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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수행법/위빠사나/1

通達無我法者 2010. 12. 19. 20:08

 

 

 

2010년 5월 7일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집멸도 4성제입니다.

그중에 도제(道諦)가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팔정도는 인간이 살아가야 할 여덟 가지 바른 길을 말합니다.

팔정도의 참뜻은 중도입니다.


이러한 중도를 실천하는 방법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알아차려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갈애가 일어나면 집착을 하게 되어 번뇌를 일으킵니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은 집착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떤 것이든 집착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율도 집착을 해서는 안 되며,

선정의 고요함도 집착을 해서는 안 되며,

지혜까지도 집착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바른 것들도 열반의 세계인 피안으로 건너가는 뗏목일 뿐이며,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부터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수행방법인 대념처경을 공부하시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부처님을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의 수행을 통하여 무상, 고, 무아라는 법의 성품을 보시고

모든 번뇌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간 길을 우리에게 이렇게 오라고 45년 동안이나 설법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랜 세월동안 바라밀 공덕을 쌓은 과보로 부처가 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냥 부처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가 되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처절한 수행을 해서 부처가 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께서는 부처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부처가 되는 각고의 노력을 거쳐서 스스로 부처가 되신 것입니다.


여기서 아무리 좋은 조건으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노력이 없이는 무엇도 이룰 수 없다는 진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업적을 존경할 뿐이지 그분께서 가신 길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분께서 어떤 수행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깨달음을 얻으셨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일부의 사람들에게 위빠사나 수행이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수행이라고 말을 해도 그다지 믿지를 않거나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진실이 아무에게나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소수의 한정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바른 수행법에 대한 궁금하신 분들의 의문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이 법문을 시작하겠습니다.


만약 궁금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으시더라고 계속해서 법문을 들으시면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기거나 바른 이해를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대념처경을 빨리어로 싸띠빠타나 수타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큰 경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한문으로는 대념처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대상은 네 가지 입니다.

네 가지 대상이 바로 몸, 느낌, 마음, 법입니다.

이 네 가지를 합쳐서 한문으로 사념처(四念處)라고 말합니다.

사념처는 네 가지 알아차릴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큰 의미에서는 대념처경이고,

알아차릴 네 가지 대상을 말할 때는 사념처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대념처경과 사념처는 같은 말입니다.


대념처경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수행에 대한 법문입니다.

이 법문의 내용은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의 다양한 수행방법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념처경은 수행은 이렇게 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 입니다.


부처님께서는 6년 동안 고행을 하신 뒤에 스스로 연기법을 찾아내셨습니다.

그런 뒤에 위빠사나 수행방법을 발견하시고,

바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셔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부처님이 가신 길이며,

부처님께서 이 길로 오라고 설하신 법문이 대념처경입니다.


부처님께서 고행을 하신 뒤에 죽음 직전까지 이르러 고행의 무가치함을 알았습니다.

고행은 지성을 나약하게 하고 사람을 극단에 빠지게 하여

바른 법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고행의 반대가 되는 감각적 쾌락의 폐해에 대해서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양극단을 배제한 중도를 발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대념처경이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이 모두 포함된 수행방법이지만,

경전의 전반적인 내용은 위빠사나 수행에 관한 것이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마타 수행 40가지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념처경에는 간략한 사마타 수행방법과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모든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념처경과 같은 내용의 경전이 있는데 이것이 염처경입니다.

대념처경은 디가니까야에 있는 말씀이고,

염처경은 맛지마니까야라는 경전에 있는 말씀입니다.

대념처경과 염처경의 내용은 같습니다.

다만 대념처경에서는 법념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이 경전 외에도 수행은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경전이 있습니다.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경이 있으며, 그리고 몸을 알아차리는 경이 있고,

큰 라훌라 교계의 경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모두 비슷합니다.


그중에 대념처경과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경과 몸을 알아차리는 신념처경,

이 세 가지가 수행에 대한 대표적인 경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중에 대념처경은 상좌 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꼽힙니다.


부처님 이래로 모든 위빠사나 수행자들이 대념처경에 근거하여 수행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경전을 누구나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 그 단계에 미치지 못했을 때는 그 단계의 법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경험이 있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만 합니다.

