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의 강의·혜거스님

〈24〉좌선의 공능 (坐禪功能) ③/정신이 상쾌·예리해지며 正念 분명

通達無我法者 2009. 7. 2. 09:23

 

 

정신이 상쾌·예리해지며 正念 분명

〈24〉좌선의 공능 (坐禪功能) ③

 
 
정신이 상쾌하고 예리해지며 정념(正念)이 분명하다고 한 것은 수행의 결과인 삼매경(三昧境)을 말한 것이다.
 
인간에게 정념(正念)은 삼매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마음이다.
정념은 사념(邪念)의 반대말로써 탐·진·치의 마음, 아상(我相) 등 4상(四相)의 마음이 아닌 진념(眞念)을 말한 것으로 밖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동하지 않고 물들지 않는 마음이다.
 
부처님께서 최초로 설법하신 법문 가운데 8정도가 있는데,
8정도 중 정념은 중생이 밖으로 경계에 끌려 시비 분별하는 마음을 끊게 하기 위해서 설하신 것이다.
이것을 지혜라 표현하기도 하지만 선종의 해석과 다르다.
대주혜해(大珠慧海) 스님은 자신의 저서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에서 정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엇을 사악한 생각(邪念)이라 하고, 무엇을 바른 생각(正念)이라 하는가.”
 
“유(有)와 무(無)를 생각하는 것은 사악한 생각이요,
유와 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바른 생각이며,
선과 악을 생각하는 것은 곧 사악한 생각이요,
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바른 생각이다.
이에 고락(苦樂), 생멸(生滅), 취사(取捨), 원친(怨親), 증애(憎愛) 따위를 생각하는 것은 모두 사악한 생각이요, 고락 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바른 생각이라 한다.”
 
“무엇이 바른 생각인가.”
 
“바른 생각이란 오직 보리를 생각하는 것이다.”
 
 
 
色 受 想 行 識에 동요가 없고 탐 진 치 등
 
온갖 번뇌가 끊어진 경지에서 한가로이
 
살림살이를 구상하는 것과 같은 즐거움이다
 
 
이와 같이 선종에서는 유무·선악·고락·생멸·원친·증애 등 상대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바른 생각이라고 하였다.
육조스님도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는 말로 법을 물은 행자에게 답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상대적인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은 온갖 차별이 생기게 되고 이러한 차별은 온갖 부조리를 낳게 된다.
그러므로 선종에서는 차별이 있는 상대적인 생각을 끊어버린 무분별의 세계를 지향한다고 하겠다.
 
법미가 정신을 돕는다는 것은,
법미(法味)란 불법미(佛法味), 법지미(法智味)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말씀은 그 뜻이 심히 깊고 미묘하여 좋은 음식의 맛에 비유하여 법의 맛이라고 한 것이다.
법의 맛이란 세간의 맛이 아니다.
가령 칭찬을 들으면 즐겁지만 그것은 법미가 아니며,
이익이 생기면 즐겁지만 역시 법의 맛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만 세상의 맛일 뿐이다.
오직 정신세계에서 느끼는 즐거움의 맛이라야 법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법미가 정신을 돕는다는 것은 법의 맛이라야 마음의 자량이 되어서 마음의 양식이 된다는 뜻이다.
 
적연하고 청정하여 즐겁게 된다고 한 것은,
적연(寂然)은 고요해서 평온한 상태를 뜻하고,
청락(淸樂)은 맑은 즐거움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에 동요가 없고 탐·진·치 등 온갖 번뇌가 끊어진 경지에서 한가로이 살림살이를 구상하는 것과 같은 즐거움이다.
흔히 말하는 안빈낙도(安貧樂道),
즉 가난한 것을 편히 여기고 도를 즐겁게 여긴다는 것과 같은 경지이다.
사람이 바깥경계에 끌려서 움직이는 것은 이미 나를 상실함이 되고,
안으로 허덕임이 있으면 청정한 자성을 상실함이 된다.
수행자의 적연한 자리는 일 마친 자리로서 삼매의 경지이다.
 
이와 같은 4가지 좌선의 공능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역시 청락(淸樂)일 것이다.
이러한 공능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를 신비스러운 체험쯤으로 여겨 지나치게 과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또 누구나 똑같은 공능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것에 현혹되어서도 안 된다.
 
자신의 공부를 이룬다(若己有發明者)고 한 것은 깨달음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발명(發明)은 곧 본래 자기에 눈을 뜨는 것,
견성(見性)의 의미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깨달음은 단지 한 순간의 문제이다.
따라서 만약 깨달았다면 용이 물을 얻은 것 같고,
호랑이가 산으로 들어간 것과 같지만,
아직 깨닫지 못했더라도 이는 바람 부는 쪽으로 불을 불어주는 것과 같아서 힘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용이 물을 얻은 것 같고 호랑이가 산에 들어간 것과 같다’고 한 것에서 용이 물을 얻은 것은 때를 만났다는 비유이고,
호랑이가 산에 들어간 것은 자리를 만났다는 비유이다.
이는 모두 가장 최고로 힘을 얻은 상태 즉,
공부의 성취를 뜻한다.
용은 조화를 일으켜 비를 내리게 하는 신물로 조화를 일으킨 다음에는 다시 비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하는데서 공부가 완성된 경지를 비유했고,
호랑이는 비록 용맹스럽지만 우리 속에 갇히면 힘을 쓰지 못하다가 산 속으로 들어가면 그 용맹함을 발휘한다. 이것은 4상(四相)의 우리 속에 갇힌 중생이 4상의 우리를 허물고 나온 모습을 비유적으로 한 말이다.
 
만약 아직 깨닫지 못했더라도 ‘바람 부는 쪽으로 불을 불어주는 것과 같아서 많은 힘을 쓸 것이 없다’는 것은 비록 아직 깨닫지 못했더라도 이러한 좌선법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바로 힘도 덜 들고 더 이상의 노력도 필요 없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바람 부는 반대쪽으로 불을 불면 끝내 불이 붙지 않고 힘만 들지만,
불이 타고 있는데 바람을 불어주면 더 잘 타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바람 부는 쪽으로 불을 불면 더 이상 힘들이지 않아도 어느 한 순간에 불이 붙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때가 익기를 기다리며 용맹 정진해야 한다.
 
끝으로 ‘긍정하는 마음을 지닌다면 반드시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고 한 문단에서 긍정하는 마음은 곧 <좌선의>에서 가르쳐주는 것을 상응하는 마음이다.
긍정하는 마음은 허덕임이 없고 갈등이 없고 시비가 없어서 어느 곳에서나 원융무애(圓融無碍)하여 잘못되는 일이 없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불교신문 2538호/ 7월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