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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20

通達無我法者 2010. 12. 24. 23:2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누구나 태어나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태어남이란 죽기 위한 것입니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언제나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훌륭한 죽음은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집착하면 과보가 생겨 다시 태어나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집착하지 않으면 과보가 없어서 다시 태어나는 고통을 겪지 않습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죽지 않는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을 집착하면 윤회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 몸과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고 단지 조건에 의해서 생긴 것입니다.

내 가족도 나의 것이 아니고, 단지 조건에 의해 모여서 살다가 헤어지는 생명들일 뿐입니다.

저마다 이렇게 찾아 온 것은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경험이 많아지고 경험이 많으면 지혜가 생깁니다.

어리석으면 경험을 하고도 잘못된 고집만 커집니다.

평생 욕심 부리고도 죽을 때까지 욕심을 부리고,

평생 미워하고도 죽을 때까지 미워합니다.

어리석으면 습관으로 살고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한 평생을 살아야 조금 압니다.

지혜가 없으면 한 평생을 살고도 모릅니다.

상대의 가치를 알았으면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이제 상대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받기만 하고 주지 않으면 바르게 안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하나같이 마음의 병을 앓습니다.

선한 자는 선한 병을 앓고 불선한 자는 불선한 병을 앓습니다.

가진 자는 가진 자의 병을 앓고 못 가진 자는 못 가진 자의 병을 앓습니다.

수행자는 수행자의 병을 앓고 스승은 스승의 병을 앓습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에는 병이 없지만 이처럼 알아차리지 못하는 마음에는 병이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본문 내용을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

집중력이 더욱 향상될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익도 함께 있습니다.

자신의 자세에 주의를 기울이면 조급하지 않게 행동할 것입니다.

그리고 불필요한 움직임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알아차림이 없다면 무의식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오는 사고나 불이익이 많을 것입니다.

운전을 하거나 걷거나 움직일 때 알아차리지 못하고 부주의한 행동을 해서

사고가 나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걸으면서 발걸음에 알아차림을 집중하면

넘어지는 사고가 나지 않을 것이며 부딪혀서 사고가 나는 것도 예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몸의 여러 가지 자세를 알아차리면 항상 바른 자세를 유지하여 건강에도 이로울 것입니다.

또 몸을 함부로 했을 때 오는 여러 가지 재앙이 알아차림에 의해서 예방될 것입니다.

 

자세를 알아차리는 것은 좌선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좌선 중에 자세를 알아차리지 않으면 바르지 못한 자세로 인해서 몸에 통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바르지 못한 자세로 인해 병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좌선할 때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항상 몸의 자세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몸을 알아차리는 것은 바로 몸의 노력입니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바로 마음의 노력입니다.

몸의 노력이란 수행 중에 바른 자세인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노력이란 수행 중에 일하고 있는, 현재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그 상태를 지켜보는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몸의 자세를 알아차리면 나중에는 몸을 움직이게 하는 의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집중력이 생겨서 지혜가 나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몸은 장님이고 마음은 앉은뱅이입니다.

몸은 저 스스로 보는 힘이 없고 마음은 저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몸의 움직임 뒤에는 항상 마음이 있어서 움직이도록 조정합니다.

 

그리고 몸을 알아차려서 얻는 또 다른 이익은, 마음의 상태까지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의 제어뿐만 아니라 마음의 제어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은 항상 유기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몸을 알아차리면 마음이 제어되고, 마음을 알아차리면 몸이 제어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원인과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알아차리는 것은 몸을 알아차리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저는 때때로, 가슴에 강한 느낌이 일어날 때 즉시 가슴의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가슴에 느낌을 일으키게 한 그 원인을 알게 됩니다.

가령 누구를 좋아하거나 미워하거나 괴로워했을 때,

그 마음으로 인해서 가슴에 격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느낌을 알아차리면 그것을 일으키게 한 마음까지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몸을 알아차리는 것이 마음을 이롭게 하며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몸을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렇게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계속하면

정신과 물질을 구별해서 보는 지혜가 생깁니다.

몸의 통증은 단지 몸의 통증일 뿐이고 그것을 지켜보는 마음은

단지 그것을 아는 마음일 뿐이라고 압니다. 이때 지혜가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몸을 단순하게 지켜 본 원인으로 인해서 생긴 결과로써의 지혜입니다.

이렇게 계속 알아차린 다음에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납니다.

