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진신론(眞身論)-2

通達無我法者 2008. 8. 15. 17:20

 

 

 

2. 부처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달마의 말이 어줍잖은 추종자들에 의해 잘못 전달되고, 엉터리 주석이 덧붙여지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너무나 슬프다. 그들은 달마의 말에 자신들의 혼란된 생각들을 마구 섞어 놓았다. 그들은 달마가 한 말이 본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실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쳐 놓은 덫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이 달마의 말이며 무엇이 덧붙여진 사족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 나는 이 어록들에 대해서 그대에게 말할 때, 다시 한번 한가지 예를 되풀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중의 하나인 타고르는 자신의 시 <기탄잘리>를 영어로 번역했다. 비록 그는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마음은 언제나 벵골의 한 거부의 아들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영국 국왕에 의해 왕이라는 작위를 받을 정도였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모국어는 항상 그의 모국어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모든 시를 그의 모국어인 벵골어로 지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이 <기탄잘리>를 영어로 번역한다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말을 몇 번이고 그에게 강조했다. 하지만 타고르 자신말고는 그것을 영어로 번역할 사람이 없었다. 그 자신보다 누가 더 훌륭한 번역을 해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타고르는 자신의 시를 영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망설임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타고르는 당시에 유명한 기독교 선교사인 앤드루스(C. F. Andrews)에게 조언을 요청했다. 그는 세계적인 인물로 위대한 학자이며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는데, 당시 벵골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그곳에서 벵골어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번역본과 원본을 대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타고르는 생각했다. 앤드루스는 타고르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것을 대조하였고, 그 결과 단 네 개의 단어만 제외하고는 완벽하다고 말했다. 그 네 개의 단어도 문법적으로만 부적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앤드루스는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단어들을 제안했다.

타고르는 언어상으로 볼 때 앤드루스의 말이 확실히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앤드루스가 제안한 단어들을 바꾸어 보았다. 그리고는 영국으로 가서 런던에 있는 그의 친구 문인들 중 한 사람인 예이츠(Yeats)에게 그것들을 보여 주었다. 예이츠는 타고르의 <기탄잘리>를 읽고서 감동을 받은 나머지 다른 친구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그 시를 낭송해 주었다. 그는 이 시가 노벨 문학상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먼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여러 시인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20여 명의 문인들이 예이츠의 집에 모여서 타고르의 시 낭송회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작품을 노벨상 후보로 선정해야 한다고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그러나 예이츠는 뜻밖에 입을 열었다.

"모든 부분이 완벽하다. 그런데 여기 단 네 개의 단어가 좀 이상하다."

그 말을 듣자 타고르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네 개의 단어는 앤드루스가 제안한 단어들이었다.

예이츠는 계속 말했다.
"그 말들은 문법적으로는 완벽하다. 하지만 시적으로는 완벽하지 않다. 그 단어들은 잔잔히 흘러가는 시의 아름다움을 거스르고 있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이 단어들을 바꾸었으면 한다. 사실 나는 이 단어들이 타고르 당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어떤 시인도 한번 사용된 단어들을 반복해서 쓰지 않는다. 물론 문법적으로는 그것이 맞지만 시인들은 자유를 갖고 있다. 그들은 문법보다 시적 자유를 더 높은 가치에 둔다. 그래서 때때로 시인들에게는 문법이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타고르가 말했다.
"자네 말이 옳다. 이 단어들은 내가 쓴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앤드루스에게서 나온 말이다. 내가 쓴 단어들은 이런 단어들이다."

그리고는 그가 처음 사용했던 단어들을 예이츠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예이츠는 굉장히 기뻐했다.
"이제 모든 것이 완벽하다. 이제 강속에 박혀 있던 네 개의 바위들이 뽑혀졌다. 타고르 당신의 단어는 문법적으로는 맞지 않지만, 시적으로는 완전하다. 그것들은 바로 그대의 가슴에서 나온 말들이다."

문법이란 마음의 장난이며 참된 시는 사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마음은 본질적으로 산문이며 시는 가슴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타고르의 시는 문법적으로는 틀렸지만 시적으로는 맞는 것이다. <기탄잘리>는 노벨상 수상 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이 이야기는 달마의 어록이 언어상으로는 훌륭한 것이지만, 깨달음의 경험과는 맞지 않도록 쓰여졌다는 예를 들기 위한 것이다. 추종자들은 많은 엉터리 문장을 첨가했고, 혼란된 생각들을 주석이랍시고 덧붙였다. 그래서 이 어록을 읽는 사람은 매우 예리한 지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달마의 말이 어디에서 끝나고, 제자의 말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서로 섞여 있다. 달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그가 너무 위대했기에 몇몇의 제자를 제외하고는 그의 경지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마저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후계자로 선택된 혜가가 달마로부터 "나의 가르침의 본질이 무엇인가?"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단지 엎드려 절만 했다.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나왔지만, 그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달마는 그를 일으켜 세우면서 말했다.

