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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25

通達無我法者 2010. 12. 24. 23:37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글이나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고

그래서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마음은 무지와 지혜로 구별됩니다.

아는 마음과 모르는 마음의 차이는 산이 가로막히거나 절벽으로 단절된 것과 같습니다.

모두 저마다의 생각을 말하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모르면 옳게 말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며, 그른 것을 옳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하며, 스승의 가르침은 경전에 근거해야 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알지 못하며 상대의 지혜를 알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모르면 그냥 듣는 것이 유익합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면 구업을 짓기 때문에 손실이 따릅니다.

 

그래서 몰라서 한 말이 잘못된 것이라고 알았을 때에도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라서 돌이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르는 마음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스님들이 탁발을 할 때에 말씀을 계속해서 드리겠습니다.

 

‘마하나가 테라’ 라는 이름을 가진 장로스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부처님께서 실천하신 깨달음을 얻는 고행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엄격한 금욕주의 수행을 6년이나 했습니다.

 

그는 부처님을 모방해서, 그는 마을로 갈 때 돌아올 때

알아차리는 계율을 지키는 수행을 7년 동안이나 계속했습니다.

7년 동안 그는 오직 서 있는 자세만 취했습니다. 그는 눕지 않았습니다.

7년 후 이 계율을 16년 간 더 계속해서 그는 모두 23년간 수행을 했습니다.

23년 째 되는 해 연말에 그는 아라한과를 성취했습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는 한 가지 일을 해야 했습니다.

마을로 탁발을 하러 갈 때 그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입에 물을 머금었습니다.

 

평신도들이 그 비구에게 경의를 표하면 비구는 무엇인가 말을 해야 합니다.

‘오래 사시기를!’ 또는, ‘행복하시기를!’

그는 이러한 말을 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 역시 수행의 대상을 놓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주의하게 말을 하지 않으려고 그는 물을 입에 머금고 마을로 갔습니다.

 

누군가 질문을 하면 물을 삼킨 뒤 대답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마을로 가고 오면서 수행 주제를 지니고 다니는 계율을 지킬 수 있었고,

23년 째 되는 해 연말에 그는 드디어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까람바 랜딩’ 이라는 수행처에 사는 500명의 비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똑같은 계율을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마을로 들어갈 때 물을 입에 머금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질문을 하지 않으면 마을 입구에서 땅에 물을 뱉었습니다.

사람들은 땅에 있는 물의 작은 웅덩이를 보는 것만으로

‘오늘 다섯 비구가 오셨다. 또는 열 분의 비구가 오셨다.’ 고 말하면서

얼마나 많은 비구들이 마을로 왔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들 비구들은 단 석 달 만에 아라한과를 성취했습니다.

그들은 석 달 동안 계속되는 장마철을 수행처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3개월 끝에 또는 3개월 동안에 아라한과를 성취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오래 전에 비구들은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을 실천하는 행위를 했습니다.

 

그들은 알아차림이 몸과 마음의 대상이란 영역에 항상 살았습니다.

탁발을 하러 마을에 갈 때와 사찰에 돌아올 때에도 영역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모두 영역 안에 있으면서, 오고 가고 수행 주제를 지니는 계율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오고 가면서 수행주제를 지닌 계율을 실천하는 ‘마하 테라’ 라는 이름을 가진 비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수행처에 있는 데 다른 비구들이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그에게 말을 해야 했습니다.

 

말하는 중에 알아차림이 없이 움직였습니다. 그는 몸을 뻗치거나 굽혔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그는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바로 팔, 다리를 그 전의 지점에 놓으면서 멈춘 후 다시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다른 비구들이 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비구는

“수행을 시작한 이후로 나는 알아차림 없이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지금 당신들에게 말하려고 하다가 나는 알아차림 없이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계속하기 위해서 팔 다리를 처음에 가져다 놓고 다시 그것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듣자 다른 비구들은 기뻤습니다.

 

“아! 잘하셨습니다. 진지하게 수행을 하는 모든 비구들은 스님처럼 행동을 해야 하겠지요.”

하고 그 스님에 대해서 감탄했습니다.

이렇게 수행을 하신 스님뿐만 아니라, 이렇게 수행을 하신 스님에 대해서 감탄 한

이 스님도 역시 똑같은 깨달음에 도달하셨던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러한 방법으로 아주 오래 전 비구들은 오고 가면서 수행 주제를 지니는 계율을 실천했습니다.

 

여기서 수행 주제를 지니는 계율을 지켰다는 것은 걸을 때 알아차리면

누구를 비난하거나 탐욕을 갖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계율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에서의 알아차림은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는 것이 전제됩니다.

 

그들은 마을로 수행 주제를 지니고 가고, 수행 주제를 수행처로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수행처와 마을을 오고 가는 시간은 비구가 수행 주제를 온전히 간직하기가 가장 어려운 때입니다.

