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진신론(眞身論)-3

通達無我法者 2008. 8. 15. 17:21

 

 

 

달마는 말하고 있다. 그대가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인연에 의한 것이며 좋은 업을 쌓은 결과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생사의 바퀴를 돌리게 한다. 그대가 생사의 바퀴 속에 매여 있는 한 그대는 결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깨달음이란 어떤 원인과 결과가 아니다. 어떤 수행의 효과도 아니며, 그대가 가득 채운 요소들의 집합이나 산물도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단지 발견될 뿐이다. 이미 그것은 거기에 있다. 그대는 단지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그대의 눈이 열릴 때 그대는 자신의 불성을 볼 수 있다. 그대가 그것을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발견한 것이다.

그대가 눈을 뜨든, 눈을 뜨지 않든 그대의 불성은 실재한다. 눈을 감아도 그대는 부처이다. 눈을 열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대는 여전히 똑같은 부처이다. 변화가 있다면 그대가 이해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대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맙소사! 나는 지금까지 깨달음을 찾아왔다. 도처에서 모든 종류의 수행을 함 부처를 찾아왔는데 그것들은 모두 어리석은 행위였다. 내가 부처이면서도 계속해서 '나는 부처다.' 라는 말을 억지로 외워 오다니! 나는 언제나 부처였고 그것은 무조건적인 나의 본성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달마가 '그대는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종류의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도 그대의 불성을 찾을 수 없다.'라고 말할 때 그의 말은 그토록 의미심장한 것이다.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여기에 언어의 문제점이 나타난다. 말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이 문장을 보면 오해할 것이다. 마치 깨달음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깨달음은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그 보물은 항상 그곳에 있다. 그대는 단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그대는 그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것을 창조할 수 없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발견하든 안 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것은 조건지어지지 않은 영원한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 모든 말들이 무의미한 것이다. 나는 이 말이 달마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이런 대담한 말은 그런 제자들에게서 나올 수가 없다. 오직 달마만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부처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 말은 완전히 사자후(獅子吼)이다. 보통 사람들의 말이 아니다. 사자에게서 나오는 포효이다.

부처는 업으로부터 자유롭다. 인연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이가 바로 부처다. 만약 그대가 부처가 어떤 것을 성취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처를 중상 모략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취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단지 발견했고 눈을 떠서 자신을 보았을 따름이다.

부처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마음을 집중시키고 힘을 모으고 어떤 견해를 갖는 것이 부처에게는 불가능하다. 부처는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친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 대해서 초점을 잡을 수 없다. 그는 다차원적이다. 그는 우주이다. 오직 한가지 차원일 때만 초점 잡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대는 일상적인 마음에 대해서는 초점을 잡을 수 있다. 그것은 집중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는 어느 한 점으로 집중이 될 수 없다. 그는 모든 방향, 모든 차원으로 열린 하늘이다. 부처는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친 존재가 아니다. 부처의 무심은 비어있는 것이 그 본성이라서 순수하고 순수하지 않은 것 모두를 초월한다.

여기서도 마음은 무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마음이라면 비어 있는 것이 그 본성이 될 수 없다. 마음은 항상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마음은 생각을 담는 그릇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은 사고의 진행 과정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이다. 낮에는 그것을 생각이라고 부르고 밤에는 그것을 꿈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어떤 것들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결코 텅 비어질 수 없다. 텅 비어지는 순간 마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을 통과해서 지나가는 생각이 어떤 종류인가에 따라서 마음은 항상 순결과 오염을 반복한다. 그대가 누구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나 어떤 것을 훔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대가 품는 생각에 따라서 마음은 수시로 변한다. 그래서 마음은 결코 텅 비어질 수 없다. 마음이란 선한 생각이든 악한 생각이든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어록에서 마음이란 단어를 무심으로 바꾸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위의 말이 의미 있는 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은 결코 이중성을 초월할 수 없다. 그것은 항상 찬성이나 반대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항상 나누어지는 것이며 결코 전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대의 마음은 항상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대의 일부분은 그대와 다른 생각을 갖게 된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마음은 항상 "그것을 하지 말라, 그것을 하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라고 속삭인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불행에 빠져 있는 이유 중의 한가지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대 마음의 일부가 항상 그대가 하고자 하는 일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일이 잘못되면 그것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 내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내 말을 안 듣고 이 지경이 되었다."

