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금강경(金剛經)

한형조교수/2부/41강/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제6

通達無我法者 2008. 8. 23. 16:59

 

 

불교, 이미 서양에도 있었다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佛告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當知, 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乃至一念, 生淨信者. 須菩提,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 衆生相, 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則爲着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則着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언해
수보리가 부처께 사뢰되, “세존하! 자못 중생이 이 같은 말씀 장구(章句) 듣잡고, 실(實)한 신(信)을 낼 이 있으리이까, 못 하리이까?”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일르시되, “이 말 하지 말라. 여래 멸(滅)한 후의 후(後) 500세에 지계(持戒)하며 복(福) 닦을 이 있으면, 이 장구에 능히 신심 내리니, 이로 실(實) 삼아라. 이 사람은 일불(一佛) 이불(二佛) 삼사오불(三四五佛)께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무량천만불(無量千萬佛)께 많은 선근을 심어, 이 장구를 듣고, 한 념(念)에 이르러, 좋은 신(信)을 내는 것을 반드시 알지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다 알며 다 보나니, 이 많은 중생이 이같은 무량 복덕을 득(得)할 것을. 어찌어뇨? 이 많은 중생이 다시 아상(我相)과 인상(人相)과 중생상(衆生相)과 수자상(壽者相)이 없으며, 법상(法相) 없으며, 또 비법상(非法相) 없으리라. 어찌어뇨? 이 많은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相)을 취하면, 곧 아(我) 인(人) 중생(衆生) 수자(壽者)에 착(着)하리며, 만약 법상(法相)을 취하면 곧 아, 인, 중생, 수자에 착(着)하리니. 어찌어뇨? 만약 비법상(非法相)을 취하면 곧 아 인 중생 수자에 착하리니. 이럴새 법(法)을 취함이 마땅치 못하며, 非法을 취함이 마땅치 못하니, 이 뜻인 까닭에 여래가 늘상 이르되, ‘너희들 비구가 내 설법이 뗏목으로 가잘빔(*견줌,비유함) 같음을 알면, 법도 오히려 반드시 버릴지어니, 하물며 비법이리오.’”

번역
수부티가 부처님께 말했다. “세존이시여, 대체 대체 어떤 중생이 있어, (여래는 오지 않는다는) 이런 말을 믿겠습니까.”
붓다가 말했다. “수보리야, 그리 단정하지 말라. 여래가 떠나고 난 후, ‘후(後) 500세’의 시대에도 삶의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은 이 말을 믿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니,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수많은 삶을 거치며, 수많은 부처에게 나아가 선근을 심은 사람들이라, 이 말을 듣고서는 바로, 깨끗한 믿음에 이를지니. 수보리야, 여래는 다 보고 아신다. 이 중생들이 여래의 무량한 복덕을 얻을 것임을. 어째서냐. 이들 중생들은 더 이상 아상 인상 중생상 그리고 수자상 등, 어떤 형태의 자의식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환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진리가 없다는 자포자기적 착각도 없다.
어째서냐, 만약 이들 중생들이 사물에서 이미지(相)를 취한다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편견과 고착에 빠질 것이다. 진리의 이미지(法相)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것에 고착되는 사람 또한 모종의 자의식의 착각과 편견에 빠진다. 그렇다고 진리가 없다는 판단(非法相)에 빠지는 것도 또한 또 다른 허무의 자의식이니라. 그래서 말하노니, 진리에도 빠지지 말고, 진리 없다는데도 빠지지 말라. 이런 뜻에서, 여래는 늘 말하지 않더냐. ‘너희들, 비구들이여, 내 말은 다만 뗏목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진리(法)도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진리 아닌 것임에야.”

나, 불교는 없다
우리 또한 불교라는 ‘이름’을 고집한다. 기독교가 유일신의 위세를 업고, 너무 자신을 고집하는데 대한 반작용인지도 모른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하든가. 불교는 그 함정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 줄 안다.
불교가 “너는 없다!”를 가르치면서 “나, 불교는 있다”고 했을 리가 없다. 지금 <금강경>은 바로 그 법아(法我)의 위험을 경고하고, 그것을 깨트리기 위해 전편을 할애하고 있다. 진리가 자신의 이름을 고집하기 시작하면 그 피비린내와 살상이 금전이나 지위를 두고 싸우는 것에 비할 수 없다.
진리는 하나가 아니고, 또 어느 특정한 철학이나 종교의 독점일 수도 없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 말을 그러나 어느 종교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불교만이 어렵사리 자신의 가치를 상대화하고 타자의 가치를 승인해 주었다. 불교의 관용과 유연성은 바로 이 어려운 양보, 즉 타자 존재의 승인(?)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는 이미 서양에도 있었다
불교는 진리가 도구라는 생각에 철저하다. 도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필요나 국면에 따라 여럿일 수밖에 없다. 불교처럼 자기 경전 안에 이질적인 것들, 정반대되는 주장들까지 한 삼태기(藏)에 담고 있으면서, 태연 모른척하고 있는 종교는 흔치 않을 것이다. 당연히 불교 밖에도 그들의 삶을 풍요롭고 지혜롭게 하기 위해 다른 도구들이 개발되었고, 또 그것들이 유용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교‘만’의 진리는 없다! 불교가 가르치는 교설들은 다른 어디선가, 물론 좀 다른 개념과 어법, 맥락과 상황을 깔고 있지만, 실험되고 표명된 것이다.


이를테면, 반야부 연구의 독보적 인물인 콘즈(Edward Conze)는, 불교가 사람들이 짐작할 수 없는 무슨 특별한 비의적 진리를 독점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다. 불교의 핵심적 교의는 이를테면 흄이나 쇼펜하우어, 윌리엄 제임스가 훨씬 정교하게 익숙한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불교의 독특함과 강점은 자신의 사유를 체현하는 열정의 강렬함과 그 수단의 정교함과 풍부함에 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이 말에 전폭 동의한다. 그러니, 둘은 공유점이 많고, 서로 배울 곳이 많다. 실제 서구는 지금 불교를 배우는데 열심이다. 불교의 자산인 참선과 명상 등의 수련법을 다양하게 접목시키는 프로그램을 수입 개발해서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불교는, 특히 한국불교는 이 대화의 광장에서 마음을 열지 않고, 자꾸만 ‘칩거’하려고 한다. 문을 닫고는 말한다. “불교의 심원한 깊이를 천박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이 뭘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물질에 찌들고, 이기심에 철저한 서양 사람들이 불교의 근본 소식을 깨닫기에는 어림 반 푼어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생각의 근저에는 불교의 최종 경계가 화두 끝의 신비적인 돌파의 체험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언필칭 깨달음이란, 한 순간 이무기가 용으로 승천하듯 저 다른 세상을 체험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깨달음이란 번뇌와 망상으로 분열되어 있던 마음이 지속적 주시와 자각을 통해 치유되어 가는 ‘점진적 과정’이다. 그 목표는 신통이 아니라 통합이며, 과정 또한 돈오(頓悟)가 아니라 점수(漸修)이다.


깨달음을 신비화해서는 안 된다. 동양철학에는 무슨 거창한, 보통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그것을 한번 알면 우주를 말아먹고, 일거에 일상의 누추함을 벗어던지고 비상할 ‘비밀의 권능’은 없다. 우리 모두는 각자 삶의 굴곡을 거치며, 작게 혹은 크게 삶을 배우고 있는 바, 그 속에서 각자 깨달음의 불씨들을 일깨워가고 있는 수행자들 아닌가.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