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가 옮겨가지 않으면서 윤회한다
전생과 후생을 믿어야만 불교가 성립된다.
전생과 후생을 믿지 않는다면 불교가 성립되지 않는다. 전생과 후생이 덮어놓고 있다고 맹목적으로 믿을 수 만은 없다. 전생과 후생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조사해보자. 부처님은 제법은 무아(諸法 無我)라고 했다. ‘나’라는 변치않는 실체가 없다고 말했다. 영혼이 없다는 말이다. 영혼도 없고 ‘나’라는 실체도 없는 데, 그러면 어떻게 해서 ‘나’라고 하는 이 생(生)이, 내가 죽은 후 다음 생(生)으로 이어져 가는가? 아주 이해하기 어렵고 해결하기 곤란한 문제이다. 죽은 후 가는 곳을 안다면 울지 않으리라. <육조단경>에 보면, 혜능대사가 “너희들은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나는 팔월이 되면 세상을 떠나고자 하니 너희들은 의심이 있거든 빨리 물어라.” 이때 많은 대중들이 울었다. 우는 대중을 보고 혜능대사는 말했다. “너희들이 슬피 우는 것은 곧 나의 가는 곳을 몰라서이다. 만약 가는 곳을 안다면 곧 슬피 울지 않으리라. 자성의 본체는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느니라.” 혜능대사는 “너희들이 슬피 우는 것은 곧 나의 가는 곳을 몰라서이다. 만약 가는 곳을 안다면 슬피 울지않으리라”라고 말했다. 이런 것을 보면 사람이 죽으면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고 가고 오는 그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몸은 늙어 죽어도 정기는 없어지지 않는다 <수능엄경>에 보면 부처님과 파사익 왕과의 대화가 나온다. (밑줄은 내가 그었다.)
부처님: “대왕의 얼굴이 갑자기 늙지는 아니하였으리라.” 왕: “세존이시여,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깨닫지는 못하오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이렇게 늙었나이다. 필경에는 이 몸이 없어질 줄을 아나이다.” 부처님: “대왕이시여, 당신이 변하고 달라져서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을 보고 이 몸이 필경에 없어질 줄을 아노라 하거니와, 그 없어지는 몸 가운데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는 줄을 아는가?” 왕: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부처님: “내가 이제 났다 없어졌다 하지 않는 성품을 보여주리라. 대왕의 나이 몇살 적에 항하수를 보았는가.” 왕: 세 살 적에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이 강을 건넌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강이 항하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처님: “세 살 적에 이 물을 보던 것과 열세 살 적에 이 물을 보던 것과는 어떠하던가?" 왕: “세 살 적과 꼭 같아서 조금도 달라지지 아니 하였사오며, 지금이 예순 두 살이지마는 세 살 적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나이다.” 부처님: 대왕의 지금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낯이 쭈글쭈글 쭈그러짐을 서러워 하거니와, 낯은 어렸을 적보다 쭈그러졌을망정, 지금 항하수를 보는 정기도 어려서 항하수를 보던 것보다 늙어졌는가?” 왕: “그렇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 대왕의 낯은 비록 쭈그러졌을 망정, 보는 정기(精氣)는 쭈그러지지 않았다. 쭈그러지는 것은 변하려니와, 쭈그러지지 않는 것은 변치 아니할 것이다. 변하는 것은 없어지려니와, 변하지 않는 것은 원래부터 났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몸은 죽더라도 그 보는 정기는 없어질 것이 아니어늘 어찌하여 죽은 뒤에는 아주 없어진다는 말가리들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는가?"
