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붓다의수행법·위빠사나·묘원법사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26

通達無我法者 2010. 12. 24. 23:39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먹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병을 일으키는 원인입니다.

 

선하게 생각하고, 선하게 말하고,

선하게 먹고, 선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계율로 생각하고, 계율로 말하고, 계율로 먹고,

계율로 행동해야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선하고,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병에는 마음의 병과 몸의 병이 있습니다.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을 일으키고

몸의 병이 마음의 병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플 때 몸이 아프지 말아야 하며,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아프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가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과 몸을 분리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면 상승효과로 인해서 더욱 상태가 나빠집니다.

 

마음과 몸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면 서로의 힘이 약화되어서 치유의 길이 열립니다.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단지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며,

몸을 알아차릴 때는 단지 몸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대가사와 다른 가사를 입을 때에도, 발우를 들 때에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그렇습니다.

이들 가르침들은 비구를 위한 것으로 가사와 발우는 적절해야만 합니다.

추위를 잘 타는 비구에게는 두꺼운 가사들이 적합하고

더위를 잘 타는 비구에게는 얇은 가사들이 적합합니다.

또는 발우를 쇠로 만들어서 무거울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약한 비구에게는 무거운 발우가 적합하지 않습니다.

평신도에게는 그것은 갖가지 옷을 입을 때와

그릇, 컵, 접시를 사용하거나 잡고 있을 때 등에 적용됩니다.

 

수행자는 느슨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약한 수행자는 부담이 되는 옷을 입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옷은 적합해야 합니다.

이들 행위들을 알아차리게 될 때 수행자는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을 지닙니다.

 

분명한 앎이 성숙된 단계에 이르렀을 때

수행자는 오직 이 두 가지, 즉 정신과 물질만 있고

다른 어떤 실체도 존재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수행자 여러분!

대가사와 다른 가사를 지닐 때 이것은 추위를 피하는 목적이 있으며,  

탁발을 하기 위해서 다니는 것은 필요한 물질을 얻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세존께서 설하신 현재의 행위가 목적에 적합한가를 아는 것입니다.

바로 이 방법으로 이익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하는 것입니다.

 

천성적으로 몸이 더운 자와 힘이 약한 자에게는 얇은 의복이 적당하고

추위를 타는 자에게는 두 겹으로 된 두꺼운 것이 적당합니다.

이와 반대되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든 낡은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덧대어서 깁는 등으로 그것을 성가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비단이나 좋은 삼베로 만든 옷 등의 욕심나는 의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은 숲에서 홀로 머물면 거처의 위협을 받거나

혹은 목숨을 잃어버리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암시를 주는 등의 바르지 못한 생계를 통해서 얻는 것과

그것을 입으면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없어져 버리는 것은

절대로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와 반대되는 것은 적당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적당함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가 비구계를 받을 때는 두 벌의 가사가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발우가 있어야 됩니다. 그 두 벌의 가사 중에서 한 벌은 대가사입니다.

이 대가사는 추위를 피하게 할 수도 있고, 때로는 햇빛을 가리게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자기 몸을 보호하여서 여러 가지 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명상주제를 버리지 않음을 통해서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이 가운데 자아라는 어떤 것이 의복을 입는 것이 아니고,

바로 마음의 의도와 그것을 입는 몸만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설명한 마음의 작용에 생긴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에 의해서 의복을 입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복도 의도가 없고 몸도 의도가 없습니다.

의복은 내가 몸을 입힌다고 알지 못하고 몸도 나는 옷으로 입혀진다고 알지 못합니다.

 

요소들이 요소들의 무리를 가리니, 마치 헤진 천으로 인형을 감싸듯이

그러므로 좋은 의복을 얻고 기뻐하지 말아야 하고

나쁜 것을 얻고 불쾌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코브라가 사는 개미집이나 탑전의 나무 등에 어떤 사람들은 화환과 향과 전등으로 공경을 하고

어떤 자들은 똥과 오줌을 누고 흙먼지를 쌓아두고, 몽둥이와 칼로 때리는 등으로 천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코브라가 사는 개미집이나 나무 등은 기뻐하거나 불쾌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좋은 의복을 얻고 기뻐하지 말아야 하고 나쁜 것을 얻고도 불쾌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숙고함을 통해서 여기서 미혹하지 않음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하는 것입니다.

 

비구들이 발우를 지닐 때도 급히 지니지 말고

이것을 지니고 탁발하여 음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발우를 잡는 것은

바로 이익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하는 것입니다.

 

몸이 여위고 힘이 없는 자에게 무거운 발우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네다섯 군데나 땜질하여 씻기 어려운 것도 적당하지 않습니다.

씻기 어려운 발우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씻을 때 그에게 성가심을 주기 때문입니다.

