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8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23:18

 

 

 

  

 

안녕하세요? 한국명상원 묘원입니다.


오늘도 교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 61쪽을 공부하겠습니다.

모곡 사야도께서는 오온의 연기에 대해서 조금 쉽게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대상을 봅니다.

그는 그 대상을 바라고 집착하게 되어 그것을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즉, 아름다운 대상을 볼 때 그는 그것을 갖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이는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이렇게 갖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그것을 집착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집착입니다.


다시 그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면,

바로 이것이 업의 생성입니다.


업의 생성을 원인으로 해서 생이 일어납니다.

태어남이라고 하는 생을 원인으로 하여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비애, 절망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일련의 연기가 도는 과정,

즉 우리 자신의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입니다. 

이러한 오온은 오직 괴로움일 뿐이며,

일련의 연속적 괴로움의 무리일 뿐입니다.


사려 깊은 청취자시라면 우리가 하루 동안에

갈애, 집착, 업의 생성이 일어나는 쉼 없는 과정을 수없이

겪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보고, 바라며, 갈망과 집착에 사로잡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업을 짓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생각과

얼마나 많은 업을 짓는지는 익히 다 알기가 어렵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어떤 소리를 들을 때도

우리는 좋아하거나 즐기는데, 바로 이것이 갈애입니다.


이때 좋아하거나 즐기는 것만 갈애가 아닙니다.

싫어하는 것도 갈애입니다.

만약 싫어하는 것을 계속한다면 그것은 싫어하는 것을 즐기고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갈망에 사로잡힐 때, 이것이 바로 집착이며,

이처럼 세 가지 종류의 업을 지을 때 이것이 업의 생성입니다.


같은 원리로 냄새 맡음, 맛봄, 신체의 접촉, 생각도 모두 여기에 적용됩니다.

우리는 의식하고 있든, 의식하지 않던,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러한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이제 수행자는 연기가 바로 자신의 행위 속에서 연속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오온에 의식을 집중해서 자신의 행위가 인과의 법칙 하에 있으며,

연기법의 사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12연기에서 업의 생성은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요?

그렇습니다. 

바로 연기는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접촉할 때, 생각할 때,

바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에 부딪쳐서 느낌이 일어났을 때,

이 느낌이 갈애로 발전하는 것을 연기가 회전한다고 말합니다.


갈애는 단지 갈애로 그치지 않습니다.

바람은 단지 바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 볼 때, 보고 또 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하는 것은 느낌이 갈애로 발전한 것이며,

이 갈애가 집착으로 발전한 것이며, 그래서 손을 잡고 싶다,

만나고 싶다 라고 하는 행위를 일으키는 것은 업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단지 바라는 마음으로 그치지 않고 

그 바라는 마음인 갈애는 집착으로 발전해서

업을 생성시켜서 반드시 결과인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갈애가 일어나면 갈애로 그치지 않고

집착과 업의 생성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미래의 태어남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연기가 멈추면 윤회가 끝나고,

연기가 계속되면 슬픔, 고통, 비탄, 절망 등의

괴로움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연기를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것이지

부처님이 연기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출현 이전에도 연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부처님이 비로소 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발견하신 뒤에

그 연기의 사슬을 끊어서 연기로부터 탈출하셨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연기를 공부해야 하는 것은

연기의 길을 따라서 살기 위해서 공부해야하는 것이 아니고

알아차린 결과로 연기가 회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연기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연기에 따른 연속적 행위들이 멈춰야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면

바로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거기에 있습니다.


보통 때와 같이 연기의 순환을 계속한다면 가차 없이

슬픔, 고통, 비탄, 절망 등 한 무더기의 고를 끝없이 반복해야만 할 것입니다.


여러분!

눈과 보이는 대상이 부딪칠 때 ‘안식’이 일어납니다.

수행자는 이 ‘안식’을 대상으로 그것이 지속되는지

혹은 사라졌는지를 지켜보아야 합니다.


이때 ‘지켜보는 의식’으로 알아차렸을 때,

이전의 안식은 이미 사라졌음을 알게 됩니다.


지켜보는 자에게 있어 명백한 사실은 아는 마음이,

안식이 찰나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졌기 때문에

그것을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수행을 해서 얻는 지혜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일어날 때

이 일어남 뒤에 오는, 아는 마음으로 지켜보아야 합니다.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에 이미 먼저 일어난 의식, 혹은 식이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식이 병행하여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합니다.


여러분!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지혜로 대상을 볼 때, 대상이 있고 그것을 아는 마음이 있을 때는

이미 아는 마음이 뒤에 생긴 마음이라서 전에 있는 마음은 사라집니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로 볼 때, 모든 것들은 항상하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고 지속한다는 사실을 알아서

비로소 무상의 법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켜보는 의식, 또는 아는 마음은

알아차림이라는 행을 수반할 때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단지 대상을 볼 때 그냥 보지만,

깨어서 아는 알아차림이라는 것이 있을 때만이

우리는 이런 원인과 결과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은 매순간 새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이렇게 일어난 마음들은 매순간 일어났다 소멸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우리들의 태어남과 죽음은

매 순간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미얀마의 쉐우민 사야도인 저의 스승께서는 이렇게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한 해를 거듭해서 생일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사실 매순간 태어나고 매순간 죽는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지혜가 있는 자가 마음이 계속 원인과 결과로 흐르고 있으면서 

새로 일어난 마음이 바로 일어난 즉시 소멸한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날 때 

매순간이 생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비로소 우리가 보는 견해가 생길 때,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집착을 하지 않게 됩니다.