그대가 그 말을 들었더라도 사실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 말을 들었다면 "그렇게 하라."고 주장한 마음이 그대에게 투정을 부릴 기회를 가질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보라, 너는 내 말은 절대 안 듣는다. 그러니 좋아질 리가 없다."

오직 무심(無心)만이 어떤 이중성도 없다. 그것은 비어 있기 때문이다. 무심은 선택하는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깨어 있음이다. 그것은 바로 텅 빈 하늘이다. 부처는 어떤 특정한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 이 말은 너무나 위대한 말이다. 황금 글자로 새겨 전 세계 곳곳에 붙여 두고서 모든 사람이 이해해야 할 말이다. 부처는 어떤 특정한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

그는 어떤 수행법도 따르지 않는다. 왜냐고? 그는 그런 견해나 수행법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한 각성 속에 산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도 어떤 도덕적 덕목도 따를 필요가 없다. 그는 완전한 각성 속에서 행동할 것이며, 그의 행동은 어떤 도덕 관념이나 경전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순간 순간 자신의 텅 빈 순수 속에서 행동한다.

그는 자신의 몸을 통해서 존재가 마음껏 반응하는 것을 고요히 구경하고 있다. 그는 하나의 거울과 같다. 그는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그의 반응은 단지 거울에 반사되는 그림자일 뿐이다. 부처는 선을 행하지도 않고, 악을 행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부지런하거나 게으르지도 않다. 부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자신이 부처라는 생각에 매달리지도 않는다.

자신 앞에 신이 서 있더라도 신은 그를 볼 수 없다. 그는 그저 순수한 비어 있음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긴장도 갖지 않는다. 집중이란 하나의 긴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히 이완되어 있다. 그리하여 달마는 다음 말에서 자신의 경지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말이다.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종교와 사상에 대해서 선입견을 갖고 있다.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이 말을 그대는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말이어서 그대가 이것을 놓친다면 모든 것을 놓치는 것이다.

여기 한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아마 그것은 이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확실히 순수하다. 그 아기는 자신이 순수하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이 순수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아기는 자신이 순수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진짜로 순수한 것이다.

부처는 다시 태어난 존재이다. 그것이 의식의 새로운 탄생이다. 그는 두 번째로 신생아의 시절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으로 의식적이다. 하지만 그는 "나는 절대적으로 의식적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 말을 하면 그 의식은 절대적으로 순수하지 않다. 그의 의식은 아기의 순수함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 자아의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 다른 어떤 것을 위해 마련된 여지가 없다. "나는 부처다"란 생각조차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부처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라. 부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 그대가 바로 부처이다. 왜 다른 부처들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그대의 시간을 낭비하는가? 왜 그대의 눈을 뜨고서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가? 부처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그대가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보지 않는 한 그대는 내가 말하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서 그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이며 어리석은 바보들이다.

여기에 한 가지 위험이 있다. 그리고 달마는 그 위험을 인식했다. 세상에는 교활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거짓말쟁이이며 바보들이며, 남을 속이면서 자신도 속는 사람들이다. 나는 달마가 한 말과 같은 위대한 말들을 읽고 듣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 즉 '무위(無爲)'를 가장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분별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냐하면 달마 같은 사람들이 "그대가 바로 부처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눈을 뜨지도 않고 그런 말만 듣기를 즐긴다. 그들의 에고가 너무 강해졌기 때문에 그들은 눈을 뜨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본성을 경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깨달았다고 선언하기 시작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를 끼치게 된다.

나는 자신이 깨달았다고 선언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지만 그대보다 더 의식적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위대한 말속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 말들은 히말라야의 봉우리만큼 높은 것이다. 이 높은 데서 그대가 떨어진다면, 그대는 자신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다. 이 비밀들은 진지하고 정직하게 이해되어져야 한다. 사람들을 속여서도 안되고 그대의 에고를 키워서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