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붓다의수행법·위빠사나·묘원법사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22

通達無我法者 2010. 12. 24. 23:3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사람들은 무조건 자기의 기분부터 말합니다.

아무 때나 자기 기분을 말하지 마십시오.

자기 기분을 밝히면 상대의 기분을 해칠 수 있습니다.

자기 기분을 알아차리면 상대의 기분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도 좋고 상대도 좋습니다.

 

자신의 가치는 자기 스스로가 만듭니다.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좋은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가 행복하고 누구에게나 환영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행복해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으면 바른 행동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괴로움을 겪고 있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이것은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남을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분명한 앎의 두 번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둘째는 적합성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하는 행동이 바른 것인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행동할 때 자신이 판단한 것이 올바른 근거에 의해서 하기보다

주위의 상황에 따라서 하거나 불가피한 조건에 따라서 결정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몰라서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수행자로서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수행자라면 오직 수행을 위한, 수행에 따른, 수행자만의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행동할 때 행동해야 할 시기나 여러 가지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것에는 때와 장소가 있습니다,

때를 놓쳐서도 안 되며 장소를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이 과연 적합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모든 법문이 모두 분명한 앎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방편이라고 하는데,

수행자의 근기를 도와 이로움을 주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방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방편이 모두 목적에 대한 분명한 앎과 적합성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사실 이러한 분명한 앎은 위빠사나 수행자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두 한결같이 적용되는 가르침입니다.

 

세 번째, 수행의 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의 대상이

몸과 마음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미래에 관한 것이나

지나간 과거의 것인가를 아는 분명한 앎도 중요합니다.

의식(儀式)을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수행인가, 지나친 계율로 속죄하려는 수행인가,

지나친 고행으로 지성을 나약하게 수행이 아닌가, 이런 것을 아는 분명한 앎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대상을 붙들고 허송세월만 보낼 수 있습니다.

이런 손해는 어디서도 보상받을 수 없습니다.

 

네 번째 실존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하는 행위가 어리석음으로 하는지 또는 지혜로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행위라면

무지의 습성으로 인해서 하는 행동이기 쉽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자신이 하는 행동이 미혹한 상태에서 하는 어리석음으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위대하신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지혜를 얻는 행동인지 아는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릴 대상을 선택함에 있어

현실적인 것인가, 관념적인 것인가, 사실인가, 사실이 아닌 허구인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재하지 않는 영혼을 대상으로 수행을 하는가,

아니면 증명할 수 있고 실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선택하는지 아는

분명한 앎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러면 분명한 앎의 경전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앞으로 나아갈 때나, 뒤로 돌아갈 때나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앞을 볼 때나, 주위를 볼 때나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팔 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때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두 겹의 가사와 다른 가사를 입을 때에도,

발우를 들 때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대 소변을 볼 때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가고, 서고, 앉을 때도, 잠자리에 들고, 잠에서 깨어날 때도,

말하거나, 침묵하고 있을 때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몸을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몸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단지 몸이 있다는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까지

몸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

 

그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렇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알아차림은 대상을 겨냥하는 행위이고,

분명한 앎은 대상을 판단하고 이해하는 행위입니다,

이 두 가지의 뜻이 크게는 같지만 세부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 이 두 가지는 서로가 보완하고 도우면서 수행을 하는 관계입니다.

 

알아차림이란 용어는 알아차림, 주시, 겨냥, 관찰, 지켜봄 등의 다양한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을 한문으로는 정념(正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앎은 바른 이해, 분명한 이해, 바른 판단 등으로 사용됩니다,

이것을 한문으로는 정지(正知)라고 합니다.

 

이처럼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은 유사한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마음을 대상에 겨냥하여 그것을 면밀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상황에 맞게 알아차리는 것으로는 같습니다.

 

먼저 대상을 알아차리면 다음에 분명한 앎이 함께하여

알아차림을 적극적으로 도울 뿐만 아니라 바른 이해의 힘으로 지혜가 나게 합니다.