보석과 같은 색깔을 가진 발우는 탐욕을 부추기므로 의복에서 말한 것처럼 적당하지 않습니다.

 

암시를 주는 등으로 통해서 얻은 것이나 그것을 사용함으로 인해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없어지는 것은 전적으로 적당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암시를 준다는 것은 내가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밝혀서

수행자들에게 보시를 받는 행위를 말합니다.

 

제가 비구 생활을 하면서 발우를 두 개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는 탁발을 나갈 때 사용하는 발우였고, 하나는 수행처에서 공양을 할 때 사용하는 발우였습니다.

저는 무심히 이것들 두 가지를 필요에 따라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저희 스승께서 보시고 하나의 발우는 보이지 않는 곳에 두고 다음에 사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발우만 사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비구가 두 개의 발우를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욕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하나가 비구들에게는 모두 스승의 가르침에 의해서 실천됩니다.

 

그래서 명상주제를 버리지 않음으로써 영역의 분명한 앎을 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서 자아라는 어떤 것이 발우를 잡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설명한 마음의 작용에 생긴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에 의해서 발우를 잡는 것입니다.

여기서 발우도 의도가 없고 손도 의도가 없습니다.

 

발우는 내가 손에 잡힌다고 알지 못하고, 손도 발우를 잡는다고 알지 못합니다.

요소들이 요소들의 무리를 잡습니다. 마치 족집게로 불에 달군 발우를 잡는 것처럼,

이와 같이 숙고함을 통해서 미혹하지 않음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합니다.

 

나아가 마치 손발이 잘리어 상처의 구멍으로 피고름이 나오고 벌레가 우글거리고

파리가 들끓는 채, 무의탁자 수용소에 보호자 없이 누워있는 사람을 보고,

인정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상처를 싸매고 헝겊과 통에 든 약을 준다면,

어떤 자들은 부드러운 헝겊을 가지게 되고, 어떤 자들은 거친 것을 가지게 될 것이며

어떤 자들은 생김새가 좋은 약통을, 어떤 자들은 생김새가 나쁜 약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들은 기뻐하지도 불쾌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헝겊은 단지 상처를 싸매기 위한 것이고, 통은 약을 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와 같이 비구는 의복을 상처를 싸매는 헝겊처럼, 발우를 약을 담는 약통처럼,

발우에 얻는 음식을 통해서 약처럼 숙고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가사와 발우와 의복을 지니는 것에 대한 미혹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그렇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은 다시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먹을 때에도, 마실 때에도, 씹을 때에도, 맛 볼 때에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먹을 때 먹는 것이라는 것은 탁발한 음식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마실 때는 죽, 물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씹을 때는 음식을 씹어 먹는 것을 말합니다.

맛볼 때는 꿀이나 당밀 등을 맛볼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구들이 따뚜마타라고 해서 오후불식을 하기 때문에 저녁때가 되면 허기가 져서

버터나 오일로 버무린 것을 오후에 맛보기도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서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을 통해서 이익이 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하는 것입니다.

 

거칠고 부드럽고 쓰고 단 것 등에서 어떤 음식으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면

그것은 그에게 적당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암시를 주는 등으로 음식을 얻으면 해로운 법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 음식은 전적으로 적당하지 않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것은 적당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적당함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제가 시골에 있는 저희 수행처에서 신도들의 아이들에게 물건을 준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저의 스승인 스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무슨 의도로 아이들에게 물건을 주었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저희 스승께서는 알아차리고 주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사실 저는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스승께서 질문하신 요지는 제가 아이들에게 물건을 주었을 때 그 자체로는 좋으나

스님이 준 물건을 받은 아이들이 집으로 가서 스님이 이 물건을 주었다고 했을 때

다시 그 물건에 가름하는 다른 보시물을 스님에게 올려야 되는 고통을 주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소하게 물건을 하나 주는 것에 있어서도

그 부모에게 그것이 고통이 되지 않는가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이 무심히 주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명상주제를 버리지 않음을 통해서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아라는, 어떤 것이 먹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설명한 마음의 작용에서 생긴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에 의해서

발우의 받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작용에 생긴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에 의해서 손이 발우를 잡습니다.

마음의 작용에 생긴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에 의해서 밥덩이를 만들고,

밥덩이를 들어 올리고 입을 벌리는 것입니다.

 

누구도 열쇠나 기계로 턱뼈를 벌리지는 않습니다.

마음의 작용에서 생긴 바람의 요소와 움직임에 의해서 밥덩이를 입에 넣고

윗니를 절구공의 역할처럼 아랫니로 씹는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씹거나 행동하거나 하는 모든 것들이 어떤 자아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순간의 의도와 그 의도에서 하는 행위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상의 모든 행동을 할 때 내가 한다, 자아가 있어서 한다,

라는 생각을 우리는 알아차림으로 그 실체를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