파사익 왕은 이 말씀을 듣고는, 죽은 뒤에도 이 생(生)을 버리고 다른 생에 태어날 줄을 알고 여러 대중들과 함께 뛰놀며 기뻐하여 처음으로 보는 일이라고 좋아하였다. 여기서 정기(精氣)라는 말은, 이희승 <국어사전>에 의할 것 같으면, “만물의 생성(生成)하는 원기” 혹은 “생명의 원천이 되는 원기”라고 씌어져 있다. 혹은 정령(精靈) 혹은 영기(靈氣)라고 한다. 사람은 죽어도 정기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부처님은 말했다. 파사익 왕은 이 생(生)을 버리고 후생에 다시 태어날 줄을 알고 여러 대중들과 함께 기뻐했다고 했다. <수능엄경>은 대승경전이다.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고 했는 데, 어떤 절차를 밟아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인지 한 번 알아보자.
여기서 죽으면 저기에서 태어납니까 <별역잡아함경> (225쪽: 동국역경원)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씌어 있다. 어느 사람이 부처님께 물었다.
“내가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납니까?” 부처님은 아무런 대답을 아니하셨다. “내가 여기에서 죽으면 다시는 태어나지 않습니까?” 부처님은 또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내가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나기도 하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기도 합니까?” 역시 부처님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내가 죽은 후에는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닙니까?”
역시 부처님은 침묵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해 부처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에 대해 말로 적절하게 표현할 수가 없어서 아예 침묵을 하신 것같다. 어디로 간다고 말을 해준다고 해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것 같지도 않고, 그리고 오히려 오해만 일으킬 것 같으니까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으신 것같다. 부처님이 “다시 태어납니까”라는 질문에 침묵을 지켰다고 해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닌 것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왜 부처님이 생과 사의 윤회에 대해서 언급을 하셨겠는가. 다음 글을 읽어보자.
삶과 죽음의 윤회 <중일아함경> 1권(463쪽)에 보면 부처님은 생의 연속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먼 옛날에 어떤 천자는 5백 미녀를 데리고 앞뒤로 둘러 쌓여 난단반나 동산의 유희장에 나가 놀다가 다시 가니나무 밑으로 가서 다섯 가지 향락으로 스스로 즐겼었다. 때에 그 천자는 나무에 올라가 놀았다. 거기서 마음이 어수선해져 다시 꽃을 꺾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이내 죽어 이 슈라바스티의 성안의 큰 장자 집에 태어났다. 그 때에 5백 미녀들은 가슴을 치고 울부짖으면서 어쩔 줄을 몰랐었다. 나는 그 때에 하늘 눈(天眼)으로 천자가 목숨을 마치고 슈라바스티의 성안의 큰 장자 집에 태爭?것을 보았었다. 그들은 사내를 낳았다. 단정하기 짝이 없고 도화 빛처럼 아름다웠다. 그 아들은 점점 자랐다. 부모는 그의 아내를 구해 장가를 보냈다. 장가 간지 오래지 않아 그는 이내 죽었다. 죽은 후 큰 바다의 용으로 태어났다. 이 장자는 문에 서서 아들을 생각하고 울부짖으면서 마음 아파하였다. 그 용은 다시 금시조에게 잡아 먹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지옥에 떨어졌다. 그때에 그 용녀의 생각하는 정의 간절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느니라.”
부처님은 계속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항상 덧없다는 생각을 닦아 행하고 덧없다는 생각을 널리 펴면, 곧 욕심세계의 욕망을 끊고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의 욕망을 끊고 또 교만과 무명을 아주 끊어 남음이 없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부처님은 생의 무상함에 대해 말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여기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한 이유는, 부처님은 숙명통을 갖고 계신 분이시라 전생과 후생을 볼 수 있는 분이시다. 천자가 죽어서 장자의 아들로 태어나고, 장자의 아들이 죽어서 용으로 태어나고, 용이 죽어서 지옥에 태어나는 것을 부처님은 숙명통의 눈으로 직접 보셨다. 직접 보셨지만,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 납니까?”하고 질문을 받았을 때, 왜 아무런 대답도 하시지 않으셨을까? 천자가 죽어서 장자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 천자하고 장자의 아들은 서로 연속되어 있다고 하지만 새로운 별개의 다른 개체인 것이다. 장자의 아들은 자기 전생이 천자였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저 연속되어 있을 뿐이다. 천자가 장자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맞다고 말을 할 수도 없다. 좀더 해명이 필요하다. 그러면 나가세나 존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윤회에 대한 설명 <미란타 왕문경> (石上善應 저, 이원섭 역)에 있는 것을 간추려 보겠다. (밑줄은 내가 그었다.)
