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붓다의수행법·위빠사나·묘원법사

붓다의수행법/위빠사나/2

通達無我法者 2010. 12. 19. 20:12

 

 

2010년 5월 8일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삶의 선택이 있습니다.

첫째, 선하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둘째, 선하게 살되 좋은 결과를 바라는 것입니다.

셋째, 선하게 살되 좋은 결과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선하게 살지 못하면 현재에도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생명처럼 살고,

죽어서도 현재 경험한 세계인 사악처(四惡處)에 태어납니다.


선하게 살되 좋은 결과를 바라면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욕계 천상이나 색계, 무색계 천상에 태어납니다.


선하게 살되 좋은 결과를 바라지 않으면 도, 과를 성취하여

윤회하는 생명의 세계로부터 벗어납니다.


선하되 바라지 않는 길로 가기 위해서는,

느낌이 고통이라고 알아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 길이 팔정도(八正道)이며 바로 중도(中道)의 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대념처경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지 않고 순수 위빠사나로 수행을 시작하는 수행자는

대념처경에 있는 사마타 수행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라고 할지라도 염처(念處)에 따라

더 집중을 할 필요가 있는 경(經)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소개하는 대념처경은 수행의 전반적인 방법을 말씀드리는 것이지,

이것을 모두 실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4념처 수행의 종류를 21가지로 나누기도 하고 더 자세하게 나누면 44가지로 나눕니다.

사념처를 44가지로 나누었을 때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 14가지입니다.

들숨과 날숨, 행, 주, 좌, 와(行, 住, 座, 臥)라는 4 가지 자세,

4가지 분명한 앎, 32가지의 몸의 형태,

지, 수, 화, 풍(地, 水, 火, 風)이라는 사대(四大)를 알아차림,

그리고 9가지 공동묘지에서의 알아차림입니다.


둘째,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 9가지입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 세속적인 괴로운 느낌,

세속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세속을 여읜 즐거운 느낌, 세속을 여읜 괴로운 느낌,

세속을 여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9가지입니다.


셋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 16가지입니다.

탐욕이 있는 마음, 탐욕이 없는 마음, 성냄이 있는 마음, 성냄이 없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 위축된 마음, 산란한 마음,

고귀한 마음, 고귀하지 않은 마음, 위가 남아 있는 마음, 위가 없는 마음,

선정에 든 마음, 선정에 들지 않은 마음, 해탈한 마음, 해탈하지 않은 마음,

이상 16가지입니다.


넷째, 마음의 대상인 법(法)에 대한 5가지 알아차림입니다.

5가지 장애를 파악함, 오온(五蘊)의 무더기를 파악함, 6가지 감각장소를 파악함,

깨달음의 구성요소인 7가지를 파악함, 고, 집, 멸, 도(苦, 集, 滅, 道)사성제를 파악함,

이렇게 해서 대념처경에 있는 알아차릴 대상은 모두 44가지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 대념처경을 설하실 때 이해해야 할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84,000 법문을 설하셨다고 할 때,

82,000 법문은 부처님의 법문이고 나머지 2,000 법문은 제자들의 법문입니다.

이 같은 84,000 법문이라는 것은 수행자들의 근기에 따라서 다양한 방편을 쓰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수행 방법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단, 큰 틀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지만 지엽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스승에 따라서, 자신의 근기에 따라서, 수행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 방법을 말씀하실 때는 총론적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수행 방법에 대한 각론은 직접 지도를 받는 스승에 의해 선택될 수 있으며,

자신의 성향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계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방법을 새로 계발할 때는 반드시 수행 지도를 받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자들은 자신의 수행 방법에 대한 확신이 서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직 바른 수행 방법에 대해서 계발할 단계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새로 시도하는 방법이라도 반드시 옳은 방법인지를 물어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실수가 없습니다.


정신세계는 경험하지 않은 것이라서 경험자의 지도를 받아야 바르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울러 위빠사나 수행은 지금까지 살아 온 방법과 전혀 다른 방법이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많은 삶을 살아왔고,

이런 삶을 살면서 생긴 고정관념에 의해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으로 수행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수행자는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고,

판단은 스승이 하는 것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바른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수행을 자가진단 하는 경우

결코 수행이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정신세계의 수행은 처처소소, 도처에 장애입니다.

