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몸의 주인인가
명리도 구하지 아니하고 영화도 구하지 아니하며
다만 인연을 따라 한 생을 살아갈 뿐이다.
심장의 기운이 사라지면 누가 이 몸의 주인인가.
백년 세월 이후에는 부질없는 헛된 이름뿐일세.
옷이 떨어지면 겹겹이 꿰매 입고
식량이 떨어지면 가끔씩 구해온다.
일개의 허깨비 같은 몸 며칠이나 가겠는가.
쓸데없는 일을 위해 무명만 키우도다.
不求名利不求榮 只麽隨緣度此生
불구명리불구영 지마수연도차생
三寸氣消誰是主 百年身後謾虛名
삼촌기소수시주 백년신후만허명
衣裳破處重重補 粮食無時旋旋營
의상파처중중보 양식무시선선영
一箇幻軀能幾日 爲他閒事長無明
일개환구능기일 위타한사장무명
- 동산양개(洞山良价)
이 글은 치문에 나오는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 화상이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계(自誡)의 내용이다. 옛 수행자의 생활과 그 정신이 물씬 풍긴다. 처음 출가하여 어릴 때부터 이런 글을 배우다 보면 수행자의 인생관이 자연스럽게 바로 선다. 동산 화상은 5대 선종의 하나인 조동종(曹洞宗)의 개조(開祖)다. 그렇듯 뛰어난 인물로 일찍부터 그의 인생관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세상 사람들이 다 목을 매고 좋아하는 명예와 이익과 영화를 좇지 않는다. 소중한 인생으로 태어나서 그와 같은 것을 위해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문제는 구하지 않아도 인연 따라 살면 된다. 만약 심장이 멈추면 누가 나의 주인인가. 아무리 화려하게 살았다 한들 백년 뒤에 모두가 헛된 이름일 뿐이다. 누가 나를 알아주겠는가. 설사 알아준들 무엇에 쓸 것인가.
그렇다면 옷은 겹겹이 기워 입으면 될 것이고 식량은 가끔 얻어오면 된다. 그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이 한 몸 며칠이나 버티겠는가. 아등바등 해봐야 결국은 의식주 문제 해결을 위해서다. 그 외에는 다 부질없는 일이다. 그 부질없는 일 때문에 번뇌 무명만 자꾸 키울 필요가 있겠는가. 헛된 이름과 호의호식을 위해서 업장만 불리는 일이다. “삼일 간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고, 백년 동안 탐한 물질은 하루아침의 먼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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