만약 이것이 항상하고, 영원하고,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바라고, 그리고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움켜쥘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움켜쥐는 순간 소멸한다고 알 때

애써 고통스러움을 선택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한 순간에 오로지 하나의 의식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색수상행식이라는 오온에서

어떤 것이 일어나든지 간에 그것은 찰나적으로

사라지는 것이라고 알아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우리의 오온에 관한 실상입니다.


모든 일어남은 순간적입니다.

이전에 일어난 오온의 사라짐은 새로운 오온을 일으키고

똑같은 과정이 끝없이 반복됩니다.


수행자가 안식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숙고하지 못한다면 갈애가 일어납니다.

이런 욕망인 갈애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숙고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집착이 따라올 것입니다.


이때 집착을 알아차리고 숙고해야 합니다.

만약 이렇게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업의 생성이 따라옵니다. 


업의 생성을 일으킨 결과로 반드시

태어나서 늙어서 죽는 노사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됩니다.

이렇듯 연기의 회전은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생명은 호흡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마지막 호흡이 일어났다 사라질 때 마지막 마음도 함께 사라집니다.

생명이란 몸과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순간적 현상의 연속선상에만 있습니다.


이때 여기에 나라고 하는 것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나라고 했다면 그것은 부르기 위한 명칭이고 관념입니다.


생명은 지속되지만 같은 몸과 마음이 아닙니다.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조건 속에서

원인과 결과에 의해 지속되는 현상만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조건에 의해서 연속되는 것을 상속된다, 흐름이다,

또는 윤회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윤회는 매순간의 윤회가 있고 한 일생의 윤회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한 일생을 텀으로 보지만

지혜가 있는 분들은 매순간을 태어나고 죽는 것으로 봅니다. 


생명이 어리석음으로 시작하면 끝없이 지속되고

이처럼 연기적 지혜로 시작하면 지속의 끝이 있습니다.

생명이 계속되는 것이 윤회고,

생명이 끝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자, 또 다른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 아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엄마~’라고 부르자 그 소리를 들은 엄마는 아들이 무척 보고 싶어지고,

더욱 아들을 끌어안고 싶어져, 귀여운 아들을 쓰다듬고 입을 맞춥니다.


그러한 행동은 친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도덕적 규범을 어기는 것이 아니므로,

죄나 과실이 된다는 생각 없이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실은, 냉혹한 연기의 과정이 여기에서도 진행되며,

그 끝없는 회전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연기가 어떻게 돌기 시작하는지 밝혀 보기로 하겠습니다.


자! '엄마~‘라고 부르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아들을 보고 싶고, 안고 싶어 하는 갈애가 생깁니다.

그 갈애로 인하여 아들을 포옹하고

귀여워해 주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구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포옹과 귀여워함이 바로 업의 생성입니다.

이제 업의 생성으로 인해 바로 생(生)이 일어납니다.


도표를 가지고 계신 분들은 교재의 도표를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3번 칸에 있는 업의 생성이 일어날 때,

바로 업의 생성을 원인으로 생이 일어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부처님께서는 업의 힘을 멈출 수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새벽에서 황혼까지 이 과정은 계속됩니다.


어떤 매력적인 대상이 보일 때 즉시 갈애가 일어납니다.

그 갈애로 인해서 집착이 일어납니다.

집착으로 인해서 업의 생성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일련의 연기의 고리는 끊임없이 회전을 계속합니다.


즐거운 소리를 들었을 때 갈애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갈애로 인해 집착, 업의 생성, 생, 노사가 일어나고

일련의 연기의 고리가 가차 없이 회전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좋은 냄새를 맡고, 좋은 맛을 느끼고,

좋은 대상에 닿고, 좋은 생각을 할 때마다

갈애, 집착, 업의 생성, 생, 노사 등의

고(苦)의 괴로움의 무더기들이 따라 일어납니다.


사실 아름다운 대상, 좋은 소리, 좋은 냄새, 좋은 맛,

좋은 촉감, 좋은 생각이 육문(六門)을 통해 들어올 때마다

갈애와 다른 일련의 요소들이 반드시 함께 일어납니다.


이러한 연속적인 과정들이 바로 번뇌의 굴레입니다.

이 번뇌의 굴레는 업의 굴레를 일으키고

여기에서 또한 과보의 굴레가 나와

다시 또 세 가지의 굴레의 원을 이룹니다.


무명, 갈애, 취는 번뇌의 굴레인 반면

행, 업의 생성은 업의 굴레이고

식, 명색, 육입, 촉, 수, 생, 노사는 과보의 굴레를 이룹니다.


모든 오온의 연기는 이렇게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알아차리고 숙고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고통과 슬픔이 끝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과정이 무한히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까?

괴롭기 위해서 태어났습니까?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감각적 욕망이 아닌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평온함,

지혜가 있는 지고의 행복을 얻어야합니다.


자, 이 길을 위해서 우리 함께 노력해봅시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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