매난드로스 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묻는다.
“존자 나가세나여, 죽은 자와 태어난 자는 동일합니까, 아니면 별개의 것입니까?” 나가세나는 동일하지도 않고, 별개의 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왕에게 물었다.
“대왕이시여, 이것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일찌기 갓난애의 모습으로 누워 계시던 때의 대왕과 어른이 되신 지금의 대왕과는 동일합니까, 어떻습니까?” 여기서 같다고 대답을 하면 틀린 것이 너무나 많다. 그렇다고 틀리다고 대답을 하면 유전인자도 같고, 부모형제도 같고, 같은 점이 또한 많이 있는 것이다. 나가세나는 계속했다. “대왕이시여, 저 자신도 예전에는 갓난애의 모습으로 누워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이렇게 어른이 되었습니다. 오로지 제 몸에 의존함으로써 이런 모든 상태가 통일돼 있는 것입니다.” 나가세나 존자는 다른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대왕이시여, 누가 등불을 켰다면, 그것은 온 밤 내내 불붙어 있겠습니까?” “존자여, 말씀대로 온 밤 내내 불붙어 있을 것입니다.” “대왕이시여, 초저녁의 불꽃과 밤중의 불꽃과는 동일하겠습니까?” “존자여, 다릅니다.” “대왕이시여, 그렇다면 초저녁의 불꽃과 새벽녘의 불꽃은 각기 다른 것이겠습니까?” “존자여, 그렇지는 않습니다. 같은 등불에 의존함으로써, 불꽃은 온밤 내내 불붙고 있는 것입니다.” “대왕이시여, 꼭 그것과 마찬가지로 현상이 연속돼 있는 것입니다. 재생한 자와 죽은 자는 별개의 것이긴 합니다만, 서로 앞 것도 아니고 뒤 것도 아니듯이, 동시적으로 연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그런 것으로써 마지막 의식(意識)에 의해 통섭(統攝)되게 되는 것입니다.
나가세나 존자는 다른 비유를 들었다. 새로 짜낸 우유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엉기어진 우유가 되고, 엉기어진 것은 버터로 바뀌며, 다시 버터는 버터유가 된다. 우유, 엉기어진 우유, 버터, 버터유 등 우유에 의존하면서 별개의 상태가 나타나는 식으로, 재생한 사람과 죽은 사람은 서로 다르지만, 서로 앞 것도 아니요 뒷 것도 아닌 것처럼, 동시적으로 연속돼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같지도 않고 다른 것도 아닌 그런 것으로서, 마지막 의식에 의해 통섭되게 된다고 말했다. 윤회의 주체는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타고 있는 불과 같이 주체가 바뀌면서 연속되어 가는 것이다.
주체가 옮겨가지 않으면서 다시 태어난다 “존사 나가세나여, 죽고 나서 그 주체가, 다음 세상에 옮겨가지 않은 채, 그러면서도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대왕이시여, 그렇습니다. 옮겨가지 않은 채, 그러면서도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었다. 어느 사람이 한 등불에서 불을 붙여 가지고 다른 등에 불을 당겼을 때, 등불은 한쪽 등에서 다른 등으로 옮겨간 것이 되느냐고 물었다. 왕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나가세나는, 그것과 같이, 죽고 나서 신체의 주체가 다른 몸으로 옮겨 가는 것은 아니나, 그러면서도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비유를 들었다. “대왕이시여, 폐하께서 어리셨을 적에, 스승으로부터 어떤 시(詩)를 배우셨던 사실을 지금도 기억하고 계십니까?” “존사여,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왕이시여, 그 시는 스승으로부터 폐하께 옮겨 간 것이겠습니까” “조사여,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왕이시여, 그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몸에서 다른 몸으로 윤회의 주체가 옮겨 가는 것은 아니건만, 그래도 다시 태어나기는 하는 것입니다.”