그런 뒤에 대상이 변하는 무상을 압니다.

 

이 때 처음에 생긴 지혜는 차츰 더 발전하는 과정을 거쳐서 진행됩니다.

가볍게 무상을 아는 지혜가 생긴 뒤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생멸의 지혜가 생깁니다.

그래서 일어나면 사라지는 것을 자세히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지혜의 과정에서 다음 단계로, 사라지는 것만 아는 소멸의 지혜가 생깁니다.

이때는 색다른 현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가령 길이 기울어져 있거나 건물이 기울어져 있거나

어떤 형상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단계에 이릅니다.

그리고 일어나는 것은 없고 온전히 소멸하는 것만 보입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공포, 불안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아는 지혜에서 이제 사라짐을 아는 지혜에 가면

더 발전한 지혜의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소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두려움이 오히려 더 큰 지혜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단순하게 하나의 대상만 지켜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했을 때

여러 가지의 지혜가 성숙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러므로 소멸의 지혜가 왔다고 해서 수행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소멸의 지혜도 수행 과정의 하나일 뿐입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새로운 괴로움과 고통이 시작되더라도

이러한 괴로움은 더 높은 도약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와 같이 단순하게 몸의 네 가지 자세를 알아차리면

그 결과로 사성제의 진리를 단계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네 가지 자세를 아는 것이 괴로움의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실제로 우리가 자신의 몸을 살펴볼 때 잠시도 몸이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온통 괴로움뿐입니다.

그래서 몸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괴로움을 알아차리는 그 현장이라고 아셔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괴로움의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알아차림이 갈애와 집착으로 인해 일어난 것을 아는 것이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몸을 알아차렸을 때 몸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누구나 괴로움의 원인을 알게 되는 지혜가 납니다.

그래서 몸을 알아차린 결과로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와 집착을 알게 되는,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의 지혜는 다른 지혜를 수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지혜가 단지 그 단계의 지혜에 머문다면 오히려 그 지혜는 퇴보하고 맙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려서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그 단계의 지혜가 그 다음 단계의 지혜로 향상, 발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계속해서 발전시키면 이제는 멸제와 도제라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이 때 괴로움이 있다는 괴로움의 진리와 괴로움의 원인이 갈애와 집착이라는 것을 아는

두 가지 진리는 일어남의 진리입니다.

 

이러한 일어남의 진리가 충분이 성숙되었을 때 다음 단계로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팔정도(八正道)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라지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사성제는 일어나는 진리와 사라지는 진리의 두 가지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일어나는 진리 속에서 살기 때문에 윤회를 거듭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소멸의 진리,

사라지는 진리인 팔정도와 열반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처음에 수행자의 알아차림에 의해 괴로움이 있다는 고제가 생기고,

다음에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집제가 생깁니다.

그런 뒤에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것이 멸제입니다.

 

이처럼 괴로움을 철저하게 알고,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

괴로움의 소멸을 향해서 가는 모든 과정이 도의 진리인 도제입니다.

이것이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래서 몸 하나를 단순하게 알아차리면 고, 집, 멸, 도 사성제의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행 할 때 의심을 합니다.

‘이것을 해서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회의를 느끼기도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러나 이 길은 부처님과 많은 아라한들이 가신 길입니다.

의심을 할 수도 있지만 노력하는 것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의심은 회의(懷疑)로 끝나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지만

노력은 좋은 결실을 가져올 것입니다.

 

누구나 몸을 알아차려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얻어 열반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몸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연기의 회전을 멈추게 하고

윤회로부터 탈출하는 해탈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길만이 수행자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모든 위빠사나의 대상은 모두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지혜가 향상되고

향상된 지혜로 인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다른 것을 통해 괴로움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스스로의 노력으로 완전한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자유는 일시적인 것이며 예속된 것이라서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오직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는 이 길을 갈 때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자유를 얻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세상에 누구를 믿겠습니까?

사실은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합니다.

하물며 자신도 믿지를 못하는데 누구를 믿겠습니까?

이 현실을 우리는 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믿을 것은 오직 스스로 하는 행동입니다.

그 행동이 다음의 행동에 따른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업자성정견’ 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어야 합니다.

바로 그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누구도 믿지 말고 스스로 원인을 만들어서 그 결과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것만이 우리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길을 통해서 무지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지고의 행복을 얻어야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