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금강경(金剛經)

한형조교수/2부/43강/혜능의 또 다른 사상(四相) 해설

通達無我法者 2008. 8. 23. 17:03

 

 

‘수상행식’조차 없는게 ‘무아’다

<금강경> 6장의 후반부, 혜능의 해설을 이어 듣는다.

4절
須菩提,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 衆生相, 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수보리야, 여래는 다 보고 아신다. 이 중생들이 여래의 무량한 복덕을 얻을 것임을... 어째서냐. 이들 중생들은 더 이상 아상, 인상, 중생상, 그리고 수자상 등, 어떤 형태의 자의식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환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진리가 없다는 자포자기적 착각도 없다.”

(혜능의 해설)
六祖: 若有人, 於如來滅後, 發般若波羅蜜心, 行般若波羅蜜行, 脩習解悟, 得佛深意者, 諸佛無 不知之. 若有人聞上乘法, 一心受持, 卽能行般若波羅蜜無相無著之行, 了無我人衆生壽者四相. 無我者, 無受想行識也. 無人者, 了四大不實, 終歸地水火風也. 無衆生者, 無生滅心也. 無壽者, 我身本無, 寧有壽者. 四相旣無, 卽法眼明徹, 不著有無, 遠離二邊, 自心如來, 自悟自覺, 永離塵勞妄念, 自然得福無邊. 無法相者, 離名絶相, 不拘文字也. 亦無非法相者, 不得言無般若波羅蜜法. 若言無般若波羅蜜法, 卽是謗法.
-내용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1)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라, 2) 그것은 사상(四相)을 극복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3) 자아와 더불어 법상을 지워라. 아울러 비법상을 경계하라, 진리가 없다는 허무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1)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라
“여기 사람이 하나 있어, 여래가 떠나신 후에, 반야바라밀을 발심하고, 반야바라밀의 행동을 행하며, 수습해오(脩習解悟), 이 의지와 실천을 닦고, 익히고, 이해하고, 깨닫는 과정을 거치며, 이윽고 붓다의 깊은 뜻을 얻은 자, 그들을 여러 부처들은 잘들 알고 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이 상승법(上乘法)의 이치를 듣고 일심으로 수지한 즉, 반야바라밀의 무상(無相) 무착(無着)의 행을 해 나갈 수 있다면, 그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다는 소식을 완전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상승법(上乘法)이란 혜능의 돈교를 가리킨다. 여기 닦아야 할 것도 없고, 그만 둘 것도 없다. 이루어야 할 해탈도 없으며, 가야 할 서방 극락도 없다. 야부의 노래를 빌리면, 원동태허 무흠무여(圓同太虛 無欠無餘)라, 세상은 ‘이미’ 완전하다. 그 안에서 나는 “하루 종일 바쁜데, 무슨 일이든 마음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終日忙忙, 何事無妨).” 이 완벽한 삶의 조건은 무엇인가. 혜능은 두 가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무착(無着), 즉 내 마음이 타자에 의해 점령되지 않는 것이고, 둘은 무상(無相), 즉 세상이 나로 인해 구획되거나 시비되지 않는 것이다.

2) 사상을 극복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나
“(1) 무아상(無我相)이란 수상행식(受想行識), 즉 감정, 지각, 의지, 의식이 없다는 것이고, (2) 무인상(無人相)이란 내 몸의 사대(四大)가 지속성이 없고, 마침내 지수화풍, 먼지와 대기로 돌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3) 무중생상(無衆生相)이란 생멸심(生滅心)이 없다는 뜻이고, (4) 무수자상(無壽者相)이란 내 몸이 본래 없는 것인데, 무슨 나이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사상(四相), 즉 이 네 가지 ‘이미지’의 환상에 잡히지 않을 때, 지혜의 눈 법안(法眼)이 차갑게 뚜렷해진다. 그는 더 이상 유(有)와 무(無)의 이분법에 고착되지 않고, 이변(二邊), 주장의 두 극단을 멀리 떠나게 된다. 자심여래(自心如來)는 자오자각(自悟自覺)이라, 번뇌와 망념과 영원히 이별하는데, 그로하여 자연 얻은 복락이 무한하게 펼쳐진다.”


