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알아차린다고 해서 무조건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서 적절한 조건이 성숙되어야
알맞은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견해는 바른 견해를 갖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제거됩니다.
잘못된 견해를 없애려고 하면 오히려 더 나쁜 결과가 생기므로,
바라는 마음 없이 알아차리고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합니다.
바라고 없애려고 하는 것이 탐욕이기 때문에
바라고 없애려고 하면 분노와 무지만 커집니다.
어리석음이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러야 자연스럽게 제거 됩니다.
지혜란 매 순간의 지혜들이 모여서 완성된 지혜로 성숙됩니다.
어느 날 홀연히 큰 깨달음이 왔다면 단계적인 과정을 거쳐서 즉각 깨달음에 이른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대념처경의 신수심법이라는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사념처라고 합니다.
사념처에 대한 비유를 주석서에서는 원통의 대나무를 네 등분으로 잘라서
각기 돗자리나 상자나 가재도구를 만드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래서 몸이라는 대나무로 여러 가지의 가재도구를 만든다는 것은
여러 가지의 몸과 관련된 수행방법을 말합니다.
그리고 느낌, 마음, 법도 마찬가지 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먼저 대념처경의 본문인 신념처 수행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신념처 수행은 몸에 대한 알아차림의 확립입니다.
몸에 대해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방법을
부처님께서는 크게 14가지로 분류하셨습니다,
첫 번째가 들숨과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이것을 출입식념이라고도 합니다. 또는 수식관이라고도 합니다.
두 번째가 네 가지 자세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이것은 행, 주, 좌, 와를 모두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분명한 앎입니다.
분명한 앎도 네 가지의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네 번째는 몸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킴 입니다.
이것은 몸의 32가지에 대한 혐오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네 가지 요소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 수, 화, 풍이라는 사대(四大)의 요소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묘지에 아홉 가지의 부정관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동묘지에서 시체가 섞어가는 과정을 9가지로 나누어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이 수행은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인 신념처에서는
이상 네 번째까지 알아차리는 수행에다가 묘지에서 알아차리는 수행 아홉 가지를 포함하여
모두 열네 가지의 대상을 알아차립니다.
신념처수행의 첫 번째인 들숨과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은
약간의 사마타 수행을 포함한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대념처경에서는 사마타수행법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중에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수행에서도 조금 다릅니다,
사마타 수행의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호흡을 표상으로 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가 많기 때문에
사마타 수행방법으로 수행을 하기도 하지만,
대다수가 호흡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미얀마 마하시 사야도의 수행방법을 따르는 제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먼저 신념처 수행의 첫 번째인 들숨과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들숨과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에 대한 경전 전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며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숲 속이나, 나무 밑이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가부좌를 하고, 상체를 반듯하게 세우고 앉아서, 전면의 호흡의 알아차림을 확립한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는 것을 알아차리고,
숨을 내쉬는 것을 알아차린다.
숨을 길게 들이쉴 때는 길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길게 내쉴 때는 길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숨을 짧게 들이쉴 때는 짧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짧게 내쉴 때는 짧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온몸을 알아차리면서 숨을 들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고 수행을 하며,
온몸을 알아차리면서 숨을 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한다.
자연스런 호흡을 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하며.
자연스런 호흡을 하면서 숨을 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한다.
비구들이여, 마치 숙련된 도공이나 그의 제자가 물레를
길게 돌릴 때는 길게 돌린다고 알아차리고,
짧게 돌릴 때는 짧게 돌린다고 알아차리는 것처럼,
바로 이와 같이 비구는 숨을 길게 들이쉴 때는 길게 들이 쉰다고 알아차리고,
길게 내쉴 때는 길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온몸을 알아차리면서 숨을 들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하며,
온몸을 알아차리면서 숨을 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한다.
자연스런 호흡을 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하며,
자연스런 호흡을 하면서 숨을 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한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안으로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며 지낸다.
혹은 밖으로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비구는 ‘단지 몸이 있다’는 알아차림이 확립될 때까지
몸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
비구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세간적인 것에 아무 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수행자 여러분!
이상이 들숨과 날숨에 대한 경전의 내용입니다.
이 경전의 내용은 부처님께서 직접 빨리어로 암송하신 것을 번역한 내용인 것입니다.
이제 경전의 부분적인 구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숲속이나 나무 밑이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가부좌를 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은 알아차림을 하기에 적절한 거처를 말합니다.
비구의 마음은 출가하기 전에 실로 오랜 세월을 형상 등의 대상들에 산만해져 있어서
명상주제를 알아차리는 과정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대상으로부터 달아납니다.
그것은 마치 사나운 황소의 멍에를 멘 달구지가 길을 벗어나서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은 한시도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소치기가 사나운 암소의 젖을 마음껏 마시면서 자란,
사나운 송아지를 길들이려 할 때 그 암소로부터 송아지를 떼어내어
한 곁에 큰 기둥을 박고서 그곳에 고삐를 메여 묶어 놓는 것입니다.
