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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2

通達無我法者 2010. 12. 23. 02:3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마음이 있고 축생에게는 축생의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축생의 마음이 아니고,

축생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길이 있고 축생에게는 축생의 길이 있습니다.

사람의 길이 축생의 길이 아니고,

축생의 길이 사람의 길이 아닙니다.

 

사람과 축생의 마음이 같은 마음이 아니므로

사람과 축생의 마음이 같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사람이 축생의 마음이면 본능만 있으며,

축생이 사람의 마음이면 질서가 무너집니다.

 

서로 다른 마음이 같기를 바라면 무지(無知)고

서로 다른 마음을 존중하면 지혜(智慧)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온몸을 알아차리면서 숨을 들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하며’ 라고 할 때

‘온몸’이라는 것은 호흡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때 ‘온’은 호흡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뜻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호흡 하나하나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꼼꼼히 살피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호흡이란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어남과 그 다음에 사라짐과 그 다음에 짧은 순간의 휴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한데 모아서 시작과 중간과 끝이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이 구절은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에 관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때 수행의 대상은 온몸의 움직임인 호흡이어야지, 물질적인 몸통이어서는 안 됩니다.

 

청정도론인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수행을 하면서

‘나는 호흡의 온몸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알아차리고

꾸밈없도록 하면서 숨을 들이 마실 것이다.

나는 호흡의 온몸의 시작, 중간, 끝을 알아차리고

꾸밈없도록 하면서 숨을 내쉴 것이다.’ 라고 자신을 수련시킨다.

 

이와 같이 호흡을 알아차리고 꾸밈없도록 하면서

그는 정신을 차리고 인식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쉽니다.

여기서 꾸밈이 없다는 것은 호흡을 만들어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호흡은 생명과 생명을 잇는 것이므로 저 스스로 상태대로 그냥 두고 지켜봐야 합니다.

호흡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면 신체에 무리가 올 수 있습니다.

특히 위빠사나 수행은 인위적으로 꾸미는 수행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호흡을 만들어서 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이 구절에서 미래시제를 눈 여겨 보았을 것입니다.

전에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에서, 긴 숨을 짧은 숨과 구별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정통한 앎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호흡을 알아차릴 때 마음을 다지며

철저히 보기 위해 정통한 앎을 얻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행자가 더 힘 있게 호흡을 해서

호흡이 분명해지도록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수행자가 호흡 하나하나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명백히

인지할 수 있을 때만이 집중과 앎, 또는 이해가 깊고 철저하다고 말합니다.

 

더 힘 있게 호흡을 해서 호흡을 명백하게 보는 것은 집중과 앎 때문이 아니라,

대상의 거칠음 때문에 호흡이 명백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호흡을 더 명백하게 보기 위해서 더 힘 있게 호흡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짧은 시간에 피로해집니다. 그래서 호흡은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제가 미얀마에서 수행을 할 때 하루 종일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을

주 대상으로 삼아서 수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녁 6시가 되면 탈진상태가 되어서 도저히 저녁수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안 것인데 그렇게 온몸이 피곤했던 것은

호흡을 할 때 호흡의 일어남 꺼짐이라는 명칭을 붙여서 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호흡을 만들어서 해서 피곤해졌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호흡에 명칭을 붙이면 매우 피곤해집니다.

그래서 도저히 수행을 할 수가 없는 상태까지 이릅니다.

제가 이런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은 명칭을 붙이지 않은 뒤부터

그렇게 피곤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호흡은 저 스스로의 호흡을 그냥 두고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정상적인 호흡을 하면서

모든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기 위해 힘을 쓰고 정통한 앎을 얻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호흡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들이 필요할까요?

분명한 알아차림 하나하나의 행위에 얼마나 많은 요소가 필요할까요?

 

그렇습니다. 단지 그것을 아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노력, 알아차림, 집중, 지혜가 있으면 됩니다.

특별히 다른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시 경전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자연스런 호흡을 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하며

자연스러운 호흡을 하면서 숨을 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한다.”

 

이 구절에서 호흡을 몸으로 조건 지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빨리어로 몸으로 조건 지어진 것이라는 것은 ‘상카라’ 라는 말이며

이것은 ‘행(行)’ 이라고도 합니다.

‘가야’ 는 몸을 뜻하고 ‘상카라’ 는 조건 지어진 행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몸에 의하여 조건 지어진 것을 뜻합니다.

 

호흡은 마음에 의해서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몸이 없으면 호흡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호흡은 마음에 의해서 생기지만 호흡이 일어나기 위하여,

즉 호흡이 나타나기 위하여 몸에 의존합니다.

따라서 호흡은 몸에 의하여 조건 지어진 현상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자연스러운 호흡을 하면서’ 라는 표현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의도적으로 호흡을 가라앉히고 억제하고 조용하게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호흡이 아주 미세할 때 열심히 노력하고 주의를 기울이고 더 많은 노력을 적용해서

호흡을 분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수행의 다른 대상은 집중과 이해가 증가하면서 더욱 명명백백하게 되지만

호흡은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이 진보하면 할수록 다른 수행의 대상들은 수행자의 마음속에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호흡은 이와 같지 않고 수행이 진보해짐에 따라 더 미세해지고

인지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렇습니다. 호흡은 수행이 발전할수록 더 미세해지고 인식할 수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그 미세한 호흡을 알아차리는 데는 더 세련된 더 깊은 집중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수행하지 않을 때 수행자의 마음과 몸은 편안하지 않습니다.