"비록 그대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대의 대답을 들었다. 그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그 눈물이 충분한 의미를 전달해 준다. 그대는 나를 이해했고, 나는 그대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다. 그대의 침묵은 내가 말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큰 것이다. 그대는 나의 골수를 얻었으며, 바로 나의 영혼이다. 내가 떠나면 그대는 나를 대표할 것이다."

그러나 혜가는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이상한 숙명이었다. 사실 깨달은 사람은 그것이 말로 표현되는 순간 혼란만 일으킨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그런 실수를 저지르기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택한다. 그리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도, 그 실수가 엄청난 혼란을 일으킨다는 것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말하고 싶다. 이 구절이 겉으로는 옳지만 속으로는 달마의 말이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이 구절들은 궁극적인 의식에 이르른 사람의 말일 수가 없다.

이제 그 구절들은 이렇게 시작된다.
"만약 제가 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부처를 생각하고, 경전을 독송하며, 공양물을 바치고, 계율을 지키며, 불법에 헌신하고, 선을 행하더라도 여전히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까?"

그렇다, 그대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이 구절은 달마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보다 고차원적이지만 말이다. 소위 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 그들은 신을 생각하거나 부처를 생각하고 예언자나 메시아나 구세주를 생각한다. 그들은 경전을 독송한다. 거룩한 《꾸란(Koran)》을, 거룩한 《바이블》을, 거룩한 《기타(Gita)》를, 거룩한 《법구경》을 말이다. 그들은 사원이나 교회, 회당이나 모스크(mosque)에 많은 예물을 바친다. 그들은 또한 계율을 지키고 단식을 하며, 밤에는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않는다. 그런 계율들은 수천 가지나 된다. 그리고 모두들 제각기 다르다.

내가 어느 날 탈무드를 보고 있을 때, 나는 눈을 의심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얼마나 바보 같은 말들이 많은지 말이다. 그대는 그 책 어디에서든지 그런 어리석은 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당신은 밭이나 목장에 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당신은 그의 끝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러나 끝은 아니다."이런 의미 없는 말들이 어떻게 성스러운 경전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거기에는 수많은 주석들이 줄을 잇는다. 한 랍비가 말했다. "왜 이렇게 말했는가?" 그러면 다른 랍비가 또 말한다. "그것은 왜 그렇게 말했는가?" 그러면 또 다른 랍비가 말한다. "거기에는 끝이 없다."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수백 번이나 계속된다.

그들은 문과 창문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그 창문은 문의 오른편에 붙어 있는지 아니면 문의 왼편에 붙어 있는지에 대해서 서로 토론하고 있다. 위대한 랍비라고 하는 사람들이 계속 그런 문제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어떤 문이 큰가? 작다면 얼마만큼 작은가? 등등 말이다.
계율이나 덕목, 온갖 종류의 난센스들이 헌신이나 선행을 한다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그래서 오직 달마 같은 사람만이 말할 수 있다.

'그대는 결코 그런 어리석은 행위로 부처나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

그대 자신을 보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왜 성취할 수 없습니까?"

그대가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인연에 의한 것이며 좋은 업을 쌓은 결과다. 이 말은 의미가 깊은 말이다. 그대는 이 말을 이해해야 한다.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인연이 다하면 언제든지 그것을 잃게 된다. 그러나 깨달음은 인연에 의해서 성취되어진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 그대의 삶은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대를 죽일 수 있다. 그대는 자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깨달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인연에 의해 조건지어진 것이 아니다.

인연에 의해 생겨나지 않은 것은 그대가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없앨 수 없다. 그것의 원인이 없다. 그래서 결코 파괴될 수 없다. 예를 들면 그대는 모닥불을 피울 수 있다. 하지만 그대가 더 이상 땔감을 넣지 않으면 결국 불은 꺼져 버린다. 불을 존재하게 하는 데는 반드시 연료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인연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땔감이라는 원인의 결과이다. 원인이 제거되면 결과 또한 사라진다.

유물론자와 유심론자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유물론자는 삶이나 의식 같은 것을 모두 하나의 원인과 결과로 생각하며 철학적 용어로 그것들을 말한다. 원인이 사라지면 그 결과 또한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그대가 죽으면 그대의 몸을 이루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들은 제각기 흩어진다. 물은 물로, 흙은 흙으로, 불은 불로, 바람은 바람으로, 허공은 또한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거기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거기에 영혼 같은 것은 없다. 생존이란 단지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함께 모이는 것의 결과이다. 원인이 사라지면 그대도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Karl Marx)가 "의식이란 단지 하나의 산물이며 그것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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