-혜능은 ‘범부들의 사상’과 ‘수행자들의 사상’을 구분한 바 있다.
A. 범부들의 사상(四相)에서 1) 아상은 재물이나 지식, 위세를 믿고 뻐기는 것이고, 2) 인상은 도덕적 종교적으로 “내가 우월하다”는 자만이었으며, 3) 중생상은 “좋은 일은 내꺼, 싫은 것은 당신이”하는 게으름과 약삭빠름이었고, 4) 수자상은 모든 사태를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해석하는 인간의 오랜 습성이었다.
B. 이것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수행인들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사상이 있다! 거기 1) 아상은 “나는 보살, 너는 중생”이라는 한심한 구분이고, 2) 인상은 “내가 곧 법”이라면서 파계를 거리끼지 않는 것이었으며, 3) 중생상은 다음 생에는 좋은 곳에 좋은 탈을 쓰고 태어나고 싶다는 지극히 인간적(?) 열망이었고, 4) 수자상은 다음 생이 아니라 지금 이 이승의 개똥밭에서 오래도록 뒹굴고 싶은 생명연장의 희구를 가리켰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혜능은 또 다른 사상을 설파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런 태도를 질색한다. 근거없이 떠들거나, 또는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이렇게를 그렇게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논거와 일관성이 진리의 토큰은 아니다! 혜능은 일찌기 이 문자의 감옥(文字獄)을 벗어나 진리를 자유케 했다. 그는 경전의 원래 의미에 학구적으로 붙잡히지 않고, 삶의 국면에서의 생생한 자득과 그 변주를 들려준다. 사상의 해석 또한 정통을 벗어난 파격 중 파격이지만, 독창적이고 또 실천적이다. 이 ‘또 다른 사상 해석’을 좀 자세히 살펴보자.


(1) 무아상(無我相)이란 “수상행식(受想行識)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말의 곡절은 복잡하다.
수상행식은 한자어로는 선뜻 뜻이 다가오지 않는다. ‘받아들이고, 상상한다, 간다, 인식한다’니 이 무슨 소린고. 서로 격이 다르고 연관이 모호한 문자의 조합들은 아무리 뒤집고 찢고 파고 해도 도무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불교의 심리학적 언사들은 산스크리트나 팔리어를 영어식으로 번역한 것들이 오히려 이해가 쉽고 빠르다. 이 말들은 영어로는 각 감정(feeling), 지각(perception), 의지(volition), 의식(consciousness)을 가리킨다. 이들 ‘마음’의 여러 상태, 혹은 국면들은 ‘몸’을 나타내는 색(色 body)과 함께 오온(五蘊)의 멤버들이다.


오온은 불교가 무아의 이치를 설명하기 위해 창안한 개념이다. 오온이란 문자 그대로 다섯 무더기(five heaps)라는 뜻이다. 쌓아놓은 볏단 혹은 장작단들에는 그들 사이를 통할하는 중심 혹은 자아가 없다. 불교는 이 용어를 통해 인간의 의식과 의지, 그리고 감정의 흐름에는 ‘주인공’이 없다는 것, 전문용어로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깨우치고자 했다. 물론, 상식에는 설득하기가 난감하다.
초기 아비달마는 자기 내부의 이런 다양한 마음의 변태들을 주시하는 ‘명상’을 개발하고, 그 흐름들을 분석하고 갈래짓는 것을 ‘지혜’라 불렀다. 아비달마에게 있어 ‘지혜’는 대승이나 선의 지혜와는 실내용이 전혀 다르다. 그 차이의 흔적을 지금 혜능의 말에서 읽을 수 있다.


소승 아비달마(Abhidharma)는 자아의 통합적 중심은 없지만(無我), “오온은 실재한다”고 말했다. 요컨대 인간에 물들지 않은 ‘객관세계의 차원높은 실재들(諸法)’은 틀림없이 실재한다는 것이었다. 아비달마를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로 한역하는 것도 그때문이다. 설일체유부란 “일체(一切)의 고차원적 사물이 존재한다(有)고 주장하는(說) 학파(部)”라는 뜻이다.
대승은 이 고차원적 사물, 즉 법(法)의 실재성을 부인하면서 출범했다. <금강경>은 그 주장의 가장 강력한 설파자인 중관(中觀)의 핵심경전임을 기억하자. 혜능은 그 발전의 연장선에서 절대무의 상승법을 설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무아란 수상행식조차 없음을 말한다!”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