수행자의 호흡은 마음과 몸의 상황을 따르므로 거친 형태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계속하면 마음과 몸이 편안하고 안정되어 호흡도 함께 섬세하게 됩니다.

 

마음집중의 성취가 더욱 진보할수록 호흡은 더 미세해져서

호흡이 있는지 없는지 탐색해야할 정도입니다.

나중에는 호흡이 너무 미세해져서 호흡이 있는 것인지 의심할 때가 있기도 합니다.

인지할 어떤 것도 찾지 못해서 호흡을 단순히 잃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때 수행자는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나는 죽지 않았다. 나는 물에 빠져 죽지 않았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러나 호흡을 인지할 수 없다.

호흡이 너무 미세하고, 아직 나의 마음집중과 이해력이 예민하지 않고

충분하게 계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더 계발하고, 수행의 대상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미세한 호흡을 인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노력을 계속해서 더 많은 이해력을 얻을 때

수행자는 아무리 미세한 호흡일지라도 인지하게 될 것입니다.

 

수행 중에 호흡을 인지할 수 없을 때에도 수행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호흡이 다시 명백하게 인지될 때까지 미세한 호흡을 인지하도록

자신을 격려하고 독려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친 들숨을 가라앉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노력을 증가시켜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수행을 하면 호흡이 미세해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몸의 느낌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오직 아는 것은 아는 마음 밖에 없습니다.

 

이때의 아는 마음을 앎이라고 합니다.

이 앎을 할 때는 몸의 느낌과 호흡이 모두 사라집니다.

실제로 호흡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워낙 미세한 호흡이라서 그 움직임이나 숨결을 감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때에는 사라진 호흡을 절대 찾아서는 안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들의 주의해야 될 사항 중의 하나는

이미 지나간 것을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사라졌다면 그것은 소멸이고, 그것은 정신적 지혜가 성숙한 과정이기 때문에,

그냥 사라진 채로 두고 다른 대상을 지켜봐야 합니다.

 

제가 수행을 할 때에도 몸의 호흡이 사라졌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거 죽은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배의 호흡을 일으켜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라진 호흡이 잠시 후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몇 차례 거듭했습니다.

그런 뒤에도 똑같이 또 호흡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스승께 보고했더니 스승께서는

‘사라진 호흡을 찾지 마라. 호흡이 없으면 그것을 아는 마음만 그냥 가지고 있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어느 땐가 집중력이 생기면 몸의 느낌이 사라지고

그리고 호흡을 감지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 절대 호흡을 찾지 마십시오.

이것은 집중력이 생기고 지혜가 생긴 단계이기 때문에

그 단계에서 그 수준에서 그때에 있는 대상을 그냥 알아차려야 합니다.

 

호흡이 사라진 뒤에 남아있는 대상은 아는 마음입니다.

이때 바로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4가지 호흡수행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긴 호흡, 짧은 호흡, 호흡의 지속기간,

미세해서 거의 인지할 수 없는 호흡을 완전히 인지해야 합니다.

이리하여 수행자는 지금 알아차림을 하여 호흡하는 4가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첫째, 긴 숨을 들이 마시면서 수행자는 숨을 길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둘째, 긴 숨을 내쉬면서 그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셋째, 짧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그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넷째, 짧은 숨을 내쉬면서 그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알아차려서 호흡하는 4가지의 규칙입니다.

 

사실 이 4가지의 규칙 외에도 또 다른 많은 호흡의 특성들이 있습니다.

가령 뜨겁거나 차갑거나 단단하거나 부드럽거나 뻑뻑하거나 가볍거나 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호흡들이 있는데,

크게는 기본적으로 4가지 호흡의 바탕 하에서

그러한 다양한 형태의 느낌들을 느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 이 가르침을 더 명백하게 이해하도록

비유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마치 숙련된 도공이나 그의 제자가 물레를 길게 돌릴 때는

길게 돌린다고 알아차리고’ 라는 구절입니다.

 

‘길게 돌릴 때’ 란 이 뜻은 드럼과 같이 큰 것을 만들 때

기술자는 선반 위에서 오랫동안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짧게 돌릴 때’ 라는 뜻은 상아로 된 바늘과 같이 작은 것을 만들 때

기술자는 선반 위에서 짧게 돌려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돌림을 할 때 수행자는 어떤 돌림을 하든지

하고 있는 그것을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안으로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밖으로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안으로’ 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수행자가 자신의 들숨날숨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호흡에 머물게 할 때 안으로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호흡에 마음을 머물게 하는 수행을 조금만 하면

때때로 다른 사람의 호흡도 같이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나의 호흡이 시작과 끝이 있고 나타나고 사라지듯이 다른 사람의 호흡도 그와 같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호흡을 이렇게 알 때 밖으로 몸에서 몸을 알아차린다고 말합니다.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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