그 때 송아지는 이리 저리 날뛰어도 도망갈 수 없게 되자
그 기둥에 의지하여 앉거나 누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비구도 오랜 세월을 형상 등의 대상들에서 맛있는 것을 마시면서 자란,
사나운 마음을 길들이고자 하면 형상 등의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숲이나 나무아래나 빈방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대상이라고 불리는 그 기둥에 알아차림의 고삐를 묶어서 매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이리저리 날뛰더라도 오랫동안 탐닉했던 대상을 얻지 못하게 되고,
알아차림의 고삐를 자르고 도망칠 수가 없어서 이제 근접삼매와 본삼매를 통해서
그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대상을 의지하거나, 눕거나, 앉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것이 몸에서 호흡을 알아차리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마치 송아지를 길들이는 자가 기둥에 묶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림으로써 대상에 굳게 묶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의 수행에 어울리는 거처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의 확립을 닦기에 적절한 거처를 취하는 것을 밝힌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이 들숨과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의 확립은 몸의 알아차림 가운데서도 아주 섬세하고
모든 부처님과 벽지불과 성문들이 특별함을 증득하여 지금 여기에서 행복에 머무는
기초가 된 것입니다.
이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의 확립은 여자나 남자나 코끼리나 말 등의 소리로
시끄러운 마을을 떠나지 않고서는 성취하기가 어렵습니다.
소리는 선(禪)의 가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을이 없는 숲에서는 수행자가 쉽게 이 명상주제를 거머쥐고
들숨, 날숨을 통해 제 4선정에 이르고, 그 선을 기초삼아서 법들을 명상하고
가장 높은 과위인 아라한과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적절한 거처를 보이기 위해서 세존께서는 ‘숲속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마치 터를 보는 기술의 대가와 같습니다.
그분께서는 택지학의 대가라서 계획할 도시의 땅을 본 뒤에
자세히 검증하고 나서 여기에 도시를 건설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안전하게 도시가 만들어졌을 때 그는 왕으로부터 큰 영광을 얻습니다.
이와 같이 세존은 수행자에게 적절한 거처를 검증한 뒤,
여기서 명상주제를 들어라 라고 지시하십니다.
나중에 그 곳에서 명상주제를 든 수행자가 아라한과를 얻었을 때
‘참으로 세존은 정등각이시다’ 라고 하여
세존께서 큰 영광을 얻은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비구는 표범과 같다고 합니다.
마치 거대한 표범의 왕이 밀림의 숲속 깊숙이, 바위산 속 깊숙이, 숨어있는
야생물소나 야생 황소나 멧돼지 등 야수들을 잡듯이
숲속 등에서 명상주제에 전념하는 비구들은 차례대로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성스러운 과를 얻습니다.
그것이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스승들은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포범이 잠복하여 야수들을 잡듯이
부지런히 수행하고 위빠사나를 닦는 부처님의 아들들도
숲속에 들어가서 최상의 과위를 증득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에게는 수행을 촉진하기에 적절한 곳으로 숲속의 거처를 보면
세존께서는 ‘숲속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을 시작하신 것을
우리는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자여러분!
이처럼 ‘숲속이나 나무 밑이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라는 말씀으로
부처님께서는 수행하기에 적당한 장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첫 번째 장소인 숲속으로는 은둔의 기쁨을 제공하는 어떠한 종류의 숲속도 된다는 뜻입니다.
한적해야 되기 때문에 촌락이나 읍, 도시, 소음과 잡음에서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살지 않은 숲속이면 더욱 좋습니다.
경전에서 말씀하신 두 번째 장소는 나무 밑입니다.
어떤 나무 밑도 수행을 하기엔 적당한 곳입니다.
그러나 삼림과 같이 조용한 곳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 장소는 그저 한적한 곳입니다.
도시 또는 촌락이라도 한적하면 됩니다.
이들 장소에 관하여 한적함이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따라서 어떤 장소이든 한적함을 제공한다면 수행하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다른 경전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한적한 곳으로 여기는 장소로
삼림, 나무 밑, 바위, 언덕의 갈라진 틈, 산의 동굴, 묘지, 정글의 덤불,
열려있는 공간, 그리고 짚더미 등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위로 시작하는 뒤 일곱 장소도 한적한 곳으로 여겨집니다.
이 장소들이 언급된 것은 초심자들에게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떨어진 조용한 장소가 필요합니다.
집중 수행처 또한 수행수도원에서 수행을 위한 한적한 환경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경험이 있고 집중력이 어느 정도 성숙한 사람에게는
어떤 곳도 수행하기에 알맞은 장소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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