 

여기서 분명한 앎이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속해서 소개되고 있지만,

사실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사념처 모두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실 알아차림이란 용어는 수행의 핵심을 이루는 말이지만,

분명한 앎은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삶의 기본구도를 제시합니다.

그래서 분명한 앎에 대한 내용은 수행자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인에게 좋은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경전에 쓰여 있는 분명한 앎의 첫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비구는 앞으로 나아갈 때나, 뒤로 돌아갈 때나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무슨 행동을 하거나

알아차림과 함께 반드시 분명한 앎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분명한 앎이 무슨 뜻인지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분명한 앎은 빨리어로 ‘삼빠잔냐’입니다.

이 삼빠잔냐는 삼빠자나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먼저 ‘삼빠자나’ 라는 말은 정확하게 보는 사람,

또는 정확하고 완전하고 고르게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삼빠잔냐’라고 하면 정확하게 보는 사람의 존재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삼빠잔냐’라고 하면 정확하게 아는 것,

또는 정확하고 완전하고 고르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삼빠자나’가 사람을 말한다면 ‘삼빠잔냐’는 그 사람의 상태를 말합니다.

‘삼빠잔냐’는 삼과 빠잔냐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서 삼은 바르게 라는 뜻이고, 빠잔냐는 지식, 이해, 구별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삼빠잔냐’를 합성어로 보면 분명한 앎이라고 합니다.

 

삼(sam)은 영어로 'well'이란 뜻으로 ‘잘’이란 말과 같습니다.

이 삼을 한문으로는 바를 정자(正)로 표기 합니다.

 

‘삼빠잔냐’라는 빨리어에서 접두사 삼(sam)은 이처럼 ‘바르다’는 뜻 외에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삼(sam)의 첫 번째 뜻은 ‘바르게’, 또는 ‘정확히’ 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 분명히 정확하게 보아야 합니다.

이때 다른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정신과 물질을 분간할 때

수행자는 정신을 물질에서 분리해서 알아차려야 하며

물질을 정신에서 분리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 둘을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는 정확히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르게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해서 보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여지껏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보와 왔지만

이제 위빠사나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정신은 정신대로,

물질은 물질대로 각각의 기능과 역할을 한다고 아셔야 되겠습니다.

 

삼(sam)의 두 번째 뜻은 ‘전체로서’ 입니다.

수행자가 하나의 대상을 보거나 분별할 때 그것을 전체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 ‘전체로서’라는 것은 정신적 물질적 현상의 모든 면에서라는 뜻입니다.

수행자는 대상의 특성, 기능과 나타남을 알아야 합니다,

 

정신과 물질이 서로의 역할을 하지만

정신과 물질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특성과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을 전체로서 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앞서 말한 삼(sam)은 정신과 물질을 분리해서 알아차려야 하겠지만

두 번째 삼(sam)은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모아서 전체로서 보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삼(sam)의 세 번째 뜻은 ‘평등하게’ 또는 ‘고르게’ 라는 말입니다.

수행자는 정신적 기능들을 고르게 적용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다섯 가지 정신적기능이 작용하도록 합니다.

 

그 다섯 가지 정신적 기능이란

믿음, 정진, 알아차림, 마음집중, 지혜입니다.

그들은 조화롭게 서로 균형을 이루어 작용해야 합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정진과 마음집중의 균형입니다.

 

이 기능들이 고르고 평등할 때 마음집중이 있게 되고,

그러한 마음집중에서 비로소 지혜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기능들이 불균형을 이룰 때 마음집중은 방해를 받고 흩어지게 되며

그 결과 사물의 성품에 대한 통찰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말하는 다섯 가지 오근(五根)은 수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우리가 수행이 잘 된다, 잘 되지 못한다 하는 것은

바로 믿음, 정진, 알아차림, 마음의 집중, 지혜가 서로 조화를 이루었느냐

아니면 어느 부분이 부족해서 조화를 이루지 못했느냐가 하는 것으로

수행의 결과가 판단됩니다.

 

그래서 사실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바르게 균형을 이루느냐 이루지 못하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세 번째 뜻의 삼(sam)은

다섯 가지 기능들이 반드시 균형되게, 평등하게, 고르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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