그 장애를 스스로의 판단으로는 결코 뛰어넘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새로운 삶의 방법이고 새로운 수행방법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라지 않고 없애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누구도 바라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으며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을 없애려고 하지 않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경험자의 지도와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누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무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승의 가르침으로 지혜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바른 지적을 수용하지 못하고 바른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무지라고 아셔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신, 수, 심, 법(身, 受, 心, 法) 4가지를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설정하신 수행 방법입니다.

4가지를 선택하신 배경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4가지는 사실 줄여서 말하면 몸과 마음입니다.

그러나 느낌과 법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분류하신 것은,

바로 이런 분류방법이 아니면 바른 수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4가지를 분류하신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이 일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수행을 시작하면 마음이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합니다.


이때 마음이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거나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

사실은 모두 느낌으로 알아차립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모든 것을 관념으로 보지 않고 실재를 봅니다.

이때 몸과 마음의 실재가 바로 느낌인 것입니다.

우리가 대상을 알 때는 모두 느낌으로 압니다.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이것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12연기(緣起)를 통하여 몸과 마음이란 대상을 발견하시고,

이 대상을 알아차리니 모든 것이 느낌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 느낌을 통하여 무상과 고와 무아를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열반으로 가는 필수적인 대상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과정이 나타난 것입니다.

느낌을 모르고서는 결코 지혜가 나지 않습니다.


12연기에서 느낌이 차지하는 비중이 결정적으로 작용합니다.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릴 때 갈애가 일어나지 않아 연기가 회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몸과 마음과 느낌이 있고, 마지막으로는 법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법(法)이라는 것은 바로 알아차릴 대상을 말합니다.


수행은 대상이 없으면 수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마타 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이나 모든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같습니다.

이때 대상이 관념이면 사마타 수행이고, 대상이 실재하는 느낌이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법을 일반적으로는 마음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법이라고 할 때는 먼저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법을 마음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수행을 할 때 먼저 대상이 있어야 수행이 성립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대상의 법이 차츰 지혜가 나면 진리의 법(法)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나타난 진리를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신, 수, 심, 법이 비로소 완성됩니다.


이 신, 수, 심, 법, 사념처가 함께 작용하는 것을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합니다.

이것들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라도 없으면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 수, 심, 법, 사념처는 위빠사나 수행의 기본 구조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몸을 알아차리는 신념처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념처 수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심념처 수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대상인 법념처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4가지 대상인 사념처를 기본으로 하되 근기에 따라서

특별하게 어느 하나의 대상을 집중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선택은 경험이 있는 스승들의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하게 어느 염처수행 하나를 계발한 스승의 지도를 받으면 무난하게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처음에는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실 신수심법 사념처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가지고도

무상, 고, 무아를 알아서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축적된 성향, 그리고 근기, 스승의 조건에 따라서

우리는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알아차리는 대상을

별도로 수행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이런 것을 종합해 볼 때 열반에 이르는 문이 4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념처(身念處)를 통해서 열반에 이를 수 있으며

수념처(受念處)를 통해서 열반에 이를 수 있으며

심념처(心念處)를 통해서 열반에 이를 수 있으며

법념처(法念處)를 통해서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네 개의 문이라고 하거나 네 개의 계단이라고 말합니다.

이 네 개의 문, 어느 문을 통해서도 열반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이 네 개의 계단, 어느 계단을 통해서도 열반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을 통과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자아가 강한 사람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을 유신견(有身見)이 강하다고 말합니다.

유신견이 강한 사람은 자아가 강한 사람으로 자신의 견해를 고집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만 열반의 문이 출입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유신견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의 견해 때문에 이 문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지기가 있어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열반에 드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아무쪼록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대념처경을 충분히 섭렵하셔서

위빠사나 수행에 전력을 기울여 부디 열반을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가장 가치 있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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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한국명상원 수행자 김수연님께서 녹취하셨습니다.

이 보시공덕으로 도과를 성취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_()_


출처: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