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6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22:44

 

  

 

안녕하십니까? 한국 명상원의 묘원입니다.

우리는 지금 12연기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12연기라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로 진행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들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이 원인과 결과를 또 다른 말로는 조건이라고 합니다.

또 이것을 다른 말로는 과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과응보라고 말합니다.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인과응보, 원인과 결과, 과보, 조건, 그런 것들이 모두 동의어입니다.


바로 일어나는 원인이 있으면 사라지는 결과가 있으며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은 반드시 조건에 의해서 사라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어서 원인과 결과가 지속됩니다.

이렇게 흐르고 지속되는 것을 우리는 윤회라고 말합니다.


몸과 마음이란 과거의 원인에 의해서 생긴 것이며,

일어날 원인이 사라지면 결과도 사라진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원인과 결과가 사라진 자리가 바로 열반입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원인이 없고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을 또 다른 말로는 깨달음, 해탈이라고 합니다.


선한 마음은 선한 행위를 하고 그리고 선 과보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선하지 못한 마음은 선하지 못한 행위를 만들고

바로 선하지 못한 과보를 받습니다.

이것이 연기이자 윤회입니다.


그래서 윤회하는 세계의 모든 것들은

바로 무명과 갈애라는 근본 원인에 의해서 회전합니다.


바로 모든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 무명과 갈애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오늘 우리가 연기를 공부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연기에 대해서

충분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이 법을 연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만이 우리들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교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55쪽을 펴보시기 바랍니다.


수행자가 연기법의 큰 뜻을 완전하게 이해할 때,

이 수행자는 일어남과 사라짐을 통찰하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즉, 오온이 일어나는 과정을 인과의 법칙에 따라 이해할 때

우리는 단멸론(斷滅論)이라는 그릇된 견해를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으로 끝이다. 윤회가 없다’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당시의 6사외도 중의 하나인 단견(斷見), 단멸론자들의 견해입니다.


그래서 연기법을 이해하면

이 세상이 끝이다라고 하는, 윤회가 없다라고 하는 단견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전의 오온이 사라지고 새로운 오온이 일어나는 과정을

인과의 법칙에 따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또 다른 잘못된 견해인 상견(常見)을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이 잘못된 견해는 내가 있다고 하는 유신견(有身見)과

이생으로 끝이라고 하는 단견(斷見),

그리고 항상하다, 영원하다고 하는 상견(常見)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잘못된 견해를 연기를 통해서 우리는 제거하고

무명에서부터 지혜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원인과 결과의 연속적 과정일 뿐이고,

그 속에 인간, 남자, 여자, 또는 자기라고 불릴 만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유신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유신견은 무아의 반대입니다.

내 몸이라고 하는 견해,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견해,

그것들은 항상하다고 하는 이런 견해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런 견해를 부수지 않고서는 우리가 한 발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 한 발을 내딛기 위해서 우리는 연기를 이해해야 됩니다.


자,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인과법의 결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7청정과 16단계의 지혜로 시작됩니다.

열여섯 단계의 지혜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과정이며,

그것이 낱낱이 기록되어있을 뿐이 아니라,

누구도 이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지혜의 시작은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정신과 물질이 있지만,

이 정신과 물질을 분리해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아프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지 못하면

몸이 아플 때 마음까지 아파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수행의 지혜는 첫째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로 시작합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성숙되면 다음 단계의 지혜가 나타납니다.

그것이 방금 말씀드린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는 바로 정신과 물질의 현상이

원인에 의한 결과에 의해서 조건지어진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수행을 계속하면 이처럼 정신과 물질이 상호관계를 이루면서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몸을 움직이는 모든 행위도 마음이 선행되어서 일어납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은 선행하는 마음이 있어서,

선행하는 원인이 있어서, 말을 한다는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걷고, 서고, 사랑하고 하는 모든 일련의 행위들은

다 선행하는 마음이라는 원인이 있어서 나타나는 물질적 현상인 결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앞서서 모든 것을 이끄는 이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라는 것에 대해서 잘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호흡도 일어남의 원인에 의해서 사라지는 결과가 있습니다.

