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의 강의·혜거스님

〈46〉마음을 조절하다(調心)/늘 마음을 시선가는 곳에 두어라

通達無我法者 2009. 12. 21. 01:29

 

 

늘 마음을 시선가는 곳에 두어라

〈46〉마음을 조절하다(調心)

  
 
참선이란 결국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로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동요되지 않고 생사의 문턱이 스스로 없어져 담연명백하여 현상계에서 자재무애할 수 있게 훈련하는 것이다. 이를 훈련함에 몸을 조절하고 호흡을 조절하고 그리고 마음을 조절하는 단계를 거쳐 수행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단계로 그 방법이 스스로 확연해지면 비로소 참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겠다.
 
따라서 호흡까지 잘 조절되고 모든 것이 참선할 준비가 되었다면 마음 조절을 해야 한다. 참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조절이다. 처음 참선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말이 “어떤 생각을 해야 하고, 번뇌가 일어날 때 어떻게 조절해야 하나요?”이다.
 
먼저 눈은 반드시 떠야 하고 코끝을 응시한다. 그러면서 마음은 한 대상에 집중한다. 화두를 든다거나 아니면 호흡에 집중한다거나 아니면 한 시점을 응시해도 된다. 그러나 마음이 한 대상에 머물러 집중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마음은 집중하는 대상을 놓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 속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자신의 마음을 주시하다 보면 우리의 생각들은 연상작용을 통하여 이어져 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 조사들은 이를 일러 여사미거(驢事未去)에 마사도래(馬事到來)라 하여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생각들을 경계하신 것이다. 여사미거에 마사도래란 나귀의 일이 없어지지 않았는데 망아지의 일이 생각난다는 뜻으로 일어난 생각이 결말이 나지 않았는데 다른 생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끊어지지 않고 일어나는 망념과 경계마다 부딪치고 집착하는 마음을 다스려 밖으로 물들지 않고 안으로 허덕이지 않는 맑고 깨끗한 마음이 유지되도록 훈련하는 것이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이다.
 
 
수행자는 행동 하나하나를 자각하여
 
몸의 움직임과 마음의 변화를 관찰해
 
‘나’라고 하는 느낌이 없어질 때
 
비로소 ‘마음의 문’이 열린다
 
 
사실 마음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고, 공간적으로는 이 세상 안가는 곳이 없다. 그러면 이 마음을 어떻게 현재 이 자리에서 집중하는 대상으로 끌어올 것인가? 초심자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려 하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허물이 아니다. 단지 마음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헤매고 헤매이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를 지어가다 번뇌망상이 생겼을 때는 번뇌망상이 생겼음을 바로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리면 즉시 번뇌망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뒤따라 다른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백 천 만 가지 망념이 일어났다 사라져도 알아차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망념인 줄도 모른다. 이미 망념인 줄 알면 아는 순간 망념은 없는 것이다. 그 생각이 사라지면 다시 집중하는 대상으로 돌아온다. 다른 생각이 들어도 집중하는 대상을 절대 놓치면 안 된다. 계속해서 이렇게 하다보면 마음은 다른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고, 점점 고요하게 될 것이다. 좌선을 통해 고요해지고 집중된 마음은 중요한 도구로 쓰일 수 있다.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6) 스님도 <종경록(宗鏡錄)>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달음이 더딘 것만을 걱정하라. 갑자기 일어나는 생각이 병이요, 이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약이다”라고 하였고, <좌선의> 본문에서도 “몸의 모양이 이미 안정되고 호흡이 이미 조절되었으면, 하복부를 느슨하게 하고, 일체 선악을 생각하지 말라. 생각이 일어나면 곧바로 알아차려야 하고 알아차리면 곧 사라질 것이다. 오래도록 반연을 잊으면 저절로 일편(一片)을 이루리니, 이것이 좌선의 중요한 방법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수행자는 늘 마음을 시선가는 곳에 두어야 한다. 행동 하나하나를 철저하게 자각하며 몸의 움직임과 마음의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단지 알아차려 바라볼 뿐 그 감정의 물결에 휩쓸리지 말고,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식으로 판단하지도 말아야 한다. 선(禪)이 깊어지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나’라고 하는 느낌이 없어질 것이다. 그때 비로소 마음의 문이 열린다.
 
다음으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회광반조(廻光返照)를 해야 한다. 오래전 혜암 큰스님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혜암 큰스님은 103살까지 사셨는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용맹정진을 하신 분이다. 스님께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물은 적이 있었다. 스님께서는 “공부는 반조(返照) 밖에 없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공부는 반조뿐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반조할 줄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잘 모른다.
 
반조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누가 잘못된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그 사람의 허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얼른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것이다. “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돌이켜보면 바로 상대의 허물이 이해가 가고 나는 저렇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두 번째는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이다. 자신을 계속 살피고 살펴보면 모자람이 큰 산과 같고 온통 허망할 뿐이며, 나이만 먹었을 뿐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 나아가 자기의 부족한 점과 허물된 자리를 살펴서 반조해야 한다. 허물자리가 곧 중생이요 허물이 없으면 바로 부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세 번째는 수행단계로, 밖으로 향한 것들을 모두 안으로 돌리는 것이다. 우리의 눈, 귀, 코, 입은 늘 밖을 향해 있다. 반조는 이들을 안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밖의 사물에 끄달리지 않고 내 안을 들여다 보는 회광반조(廻光返照)는 참선수행의 기초이다. 기초를 잘 다졌을 때 수행은 급진전하기 마련이어서 모든 상황에 처해서도 반조하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참된 반조를 하게 되면 진정한 참회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참된 반조가 더욱 깊게 이루어지면 참회가 사라진다. 참회 그 자체가 참 반조이고, 참 반조가 참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한 반조가 이루어지면 참회할 것도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밖으로 구하지 말고 이룰 것을 찾지도 말고 오직 반조하고 반조하여 풍랑이 멎어 맑은 물처럼 허물이 없어져서 청정한 마음이 되도록 참회하고 반조하는 것이 마음 닦는 길이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