남의 시(詩)를 읽음으로 해서 그 시가 내 것이 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가 원래 시인의 머리 속에서 빠져나와 나의 머리 속으로 옮겨온 것은 아닌 것이다. 시는 시인의 머리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나한테 옮겨온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다음 생으로 직접 옮겨간다고 믿고 있지 않다. 불교에서는, 몸(신체:身)과 말(언어: 口)과 의지(뜻: 意), 3가지 행위를 통해서 업을 짓고, 그 업에 따라, 윤회하게 된다고 믿고 있다. 좋은 업을 많이 지어놓은 사람은 그 좋은 업에 따라 극락이나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고, 나쁜 업을 많이 지어놓은 사람은, 그 나쁜 업에 따라 축생으로 혹은 지옥으로 태어난다고 믿고 있다. 업에 따라 극락이나 지옥에 태어난다고 하니까, ‘나’라는 사람이 윤회를 한다고 오해를 할까 봐서 다시 예를 하나 더 들겠다. 부처님은 무아(無我)라고 했다. ‘나’라고 하는 변치않는 ‘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인연따라 변하는 ‘나’는 있는 것이다. 영원히 변치않는 ‘나’와 인연따라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나’하고 구별해주기 바란다. 메난드로스 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물었다. “현재의 신심(身心: 육체와 마음)이 다음 생에 있어서 태어나는 것입니까” 나가세나 존자는 대답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선악의 업에 의해서 다른 새로운 신심(身心)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나’가 업을 만들어가면서 또한 업에 의해 ‘나’도 변해간다 나가세나 존자는, 똑같은 신심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선악의 업에 의해서 다른 새로운 신심(육체와 마음)이 태어난다”고 말했다. ‘내’가 업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까 업을 만들어내고 있는 ‘나’는 항상 똑같은 ‘나’가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업을 만들어내는 ‘나’는 만들어진 업에 의해서 다시 새로운 ‘나’가 되어 가는 것이다. 업과 ‘나’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나’가 새로운 업을 만들어내면 그 새로 만들어진 업이 ‘나’를 새롭게 다른 ‘나’로 변하게 하는 것이다. 새로 만들어진 ‘나’는 전(前)의 나의 주체하고 다른 ‘나’가 되어 가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면, ‘나’가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나쁜 업을 많이 지어놓으면, 그 나쁜 업이 ‘나’를 다음 생에 호랑이로 태어나게 한다. 호랑이로 태어났기에, ‘나’는 이제는 호랑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전생의 ‘나’하고 후생의 호랑이는 서로 틀린 개체인 것이다. 이처럼 ‘나’는 업을 항상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동시에, 업은 ‘나’를 새로운 ‘나’로 변화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주체가 옮겨가지 않으면서 윤회한다는 다른 예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Ananda Coomaraswamy in “Buddha and thd Gospel of Buddhism”: 1916 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구를 쳐본 사람은 알겠지만, 공1을 친다. 공1이 공2를 정통으로 마친다. 공1이 정지한다. 공1의 에너지(힘)가 공2로 옮겨간다. 공2가 대신 앞으로 달려나간다. 공1의 에너지가 공2로 옮겨가는 식으로, 이 생의 업이, 육체는 죽어 없어지지만, 다음 생으로 연속되어 간다고 쿠마라스와미는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버마의 선승 마하시 스님(Mahasi Sayadaw: 1904년 출생)은 <연기법 강설: Discourse on Dependent Origination)이란 책에서, 생과 사의 윤회를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했다. 전구(電球)가 닳아서 꺼졌다고 가정해보자. 전구가 닳아서 불빛이 꺼졌다고 하더라도, 전기는 계속 흐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닳아 꺼진 전구를 빼버리고, 새로운 전구를 집어넣으면 다시 불빛이 나타난다. 여기서 전구는 생명체를 말한다. 전기는 업의 흐름을 말한다. 유식학자들은 업이 제팔식 아뢰야식(Consciousness)에 저장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늙어 죽어 없어졌어도, “업의 흐름” 혹은 “제팔식의 흐름”에 의해서 생(生)은 계속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업이란 무엇인가? 