오른 발, 왼발도 하려는 의도에 의해서 오른 발이라는 결과가 있습니다.

또 오른 발을 들어올렸을 때 올린 원인으로 인해서 내리는 결과가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들이 원인과 결과를 벗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 다시 12연기는 무명과 갈애 그리고 행을 원인으로 하여

오온이 형성된다는 것을 완전하게 알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 때 수행자는 존우론(尊祐論), 비작업론(非作業論),

무인론(無因論)을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존우론이라는 것은

초월적 존재에 의해서 우주가 창조되었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교리에서는 잘못된 견해하고 봅니다.


다음으로 비작업론이 있습니다.

비작업론이라는 것은 선행이나 악행이

그에 수반되는 이득이나 손해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우리는 이것과 상반된 업자성정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업자성정견은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다.

모든 것들은 지은대로 받는다 하는 것들입니다.


세 번째 무인론이 있습니다.

이 무인론은 원인에 따른 결과는 없고,

모든 것들이 원인 없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우연히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과학 문명이 발전하고

우리의 인식 능력이 지혜가 생김으로 인해서

모든 것들이 원인이 없이 생기는 결과가 없다는 사실을

차츰 이해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연기법의 바른 이해를 통해서

수행자는 오온은 단지 육체적 정신적 현상들,

즉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작용, 의식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이

축적된 무더기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수행자는 오온은 불만족과 괴로움의 축적물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통찰이 되어야 비로소 우리들의 일상사에 대한

크고 작은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위의 이상 말씀드린 네 가지 요점들을 완전하게 이해할 때

수행자는 사악도에 떨어질 위험에서 일시적으로 자유롭게 됩니다.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2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를 얻은 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라는

4악도에 떨어질 위험이 적어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4악도에 떨어질 위험이 적어진다고 말씀하신 것은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라는 지혜가 나면

자기가 잘못된 원인을 일으켜서 잘못된 결과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악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12연기 공부를 해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성숙되면

우리가 죽어서 갈 수도 있을지 모르는 지옥과 축생, 아귀, 아수라라는

네 개의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합니다.


이 네 개의 악처는 무지하기 때문에 가는 곳입니다.

이 네 개의 악처는 바로 원인과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불선행을 해서 불선과보를 받아서 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연기법을 완전히 숙지할 때만이

믿음, 지혜 그리고 노력에 따라

사성제의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단계의 이익을 거둘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우리는 과거의 원인으로부터 현재의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어디서 온 것이 아니고, 과거의 원인으로부터 왔습니다.


이 태어남과 죽음은 우리들에게 불가피한 원인과 결과입니다.

누구나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원합니다.

누구나 좋은 태어남을 원하면서도 사실은 좋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은

우리들이 과거에 살아온 습관,

과거의 원인으로 인해서,

새로운 원인을 만들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12연기와 더불어

여러분들은 수행을 통해서 새로운 원인을 만드셔야 됩니다.


우리가 오늘 이 시대를 사는 목적,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소중한 사명은

오늘 새로운 원인을 만들어서 지금 이후에 좋은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좋은 곳에서 태어나기를 원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최선은 아닙니다.

태어남과 삶과 죽음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최상의 선택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은 뒤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원인이 끊어져서 결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선심과 불선심, 그 다음 선과보와 불선 과보와

네 번째 무인작용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무인 작용심이 바로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마음입니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 이유가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것을 무인작용심이라고 말하며,

이러한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것이 바로 아라한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면,

바로 그 순간 단지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을 때,

그 순간 원인과 결과가 끊어지는 마음의 상태가 됩니다.


우리가 대상과 아는 마음만 가지고 있는

수행의 상태에서는 연기가 회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범부는 출세간의 성자의 정신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지혜가 나야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행복인지를 압니다.


우리는 태어나지 않는다고 했을 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는 것이 고통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원해서 고통을 지속적으로 수반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얻어야 되는 이러한 지혜는

몸과 마음을 통찰하는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연기를 알아야 되는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감사합니다.

 

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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