수행처나 집에 있을 때는 산만함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곳에서 수행 주제를 유지하기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탁발을 하러 마을에 가고 돌아올 때 수행자는 길을 걸으면서 길과 동물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 주제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어렵지만 비구는 수행 주제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세 번째 분명한 앎,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네 번째 분명한 앎은 미혹하지 않음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이 마지막 종류의 분명한 앎은 어리석음이 없는 것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미혹은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갈 때 돌아올 때 등 여러 행위를 혼돈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수행자는 그것을 인지해야 하고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수행자가 그것을 분명히 알 때, 그것을 뚜렷하게 볼 때,

어리석음 없음에 대한 분명한 앎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음 없음에 대한 분명한 앎은 수행자가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을 철저하게 지킬 때 나타납니다.

 

수행자는 어리석음 없음에 대한 분명한 앎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이 성숙되면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어리석음이 없음에 대한 분명한 앎이 저절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수행자가 무엇을 하던, 가던, 돌아오던 앎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수행자가 어리석음 없이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항상 알아차림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수행 중에 지금 무슨 마음으로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구는 나아갈 때나 뒤로 돌아갈 때나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보자면

여기에 네 가지 종류의 분명한 앎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가기 전에 또는 돌아오기 전에 수행자는 밖으로 나가는 것,

돌아오는 것이 유익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수행자는 밖으로 나가는 것 또는 돌아오는 것이 적절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적절하지 않다면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밖으로 가는 동안 또는 돌아오는 동안 수행자는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밖으로 가는 것을 알아차리는 분명한 앎을 한다는 뜻입니다.

돌아오면서 수행자는 돌아오는 것을 알아차리면 밖으로 감과 돌아옴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지속할 때, 밖으로 가는 것과 돌아오는 것에 대하여 알아차림을 유지할 때,

밖으로 가는 것과 돌아오는 것에 대한 본질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가는 행위를 하는 어떠한 실체도 없다는 것, 밖으로 가는 행위나 돌아오는 행위를 하게 하는

영혼이나 자아를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수행자는 밖으로 가거나 돌아오는 행위를 떠맡는 아무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은 단순한 현상, 의도와 의도로 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순간에 일어난 이들 두 가지 것들만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될 때,

수행자는 비로소 어리석음이 없음에 대한 분명한 앎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의 앎이나 이해는 어리석음이 없습니다. 이 때 수행자의 앎은 정확하고 철저하며 적절한 것입니다.

 

이처럼 한 단계의 지혜가 성숙되면 그 단계의 지혜로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의 지혜가 성숙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열심히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지,

높은 단계의 지혜를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얻으려고 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모든 단계의 지혜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들을 충실히 알아차렸을 때

차츰 조건이 성숙되어서 더 높은 단계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다시 ‘앞을 볼 때나 주위를 볼 때나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수행자가 앞이나 옆을 바라볼 때,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똑바로 바라볼 때, 또는 옆을 바라볼 때, 수행자는 네 가지 종류의 분명한 앎을 지닙니다.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유익하고 적절할 때만이 똑바로 앞을 바라봅니다.

유익하지 않고 적절하지 않을 때는 똑바로 앞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보던, 똑바로 앞을 바라보건, 옆을 바라보건 알아차림을 유지할 때,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이 성숙해지면 똑바로 앞을 바라볼 때나 옆을 바라볼 때,

오직 다음의 두 가지 것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음과 몸, 즉 보려는 의도와 보는 행위, 그리고 보게 되는 몸,

이들 두 가지 것만 있고 다른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수행을 하는 사람은 위를 보거나 아래를 보거나 뒤를 돌아보거나 하는 일이 많지 않지만,

위를 보건 아래를 보건 뒤를 보건 수행자는 분명한 앎을 지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에서 이들 동작(위를 보거나 아래를 보거나 뒤를 돌아보거나)에 대해서

특별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나 아래, 뒤를 바라볼 때 수행자는 분명한 앎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팔 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때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수행자는 유익하고 적절할 때만 구부리거나 폅니다.

곤란한 순간 또는 곤란한 장소에서 구부리면 다치거나 알아차림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옛날에 적절하지 않은 곳에서 팔다리를 폈다가 뱀에 물린 비구가 있었습니다.

다른 비구는 발을 불 위에 놓아서 불에 데었습니다.

 

수행자는 구부리거나 펴기 전에 그것이 유익한가, 적절한가, 검토해야 합니다.

분명한 앎을 지니면서 행동하면 의도가 있을 때 굽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때 오직 의도와 굽힘만 있지, 다른 인격이나 자아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수행자들은 불필요한 동작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불필요한 동작을 일으킬 때는 탐욕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작 하나하나에 모두 알아차림이 있다면

그 동작을 일으키는 마음이 제어됨으로서

그 수행자는 고요함과 평화로움 그리고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의 행위는 단지 수행자의 행위로 그치지 않고

그의 마음이 행위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행위를 통해서

그것을 하게 한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의 모든 행위는 반드시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이 함께 해야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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