘용이 우리 삶을
순간이라도 떠나본적이 있는가.


순간순간 항상 같이 하고 있으며
묘용 중에 있지만, 얻을 수는 없는 것을 看하니,
看하는 주변의 것들이 저절로 다 떨어져 나가버려,
묘용 중에 얻을 수 없는 것만 남게 된다.
그러니 의정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근본을 놓치고
떨어져 나가버려야 할 것을 붙들고,
거기서 의정이니 화두니 은산철벽이니
동도 아니니 서도 아니니 생각을 일으키면,
의정이 특별한 곳에
따로 있는 것 처럼 여기게 되어,
강박관념만 증가하게 되고 소위 의정병, 화두병,
참선병에 떨어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의정이라는 것은 말이 의정이지 마음법이다.

마조스님에게 어떤 이(大梅法常)가 와서 묻길래,
스님은 "마음이 부처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3년 동안이나 산속에 들어가 나오지를 않아,
마조스님이 이상히 여겨 제자를 보냈다.

제자는 "요즈음 우리 스님께서는
마음이 부처가 아니다고 가르친다"고,
시킨대로 전했다.

이 말을 전해 들었으나,
그 듣는 이는 마조스님이 그렇게 하든 안하든
"나는 마음이 부처다" 라고 했다.

제자가 다시 돌아와 스승께 그대로 이야기 드리니,
"그 사람 공부가 많이 익어졌구나
(매실이 익었구나)" 하였다.

'마음이 부처'라고 믿고 공부한
사람은 의정이니 화두니 그런 말이 전혀 소용 없고,
'마음이 부처'란 소리에, 항상 작용 중에 있는
마음 경험 속에 있어, 다른 것들이
침범할래야 침범할 수 없는 상태에 있게 되어,
저절로 의정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이 화두의
출처고 의정의 출처인데 화두라는 말,
의정이라는 말만 익혀가지고 안으로 끌고
들어가니 근본을 등질 수 밖에...

그래서 이 공부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첫째 이 공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공부다.
너무 쉽기 때문에 평상심이 도라고 한것이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익힌 것이 많아,
화두나 참선이라는 말에 주눅들려 가지고
이미 내게 쉽게 있는 것을 공부하려고 하니,
얼토당토 않는 소리에 떨어져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기때문에, 옛 사람들은
'묻는 자 상신실명이다'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무엇을 따로 묻는가.

조주 무자도 개에게
불성이 있다 없다가 문제가 아니고,
조주가 깨닫는 불성은 어떤 것이기에
승이 묻는 말에 무라고 했을까?
하는 조주의 의지처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있고 없음에 놀아나
궁리해본들 조주를 등지게 된다.
여기서 무슨 의정이 생기겠는가 !

너무 조주에게 주눅 들릴 필요도 없는 것이다.

또 화두는 근본 뜻에 마음이 가있어야지
옛 어록이나 조사님들의 역사적인 일에
붙들려 있으면 이것들이
공부길를 다 방해하게 되는 것이다.

가능하면 부처와 조사를
원수 보듯이 봐야 된다. 장부라면...
거기에서 살아날 길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원수 보듯이 보라는 말은
나를 세워두고 남을 밀어내라는 말이 아니다.
잘 알아들어야 된다.

  조계사문 玄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