정말 업이란 존재하는가? 나가세나 존자, 마하시 스님 등 많은 다른 선지식인들은 전생과 후생 그리고 생사의 윤회에 대해 아는 것 같은데 왜 우리같은 보통사람들은 이에 대해 모르는가? 우리는 왜 전생을 기억 못하는가? 모르는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는, ‘나’라고 하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무아이다. 새로 태어날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개체로서 새로운 두뇌를 가지고 태어난다. 새로운 두뇌는 전생에 대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가령 미스터 김이라는 사람이 죽어서, 미스터 박이라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면, 새로 태어난 미스터 박은 전생의 미스터 김하고 틀린 개체이면서 동시에 전생에 가졌었던 미스터 김의 두뇌를 가지고 있지 않고, 그리고 미스터 박으로 태어나면서 미스터 박의 두뇌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자연 미스터 박은 전생의 미스터 김을 기억해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은 어떻게 해서 자기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가? 유식학자들은 업(業)은 제팔식에 저장되어 있다고 말한다. 부처님처럼 혹은 도를 깨친 고승들은, 도를 깨쳤기에, 제팔식,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업을 읽을 수가 있다고 한다. 제팔식의 업을 통해서 전생을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는 ‘생과 사의 흐름’속에 있기 때문이다. <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사사키겐준은 우리 자신이 업의 흐름 속에 있기에 우리는 전생과 후생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다. 높은 공중을 날으는 비행기 안에 앉아 있으면, 빠른 속도로 비행기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비행기가 움직이는 것을 볼 수가 없는 이유는, 우리가 비행기 안에, 비행기의 움직임 속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비행기 밖에 있으면 비행기의 움직임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우리 눈에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결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떠서 중천으로 올라 갔다가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진다. 우리 눈에는 지구가 완전히 정지되어 있다. 우리는 지구의 움직임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지구는 자동차의 1000배나 빠른 속도인 시속 66,000 마일의 속도로 빨리 달리고 있다. 이렇게 빠르게 달리고 있는 데도 우리는 지구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구의 흐름 속에서, 지구의 움직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전생과 후생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냈는가 어떻게 해서 지구가 움직이고 있고, 그리고 어떻게 해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가를 알아냈는가? 중세기 때 갈릴레오 Galileo (1564-1642) 라는 천문학자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그후 많은 천문학자들이 갈릴레오의 가르침을 받아 지구가 돌고 있음을 확인했고 그리고 우리에게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것이다. 바로 그런 식으로 2,500년 전에 부처님이 처음으로 ‘업의 흐름’을 알게 된 것이다. 아함경에 보면, “마음이 적정 순일하여 모든 번뇌를 여의고, 안주부동한 상태에 있을 때에, 마음을 천안통(天眼通) 경계에 기울이면 그는 인간계를 뛰어난 하늘눈(天眼)을 얻어, 중생이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중생이 지은 업에 따라, 귀하고 천하고 곱고 밉고 행복하고 불행한 것을 증명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부처님은 아자타샤트르 왕에게 말했다. 그후 많은 아라한, 선지식, 큰 스님들이 부처님의 가름침에 따라 업의 흐름을 확인했다. 전생과 후생, 무아(無我)와 영혼의 부재(不在), 그리고 주체(主體 )가 옮겨가지 않으면서 생과 사(死)가 윤회한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오마이뉴스 2002. 1. 15일자에서 수록>
2002년 2월 140호
출처:미주현대불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