사실 스승도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누구나 주석서에 의존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위빠사나 수행이 부처님께서 2천5백년 전에 말씀하신 수행법이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맞지 않는 수행이므로 새로운 수행법이 나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수행자는 위빠사나를 해서 지혜를 얻어 보지 못한 사람의 소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은 순간에 이미 모든 것을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위빠사나 수행방법은 시대를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한 수행방법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면 역대 모든 부처님께서 새로 출연하실 때는

모두 똑같은 수행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으신 것으로 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가는 길은 어느 시대나 똑같습니다.

모두 원인과 결과의 길인 연기의 길을 갑니다.


부처님께서 초기에는 어떤 법을  설하시고, 중기에는 어떤 법을 설하시고,

말기에는 어떤 법을 설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그 순간에 모든 법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은 더 이상 발전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대에 따라 더 높은 수준의 경전이 설해진다는 것은

불법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문화의 차이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은 있을 수 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계속 발전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대에 따라 더 심오해졌다면 이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은 긴 것과 중간 것과 짧은 것으로 분류하였으며,

숫자별로 분류한 것, 여러 가지 내용으로 분류한 것들로 묶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문은 시대별 법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45년의 시간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시대별로 분류하지 않은 것입니다.


수행자들은 부처님의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난해한 지혜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주석서에 의지하여 수행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상좌 불교에서는 주석서가 갖는 의미가 절대적입니다.

왜냐하면 바른 길잡이가 없으면 다른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상좌 불교가 생긴 이래 초기에 18개의 부파로 갈라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많은 부파가 모두 없어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전승한

상좌 불교 하나만 남아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파 불교가 갈라진 것은 경전의 해석에 대한 다른 견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상좌 불교에서는 주석서의 의미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주석은 2500년 동안 경전과 함께 면면히 계승되어 옵니다.

그래서 앞선 스승이 한 주석에 대한 보완을 또 거듭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을 복주라고 합니다.


최근에도 미얀마의 훌륭하신 큰 스승들께서는

현대인에게 맞는 알기 쉬운 주석을 계속해서 하고 계십니다.

이런 주석에 근거하지 않으면 모두 저마다 자기가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주석서는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빨리어를 근거로 하기 때문에

주석을 할 때 왜곡된 견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빨리어는 현재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언어이고

또 문자가 없어서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그 뜻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석의 가치가 존중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대한 주석서는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당시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사리불, 목련존자, 가섭존자등과 역대의 수많은 아라한들에 의해서

알기 쉽게 설명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석된 것을 5세기에 붓다고사라는 비구에 의해 총 정리가 된 주석서가 나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청정도론이라는 주석서입니다.

현재 상좌 불교의 주석서는 청정도론에 의거합니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대념처경 법문은

먼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경전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대념처경에 대한 주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주석은 모두 붓다고사께서 말씀하신 청정도론에 근거한 것이며,

또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와 마하시 사야도의 제자이신 우실라난다 사야도께서

주석하신 것을 종합하여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주석은 처음에 사리붓다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와

까사빠 존자에 의해서 시작된 주석서가 계승된 것으로 이해하셔야 하겠습니다.


대념처경이나 다른 경전을 이해함에 있어서 주석서가 없이는 바른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우리가 아는 상식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서 깊고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전을 읽어도 표피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관념적으로 받아들이고

문자를 이해하는 수준에 그치지만 사실은 경전에 있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차이, 그리고 정신적수준의 차이 등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합니다.


이제 수행자 여러분께서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을 직접 듣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계승되어온 주석의 상세한 안내를 받으실 것입니다.

아직 여러분들이 주석을 하기엔 빠르므로 그냥 있는 그대로

주석의 내용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대념처경에 있는 수행의 방법은 신, 수, 심, 법, 네 가지인

사념처(四念處)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을 염처별로 모두 합하면 수행방법이 44가지입니다.

수행자가 44가지 수행을 모두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위빠사나 수행을 배울 때 스승에게 배워야 하므로

자신이 수행방법을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배우는 스승이 지도하는 방법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44가지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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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한국명상원 수행자 조남희님께서 녹취하셨습니다.

이 보시공덕으로 도과를 성취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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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